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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5/08/10
    푹 쉰 김치를 버리지 않고 맛있는 밑반찬으로 만드는 방법(4)
    무나

고독...

  • 등록일
    2005/11/22 16:25
  • 수정일
    2005/11/22 16:25

"고독이야 말로 가장 수지맞는 시장"

거 맞는 말이네. 온갖 미디어와 "문화" 상품들이 흘러들어가는 시장,

바로 이 사회 원자들의 고독.

 

- 녹색평론 85호를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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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05/11/07 12:41
  • 수정일
    2005/11/07 12:41


               장시기

아름다운 길은
아름다운 사람처럼
모든 것을 길 속으로 흡입한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길 때문이 아니라
길을 따라
나무

바람
하늘의 어우러짐이요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따라

사회
세상
우주의 어우러짐이니

길 중에서 최고의 길은
자연적인 물길이듯이
사람 중에서 최고의 사람은
자연 속에서 사는 자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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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닦자

  • 등록일
    2005/11/07 10:19
  • 수정일
    2005/11/07 10:19

돕과 지하철을 타다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나누는데,

가장 하고 싶고 행복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돕은 굉장히 의외라는 듯이 동그랗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봐. 니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있을거야?"

그래...한번 잘 생각해보자.

평소에 그랬다. 하고싶은 일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다.

일구고 싶은 사랑도... 열정도...

귀농과 자연과 벗이되는 삶과 평화, 긴 여행 등등

 

하지만 그런 것들을 꿈꾸기 힘든 것은

내 몸과 마음이 가진 고통의 무게 때문이다.

어젯밤의 피로와 불면때문이다.

 

"내 불안과 강박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어."

 

그랬다.

나에겐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그 일들은 스스로가 평화롭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일들은 스스로가 확고하고 단단하면서도 보드라운

흙 땅 위에 두발을 디딜 수 있어야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먼저 스스로와 대면하는 일이다.

그 단단한 것들을 풀어헤쳐 날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집아" 속에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스트레스와 강박과 불안과 화와 미움과 우울이

함께 똘똘 뭉쳐있다.

 

거울을 닦자.

그러면 뿌연 먼지들이 사라지며 "진아"가 나타나고,

더 닦으면 닦을수록 진아도 사라져

투명한 유리만 남겠지.

이 세상은 그 유리 속에 고스란히 담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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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미즈의 "서브시스턴스의 관점"

  • 등록일
    2005/11/03 17:48
  • 수정일
    2005/11/03 17:48
 

마리아 미즈의

서브시스턴스의 관점


O. Ressler의 비디오에서 발췌한 번역문

2005년 독일의 Cologne에서 녹화



저는 마리아 미즈라고 하고, 은퇴한 사회학 교수입니다.  파흐호흐 학교의 여기 사회교육대에서 1972년에부터 연구를 시작했었죠. 저는 또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여성운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생태운동, 평화운동, 1997년 이후에는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죠.


먼저 우리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서브시스턴스 경제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란 저와 저의 두 친구인 클라우디아 폰 베르호프와 베로니카 벤홀트 톰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과 함께 1970년대에 이 이론을 함께 발전시켜 왔죠.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서브시스턴스 경제”가 아니라 “서브시스턴스 관점(perspective)”입니다. 즉, 구체적인 경제 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지향성, 경제를 보는 새로운 접근법이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브시스턴스 관점은 단지 경제에 적용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도대체 ‘서브시스턴스’가 무슨 의미냐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서브시스턴스란 바로 상품생산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이라고요. 상품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의 목표입니다. 모든 생산되는 물건들은 상품화를 거쳐야 하죠. 이는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표를 향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죠. 이것은 돈과 상품의 생산을 통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직접 삶을 생산,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품의 생산”이 아닌 “삶의 생산”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서브시스턴스의 관점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여성의 가사노동문제를 다루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때 전 세계적인 토론이 하나 진행되고 있었는데 각지의 페미니스트들이 참가했었죠. 주제는  “자본주의에서의 가사노동의 의미”였습니다. 즉, 가사노동은 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가, 왜 부불노동인가? 라는 문제였죠.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노동은 지불될 수 없다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가사노동의 대가가 지불 된다면 자본주의의 축적모델은 붕괴하고 말테니까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비용 상승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거죠. 모든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출산, 육아, 남성을 위한 재생산 노동, 각종 보살핌 노동 등. 만약 이런 것들이 정규직만큼 임금을 보장받는다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모델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서브시스턴스의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개념인데, “삶의 생산” 이라고 불리는 이 서브시스턴스 노동은 모든 지불노동의 선결조건으로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어요. “서브시스턴스 노동이 없으면 모든 지불노동은 존재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불노동이 없어도 서브시스턴스 노동은 여전히 존재한다.” 라고요.  음식, 집 등 살림에 관련된 노동들은 온갖 형태의 “삶”뿐만 아니라 노동 전체를 뒷받침하는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이 일들은 매우 가치 있지만 결코 금전적으로 보상받지 못하죠.


꼭 가사노동만이 비용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자급농들도 이와 비슷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지만 임금노동자는 아닙니다.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들의 노동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국민 총생산(GNP)이나 국내 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뉴질랜드 여성인 마릴린 워링이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If Women Counted)”이란 책에서 쓴 표현처럼 그들은 계산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 어떨까요?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자급농 또한 가사노동과 관련이 있고, 나아가 둘 다 식민지의 노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셋이 모두 제3세계에 체류하면서 가지게 되었죠. 저는 수 년 동안 인도에 있었고, 제 두 친구는 남미에 있었어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로 착취 받지 못했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만약 오늘날 “식민지”(저는 아직도 이들을 식민지라고 부릅니다)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축적될 자본이 없어질 겁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식민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남녀 관계도 식민지적이고, 자급농과 기업의 관계 또한 식민지적입니다. 거대도시와 시골의 관계 역시 식민지적 관계지요. 무엇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서브시스턴스 관점과 서브시스턴스 사회와 경제는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도적인 정책들을 통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브시스턴스 사회는 2차 세계대전 전에 시골과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독일에서는 소농들이 전체 농산물의 대부분을 생산해서 사람들에게 공급했었죠. 또 놀랍게도 도시에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광범위한 서브시스턴스 생산물이 존재했었습니다. 어느 미국 페미니스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주요 산업도시의 동네마다 상당량의 서브시스턴스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해요. 우선 이웃 간의 상호부조가 존재했습니다. 상호부조의 원리, 호혜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어요. 이웃끼리 서로 도와가며 작은 텃밭에서 채소나 과일을 가꾸거나, 시장에서 싸게 사다 집집마다 저장해두었죠. 바느질이나 작은 규모의 수선 등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가난한 노동 계급에게 이런 상호부조가 없었다면 도시에서 살아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위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경제 모델을 이식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바로 포디즘입니다. 첫째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졌고,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을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해졌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또 농가들은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고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농사짓고는 더 이상 못살겠다. 떠나야겠어.” 하며 농촌을 등졌어요. 오늘날까지 똑같은 정책이 이어지고 있죠. 뿐만 아니라 산업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농업 전체를 단일경작, 대량생산, 화학 비료와 농약, 거대 농기계 체제로 바꾸려는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석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우유, 버터, 고기, 계란 등을 대량생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제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기업농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 생산물들은 잘 알려진 대로 제3세계에 덤핑 판매됩니다.


반면 제3세계의 농민들에겐 이러한 기회는 전혀 주어져 있지 않죠. 더구나 똑같은 농업 정책이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에도 이식되어 있습니다. 소농들은 기업농과 경쟁 상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더미를 짊어진 채 땅을 잃거나 팔아버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의 슬럼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슬럼가에서도 그들은 서브시스턴스 생산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죠. 우리가 서브시스턴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기 이 Bielefeld 회의의 초점도 바로 제3세계에서의 서브시스턴스 생산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의 슬럼가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관찰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지만 붙여먹을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해요. 일용직, 절도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거나 하인, 식모 일들도 서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보호해줄 어떠한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죠. 서브시스턴스 생산이 농촌에서는 산업개발 정책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서 요구되었지만, 도시에서는 그 자체가 생존의 정치학이 된 것입니다.


지금 아주 적절하게 제게 질문을 해 주셨는데요, 그렇게 박탈당한 삶이 어떻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공해줄 수 있냐는 것이죠? 좀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존방식과 생활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우리는 방금 전에 얘기했던 그 오래된 원칙들이 그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호부조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니다. 비록 아주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생산하는 주체성과 권리를 회복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보다 새롭고 긍정적인 관점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발견이죠.


물론 현금이 필요합니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오직 돈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돈을 버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지요. 서브시스턴스 생산 또는 서브시스턴스 지향은 돈으로 사는 상품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해결해줍니다. 사실 상품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오직 물질화된 죽은 노동뿐이지요. 그들은 사용되면 버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면서도 영원히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전제품의 기술혁신과 함께 갑니다. 흑백 TV만으로는 부족해서 컬러TV를 장만합니다. 그리고 나면 컴퓨터와 휴대폰이 필요해지지요. 이제는 아이들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어요. 말하자면 끝이 없죠, 그렇다면 지금 행복하고 만족스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에서 좋은 삶(good life)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경제 개념인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활동의 목표로 설정한 바 있었죠. 경제활동의 목표는 좋은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일하고 또 일해도 좋은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좋은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바로 그것이 서브시스턴스의 목표입니다. 서브시스턴스는 우리가 계속해서 세뇌되었듯이 빈곤이나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서브시스턴스가 아니라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된 서브시스턴스라면 생존뿐만 아니라 보다 좋은 삶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좋은 삶이 실현가능해지죠.


우리 스스로가 권리의 주체이고,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들 인정하시겠죠? 이건 8시간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 것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만족감을 줍니다. 마치 65살이 되면 좋은 삶이 올 것 같이 생각들을 하는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지요.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소외된 노동을 보상할 수 없어요. 반면 서브시스턴스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삶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몇몇 사례들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제 친구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들은 농촌에 침투해 들어온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는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토양은 황폐화되고 물은 비소로 오염되었으며 수확량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거죠. 단일경작을 하게 되면 생산량이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것이 녹색 혁명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먼저 여자들이 “나야크리쉬 안달론”이라는 새로운 농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여자들은 녹색혁명과 함께 남자들이 자신들을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예전에 여자들이 종자 관리를 맡아 할 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폭력이었어요. 그 전에는 종자가 여자들 손에서 관리되었고 농부들은 이들로부터 언제 씨를 뿌려야 좋을지 조언을 듣곤 했었어요. 상황을 인식하게 된 여자들은 단결해서 세상을 바꾸기로 했죠. 운동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주도로 전개되어 나갔어요. 운동의 제 1 목표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는 것이었죠. “우리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는 거죠. 실제로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들은 하나같이 오직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얘기해요.


여성들이 내놓은 첫 번째 주장은 절대 다국적 기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을 무독성 마을로 선언하고 어떤 다국적 기업도 독성물질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고 못을 박았죠. 아, 깜빡 잊을 뻔했는데, 많은 여성들이 삶을 비관해서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이 있었죠. 오늘날 똑같은 원리들이 다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다시 새롭게 부활된 이 원리들로 인해, 산업국가의 자본 투입에 의존하지 않는 풍요롭고 생산적인 농업이 가능해진 것이죠.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재발견해냈습니다. 가령 다양성을 들 수 있죠. 그들은 단일경작을 지양하고 직접 만든 퇴비를 썼습니다. 또 서로 도우며, 더 이상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구입하지 않았어요. 거의 대부분의 마을에 씨앗 창고가 있는데 이것도 여성들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고, 여성들이 씨앗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다시 주권을 되찾게 되었어요. 이들은 전 세계 소농 연대 기구인 비아캄파시나가 주장하는 ‘영양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서브시스턴스는 이 영양주권과 함께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런 운동이 방글라데시에서 아주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일례에 불과하지요.


여기 독일에서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서브시스턴스 관점의 예가 많이 있죠. 좀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니더카우훙겐”이나 “롱고 마이”와 같은 공동체를 들 수 있는데, 이들 공동체는 벌써 오래전부터 서브시스턴스 라이프스타일을 견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가장 제 흥미를 끄는 것 중의 하나가 국제 공동 텃밭운동입니다. 이 텃밭들은 괴팅겐의 난민 여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여성들로부터 괴팅겐에 텃밭을 만들게 된 계기를 들어보았는데요.  난민의 생활이 너무 불행하고 늘 자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에 신물이 나 있던 중, 한 사회사업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대요.  그들은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곧 이들은 한 복음교회로부터 조그만 땅을 얻어서 함께 경작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땅을 분할해서 각자에게 배당하는 대신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 여성과 남성들이(남성들은 나중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요) 함께 경작하는 공동 텃밭으로 운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는 동안 독일 여러 도시에서 벌써 7개의 국제 공동 텃밭이 생기게 되었어요. 퀠른에도 몇 개가 생겼죠.


오늘날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을이나 도시 어딘가에 작은 서브시스턴스 섬을 세우고 거기에 만족할 수는 없어요.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라면 우리도 전지국적인 시각을 견지해야만 하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에 개인의 이익과 효용을 두는 것)를 극복하고 그 대신 새로운 원리들, 가령, 상호부조, 호혜, 공동체의 연대감, 협동, 공유 등의 원리가 들어선다면 문제는 달라질 겁니다. 또 오늘날처럼 소비와 생산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거예요.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의 삶이 비록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 모델을 벗어던지는 것은 정말 힘들지요. 


또 한가지, 만약 우리가 서브시스턴스를 지향한다면 다른 종류의 기술이 필요해질 겁니다. 현재의 기술은 늘 소모적이고 쉽게 낡아버립니다. 기술 개발에 드는 스트레스 비용 또한 만만치 않죠. 또 현대기술은 결코 체제 중립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편향되어 있어요. 물론 가부장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는 기술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손쉽게 일을 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공업사회와 획일화된 산업문화가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농업뿐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의 획일적인 문화에 두루 팽배해 있어요. 즉, 이런 종류의 일이 가장 생산적다, 저런 방식의 일이 가장 생산적이다,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완전 비생산적이다 등등의 신화 말입니다. 그래서 서브시스턴스 생산은 국민 총 생산 속에도 포함되지 않죠. 오직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잘 알려진 생산성 개념에도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너무 편협하기 때문에 노동과 서브시스턴스의 생산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동물, 식물, 인간 등 다양한 생물 간의 공생, 한 장소에서 서로 도우며 좋은 삶을 일구어가는 것. 이러한 삶은 아무리 많은 상품문화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다고 한다고 해도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문번역 - 리사 로젠블랫

한글번역 - 매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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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직

  • 등록일
    2005/10/22 09:51
  • 수정일
    2005/10/22 09:51

오후에 팀장에서 1년은 쉬어야 겠다고 얘기를 했다.

팀장은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고 다정하기조차 했다.

지난 4월부터 고민해왔고 최근 몇주동안은 이걸 언제 얘기하나 마나를 놓고

내 마음이 옥신각신 하다가, 그만두면 나중에 뭘 먹고 사나라고도 생각하다가

또 에잇, 내 물이 아닌 바에는 일찍 떠나는 게 낫지, 하며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끝에 1년 휴직을 제안해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떠나자! 하고 마음먹게 된 거다.

 

점심때까지만 해도 팀장에게 얘길 해, 말아? 하면서 계속 갈등했다.

아랫배가 부글거리면서 시험보기 10분전의 긴장감이 계속 되었다.

과민성대장증후군...

지금 팀장이 자리에 있으니 말을 하자 하고 마음을 먹을라치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니,

내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내가 그렇게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었나?

팀장과 회사의 권위에 내가 이제껏 이렇게 기가 죽어 있었던건가?

긴장하는 내 모습이 한편으로 굉장히 우습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다잡고자 그만두는 이유를 리스트로 정리해보았다.

어쩔때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대담하고 당당해지다가도

또 다른때는 결정을 하지 못해 어쩔줄모르는 소심함.

 

팀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부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기 위해

음식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하루종일 계속된 스트레스의 여파인지

마음이 단단하게 경직되어 있었고,

마음이 경직되니 혀도 경직되어버려서

맥주를 한잔 마시고도 말이 시원하게 풀리지가 않았다.

30줄을 넘어서면서 긴장과 강박의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하면 말을 더듬거나

이름이나 단어가 쉽게 입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어쨌든 이야기는 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회사일을 정리하고

1년을 알뜰하게 계획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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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대안무역 동영상

  • 등록일
    2005/10/06 15:00
  • 수정일
    2005/10/06 15:00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작은 대안무역!



♪ 만든이: 마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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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와 함께 ‘작은대안무역’을!

  • 등록일
    2005/09/08 11:55
  • 수정일
    2005/09/08 11:55

[일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작은대안무역’을!

추방된 이주활동가가 보내온 메시지

- 매닉 기자

 

 올해 2월경 방글라데시로 추방된 이주노동자 활동가 자히드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빚쟁이들이 수시로 집을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며 협박과 갖은 욕설을 퍼붓고 간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후로 집에 돈을 보낼 수 없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빚을 내어 생활을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결코 돈을 달라는 말이 아니다. 한국에 다시 가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말하는 문장 속에서 그의 유난스러웠던 자존심과 고집의 흔적이 묻어 나왔다.

2003년 겨울부터 2004년 겨울까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선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노동허가제 쟁취”, “노동3권 보장”을 외치는 이주노동자들의 천막농성투쟁이 있었다. 농성 도중 많은 활동가들이 출입국에 잡혀 추방되었는데, 이중에는 출입국의 표적 연행에 잡혀 여수보호소에서 30일 넘는 단식을 한 후 강제 추방당한 농성단 대표 샤말 타파 외에도, 비두, 굽타, 깨비, 헉, 자히드가 포함돼 있었다. 자히드는 거의 농성 막바지에 붙잡혀가 강제추방을 당해 함께 하는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자히드 편지 속에는 추방된 이주노동자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 있었다. 돈 문제도 문제거니와 많게는 10년 이상의 세월을 한국에서 생활한 이들에게 고국은 또 다른 ‘외국’이고 낯선 땅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주노동자 운동의 성격상 한 번 추방되고 나면 그 전의 활동과는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에, 함께 투쟁해온 동료 활동가들로부터 서서히 잊혀지고 마는 망각의 고통을 함께 앓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주 활동가에게 추방의 무게란 사회적 “죽음”과 맞먹지 않을까 싶다.

법무부와 출입국도 이주활동가의 체류자격을 약점으로 삼아 이주운동 탄압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게다가 국내의 이주노동자 노조와 운동단체들도 당면한 국내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추방된 이주활동가의 생존과 생계 문제까지는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운동과 대안무역운동의 만남

자히드의 편지를 읽고 나를 비롯한 ‘이주노동자 합법화를 위한 모임’의 친구들 몇몇이 후원금 모금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금은 원래 목표로 했던 금액에 훨씬 못 미쳤고 나중엔 각자 주위에 아는 이들을 “포섭”해서 후원을 요청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모든 이주활동가들이 어려운데 누구는 돕고 누구는 돕지 않느냐,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또 일방적인 후원보다는 쌍방의 상호부조에 입각한 교류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작은 대안무역’이다. 추방된 이주활동가의 가족이 만들어 보내준 물건들을 각종 집회와 행사 때 판매해서 그 판매 금액의 50~70%를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돌려주고, 나머지는 국내 이주활동가들을 위한 지원금 등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를 통해 추방된 이주활동가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추방되기 전에 함께 했던 활동가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되어 단절되었던 활동에 연속성을 부여해준다는 것이 우리가 그린 ‘작은대안무역’의 밑그림이다.

‘대안무역’은 영어의 ‘공정무역’(Fair Trade)에서 유래한 말로, 1세계 중심 다국적 기업이 3세계의 노동력, 자원, 생산품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불공정 무역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됐다. 또 제3세계를 극심한 빈곤과 착취로 몰아가는 자본의 세계화 흐름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 신뢰와 연대로써 돌파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대안무역 운동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으며, 한국에선 ‘아름다운 가게’가 몇 년 전부터 이 운동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작은대안무역’은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파생돼 나왔기 때문에 대안무역의 관점보다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보다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불공정 무역과 제3세계의 빈곤, 이주노동은 ‘자본의 세계화’라는 흐름에서 얽혀있으므로, 이주노동자 운동과 대안무역운동이 함께 갈 수 있는 여지는 크다.

옷에 수 놓인 여성들의 이름

자히드와의 인연으로 작은대안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올 5월 노동절 집회에서였다. 자히드의 여동생과 누나들이 염색하고 수놓은 옷들을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판매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판매가 제법 잘 됐다. 그 이후에도 각종 이주노동자 집회와 대학 축제, 여성 행사 등에서 판매했다. 추방된 이주노동자과 함께 하는 대안무역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여 물건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보내온 옷들이 예뻐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6월에 있었던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Migrants' Arirang” 행사에서는 허락 받지 않고 판매부스를 차렸다가 행사장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시청 앞 광장 행사장에서 쫓겨난 우리들은 인도로 나와 6월의 뙤약볕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판매를 계속했다. 판매부스에 들러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에 다행히 상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또 큰 행사가 별로 많지 않았던 8월 중에는 홍대 앞 길거리에서 노점을 차렸다가 근처 음식점 주인이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테이블과 옷가지들을 들고 뛰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추방당한 후에 상실과 좌절에 빠져있던 자히드와 그의 가족들이 작은대안무역 이후 생활에 활기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여동생과 누나들이 옷을 염색하고 그 위에 수를 놓고, 그 옆에는 자히드가 옷을 손질하고 다리는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보내준 옷 하나 하나에는 디자인을 한 여성의 이름과 디자인 명이 정성스레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히드의 여동생과 누나들이 이 일을 계기로 가족 내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여자들이 바깥일을 할 수 없고 철저히 집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평소 방글라데시 친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히드가 이주노동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온 이유도 그가 가족 중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작은대안무역과 함께 하는 사람들

우리는 자히드의 물건뿐만 아니라 이주여성 활동가인 라디카가 만든 목걸이, 귀걸이, 팔지 등도 함께 판매했다. 라디카는 명동농성 기간에 있었던 단식 투쟁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앓던 지병이 악화되어 농성이 끝난 후에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공장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7월에는 네팔에 있는 샤말로부터 함께 하고 싶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샤말은 명동성당 농성단의 대표였지만, 올 3월 정부가 농성단을 와해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를 강제 추방했다. 추방된 뒤 지금은 네팔 노조의 이주노동자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주지부의 활동자금이 없어 작은대안무역을 통해 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지만 그의 개인적인 경제사정도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닌 듯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추방되거나 자진 출국하여 네팔에 돌아온 사람들은 1, 2년 고국에 머무르다 다른 나라로 이주노동을 떠나게 되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고국에 와도 먹고 살 일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 고국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샤말도 다른 나라로의 이주노동을 생각해봤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고 한다. 다시 이주노동자로 차별 받고 탄압 받는 것보다 고국인 네팔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동료, 친구들에게 스스로 증명해 보여주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자히드, 라디카, 샤말 외에도 작은대안무역이 함께 해야 할 이주노동자들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작은대안무역이 제안하는 것은 정부나 기업, 큰 단체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크게 벌여 가능한 많은 이주노동자를 한 번에 도와주자는 야심찬 프로젝트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주어진 능력 안에서 투쟁을 통해 맺어진 이주활동가들과의 끈끈한 개인적 친분을 기반으로 ‘가늘고’ 소박하게 가자는 것이 우리의 운동 방식이다.

우리의 운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명되어 여기 저기에서 서로 다른 작은 대안무역 모임이 생겨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커다란 운동의 대의명분보다는 이주노동자 개인의 삶에 더 밀착된 풀뿌리 모임들이 모여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작은대안무역(stopcrackdown.net)에 참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이주노동자 집회나 반전집회, 각종 여성행사, 소수자 행사에 차려지는 작은대안무역 부스에 한번쯤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둘째, 수중에 돈이 있고 물건이 마음에 들면 주저 없이 산다. 셋째, 좋은 물건은 주위 사람에게도 권한다. 넷째, 작은대안무역의 활동가가 되어 판매에 직접 참여한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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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체포된 일본 반전활동가들을 위한 성명서

  • 등록일
    2005/08/19 10:37
  • 수정일
    2005/08/19 10:37

일본 활동가로부터 긴급 메일을 받았습니다.

다음은 http://antifa815.podzone.org/en/ 의 내용을 번역한 성명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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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시위에서 '불법' 체포된

4명의 일본 반전 활동가들을 지지하는 성명서

 

2005년 8월 15일 군국주의와 외국인차별을 기치로 내건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6천명의 군중을 동원한 대규모 행사를 진행했다. 이들 우익들 중에는 신조 아베, 신타로 이시하라 등 일본의 핵무기 무장을 지지하는 각료와 의원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종전 60년을 맞이하여 전쟁으로 죽어간 군인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이들의 행동은 과거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미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최근의 이라크전 참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로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부정하고 이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망각의 심연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이날, 12시 사이렌이 울리고 군국주의자들이 묵념을 하는 동안 행사장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길에서 전쟁 반대 구호를 외치던 친구들이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전쟁과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군인들을 추모하는 행위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어 약 50명의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로 행진하려고 하자 중무장한 전경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이들을 에워싸고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경찰은 심지어 지나가던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결국 4명의 친구들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들의 체포 사유는 “공무집행방해”였다. 도대체 경찰의 그 신성한 “공무”가 무엇이었는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해산시키는 것이 진정 경찰의 “공무”인지 묻고 싶다.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사소한 이유를 붙여 진압하거나, “급진파”니 “극렬분자”니 하며 체포해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우리 반전 활동가들은 항시 체포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우리에게 정치적 행동의 권리와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권리와 자유는 무시되고 소위 ‘법집행’이라는 이름의 탄압은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더욱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은 공공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것인 양 왜곡되고 있다. 진정 평화와 질서에 위협이 되는 것은 그들의 ‘법집행’ 행위가 아니던가! 다시 무시무시한 전쟁 시대의 사회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같아 위기감을 감출 수가 없다.

 

우리는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한다. 또, 전쟁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경찰국가 체제를 반대한다. 심판받아야 될 대상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시민들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세력들이다. 여러분들께 묻고 싶다. 단순히 전쟁반대 의사를 표명한 시민이 “극렬분자”인가, 아니면 폭력적으로 이들의 행동을 제지한 당국이 “극렬분자”인가?

 

여러분의 지속적인 지지와 지원에 감사드리며,
체포된 반전 동지들을 위한 지지 모임
ANTIFA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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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사리날 배 위에서

  • 등록일
    2005/08/11 09:34
  • 수정일
    2005/08/11 09:34

풀꽃세상의 오디님이 올려주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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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을 건들 뿐이지 이길 수 없고

 

자연은 소리없이 우리를 오늘 죽이지 않고

자손만대까지 다 죽인다고 소리없이 비웃겠지.

 

오늘 나 먹자고 인류를 담보하다니?

땅 욕심 나거든 미국땅 애리조나 사막하고 바꿔볼까?

 

흙먼지 등지고 권총차고 말타고 다니면 전북도민 폼 나겠네.

민초만도 못한 원님들은 예나 지금이나 득실대니

 

삼대걸쳐 뱃놈하며 큰배 하나 장만했다고 제삿날 풍선달고 노저어서

고기잡은 조상님께 정종 따라 올렸는데

그네들 아파트는 먼 산이 안 뵌다고 조망권 이라고

법만들고 앞 공사장에 그늘만 져도 일조권이라고 재판하면서

 

심포항 낙조의 황홀함도 그만두고

하루에 네번씩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여 온갖고기 다 몰아오고 온갖 철새 떼지어 날아드는데

 

바다만 쳐다봐도 세상이 행복한데

보릿고개 시라구 죽을 먹고도

 

이 좋은 내 고장에 무시당하고 짓밟혀도 내 고향이 좋아서

다가는 서울도 안가고 이 강에서 인생의 닻을 놓았건만

막는디야!

안되겠네. 그물값, 기름값, 기계값, 외상값도 갚아야 허고 아들놈 등록금이 내일 인데

 

누구도 안주는 돈, 내일은 금복골에서 대생합이나 잡어야지...

- 백중사리날 배위에서



(지난 2004년 10월 25일 새만금 피해어민 상경집회 때 한 어민의 발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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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쉰 김치를 버리지 않고 맛있는 밑반찬으로 만드는 방법

  • 등록일
    2005/08/10 13:05
  • 수정일
    2005/08/10 13:05

엄마가 바리바리 싸 준시는 김치.

쉬어서 쓴 내가 날 지경까지 냉장고에 처밖아 두었다가

결국엔 한 두 포기씩 버리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너무 아까워서 아예 엄마에게서 김치를 받지 않은 경우도 있다.

요며칠전 푹 쉰 김치로 밑반찬 만드는 노하우를 언니로부터 전수받았다.

밥맛을 돋구는 것이 아주 일품이다.

 

 

1. 푹 쉰 김치를 물에 잘 씻는다.

2. 약 30분 가량 물에 푹 담구어 놓고 소금기를 뺀다.

3. 씻은 김치를 잘 썰어서 냄비에 넣고 김치가 푹 잠기게 물을 붓는다.

4. 멸치 또는 다시마를 넣고 된장을 반 숟가락 정도 넣는다.

5. 처음엔 중간불로 끓이다가 끓면 약하게 줄이고 한 시간 정도 푹 끓인다.

 

냉장고에 넣고

밥먹을때마다 밑반찬으로 꺼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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