청소년들과 노동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하는 비청소년 대상 교육이 최근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을 위해 같은 장소에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길이 다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대체 청소년과 노동을 이야기한다는 것,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참가자들은 주로 일하는 청소년의 ‘일하는’이라는 상태에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 청소년에게 노동을 알려주고 싶은 의지가 높다. 그런데 필자를 비롯한 몇몇 교육진행자들은 ‘청소년’에 더 큰 무게를 실어(일하는) 청소년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얘기하면서 어떻게 평등한 관계를 맺을지 질문하는 것이다. 참가자와 교육 진행자들의 다른 의지는 묘하게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교육에서나 ‘청소년 노동 인권이라면 청소년이 노동 현장에서 당하는 억울함을 함께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거 아니냐, 왜 나의 청소년 인권 감수성을 점검하지?’ 이런 말을 담은 표정을 만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사실은 학교 다니기 전부터…), 청소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 잘 들어야 착하지!’ 하는 격려(?)를 받으며 자랐고, 학교의 규칙을 잘 지켜야 학생답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을 고분고분하게 자란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터에 가기만 하면,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로 변신할 거라는 기대는 과연 합당한가? 노동법이 규율 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 모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 사회가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이고, 또 학교라는 괴물 같은 시스템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법적인 권리를 알게 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해도 되는가? 고민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 사회는 노동의 신성함과 가치 있는 노동을 떠받들고 있지만, 그 신성하다는 노동을 하면서 왜 많은 사람이 숱한 모욕을 당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교육에서, 끝없이 질문했던 것 같다. ‘노동은 정말 신성한가?’

이 교육을 기획하는 자리에서 노동의 가치에 대해 정답처럼 말하고, 위계나 속도, 경쟁을 비판하는 것에서 나아가, 일상에서 자신이 청소년들에게, 특히 자녀에게 하는 말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어그러지게 하는 발화를 하고 있지는 않나 살펴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돌이켜보면 청소년에게 하던 말 속에서 우리의 평소 주장과 다른 ‘나’와 ‘나의 시선(혹은 무의식)’을 쉽게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뭐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느냐’, ‘또 쓸데없이 뭐 하고 있어?’하는 핀잔들의 행간에 담긴 이야기를 보면, ‘어떤’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가 들어있는 것도 같고, 청소년의 ‘내일’의 일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상상하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청소년 노동 인권교육 속에서 이토록 익숙한 발화에 드러나고, 또 내면화하고 있는 주류사회의 가치들을 살피는 것이 가능할지, 또 어떻게 자신의 말과 행동의 괴리를 알아차리게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2015년 4~5월 동안 진행된 은평지역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 과정의 한 회차에서  ‘청소년기에 내가 들어왔던 말’, 그런데 다시 ‘청소년들에게 내가 하는 말’을 살펴보는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누구나 청소년기를 거쳐오면서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비청소년들의 잔소리에 숨겨진 ‘의도’는 없는 것일까? 혹은 발화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퍼뜨리고 있는 노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비청소년들의 말을 조곤조곤 살펴보기로 했다. 청소년이던 내가 들어왔던 그 말을 나도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런데도 그 말이 진리는 아닌 것 같다면, 그 핀잔들의 행간을 읽어보는 일은 재미있을 듯했다.

“너 그러다 아무짝에 쓸모 없게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쉽게 무시하고 쓸데없다고 치부하는 많은 일은 사실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일이냐는 딴죽을 걸어보고도 싶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동시대를 사는 비청소년인 나와 청소년이 만나온 노동이 어떻게 닮고 또 다른지 어설프게나마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찌 이리도 닮았나! “내가 들어왔던 말, 또 내가 하는 말”

참가자들은 다섯 모둠을 이루고 자리를 잡았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이 말, 정말 지겨웠다.’ 그리고 ‘내가 지금 청소년 및 어린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모둠별로 나누어 5가지씩 찾아보기로 했다. 내가 들었던 말이나 지금 하는 말은 역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절~로 가! (저 멀리 가라는…)’, ‘넌 몰라도 돼’, ‘00하지 마’, ‘조용히 해’ 이런 배제하고 차단하는 말들부터, ‘공부할 때가/학생 때가 좋은 거야’, ‘다 경험이야.’ 같은 훈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네가 뭘 알아’, ‘나 자랄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다’와 같은 저주와 무시의 말까지, 우리는 듣고 자란 말을 고스란히 어린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며 살고 있었다. 나도 듣고 살았는데,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뭐 그렇게 문제냐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화이트보드에 붙은 말풍선을 확인한 참가자들은 자신이 해왔던 평소의 말들의 민낯을 대하고는 ‘저 말들, 참 폭력적이구나…’ 하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때리지 않는다고 폭력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듯이 ‘다 너희를 위해서’하는 말이라며 해온 말이 결과적으로 청소년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적으로 뱉던 나의 말들과 결별하기

이제 스스로 다시 청소년 입장이 되어 댓글을 달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이트보드가 넘치게 많은 말 중에서 청소년들에게 정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말 5가지를 선택한 후 모둠별로 나눠 가졌다.

1.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 이 말은 누가 들어도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화가 나는 말이다… 그래서 댓글도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싸가지 없다는 평가는 나이에 따른 ‘아랫사람’에게 주로 하는 말인지라 굳이 청소년이 더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할 수 없기도 하다. 나도 가끔 듣거나 하게 되는 말인데, 음음… 이제 나(참가자 자신들)에게 말한다. “고마워, 너나 잘하셔~^^”

2. (어른들 말 안 듣더니,) 너 그럴 줄 알았어 : ‘말 잘 듣는 아이’로 살게 되면 경험하지 못할 것들을 과감하게 저질러버린(?) 분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함에도, 이런 식의 말로 청소년들이 실수하고, 방황할 권리, 다양한 경험을 할 권리를 얼마나 가로막아왔던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회의 결과 중심적인 판단을 문제 삼았던 우리도 별수 없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점집 차리세요~^^’라는 댓글이 인상적인데,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른들은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늘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3. 00 하지 마 : 청소년도 뭔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온전한 존재,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의견들이 댓글로 달렸다. 청소년의 여러 가지 행동을 금지하려는 이 말들은 정말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어른들에게 부여될 미래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어떤 청소년도 비청소년들에게 무언가를 대신 감당해달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금지하면 된다는 생각에는 청소년들이 저지를 일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를 자처하는 비청소년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깔렸다. 청소년을 스스로 판단하거나 그 결과를 감당하고 책임지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다 하면 안 되는 청소년들의 댓글은 ‘그럼 뭐해요?’였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4. 공부 안 하면 저렇게(노숙자,청소노동자) 된다 : ‘우리는 좀 달라’라고 생각했을지 모를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의 참가자들도 역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쟁, 즉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한 경우다. 그만큼 자본주의는 힘이 세다. 참가자들이 청소년의 관점에서 적어 놓은 비판 댓글을 살펴보면 ‘저렇게 된다.’라 할 때의 ‘저렇게’를 해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공부해도 다 저렇던데, 저게 뭐 어때서, 대학 가면 잘 되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모양이셔?’. 우리가 더 주목하고 고민해야 했던 것은 ‘저렇게’로 분류되는 존재와 노동이 사회에는 물론, 우리의 인식 속에도 그대로 건재하다는 것이 아닐까.

5.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넌 몰라도 돼 : 어른들의 일이 따로 있다는 듯이 하는 말이지만, 알고 보면 별거 없다는 사실을 참가자들은 댓글로 적어주었다. 어린 너(청소년)와 말할 이유 없다는 의사표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어떤 주제로든 나이 어린 사람인 너와는 동등한 관계로 대화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말이다. 그러니까 청소년에게 하라는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어른들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노동이며 정치며 성(性)의 영역에 관심을 두느냐는 배제의 말이기도 하다. 여느 조직에서나 권력을 쥔 사람이 정보에 대한 접근권도 갖는다는 사실은 이런 배제가 청소년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다른 권력관계(남성/여성, 상사/부하 직원 등)에서도 숱하게 경험하고 있다.

 

청소노동자와 판사의 임금이 같아진다면, 노동의 위계는 사라질까?

노동의 프랑스어 Travail는 속박과 고문을 의미하는 것처럼 노동은 힘든 게 분명한데, 왜 노동이 신성하고도 숭고하다고 추앙받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숭고하다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그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다양한 노동을 떠올려본다. 이반 일리치가 그림자노동이라고 이름 붙인 이 노동에는 가사, 돌봄 등 우리 사회를 존속 유지케 하면서도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모든 노동이 포함된다. 노동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이미 이렇게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청소년들이 노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자신들은 ‘노동자’가 되지 않겠지만, 또 노동은 사회를 이끄는 힘이라고 여기는 모순을 안고 사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들었던 말들과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하는 말들에는 청소년을 대하는 사회의 기본태도와 노동에 대한 이런 분열적인 시선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특히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자녀와의 관계에서 ‘네가 정 운동을 하고 싶으면 지금은 공부하고 대학 가서 해’라고 하더라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지경이다. 일과 노동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이 분열적인 것은 우선 잘게 쪼개어 분절된 노동구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고민하는 노동이 정규직/이성애자/남성/비장애인의 임금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과 전문직 노동자의 임금이 같아져 보상의 평등이 실현된다고 해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올려 분배의 평등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한다고 해서 이런 분열적인 인식에 기댄 노동의 위계를 없애는 일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교육비의 부담은 누가 할 것인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또 어떻게 일구어갈 것인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욕당하지 않으면서 살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어떻게 갖출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논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청소년노동 인권교육에서 나눌 이야기는 무엇이어야 할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고스란히 남는다. 그래서 사회가 지정해 둔 자리를 벗어나려는 노력, 내가 누리는 소소해 보이지만 끊을 수 없는 권력의 힘들을 어떻게 놓을 것인지 같이 머리 맞대고 찾아보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자고 초대하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인권 오름 제442호(2015.6.11)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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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5:14 2016/05/24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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