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이놈의 가시나’라는 말을 한 번도 안 듣고 자랐다고 말하던 분의 얘기를 읽다가, 어떤 말을 듣고 사는가에 따라 우리의 자존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머문다. 예를 들어 ‘인건비 절감’이라는 말은 저임금과 살인적인 노동강도로 노동을 착취하겠다는 자본의 의지라고 읽혀야 마땅하지만, 많은 이에게 참으로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말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언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밀양을 살다>, 오월의봄, 2014

온통 신문과 방송에서 ‘국가 경쟁력 강화’니, ‘깨끗하고 안전한 원자력’이니, ‘나라를 먹여 살리는 삼성’이니 하는 말을 떠들고 있는 까닭에, 이 ‘말’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많은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이 흐른다. 그만큼 언어의 힘이 세다. 아마도 그래서, 그 강한 말의 힘에 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밀양에 대한 ‘편파적인 기록’이라는 이 책에 끌렸다.

 

밀양 할매들의 싸움을 님비 현상쯤으로 격하시키고, 보상금이나 더 따내려고 억지나 부리는 이들로 여겨 비난하며,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불순한 외부세력으로 몰아세우기만 한 언론들은 그들에게 한 번도 왜 이렇게 싸우는지, 이 싸움이 도대체 뭔지 묻지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하고,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누구도 듣지 않았던 대답을 정성껏 듣고 기록한 <밀양을 살다>.

 

다양한 필자들이 모인 밀양구술프로젝트가 만난 열일곱 명 가운데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지만, 10년 못 되게 한전과 전쟁을 치러오며 이들의 몸이 저절로 알아챈 것은 공부 좀 했노라는 지식인들에 꿀리지 않는다. 송전탑 싸움은 ‘힘 있는 사람들과 힘 없는 사람들의 전쟁’이며, 백성을 보살펴야 할 나라님이 우리를 죽으라고 내모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밀양의 이 싸움은 밀양만의 일이 아니라, ‘전국의 뜻있는 시민들과 같이 하는 싸움’이 되고 말리라는 것, 탈핵과 연대라는, 국가의 폭력이라는 평생 써보지도 않았을 말을 몸으로 배운 이들. 말의 힘이 센 것처럼 몸으로 깨달은 감각들도 쉬 잊히지는 않는다.

 

인터넷과 책 안에 갇혀 흘러넘치는 지식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경찰 벽에 부딪히며 탈핵, 연대, 생명의 가치들을 몸으로 터득한 그들은 ‘세상은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일함, 또는 그런 힘)으로 사는’ 거라고 한다. 그저 이 산과 이 땅이 아주 고맙고, 지금, 여기 농성 움막에 함께 있는 이들이 무척 소중하다고 한다.

 

 

‘여성’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할매들의 이야기

 

시부모만 생각하고 시댁 귀신이 돼야 한다는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라, 정말 그렇게 살아온 이, 청와대 드나드는 이들만 신사인 줄 알다가 땅 부치고 사는 농부가 진짜 신사였음을 깨달았으며, 자연과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고마워하던 이, 당신 살아온 삶은 기막혀도 그저 자식들이 쉬어갈 집이나마 남겼다고 뿌듯해 하던 이들. 그들이 ‘내가 죽으면 이 싸움이 끝날까’ 하는 마음으로, 무서울 것 없다는 듯이 살며 싸우고 있는 땅, 밀양.

 

인터뷰에 응한 열 몇 명의 여성들 앞에 놓였던 엇비슷한 환경들이 내 앞에 떨어졌다면, 아마 꾸역꾸역 살기는 했으되, 늘 괴롭고 힘들었을 것만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여성’의 삶에 울컥거리고, 그걸 버티고 살아온 그들이 존경스럽다가도 너무 고분고분 착하게 살아온 그 사람들의 삶이, 반항도 없이 감내하며 죽자고 일만 해온 그 인생들이 무척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대부분 그렇듯, 밀양의 그 어른들도 그랬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군말 않고 살아남은 그분들을 ‘생존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고단한 가난의 시기를 버텨온 착해빠진 여성들이, 타령하듯 읊어대는 그 살아온 얘기는 하는 이도 울고, 듣는 이도 우는 구슬픈 얘기다.

 

참,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이 나라에서 힘없는 자, ‘소수자/약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래서 눈물겹다. 그런 삶의 끝자락에 송전탑 싸움이 들어앉았다. 그들은 하나둘 세워지는 송전탑 앞에서 경찰과 용역들에게 모욕당하며 나날이 무력감을 느낀다. 송전탑 때문에 악으로 버티며 붙들고 늘어진 한 줄기 희망이 다 사라질 처지에 처한 것이다.

 

송전탑 52기 중 하나라도 안 서면 선은 못 걸 테니, 마지막 한 개라도 꼭 막고 싶다고, 이 싸움도 언젠가는 끝나지 않겠느냐는 이들. 고향의 품, 자연의 품에서 느릿느릿 살고 싶던 이들은 이 전쟁통을 겪으며 이웃과 척지고 사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그 마음 아픔은 한전의 보상을 받은 이들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표현되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 할 도리를 지키고 같이 살던 마을인데, 나라와 한전이 마을의 정을 깨고 이간질하여, 이제는 더 그러지 못하리라는 안타까움이 더 크게 보였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심지어 자신들을 모욕하는 용역 청년들에게도 먹을 것을 해 먹이던 이들에게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온 얘기가 쌓이고 쌓여 비슷한 언덕을 쌓고 그 언덕에 기대어 서로를 보듬으며 사는 그들의 단단한 모습을 보았으니, 밀양구술프로젝트 참가자들도 ‘우리는 이미 스스로 희망인 사람들을 만났다’고 확신했을 테다.

 

   
▲ ⓒ장영식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밀양의 손을 잡자

누구나 살면서 부끄러운 때가 있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때, 아니 너무 고단하고 상처가 크기에 심지어 기억해내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의 그 어리숙하고 바보스러운 일들마저, 내 삶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어눌한 부분들 덕분에 나 아닌 다른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는지도 모르겠다. 또 어지간한 어려움은 버텨낼 수 있는 배짱도 생기는 것 같다.

 

나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그랬다. 진짜 관심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었던 것은 아닌가 반성하기 전까지 그냥 상처만 받았다고 여기고 애써 세상을 바라보는 길을 피해 다녔다. 물론 끝까지 세상일을 모른 체하고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용산참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 사람이 들고 나도 저 세상은 그냥 거기 있구나,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이들에게 ‘안녕하신가?’ 하고 묻고 싶어지고, 그들이 옳게 존중받는지, 안전하고 평화로운지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한동안 외면했던 거리만큼 더 절실하게 세상의 얘기를 듣기 위해 애를 쓰는데도 밀양 송전탑 얘기는 한참 뒤에야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2012년,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경찰과 싸우는 할매들의 영상을 보면서, ‘아…’ 하고 한숨을 토하던 기억. 그 후로는 도저히 할매들이 나온다는 영상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의 대한문 문화제, 올겨울 희망버스에 함께 참여했다. 그저 하룻밤 묵고 매일 싸우는 할매들 곁을 잠시 지키다 가는 것인데도 대접이 융숭했다. 이런 환대를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송구스러움을 잊지 못하겠다.

 

흔히 우리는 나 하나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마운 노동이 깃들어 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살기 마련이다. 몸으로 많은 것을 느리게 깨달아온 이 농부들은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산다는 걸 알고 있다. 나, 너, 우리 모두 같이 살자면 같이 도우며 살아가는 거라고,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한다.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

 

지난 22일, 세월호 참사로 전국에 슬퍼할 권리만 남은 것 같던 와중에, 정부는 주민들의 집단 반발이 있다면 송전탑 건설 관련 공청회를 안 해도 된다는 취지의 전기사업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을 심의, 의결했다. 더는 밀양을 외롭게 두지 말자. 전기도 많이 필요 없는 밀양 말고, 차라리 서울 한가운데 송전탑을 세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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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5 11:29 2014/04/25 11:29

지난 2월 말, 송파구 석촌동 어느 단독주택의 반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슬퍼하는 이는 별로 없어보였고, 일주일 뒤 대통령은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고 있는데, 그 모양을 보자니 절로 술 생각이 났었다.

 

“대통령님, 이럴 때 가만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 거겠죠? 혹시 기초생활수급제도에 대한 원고를 당신이 쓴 게 아니라면 그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공무원 양반의 거취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시는 게 좋겠어요” 하고 충언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대통령이 복지제도를 알리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시자, 묘하게 언론들은 생활고로 목숨을 던지는 이들에 대한 보도에 열을 올리는 것 같다.

 

술 생각에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라는 단편소설이 생각난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이며,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는 마지막 문장이 유명하단다.

 

그래, 사회는 술을 권하고, 교회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죄책감을 권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마도 이번 기고의 주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으면서 섹슈얼한 주제에 대해서는 왜 고리타분하게 구는지 알 수 없는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어느 불량신자의 고뇌’ 쯤이 될 테다.

 

 

‘기지촌 여성을 위해 오신 예수님’

 

최현숙 씨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라는 책에는 세 명의 80대 여성 노인의 삶이 담겨 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삶은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첫 번째에 등장하는 김미숙 할머니. 그의 아들과 며느리는 목사다. 할머니는 체격이 크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데, 책의 곳곳에서 그 연배의 다른 여성들과 달리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김미숙 할머니는 미군 부대 주변에서 기지촌 여성들에게 옷 장사로 생계를 꾸리다가 미군들에게 성매매까지 하게 되었고 그 일로 모은 돈을 종자로 삼아, 하나 있는 아들을 공부시켜 목사로 키운 것이다. 그런 아들이 팔순이 넘는 노모를 위해 새벽기도 때 “우리 어머니에게 회개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하고 통성기도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목사인 아들은 어머니의 삶의 역정(歷程)을 부정하고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 그에 대한 할머니의 술회를 그대로 옮긴다.

 

“언젠가 아들이 나 붙들고 조용히 말도 하더라구. 미군 부대 근처에서 몸 함부로 굴린 거랑 낙태 많이 한 거랑 그런 거를 회개를 하래는 거야. (……) 다른 회개래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 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거기서도 미군이랑 살림하던 여자들은 많이들 낳았어. 남자 붙잡아 놓을래니까, 남자가 낳자 그러면 낳는 거지. . (……)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낳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 (……) 그리고 저 목사 만든 돈이 어디서 나온 건데? 저 목사 된 게 내가 양키 물건 장사하고 미군이랑 살림해서 번 돈인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고? 그 돈으로 공부해서 목사 된 지가 할 소리냐? 회개를 하려면 에미가 뼈가 빠지게 고생한 돈 갖다 쓰기만 한 거를 회개를 하던가 해야지. (……) 지네들 하나님은 어떤가 몰라도 내 하나님은 딱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이야.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

 

이 책을 읽다가, 내 부모와 얽힌 나의 삶까지 되짚어보았다. 나의 부모도 이혼했고, 각자 다른 이들을 만났다 헤어지는 일을 반복했고, 우리 세 남매는 각자 그런 무게감을 버티며, 그들의 삶을 가끔은 외면하고, 비난하고 또 동정하기도 하며 살아 왔으니…….

 

사람의 삶이란 게 그이의 의지대로만 풀려가는 건 아니란 것을 대부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미숙 할머니도 어렵고 힘든 인생의 굴곡 가운데, 미군들과 살림 차리며 살던 그 시기에 자유로움을 만끽하기도 했고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았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의 삶 중에 가장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느끼던 시절이지만,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편견으로 쉽게 그때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던 할머니는 최현숙 작가와 세 번째 만남에서 그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있는 하느님”,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라고 말한 김미숙 할머니의 하느님과 나의 하느님이 퍽 닮아 있어 반갑기도 했다. 내 부모에 대한 비난과 무시의 마음을 품었던 어느 때의 나에 대해 깊은 반성도 하게 되니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한편으로, 교회의 교리는 그런 삶의 맥락을 다 무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일’에만 문제를 제기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혼전 성관계에 죄책감을 느껴야만 ‘좋은 신자’일까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에서 모임을 이끄는 역할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 모임에 20대 초반의 여성 신자가 있었다. 그이는 남자친구와 연애 중이었다. 연애하다 보면 스킨십의 단계가 꽤 깊어지기도 하기 마련. 역시 그이는 그 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얘기 좀 하자고 말을 걸더니, 자기는 남자친구와 종종 성관계를 하게 되는데, 나름 신앙심 깊은 천주교 신자인지라, 잠자리를 갖는 날이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결혼하기 전에 같이 자면 간음인가요? 우린 아직 어리고, 결혼을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너무 죄책감이 생기니까 힘들기도 해서 신앙을 버릴까 싶기도 하네요.”

 

우리가 별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자기 속내를 비치는 그이의 말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우리가 죄책감으로 자기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 분인데, 교회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좀 다른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 일인데, 그 사랑의 한 과정일 뿐인 성관계만 문제 삼고, 나쁘다고 꾸짖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이가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약간은 자신 있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남자친구와 사랑하라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냐며, 연애도 못 하고 있던 시절이라 나는 당신이 좀 부럽다고 덧붙이면서.^^

 

 

죄책감 없는 교회, 반성하지 않는 교회가 부끄럽다

 

본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교무금을 많이 못 내서 미안하다는 할머니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자녀들에게 겨우 용돈 받아 하루하루 살기 어려운 분들일수록 헌금 많이 내는 이들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성당에 빚진 마음이 들어 나오기 힘들다고 하는 분들이 꽤 많았다.

 

교회 안에 있다 보면 이렇게 죄책감은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방식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과 생활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혼전순결이나, 성정체성, 성적 지향 등의 섹슈얼한 문제든, 이혼 등의 가정 문제든, 금전 문제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괜한 마음 앓이를 하시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나날이 세상 속에 공존하면서 세상과 빠르게 닮아 가는 가톨릭교회를 보고 있자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주체는 교회가 돼야 할 것 같은데, 우리 교회의 착한 신자들은 자기 속만 긁어댄다.

 

스스로 반성하지 않는 교회를 보고 있자니, 나 같은 불량신자는 종종 자괴감에 빠져버린다. 그 자괴감이란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온다면, 이러저러한 현실에 좌절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선택을 할 것만 같아 생기는 것일 테다. 교회가 예수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더라도 밀양 할매나, 거리의 노동자들, 세상 속의 소수자들이 그의 친구가 되어줄 테니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자괴감을 거두어야 하려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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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8 07:25 2014/03/18 07:25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루카 7,34)

 

트랜스젠더와 어울리는 예수, 담배 피우는 예수

 

▲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의 그림에 누군가 글을 덧붙여 만든 지난해 12월 28일 총파업 포스터의 하나

한참 본당 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고, ‘수도자다운 신앙심’이라는 비웃음도 당하던 2007년. 물론 살짝 수녀원을 들어갈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그리 심각한 건 아니긴 했다. 그저 나를 숙고하게 하는 책이나 경구에 감동하고, 말하기를 즐겼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이월드에서 맘에 드는 그림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황인호 작가의 ‘은혜와 놀라운 은혜’다.

 

‘은혜’의 이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놀라운 은혜’의 이미지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마약중독자, 트랜스젠더, 소년병, 성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 앵벌이하는 할머니와 손자, 개, 데스메탈(이런 음악도 일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세를 당하고 있다)을 할 것 같은 음악인들, 부상당한 이주민 등이 예수님과 화기애애하게 둘러앉은 모습이라니……. 별로 점잖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않은 사람들, 지금은 교회에 나타나지도 못하는 이들이 아닌가. 뭔가 당신들의 하느님과 나의 하느님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신앙의 갈등기에 접어들었던 나는 내 미니홈피에 이 그림을 스크랩하고는 몇 년 동안 이 작품을 잊고 있었다.

 

성당에서 일하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생활인, 혹은 진보적인 마음만 있는 소시민이 되기도 했지만, 성당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내가 노동자라는 생각, 성당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천주교회 안에서 참 대접을 못 받는다는 소외감, 천주교회는 나날이 가난한 이들을 우선 선택하는 교회가 되기보다는 ‘사장님의 교회’로 변질하는 것 같다는 안타까움을 가득 안고 하루하루 견디고 있었다.

 

2013년 초부터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여러 교육과 강의를 쫓아다니다 보니, 스무 살에도 갖지 못했던 장래희망이라는 것이 생겼고, 2014년부터는 장래희망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한 인생 제2막을 시작해볼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약간은 희망차다. 밀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고, 여전히 버거운 노동조건에 사람들은 허우적대며 살고 있고, 그 현실은 나의 희망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흘러가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차마 아이를 데리고라도 가진 못했지만,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이 작년 12월 28일 총파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총파업 전, 인터넷에는 총파업 참여를 독려하는 다양한 포스터들이 넘치게 흘러 다녔다. 그러다가 저 ‘담배 피우는 예수’를 만났다.

 

내가 이해했던 예수와 가장 닮은 그림이 저 두 가지이다. 그래, 우리는 저런 예수를 돈으로 떡칠한 조각상에 가두어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천주교의 침묵

 

2012년 말부터 2013년 2월까지 몇몇 국회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했고, 숱한 논란 끝에 2013년 4월 24일 발의한 의원 중 일부가 철회를 요구, 결국 국회에서 논의도 해보지 못한 채 철회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 곳곳은 물론이고 온갖 신문, 잡지 등의 지면 광고, 현수막, 단체 문자메시지에 이르기까지 ‘보수 기독단체’의 적극적인 반대 의사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그 혐오와 거부의 표현들을 보는 것 자체가 공해가 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인 나는 한국 천주교회는 어떤 견해를 밝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아니, 솔직히 침묵하는 천주교에 대해 분노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치 저 왕왕거리는 ‘보수 기독단체’의 목소리가 고맙다는 듯한 그 침묵이 역겨웠다. 적어도 2013년 7월 조계종 노동위원회가 주최한 ‘차별금지법과 노동 토론회―노동, 차별금지법을 말하다’ 같은 행사를 통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고 지지한다는 발언 쯤은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고 순진한 신자였다는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 원래 침묵은 중립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냥 ‘나랑 상관없음. 내 알 바 아님’의 표시일 뿐. 그래서 침묵이 참으로 정치적인 언어라는 것을 한국 천주교는 나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사실, 천주교의 그런 입장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2011년 10월에는 ‘소수자 주거권 확보를 위한 틈새 모임’이라는 단체가 ‘가톨릭 청년회관 다리’에 대관 신청을 했지만, 이 행사에 ‘동성애 관련 단체’가 참여하고, ‘틈새 모임’의 행사로 인해 가톨릭 청년회관이 ‘가정’ 및 ‘성’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듯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도 못했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진보네트워크는 가톨릭 청년회관 다리에서 진행할 예정이던 ‘정보 인권상영회 행사’의 대관을 취소하는 것으로 연대의 뜻을 표하기도 했단다.

 

이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와 틈새 모임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천주교 은근히 보수적인가 봐” 하는 쑥덕거림을 보태 나누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그때로부터 햇수로 3년이 지나고, 가톨릭 청년회관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차별적인 논란이 될 대관은 아예 접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 지난해 11월 3일, 제10차 WCC 총회에 참가한 각국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이 광화문광장에서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동성 결혼은 매우 부조리하다”고?

 

2005년 하반기쯤 나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알게 되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태>, <노동하는 인간> 같은 교황의 문헌들에 대해 강의를 듣고, 공부하면서는 심지어 가톨릭교회가 정말 예수를 따라 살고자 하는 교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희망마저 품었던 것도 같다. 물론 경영자의 처지에 있던 나이 많은 신자 몇 분들의 공격적인 비판(비난일 수도 있다)이 우리의 소박한 기쁨을 방해하는 일도 숱하게 있었다.

 

1차, 2차에 이르는 사회교리학교 일정을 마치고 그 당시 출간된 지 채 1년도 안 된 <간추린 사회교리>라는 책을 통독하는 3차 연수가 있었다. 통독 연수라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2박3일 동안 다 읽을 수는 없었던 것 같고, 부분별로 중요하다 싶은 곳을 짚어가며 읽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읽던 중 맞닥뜨린 228항. “동성 결합에 ‘혼인’의 지위를 부여하라는 요구는 매우 부조리한 것임을 드러낸다”는 문장을 만났다. 빙빙 돌려 서술한 글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가톨릭교회는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입장인 건지, 그들에게 ‘사람이 아니므니다’라고 말하는 건지, 그들의 연애는 인정해도 법적인 혼인만은 인정을 못하겠다는 건지, 정확한 입장을 읽기가 힘들었다.

 

지금 읽어보면 명확하게 ‘인정 못함, 반대’의 뜻이 드러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도 애매하다고 느꼈던 건지도 의문이다. 그날 연수에는 주교도 와서 약식 강의를 했는데(그 주교가 아마도 염수정 추기경이었을 것이다), 의구심이 있으면서도 차마 질문하려고 손을 들지 못했다. 다만 책 귀퉁이에 ‘한국 천주교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이라고 끄적이며 낙서만 했다.

 

“사실혼과 관련된 또 다른 구체적인 문제는 동성 결합의 합법적 인정에 대한 요구다. 이 문제는 점점 더 공론화해 가고 있다. 인간의 온전한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학만이 사회적 교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이 문제에 적절한 응답을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학의 견해는 ‘동성 결합에 '혼인'의 지위를 부여하라는 요구는 매우 부조리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러한 요구에 반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인간의 본성 자체에 새겨 놓으신 계획에 따라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결합 관계가 객관적으로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장애는, 신체적 생물학적 차원과 특히 심리 차원에서 창조주께서 뜻하신 남녀의 상호 보완성을 위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통합적인 일치와 정신물리학적인 상호 완성을 통하여 완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성(性)이 다른 두 사람의 결합에서만 가능하다.

 

동성애자들의 인간 존엄을 온전히 존중하여야 하며 정결을 지키는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도록 격려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중의 의무가 도덕률에 위배되는 행위의 합법화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동성 간의 혼인과 그것이 가정과 동등하게 여겨질 권리의 인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이 단지 가능한 혼인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진다면 혼인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이는 공동선에 심각한 손상을 입힐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결합을 법적으로 혼인이나 가정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국가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228항

 

 

   
▲ 지난해 8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성소수자 4대 인권입법과제 실현 촉구 및 김조광수-김승환 결혼식 국회의원 초청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조광수 감독(오른쪽) ⓒ민중의소리 LeeSuengBeen

 

동성결혼식 올린 가톨릭 신자, 김조광수와의 대화
“차별하지 말자는 법 반대하는 게 예수를 따르는 건가?”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을 시작하면서, 천주교회에 얽힌 차별 얘기를 반드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칼럼을 기고하기 며칠 전인 2013년 9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적인 게이 커플 결혼식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로 알려졌던 김조광수(베드로)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많았지만, 고르고 골라 단 두 가지의 질문을 보냈는데 고맙게도 답변이 왔다. 답변을 정리해 글을 써볼까도 했지만, 당사자의 심경이 잘 드러난 글이라 그대로 옮긴다.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은 신자시잖아요. 혼인성사에 대해 알아보신 적이 있을까요? 혹시 추진해보시기도 했는지 궁금합니다.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은 베드로이지만, 최근 10여 년은 주일에 미사도 드리지 않는 냉담자로 살았습니다. 가톨릭은 여전히 동성애를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요. 물론 저는 스스로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지도, 동성애자인 게 부끄럽지도 않지만, 성경에서 금하는 사람, 교리에 어긋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힘들었어요. 신부님께 ‘저는 동성애자예요. 어제는 동성과 섹스를 했어요’ 이렇게 고백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고해성사를 하고 난 뒤에 기분이 찜찜했죠. 그래서 고해성사를 안 하게 되고 그러니 영성체를 못 하게 되고요. 주위에서 ‘왜 영성체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저는 얼버무리고. 그러는 모든 것들이 싫어지면서 교회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어요. 가까운 신부님 중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어서 그분들 덕에 크리스천으로서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죠. 결혼을 기점으로 교회에 다시 나가보려 했어요. 그래서 혼인성사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예상한 대로 저희 결혼을 받아주는 사제나 교회는 없었습니다. 아직 가톨릭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죠. 다른 나라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 섭섭하지는 않지만 아쉽기는 하죠.

 

최근에는 성공회로 이적을 해서 성공회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미국 성공회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주교님도 있고 2010년에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주에서는 교회에서 동성 결혼하는 것을 합법화’했어요. 대한성공회는 아직 동성애와 동성 결혼에 대해 정확한 견해를 내놓은 적이 없지만(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죠) 보다 긍정적이고 앞으로 변화도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해서 성공회를 다니고 있어요. 아직은 성공회 교회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조용한 신자로 있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교회에서 다른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논란이 있을 때, 저는 가톨릭교회가 묵묵부답하던 것에 참 분노했습니다. 그런 침묵은 동조로 보이기 쉬운데, 감독님의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죠. 차별금지 조항 중 ‘성적 지향’을 크게 문제 삼는 것으로 ‘성경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인데, 이럴 때마다 힘들고 괴롭습니다. 차별하지 말자는 법을 제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인데 왜 그것을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지 못하는지 참으로 딱합니다. 이제라도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 합니다. 최소한 프란치스코 교황만큼은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나요? 교황은 최근에 ‘동성애자 커플의 자녀도 다닐 수 있는 교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했잖아요.”

 

 

   
▲ 지난해 4월 25일 열린 고(故) 육우당 10주기 기도회에 그의 유품이 전시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육우당은 동인련 회원들에게 성모상을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문양효숙 기자

 

육우당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내가 교회로 다시 찾아가기 몇 년 전인 2003년 4월,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 6가지의 친구를 둔 19세 육우당이 세상을 떠났다.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이기도 한 그는 사무실 문고리에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평소 묵주를 지니고 다니며 기도하곤 했다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옆에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세상을 원망하는 6장의 유서와 자신의 전 재산인 34만 원을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기부한다는 메모가 있었다고 한다.

 

작년 4월, 육우당 10주기 행사에서는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수많은 동성애자가 함께했다. 그의 죽음이 있고 얼마 후, 인권사회단체들은 “그의 죽음은 차가운 편견과 멸시, 소외와 차별의 빙벽 속에 갇혀있는 이 땅 모든 동성애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면서 동성애자들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선택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비판했다. 나아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일부 개신교 단체들과 언론에 대해서는 “단지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반인권적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되물었다. 11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육우당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는 건 아닌가.

 

 

예수는 세상의 온갖 소수자를 받아들였다

 

2014년 1월 10일.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개정안 공청회에서 한 판의 난동이 있고 나서, 이 원고를 시작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건 중심으로 글을 쓴 감이 있지만, 성소수자를 포함한 장애인, 여성, 청소년, 이주노동자, 노인, 노숙자 등 모든 소수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 이러한 소수자성은 한 사람에게 하나만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장애인’, ‘여성-성소수자’, ‘성소수자-청소년’ 등으로 결합하여 그 차별을 더 심화하기도 한다.

 

왜 나는 이 칼럼을 ‘차별’이라는 말로 채우고 싶었던 것일까 하고 오래 고민해 보았다. 그건 내게 차별의 말이 권위적인 억압의 다른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교회(또는 사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라는 판단이 싫었는데, 그 권위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하느님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나나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을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이라며 소외시키고 배제하려 해도 무섭지 않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 욕심(권력욕, 군림)을 채우고자 하는 그대의 혓바닥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에게 차별의 말은 순응을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본당에서 숱하게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요구받는데도 ‘할 수 없지’ 하며 일하는 우리 자매님들의 모습(흔히 예수의 어머니 성 마리아의 헌신과 모성의 수고로움을 들먹이며 존중하는 듯한 언사를 하기도 한다), 직장 생활도 버거운데 각종 행사에 그저 ‘동원’되거나 사제들의 의견을 넘어서는 일을 하기는 어려운 청년들, 그리고 사제와 사목위원들이 아무리 임금을 깎으려고 시도해도 노조는커녕 체념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는 교회 안 노동자들은 일면 그 희생양일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어 아무리 반대해도, 그들은 우리 옆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이다. 노동자라는 말이 불편해서, 아무리 그들의 권리를 부인하려고 해도 어떤 타인의 노동에 빚지지 않고 단 하루라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역시 목수 일을 하던 노동자였고, 그의 놀라운 은혜 혹은 은총은 세상 속 다양한 소수자들을 이미 다 받아들였는데, 어이없게도 우리는 교회며 사회라는 울타리를 치고 어떻게 저들을 배제하고 차단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답을 내릴 수 없는 갈등의 순간, 우리에게는 좋은 질문이 하나 있지 않은가. 만약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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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4:44 2014/02/14 14:44

흔히 서품식 즈음에 새 사제에게 ‘착한 목자’ 되시라며 축복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사제를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자를 양 떼에 빗대어, 신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성직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어떤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기도 하고, 신학적으로나 보편적인 인식에서나 필자의 의견은 부족하고 편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고백한다.

 

 

사제는 목자인가?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을 두고 보면 목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 그러니까 하느님뿐이다. 인간 가운데 하느님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존재는 아들 예수가 유일하다는 것이 성경과 교리를 통해 알려진 상식이다. 게다가 예수는 목자이면서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 제단에 봉헌하지 않았나. 예수마저도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양’이 되었다는 말인데, 인간일 뿐인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에 도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사제도 그저 한 마리 양일 뿐이니 목자라는 말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호칭이 되고 만다. 사제에 대한 존경으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양 떼 가운데 우두머리 양 정도라고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사제의 강론에서 이런 논조의 얘기를 듣고 깊게 공감했다. 그 사제도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지나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사제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를 닮고 따르겠다고 하느님 앞에 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제는 그래서 예수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의 전 존재를 닮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일이고, 한 명의 사제가 예수의 어떤 점 한 가지라도 닮는다면 그것이 진정 은총이라고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인간을 측은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닮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기꺼이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어 세례를 청하는 겸양과 용기를 닮았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국미사에 함께하는 사제들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옆을 지켜주는 의리, 그들과 친구 되려는 노력을 닮기도 했을 테고, 정 닮은 것이 없으면 예수를 그린 여러 그림에 보이는 긴 머리칼, 멋진 수염이라도 닮았을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내 주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술자리 안주가 되는 ‘달걀과 닭’ 논란이 있다. 사제의 ‘권위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신부는 이러저러하더라 하는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이가 교회에서 힘 좀 쓴다는, 권위 좀 부리는 신자들이 신부들을 어떻게 대하더라, 또 여러 가지 편리를 제공해 사제들을 길들이기도 하는 것 같다는 얘기로 맞받아치며 다양한 일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성당에서 신자로 활동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사실 사제의 권위가 교회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인 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교회에 봉헌’하겠다면서 신학교로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사제의 부모님들에 대해 ‘자기들이 신부인 줄 아나봐’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게 모르게 권위를 부리고 다닌다는 뒷이야기도 쉽게 듣게 된다. 또 사제들의 권위에 무임승차하곤 하는, 사제들과 무척 가까운 측근들의 활약(?)에 대한 이런저런 수다도 오가기 마련이다.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없고, 수도자도 부족하다는 가톨릭교회의 위기론이 만연한 요즈음은 본당에서 ‘신학생’이 나오기만 하면 잔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대신학교(서울대교구의 경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들어간 신학생들을 ‘학사님’이라고 불러주면서 그 신학생과 부모에게 온갖 축하와 격려가 넘친다.

 

‘학사(學司)’가 무슨 뜻인가? 대학 졸업하면 받는 학사(學士) 학위를 받을 사람이라 학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신부〔司〕 공부〔學〕하는 사람’이란 뜻이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대신학교에 입학하면 ‘구마품’을 받고 성직에 입적하게 되어 있었고, 신부는 아니지만 성직에 입적하는 것으로 인정해 흔히 ‘학사님’이라는 존칭을 썼다고 한다. 현재는 ‘신학생’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지만, 여전히 ‘학사’라는 호칭이 애용되고 있다.

 

20대 초중반부터 강사로 생계를 유지해오다 유명세를 얻은 사람 한 명를 알고 지냈다. 워낙 젊을 때부터 ‘○○○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어오던 그이의 경력이 10년가량 되었을 어느 때쯤, 누군가가 ‘○○○ 씨’라고 불렀을 때 “저 사람은 뭔데 나를 ○○○ 씨라고 부르는 거야” 하며 화가 났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권위의식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순식간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이의 권위의식이 수시로 떠오른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나이로 선후배 따지는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나도 가끔은, 본당 주임신부가 자기보다 훨씬 높은 연배의 신자나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혀 말을 잃는다. 신자들이 신학생과 사제에게 지나친 존중을 표하면서 결국 이러저러한 경우에서 보듯 사제들에게 권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들도 처음엔 신자들의 과한 존칭과 대우가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스스로 신자들의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공손’과 ‘격식’이 부족하다며 화를 내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진다면, 그는 이미 권위주의에 적응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권위의식, 권위주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나 공감이라는, 성직자의 의무에 해당하는 가치들을 배반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게 만든다. 사제에게 ‘성인사제(聖人司祭)’가 되라고 말만 하지 말고, 제발 부디, 우리 이제 사제들에 대한 조건 없는 ‘예우와 존경’을 철회할 수는 없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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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9:10 2014/02/09 19:10

지난 10월 31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씨가 자결했다. 12월에 돌을 맞는 딸과 아내를 남겨두고 죽을 수밖에 없던 그의 생존을 위협한 것은 무엇일까. 이제 서른셋, 얼마 전까지도 형에게 업어달라고 응석 부리던 막냇동생. 그가 노동조합을 통해서 눈뜬 현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이 가족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던 회사. 어떤 가치를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책임질 수 없을 것만 같았을 가족.

 

삼성 본사와 서비스센터의 ‘바지사장’들에게 농락당하던 자신들의 권리를 찾겠다고 노조를 만들었더니, 이제 삼성의 부속품이 아닌 노동자로, 참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는 삼성노조 노동자들의 대화를 보노라면, 고(故) 최종범 씨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 *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페이스북 페이지의 게시물을 허가를 받아 사용합니다.
 

▲ * 전국금속노동조합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페이스북 페이지의 게시물을 허가를 받아 사용합니다.

 

 

다른 듯 비슷한 삼성과 천주교

 

이게 사는 건가 싶었던 최종범 씨의 상황에 대해 ‘삼성이니까 뭐~’ 이러면서 우리 교회가 안도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것은, 삼성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거리가 의외의 지점에서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썩 괜찮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가족’, 천주교 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경건하고 거룩한 종교다운 이미지를 견주어 보면 될 것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신자 수와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된 전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 그로 인한 종북몰이, 천주교에 대한 환상과 일반화…….

 

또 다른 하나는 ‘노조 없음 혹은 인정 안 함’, 즉 무노조 신화다. 2005년 5월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식당 외주화 방침을 세우고 27명의 영양과 직원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던 성모자애병원이 있었다. 보건의료노조 성모자애병원지부 관계자의 말로는 인천 지역 성당에 다니는 조합원들이 줄줄이 ‘더는 노조 활동하기가 어렵다’면서 탈퇴서를 제출했다는 거다. “딸이 인천 지역 모 성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노조에 가입할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 탈퇴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성당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이모를 통해 노조 탈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천주교 인천교구를 통해 노조 탈퇴 종용이 이뤄졌다고 했다. (* <매일노동뉴스> 2007년 3월 6일 기사 ‘'성당' 마저 노조 탈퇴 요구하나’ 참고 )

 

어느 병원의 원장 수녀가 노조와 협상을 거부하며 “예수님도 사탄과 협상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는 얘기는 씁쓸하게 회자되고 있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CMC 해고자 5명의 상황도 그렇다. 그나마 병원은 노조라도 있지만, 일반 교구청별로 노동조합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전혀 없는 상태다.

 

마지막으로 ‘본사와 하청, 혹은 지사 간의 노동조건 차이’ 문제다. 이건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닐 수도 있지만, 천주교의 각 교구청을 본사에 대입하고, 본당을 하청회사 또는 지사에 대입할 경우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절 유급휴가, 성탄과 부활 후의 휴무, 연차 사용의 쉬움, 즉 주로 휴가 · 휴직 사용의 문제에서 교구청과 본당 사이의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즉 본당에서 일하는 직원은 교구청에 속해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대기업 직원이지만 실제로는 5인 이하 사업장 직원의 처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연차나 육아휴직 등을 신청할 때 곤란을 겪는 일이 꽤 많은데, 한 사람이 휴가를 쓰면 다른 사람은 자신의 휴무일을 반납하고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무자가 한 명인 성당도 많아서, 이런 조정조차 어려운 경우도 꽤 있다.

 

 

부서지기 전에 지킬 수 있다면

 

사제 인사이동이 있으면 사제와 동반하는 사무장이나 식복사(사제관 주방 근무자) 때문에 본당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맥없이 일터를 잃어야만 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최근 와서 그런 일은 거의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이런 일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울대교구는 본당 직원들을 교구청 직원으로 등록하고 있다고도 한다. 물론 기꺼이 한 일이라기보다는 노동 관계 부서의 권고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성당 직원, 그러니까 교회 시설에서 일하는 노동자인 나는, 무노조 신화를 이어가는 천주교와,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응원하는 200일이 넘는 대한문 미사 사이의 거리감이 참 부끄럽고 어색하다. 게다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많은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의 시선도 낯설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내 동료의 노동을 그런 눈빛으로 봐준 사람이 있었나. ‘아, 저 시선을 받으려면 교회 내 노동자들도 목숨을 걸고 노조를 만들고, 온갖 생존의 위협을 감수하는 고된 싸움을 해야만 하겠구나’ 싶었다.

 

대한문 미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아무도 모르게, 여전히 다양하고도 사소한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리는 교회 내 노동자들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 사정을 모른 척 외면하듯이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라는 게 참 어렵고 힘들다.

 

지옥 같은 돈 중심의 사회에서 가족들과 살고 아이를 키우려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다른 성당에서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일자리를 잃어도 말도 못 꺼내고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왜 당신의 권리를 버리느냐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잠시 자존심이 상해도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 우리 모두 사람이라서 그렇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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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50 2014/02/09 18:50

아이를 키우면서 하는 각오가 있다. 내가 저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다는 것이 하나, ‘친구 같은 엄마’가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이 또 하나다.

 

아이의 인생을 살아 줄 수 없으니 너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참견과 간섭은 안 할 것이며, 친구가 되겠다는 것은 ‘친구 같은 엄마’란 말 속에 있는 엄마의 성격, 지위, 권위마저도 놓겠다는 뜻이다. 친구처럼 지내는 건 좋지만, 엄마로서 딸에게 해줄 것은 해줘야 한다는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싶다는 간곡한 바람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을 각오라고 부르는 건 부모, 자식의 관계가 평등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은근히 강력한 탓이다. 특히 엄마와 자식의 관계는 엄마의 몸을 통해 이루어진 관계이다 보니 ‘소유’의 관계―‘헌신’이라는 말로 포장되곤 하는―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같다.

 

얼마 전 한 청소년 활동가들의 모임에 갔다가 ‘모태 전교조’라는 말을 들었다. 엄마가 전교조 조합원인 선생님이었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자연스럽게 전교조 활동을 하는 엄마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 아이도 자라면서 청소년 활동가가 되었는데 부모의 영향을 꽤 받았을 테지만, 부모와는 또 다른 가치관을 갖고 활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모태 신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모태 신앙이나 모태 전교조나 아이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부모의 가치관과 신앙에 대해 아이가 비판 의식을 가질 틈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들을 증언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의 신앙심이 깊고 영성의 깊이가 깊어 생활 그 자체에 가식이 없고, 가난한 이들의 참된 친구였던 예수의 제자마저 될 만한 풍모를 지닌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대부분 부모의 신앙생활과 현실생활 사이의 괴리감, 그 배신의 거리에 절망하고 심지어 부모를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배신감과 조롱은 ‘모태 전교조’만이 아니라 진보적이라고 하는 어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 386 부모를 둔 한 청년도 자신의 부모가 “나도 옛날에 다 해봤는데…” 어쩌고 하면서 정작 세상 속의 성공에 무신경한 자신을 설득하거나 윽박지를 때마다 씁쓸하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부모에게 마음과 행동의 완벽한 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마음이 신앙이든 사상이든, 어떤 가치관이든 간에 사실 살아간다는 것은 적당히 내가 포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만 신앙심을 갖거나 양심적이면 된다는 마음들이 ‘원칙’, ‘도리’ 같은 것과 벌이는 사투쯤 되지 않을까?

 

모태 신앙이 성당 다니는 사람들에게 큰 의미 부여가 되는 이유는 아마도 ‘성가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그 성가정의 고단한 사연들은 외면하고, 그저 예수가 태어난 가정이라는 성스럽고 따스하고 멋진 이미지만 취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말이다.

 

성가정의 아버지 요셉은 누구 자식인지도 알지 못하는 애를 임신하고 돌아온 약혼녀를 받아들인 고독하지만, 의리 넘치는 사내가 아닌가. 한국 남자들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용기를 내준 사람이니 성가정의 일원이 될 만하다. 마리아는 어떤가? 남편인 요셉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임신을 했고, 아이를 한겨울 허름한 마구간에서 낳은 것도 모자라 그 아이 때문에 여기저기 떠도는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그 녀석을 장가도 못 보내고 욕된 십자가에서 죽는 꼴을 목격한 어머니였다. 아들 예수야 말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요셉, 마리아와 예수가 감당하고 받아들였던 것들, 그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감수했던 성가정의 고난의 시간을 끝없이 우리도 함께하겠다는 각오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국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온화한 표정의 세 사람을 그리고 조각한 성가정상이라는 이미지만 남긴 채 소비되면서 그저 신자만 되어 달라고, 신자가 되었으니 혼인성사는 꼭 성당에서 하자고 남편과 아내, 아이들을 다그치는 이상한 힘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이상야릇한 힘 때문에 사람들은 자녀에게 유아세례도 해주고, 1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 첫영성체 교리도 함께 버티고, 어떤 집 아들은 사제로 봉헌한다면서 신학교에 보내고, 하다못해 자녀들을 성당에서 혼배미사로 출가시키고 싶다는 소망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신앙을 선택할 자유, 삶의 가치관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나도 유아세례를 받았고, 오랜 냉담 끝에 성당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것을 ‘유아세례의 은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지만, 내 아이의 신앙 문제를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질문마저 하지 않는 유아세례란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가 싶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만, 성당 직원이기 때문에 ‘네 딸에게 유아세례 안 시키느냐, 둘째는 안 갖느냐’는 온갖 간섭과 오지랖에 시달려야 했다. 성가정을 꾸리고 말고는 나와 우리 가족들의 의사일 텐데, 성가정에 대한 강박감이 내 자식이나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성당 직원들도 그래야 한다는 간섭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태 신앙이나 유아세례만큼 고민하게 되는 것이 혼인성사다. 어떻게든 성당에서 결혼을 시키고 싶은데 바쁘다면서 시간 내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들은 정말 절실하게 사무실에 와서 묻고 또 물으신다. 자기 자녀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자녀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압박하는 일마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나보다 먼저 결혼한 여동생이 결혼을 준비 중일 때의 일이다. 동생의 시어머니인 사돈어른이 얼마 전에 세례를 받으셨다며,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여동생은 오랫동안 성당을 나가지 않고 있는 소위 ‘냉담 신자’였고, 나도 다시 성당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시어머니의 요구에 난감해하는 동생을 위해 내가 다니던 성당의 청년 담당 사제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부모님이 결혼하는 게 아니니까 본인들이 혼인성사를 원하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게 가장 좋다”는 해답을 주었고, 이 사제의 한마디로 동생은 곤란한 입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다. 사돈어른은 사제의 말이라니 아쉽긴 해도 토 달지 못했고, 동생은 은근한 혼인성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거다.

 

이 일을 겪은 덕분에 성당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자녀들의 혼인성사에 관해 고민스러워하는 부모들과 얘기할 때마다 “부모님들이 아니라 자녀들의 일이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세요”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강요하는지 묻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특히, 교회에서 묘하게 급진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다양한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가깝게 지내는 가족일수록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든 밀착되어 있을수록 생길 수 있는 피로감을 없앨 수 있는 시공간적인 거리가 필요하니 말이다. 단지 함께 신자이기를 강요하기보다 어떤 내용의 삶을 살 것인지 먼저 공감하고 살아가다 보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삶의 모양새를 보고 강요하지 않아도 어떤 길이든 선택하기 마련임을 믿어주는 것. 그것을 성가정의 출발점으로 삼아도 좋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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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8 2014/02/09 18:48

대학 때 꽤 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 참여했지만, 잘 뛰지 못하는 나는 대열에서 떨어질까 혹시나 잡혀갈까 엄청나게 떨었고, 눈치껏 바짝 쫓아다니곤 했다. 학교를 한두 해 더 다닐수록 그런 두려움의 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웠고, 가끔은 너무 두려워서 그게 두려움이라는 걸 잊은 줄 알았다.

 

그렇게 두려움을 잊은 듯 살아오던 2009년이던가. 명동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의 4대강 관련 미사와 행진이 있었다. 미사까지는 뭐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미사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면서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그 자리에 혼자 참가했던 난 그 순간 왠지 간 덩어리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자유분방한 행진 대열에서 혹 잡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 탓이다. 그날 그 행사가 끝나고 동생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부끄럽기까지 한 그 두려움에 대해 한참이나 횡설수설 어설픈 수다를 떨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내 두려움을 인정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꽤 오랫동안 난 내가 아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존재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건 단지 강해 보이고 싶었을 뿐 실제의 난 별로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지 몇 년 안 되었다.

 

내 안의 두려움을 알게 되고부터 나는 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 철탑을 올라가는 사람들, 희망버스에 오르는 사람들, 비혼을 주장하는 사람들, 탈핵을 말하는 사람들을 전보다 더 많이 존경한다. 이렇게 맞서 싸우기 어려운 권위적인 체제와 문화, 질서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두려움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해서다.

 

지난 기고에 대한 반응 몇 가지를 보면서 오랜만에 간이 쪼그라들었다. 몇 달 전, 우연히 만났던 CMC(가톨릭 중앙 의료원) 해고자 몇 분이 가톨릭교회의 놀라운 정보력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다. 해고자 중에 누구를 회유하면 효과적일 것인지까지 파악한 것처럼 느껴지더란다.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는지 ‘골랐다’고 했는지, 그분들의 정확한 표현도 잊은 것 같다.

 

비록 해고자 몇 분의 직감이라 하더라도 참 무서웠다. 필명으로 글을 쓰는데도 내가 누군지 알아낼 사람이 곧 나타날 수도 있겠구나. 아니면 혹시 정보기관 같은 곳에서 남편에게 ‘네 마누라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고 있느냐’라며 전화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자본론을 강의하는 시간강사도 고발당하는 토끼몰이 분위기까지 더해져 생기는 공포심 같은 것, 그런 이유로 혹여 해고되는 것도 싫지만, 나와는 차원이 다른 ‘권력’에 파악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정말 소름이 끼친다. 그것이 교회든 국가든 말이다.

 

사실 한국 천주교회에 적을 둔 평신도가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의 성격에 맞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내가 교회’라고 교리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교회와 관련된 영역에서 조금 활동을 해보면 ‘정말 내가 교회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너도 교회인데 왜 다른 존재의 부족함을 들추려 하느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코너다. 나도 다른 필진의 글을 읽을 때 이 칼럼이 좀 더 불편하고 읽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또, 너는 얼마나 깔끔하고 성실한 직원이었느냐 물으면 도망치고 싶어질 지경이다. 요즘 흔하게 유행하는 ‘갑을관계’라는 말로 치면 여러모로 ‘을’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99%쯤 될 거라고 얘기하는 ‘을’이 교회 안에 있다면 당연히 교회 직원이다. 그 입장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도 이곳에서 일하기 전엔 그랬으니까.

 

성직자 중심의 위계를 갖는 교회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하위 층을 차지하는 무리가 교회 내 ‘노동자’이고, 거기에 속한 내가 교회를 바라보며 갖게 된 여러 생각을 거칠면 거친 대로 나누고자 용기를 내었으니 못마땅하다는 소리를 피하진 못할 거라 각오도 했다. 그랬으니까 나는 충분히 편향적이고 치우친 글을 썼을 테고 앞으로도 가능하면 더욱더 그렇게 쓰고 싶다.

 

불행하게도(?) 이 칼럼에 기고를 시작할 즈음 천주교회는 국정원 해체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하면서 우직하고 역사적인 행보로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고 있다. 160일에 다가가는 쌍용자동차 미사도 그렇고 강정에서, 밀양에서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이 활동 중이다.

 

정말 따뜻하고 신심 깊고, 게다가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직자, 수도자가 적당히 많아서 가톨릭교회가 존경받아 마땅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칼럼의 취지는 그런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많은 문제의식을 느낀 평신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 문제에서 벗어날 길을 함께 찾자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모르던 처지에 있는 이의 말을 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이 코너를 대해주면 좋겠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얘기가 시작되고 길도 찾을 것 아닌가.

 

세 살 된 딸아이를 키우는데 그 아이는 자기 나름의 하고 싶은 게 있고, 나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도 어른보다 말이 미숙하고 힘도 약하다 보니 자기주장을 하려면 떼쓰며 귀가 떨어져 나가라 울어 대곤 한다. 아이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 더 크고 말이 늘면 말싸움이라도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로 해를 입는 자와 차별로 덕 보는 자, 힘센 자와 약한 자의 힘의 크기가 딱 엄마 앞의 아기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애처럼 울고 떼쓰지 않으면 흘깃 쳐다보지도 않을 것 같은 ‘을’의 입장을 ‘을’끼리라도 다독이며 나누어야 할 텐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 게 요즘 우리 사는 세상이다.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층은 언제나 아동, 청소년이나 소수자들에게만 조용히 하라고, 고분고분 말하라고, 말 잘 들어야 착하다고, 항의하려면 절차대로 하라고 말한다. 우리도 다 아이였으니 난 그런 말 안 들어봤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이름도 못 밝히고 글을 쓰면, 이러지 말고 절차를 통해서 항의하라고 하거나 그냥 참고 국으로 있으란다.

 

그런데 양보나 협상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의 순서는 내가 정해야 하는 것 같은데 참 알 수가 없다. 상대편이 100을 가지고도 다섯을 내놓기 꺼리는데 내가 가진 10을 내놓으라는 협상은 이미 불평등하고 편향적이라고 판단하는 게 상식인 듯한데 말이다.

 

공손한 말투로 차분히 얘기하라는 말을 어떤 대상에게 하는지 잘 살펴보자는 거다. 그 말을 하는 나는, 또 당신은 어른인가 아이인가? 우는 아이들에게, 좌충우돌 10대에게, 부하 직원에게,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이나 밀양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할매들에게 하고 있지는 않나? 왜 그들만, 또는 우리만 착하고 공손해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참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계속 하는 게 용기라니 다시 용기를 내볼까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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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6 2014/02/09 18:46

새로 지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와 산 지 2년이 되었다. 얼마 전 재계약을 마치고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그 감격이 아직 생생하다.

 

남편이 독립해서 살던 살림살이 대부분을 그냥 갖고 들어오는 이사였다. 새로 마련한 살림은 에어컨, 안방의 붙박이 장롱과 원목 평상 침대, 작은방 책장, 그리고 3인용 좌식 소파였다. 소파와 책장은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하고 나날이 바뀌는 쇼핑몰 가격을 따라서 주문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해서 각각 15만 원 정도 선으로 경매 낙찰 받은 기분으로 고생 끝에 주문했고, 장롱도 역시 150여만 원 하는 걸 어느 쇼핑몰 할인 행사 쿠폰 덕에 백만 원도 안 주고 살 수 있었다. 에어컨이나 원목 침대도 한 번 주문할 때 좋은 거 해서 오래 쓰겠다며 큰 맘 먹고 결정했던 것이었다.

 

결혼해서 집안 살림 마련하고 이사 몇 번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 얼리 어답터 기질이 있던 사람도 가족을 이뤄 살다 보면, 그 기질이란 게 얼마나 허망하고 거추장스러우며 호사스러운 취미인지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되기 마련이다.

 

이쯤 해서 “얘는 뭐 하는 앤데, 지 살림 얘기를 쓰면서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에 기고한 거냐” 할 만한 독자들을 위해 사족을 좀 달아드리겠다. 필자는 몇 년간 성당 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몰랐으면 좋았을 일을 많이 알게 된다. 솔직히 수두룩하게 얘기할 거리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써도 될지 걱정스러운 얘기도 많아 은근한 자기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점을 미리 고백하고 싶다.

 

어떤 얘기가 좋을까 고민을 좀 했지만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수레바퀴의 하나를 맡은 사람으로서, 또 벗어날 수 없고 가끔 사랑스럽기까지 한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답게 일단 살림에 관한 돈 얘기부터 해볼까 하고 내 살림 얘기를 꺼낸 것이다. 불편할 수도 있고, 모르면 더 좋았을 교회 안의 경제 관념 말이다. (좋은 얘기 쓸 것도 아니므로 존칭은 생각하기로 한다. 이이, 그이 등의 표현에 맘 상하지 않으시길.)

 

개신교 성직자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흔히 가톨릭 성직자 · 수도자는 ‘순결(독신), 순명, 청빈’의 서약을 한다고 알려졌다. 장벽을 치고 살면 모를까, 사제 · 수도자도 나약한 인간이니, 세상 살아가며 지키기 어려운 세 가지는 서약이라도 해서 스스로 다짐하고 실천하라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사제 · 수도자들에 대한 교우들의 기대는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옆에서 보기에 아찔할 지경이지만, 그 양반들도 하느님의 어린 양인 실수투성이 인간인 것을….

 

아무튼, 청빈에 관해 짚고 갈 한 가지. 수도회에 들어간 수도자와 수도회 소속 사제들에게는 세 가지 서약이 유효하지만, 교구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청빈의 서약이 빠져 있다고도 한다. 일단 청빈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청빈(淸貧, poverty, paupertas) : 복음적 권고의 하나. 스스로 선택한 단순 소박한 가난을 뜻한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출처 :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 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편찬, 20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느 성당이나 때가 되면 사제도 바뀌고 수도자도 바뀐다. 교사들이 몇 년마다 전근 다니듯 사제, 수도자도 각자의 지위에 따라 근무하는 기간이 다르지만, 교구 · 수도회별로 한 해에 한두 번의 인사 이동이 있다.

 

그때가 되면 본당 신자들과 직원들은 분주해진다. 대개 먼저 살던 이가 사는 집에 당신들 짐을 그냥 얹어두고 사는 이들이 많지만 가끔은 이중 삼중의 공사를 하기도 하고, 혼자 사는 양반들 특유의 까칠한 주문들이 봇물이 터지듯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먼저 살던 이가 이사 올 이를 위해 집 정비를 해주었는데 새로 온 이의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따로 생각한 구조가 있었는지 말단 직원은 모를 어떤 이유로 내부 공사가 다시 시작된 일도 있었다. (사제가 새로 부임하면 내외부 공사를 못 하도록 하는 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큰 힘을 발휘 못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도 하고 싶었던 실크 포인트 벽지 도배, 나도 좋아하는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뽑아주는 고급 캡슐 커피 머신, 가끔 드라마에서 상반신 노출하며 샤워하던 남자 배우들의 머리 위에서 한두 번 봤던 해바라기 샤워기, 고급 가구, 심지어 본당 주변의 지역 유선방송 상품마저 대기업 IPTV로 교체하라던 이도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사 다니고 애 키우는 살림꾼으로서 그런 주문을 받을 때마다 흥분하곤 했다. 나는 뭐 저런 거 집에 놓고 살면 좋은지 몰라서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들을 끌어안고 이사하는 줄 아시나. 차곡차곡 통장에 돈 쌓이는 재미도 잠시, 애 키우고 전세 재계약할 때마다 올라가는 보증금 따라잡으려면 우리는 언제 그런 뽀송뽀송한 살림들을 수시로 바꿔가며 살 수 있을지, 둘이 벌어봐야 뻔한 살림 사는 입장에서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무너졌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한다고 사전에도 나와 있다. 진정한 가난을 말하자면 집 걱정도 하고, 차비 걱정도 하고 한겨울에 보일러를 자꾸 끄면 연료비가 더 나온다는 생활상식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약하고 못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결핍과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나는 사제고 수도자니까 뭔가 초월했다는 위선도 버리면 좋겠다. 부족분을 메우려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거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 하면서 다들 살아간다. 아쉬운 소리 하기 부끄럽고 치사하니까 쓸 거 안 쓰고 아껴가며 사는 거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세상을 살면서 소비 욕망을 다스려가며 자기 지갑 살펴가며 살아가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왜 이렇게 평등하지 못한 건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볼 테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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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8:44 2014/02/09 1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