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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

  • 등록일
    2005/04/18 13:02
  • 수정일
    2005/04/18 13:02

구걸하는 것 같은 기분.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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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세상 만세

  • 등록일
    2005/04/18 09:24
  • 수정일
    2005/04/18 09:24

생태주의자들의 선언! 이 갖는 의미

  • 등록일
    2005/04/09 11:27
  • 수정일
    2005/04/09 11:27

예전에 다운받아놓은

Andre Gorz의

에콜로지스트 선언을 읽었다.

자율평론에서 윤인환씨가 번역했는데,

에이포로 24쪽 남짓 되는 글이 전문인지

아니면 발췌인지 잘 모르겠다.

김원식 할아버지가 가지고있는 일본어로된 에콜로지스트 선언은 꽤 두꺼운 책이라고 한다.

80년대 말에 한길사에서 조홍섭씨가 번역한, 지금은 절판된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에도 에콜로지스트 선언이 한 장으로 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아마도 선언 자체는 24페이지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불어를 모르는 까닭에 영어웹사이트에서 영어로된 걸 찾다가 포기했다.

앙드레 고르의 다른 저작은 있는데, 에콜로지스트 선언이라는 제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다른 제목의 저작 속에 뭍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책들도 그 제목만 봐서 내 흥미를 끄는 것들도 몇개 있었다.

[Reclaiming Work: Beyond the Wage-Based Society],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 등이 그렇다)

 

에콜로지스트 선언이라는 제목에서도 풍겨지는 것처럼

Gorz는 아마도 "공산당 선언"을  생태주의적으로 패러디하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생산성 향상을 통해 자본은 그 과잉축적의 위기를 맞아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사적 유물론을 환기시키면서,

과잉축적의 위기가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석유위기 등 점점 희소화되어 가는

자원, 재화의 문제(절대적 희소성, 재생될 수 없음)로 인해 

더욱더 돌이킬 수 없이 된다는 생태주의적 시각을 접목시킨다.

 

아니, 맑스의 유물론을 생태주의적으로 사이좋게 접목시킨다기 보다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다시 쓰는 것을 시도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대부분의 좌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평등"관에 대해 그가  아래에 비판하는 대목만 읽어도 명확해진다.

 

유럽의 사회주의가 어떻게 사민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더욱더 글의 맥락이 머리에 들어 올 것이다.

 

한국에서 정규직과 연대한 비정규직 투쟁의 한계,

"우리는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원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라는

슬로건이 가진 한계를 생각해보면 읽어봐도 재밌을 것이다.

 

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부정하는 아나키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글은 그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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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등과 차등

물질적 평등이 더 이상 계급적 분화를 표현하지 않을 때 그것은 이미 인간의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특권과 권력을 수반하지 않을 때, 물질적 부는 다른 사람에게 모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을 빈곤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물질적 빈곤도 그것이 사회의 하층계급으로 내쫓기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굴욕적이지 않다. 서구의 󰡐좌파󰡑가 이러한 진리에 대해 품는 저항감은, 그들의 문화적 세계와 그들이 입각해 있는 가치가 얼마나 상품관계에 의해 획일화되고 말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 불평등은 󰡐차등󰡑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인간이 󰡐보다 많이󰡑 갖는가, 혹은 󰡐보다 적게󰡑 갖는가에 따라서 계급적으로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가치와 생활양식과 개인적 목표의 획일화만으로 상품관계와 임금노동을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버린 것이다. 평등 혹은 󰡐사회정의󰡑의 이름 아래 참다운 경쟁과 선망과 권리 요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오직 동질적인 사회적 우주에서 뿐이다. 그곳에서는 차등이 순수하게 양적 차원의 것으로 되고 따라서 측정이 가능할 것이다. 󰡐보다 많이󰡑 혹은 󰡐보다 적게󰡑라는 범주는 주로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서 불평등이 다만 경제적 차등으로서 간주되는 사회/문화적 우주를 전제로 한다.

원리적 평등이라는 허구가 자본주의의 문화적 기초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모든 차등은 화폐로 보충할 수가 있으며 또한 모든 차등을 수입의 불평등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부르주아 지배의 확립기에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에 대해 행해진 광폭한 억압은 이것으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문화적 소수자와 문화적 편향은 그들의 가치의 특수성과 차등성을 고집함으로써, 상품의 지배에 필요한 사회/문화체제의 단일 차원성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또한 보통교육을 위한 학교제도의 탄생은 이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학교가 획일성 바로 그 자체에 의해 가장 혜택받는 자를 한층 우대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나아가 국가에 의해서 특수한 직업윤리(혹은 󰡐의무론󰡑)의 파괴가 수행된 것도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직업을 영위하는 구성원이라면 그들의 기량을 팔거나 빌려주는 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그러한 직업윤리를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에 고유한 의미와 내용은 억압되었으며, 화폐에 의한 󰡐보상󰡑 즉 상품적 소비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 보상의 총계가 사회활동, 즉 노동의 결정적인 목적으로 된다. 노동은 그 고유한 내용을 남김없이 빼앗겨버린 채 임의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연속으로 측정되고 근로자로부터 사들인 부역으로 환원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의 활동은 일체의 자율적인 합목적성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주요한 목적으로서 돈과 상품의 구매력을 할당받는 것은 이러한 노동의 소외상태를 보여준다.

이상의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정되는 경향을 보이는 평등화를 항상 추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부류의 임금노동자도 바로 위의 부류의 소득수준에 도달하고자 애쓴다. 하지만 어느 소득수준을 넘으면 소득의 증가는 그 자체로서도 또한 그 결과 얻어질 여분의 소비를 위해서조차도 불필요한 것이 된다. 소득의 증가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사회적 가치를 내게도 용인해 주면 좋겠다는 욕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노동에 대하여 불평등한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에 기초를 둔 이 사회에서 평등에 대한 요구는 소비에의 요구라든지, 사회적 불만, 또는 사회적 경쟁 등에 대해 끊임없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감추어진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소득수준의 안정화가 달성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로 한정될 것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필요한 모든 노동이 평등한 사회적 승인(및 보수)을 향유할 때, 둘째,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무한히 다양한 자유활동 덕분에 개인적인 능력과 욕망과 취미의 무한한 다양성을 실현할 가능성이 만인에게 주어질 수 있을 때이다.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는 시간의 단축과 자유로운 시간을 생산적 활동에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품관계와 경쟁관계의 쇠퇴를 위한 조건이다. 소비수준과 생활양식에서의 차등이 이미 보수의 다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자유시간에 추구하는 여러 가지 활동의 결과가 될 때 그러한 차등은 더 이상 불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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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일본의 생협운동

  • 등록일
    2005/03/26 09:44
  • 수정일
    2005/03/26 09:44

진보넷 참세상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2013&page=1&category2=30

생협운동의 역사와 현황  

[이영채의 일본의 사회운동1]대안사회 구성원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의 일면이 반영  

이영채  


들어가며


2001년 9월29일, [사회운동으로서의 생협운동론]의 공개토론회에서 일본의 대표적인 생협운동인 세이카츠크라브의 창시자인 이와네씨는 [개인의 자립자치를 생각하면, 다음단계의 운동은 [협동조합]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생협운동의 중심국가중 하나인 일본에서 생협운동의 창시자가 생협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지역주민운동의 존재방식을 지적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짧은 역사속에서도 발전과 확대를 거듭해온 일본의 생협운동 속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생협은 대안적인 시민민주주의인가 부르조아민주주의의 모방에 불과한 것인가? 일본생협운동의 변화는 글로벌시대 지역시민의 존재방식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일본의 생협운동의 현재


일본 시민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구석구석마다 살아있는 지역사회와 지역운동]이다. 00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세제를 쓰지않기 운동, 유기농업, 생협조합원의 정치참여 등 일본의 시민운동은 코뮤니티 내에서의 치밀하고 세밀한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있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식민지, 독립, 내전, 군사독재, 개발지상주의의 경험속에서 지역사회가 급격히 해체되고 황폐화 되어가는 것을 생각할 때 일본의 [주민참여에 의한 공동체만들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것이 60년대 후반부터 대중적으로 성장해 온 새로운 시민참여형태의 생협운동이다.


일본에는 2002년을 기준으로 약652개의 생협이 있으며, 조합원수는 2200만 명정도이다.(일본의 인구1억2700만 명). 이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노동조합이었던 총평의 450만명, 그리고 현재의 노동조합연합인 렝고의 800만 명보다도 훨씬 대규모조직을 이루고있다. 전국의 생협의 사업액은 90년도에 2조7천억 엔에 달하였고, 80년도부터 10년간에 2,5배이상의 성장도를 거듭해왔다. 물론, 일본생협의 이러한 빠른 성장배경에는 일본사회의 고속경제성장, 대량소비사회, 기업형국가 형성의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경제성장의 그늘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부패, 빈부격차, 군비의 확산, 공해 및 환경문제가 속속 등장하면서 국민생활의 불안정 및 삶의 피폐화가 눈에 뜨게 확산되었기때문이다.


하지만, 산업근대화의 부작용과 그에 대한 대안책으로서 생협운동이 시작된 것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다. 일본보다 앞서 근대화를 경험한 서구 유럽사회에서 생협운동은 훨씬 빨리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생협운동이 서구유럽의 생협운동과 차이가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전후 일본의 3가지 생협운동의 전개과정


일본은 45년의 패전직후, 점령군GHQ의 간접통치속에서 쌀 및 생필품부족, 실업난 등으로 경제파닉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어떻게해서든지 식량만이라도 확보하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생협을 탄생시킨 원동력이었다. 말하자면 생협은 식량확보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역과 직장의 동료들이 함께모여, 돈이 없으면 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옷가지들을 모아서, 대표자가 그것을 가방에 넣어 농촌으로 가서 쌀과 바꾸어와서 나누어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입에 풀칠을 해야만 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생협이 탄생하였고, 동일유형의 조직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47년 조합수 6503개, 조합원 297만명). 이시기에 형성된 생협들이 제1단계의 소위 [생활방위형 생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대한 전국의 생협조직들은 48년을 계기로 급속히 축소되었으며, 50년에는 조합수1130개, 조합원221만명까지 줄어들었다. 이는 미점령군의 민주화조치의 중지-독점금지법의 완화,기업의 합리화, 공무원 인원감축 등-, 한국전쟁 과 좌익탄압의 영향 등으로 노동자 및 국민의 권리가 눈에 띄게 축소되고, 도산 및 실업이 증가하여 노동자들의 민주적 요구와 공동체 생활이 급격히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여기에 맞서 [지역노동자 생협]건설로 대응하였으며, 1951년에 일본공산당 소속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일본생협련]을 창설하였다. 창립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평화와 보다 좋은 생활이야말로 생활협동조합의 이상이며, 이 이상의 관철이야말로 현단계에 부여된 최대의 사명이다. ...우리들은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서, 일본의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올바르게 계승한다.]


이 운동은 노동자 생협의 연대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의 평화를 지켜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시기가 제 2단계의 생협운동이다. 하지만 생협련은 일본공산당이 주도한 운동의 특성상, 조합원의 자발성보다는 위로부터의 결정에 좌우되는 수동성의 한계가 있었다. 또한,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조직운영은 비조합원들의 지역노동자생협운동방식에 대한 불만을 불러왔으며, 이후 생협운동의 분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노동자생협운동의 한계는 이후 지역시민이 주도하는 제 3단계의 시민주도형 생협의 시대를 열었다.


4대 공해문제와 생활자로서의 생협운동의 발전


유럽의 소비자협동조합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 기업과의 경쟁을 위해 규모화에 치중하다가 협동조합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거나 사라져갔다. 이는 소비자협동조합이 기본적으로 경제적 약자의 결사체라는 인식이 깊게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은 60년대 중반 [소비자]협동조합이라는 이름대신 [생활자] 협동조합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생협운동의 가치체계를 창출하였고, 서국 국가와는 반대로 생협운동의 전성기를 불러왔다. 일본에서 이 시기 시민이라는 용어대신 [생활자]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당시 일본 시민사회의 생활형태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고속경제성장의 모순들은 6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50년대중반, 유아의 분유에 대량의 비소가 발견된 모리나가 비소중독사건을 시작으로, 4대 공해문제로 불리는 구마모토 미나마타병(1969년), 니이가타 미나마타병(1967년), 이타이이타이병(1968년), 요카이치천식(1967년)의 공해문제는 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미나마타병(메틸수은에 의한 인체오염)으로 공인된 환자만 현재 1만2천명이 넘으며, 피해자는 10만명이 넘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지역주민과 시민의 생활자체가 기업형 국가속에서 가장 큰 피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반공해투쟁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조차도 공해 기업의 성장과 분배논리만을 강조한 채 이러한 문제들을 외면했던 것은 사회운동의 역학관계를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변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버렸다.


한편 동시기에 대학에서는 권위주의 교육행정에 대한 반감으로 [개인학생의 반란]이라고도 불리는 전공투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그리고, 50년대 중반, 일본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에 대한 반감과 60년대 안보투쟁의 실패로 침체기에 빠져있던 신좌파출신들에게 이러한 반공해운동과 지역주민운동은 새로운 운동의 활로가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도 일부 신좌파들이 지역운동을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무장투쟁을 하는 [혁명거점]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우치게바(내부살인), 아사마산장의 인질사건 등으로 이러한 극좌계열의 계급적 지역운동이 실패한 후, 신좌파는 70년대 중반부터 생협운동을 지역주민의 참여에 의한 생활공동체로서의 거점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생협운동의 대중화의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60년,70년 두번의 안보투쟁의 실패와 계급적 거점운동의 실패가, 정치조직중심의 운동과 대중과 유리된 정치투쟁이었다는 인식하에 이들이 지역주민의 삶의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에 도쿄의 세타야구의 한 청년이 [종래의 정당이나 노동운동에 좌우되지않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운동을 만들고싶다]는 취지로 주부를 중심으로 우유의 공동구입을 제안하였다. 이후 이 운동은 68년에 세이카츠크라브 생협이라는 단체로 출발하였으며, 현재 이 단체는 일본최대의 생협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유라는 일상생활물건을 공동구매하여 자발적으로 분배하는것으로 시민 생활의 안전과 사회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한 것이다. 일본의 생협운동은 유럽의 경제적 결사체라는 토대위에 마침내 대중적인 주민조직운동을 결합시켰다. 대표적인 양식이 15인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진 반조직과 다양한 소모임들 그리고 지역위원회 등이다.


반조직은 공동구매의 기초단위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의식을 고양하는 기초적인 운동조직이었다. 이러한 양식의 조직을 만들게 된 배경이 두번의 안보투쟁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적 교훈이 반영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생협은 기존의 운동에 비해 더디고 느린 길을 선택하였지만, 이후 단순히 경제적 약자들의 공동구매조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소비자이면서도 생활자로서의 지역운동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 대중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시민주도형 생협운동조직과 운동의 형태


현재 시민주도형 생협조직으로는 대표적으로 3곳이있다. 이는 세이카츠(생활)크라브, 수도권Coop, 그린Coop이다. 일본의 생협법에 생협조직은 최소 현(도)단위로 설립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이들 3조직은 설립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지역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역내에 대표적인 지역생협을 가지고 있다. 세이카츠크라브는 세이카츠크라브 카나카와, 수도권Coop는 키타타마 생협, 그린Coop는 큐슈 생협이 대표적인 지역생협이다. 생협은 생산지가 없는 소비자 중심지역에서 발달하였지만, 지역운동과도 연관이 있다. 예를들어 수도권Coop의 도쿄의 북쪽에 있는 키타타마지역은 신좌파출신들이 중심이되어 지역운동을 시작했던 곳이기도하다.


생협은 공동구매에서 시작하여 지역의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갖었다. 그린Coop를 중심으로 큐슈에서는 골프장 반대운동이 대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지역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생협 조합원중에서 후보를 세워 지방자치단체의 선거에도 참여하고 있다. 세이카츠크라브의 대표지역인 세이카츠크라브 카나가와는 카나가와 시민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조합원을 조직적으로 지방자치단체에 참여시키고 있다. 임기는 2년으로 2번까지 출마할 수 있으며, 2004년현재 카나카와 네트는 카나카와현 내의 17개의 시/촌에서 34인의 여성의원을 배출하고 있다.


이처럼 생협조직은 경제공동체로 시작하였지만, 지역문제, 환경문제, 생활자의 직접참여라는 3가지 과제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생협운동의 시작은 고속경제성장의 부작용과 공동체 파괴에 대한 지역주민사회의 저항, 생활자로서의 시민의 인식, 풀뿌리 민주주의에 의한 대중적 지역운동이 기본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생협운동의 참가자 대부분이 주부와 여성이라는 점과 이들의 자원봉사를 통해 생협조직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대부분의 가정의 소비형태를 결정하는 주부가 생협운동을 통해서 생활의 주체가 되고 사회의 최전선에서 사회문제에도 직접 참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자원봉사자들에 의한 주문과 분배구조는 자본주의의 고비용 유통구조의 문제를 극복하며 조합원 전체에게 효율적인 가격에 안전한 생활 필수품을 제공하게 된것이다.


생협운동의 직면한 과제: 이상과 현실의 괴리


하지만, 일본의 생협운동속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현상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생협은 결코 편리함이나 저가격, 이윤획득을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으며,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신뢰형성을 통해 지역공동체의 보존을 지향해 왔다. 하지만, 일본의 버블경제의 붕괴와 장기간의 불황은 식품의 안전과 공동체의식보다는 저가에 의한 편리함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다. 불황속에서 24시간 편의점과 대형슈퍼,백화점의 계속되는 바겐세일은 생협의 조합원들의 이탈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공동구매와 자발적인 분배구조도 개인맨션과 아파트 생활속에서 개인구매와 자택앞까지의 직접 배달의 시대를 갖어왔다. 특정점포를 갖지않고, 자택배달을 하지않는 것을 원칙으로 지향해왔던 시민주도형 생협들도 이러한 원칙을 깨지않을 수 없게되었으며, 생협은 오히려 다른 대형슈퍼보다도 편리하다는 대상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원래 생협이 자택배달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장애자생활운동의 일환이었지만, 새로운 경영법으로 전환되어 새로운 이윤추구의 유통 방법이 되어 버린것이다. 또한 조합원의 감소를 메꾸기위하여 지역중심의 생협들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상품의 단일화와 전국배달을 가져왔다. 여성과 주부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유통비용을 감소시켰던 비생산노동의 사회적 참여부분도, 일부 생협운영자의 골프파동 등 생협의 비리에 대한 의구심 속에서 비생산 노동의 착취라는 비판도 듣게 되었다. 게다가, 식품의 지나친 안전의 추구는 현지 생산자의 자연재해에 의한 농산물 불황의 문제를 이해하기보다는 안전한 농산물을 가지고 있는 다른 생산자를 찾음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상호불신의 문제도 가져왔다. 사회의 총체적인 이익을 추구해왔던 생협의 구성원들이 개인의 이익만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윤보다는 공동의 가치를, 위로부터의 지도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참여를, 저가보다는 생활과 음식의 안전을 추구해왔던 생협운동이 이상과 현실속에서 새로운 과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지역운동의 대안을 찾아서


일본의 지역운동으로서의 생협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회운동의 역사적 경험, 개개인의 양심과 헌신, 사회곳곳의 구석구석까지 존재하는 작은 생활그룹들의 네크워크가 이 생협운동을 뒷받치고있다. 불량식품을 만든 회사의 제품이 2-3일내로 전부수거되어 해당회사가 문을 닫아야하는 것도 생협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불매운동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불만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사회적 통제와 구체적인 실효성을 획득하고있는 것이 일본의 시민운동의 특성이다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일본의 생협운동에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이념이 국제시민연대이다. 세이카츠크라부 카나카와는 1980년 조합원을 중심으로 합성세제 추방운동을 벌인후 카나카와네트와크 운동을 통해 지역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 단체가 98년 시민연구의 일환으로 영국의 옥스팜을 방문한 후 일본판 옥스팜운동인 [WE21(Women`s Empowerment 21 Japan]을 설립하여 [공정한 지구사회]건설을 내세우며 구체적인 국제시민연대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WE21는 각지역에 리사이클 전용의 WE21전문숍(현재 카나카와현내에 약50곳)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에서의 수입을 아시아중심의 국제협력 NGO단체에 기부한다. 또한 페어 트레이드를 실시하며 개발도상국의 상품을 현지가격에 맞도록 생협조하원에게 제공하며 또한, 정기적으로 조합원들과 현지탐구활동 등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 전문숍도 주부와 여성들의 자원봉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 운동은 NGO운동의 가장 큰 고민인 재정의 자립을 몸소 실천하며, 또한 생협운동이 지역운동의 연대를 넘어 국제시민연대운동에 까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자로서의 존재가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끌며, 국가를 넘어 아시아 및 세계평화로 연결된다는 시민운동의 이념이 일본의 생협운동속에 서서히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오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속에서도 일본의 생협운동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며, 운동의 자기정체성을 극복해보려고 노력하고있다. 거대한 이념보다는 조그마한 생활의 실천속에서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의 여러 시민단체를 한달간 돌면서 그 경험을 책으로 엮은 전 참여연대 박원순 변호사는 한국의 시민운동은 총론에는 강하지만 각론이 허약하며, 일본의 시민운동은 다양한 각론이 강한 반면, 총론이 약하다고 지적했다.숲과 나무를 비유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은 숲을 보지만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에 별로 신경쓰지 않은 반면, 일본은 한그루 한그루 나무를 중요시하며, 숲의 형태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개인의 민주주의와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느것이 더 중요하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일본의 생협운동은 개개인의 민주주의를 중요시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으로서의 생협운동인지, 단지 브루조아민주주의의 제도적 강화인지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 하지만 초기 사회주의자였던 로버트오웬이 생협운동의 형태를 제안했던 것은 공상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속에 생협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생협운동속에 대안사회의 구성원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의 일면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2005년03월15일 1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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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환경정의가 필요하다

  • 등록일
    2005/03/23 10:23
  • 수정일
    2005/03/23 10:23

프레시안에서 "환경귀족이 환경운동을 망치고 있다"는 글을 읽고

이제야 좀 바른 말들이 나오는가 싶다. 

 

그래서 환경정의가 필요한 거다.

환경 파괴가 누구에 의해 자행됬고,

그 피해가 누구에게 돌아갔으며,  

대책와 정책은 누구를 위해 수립되는가?를

꼼꼼히 따져 묻고 저항하지 않으면

그 환경운동이란 결국 권력을 갖은 자 편에

서게 될 수 밖에 없다.

 

예전에 반다나시바의 글에서 전지구적 환경파괴를

타이타닉 호에 비유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부유한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특실과

아이들, 여자들, 가난한 이들이 있는 배 가장 밑바닥의 3등실로 나누어진

그 거대한 타이타닉 호가 침몰했을때,

구명보트는 가장먼저 이 특실 손님들의 차지가 되고,

3등실에서 갑판으로 오는 통로는 선원들에 의해 봉쇄된다.

 

지율스님의 투쟁만큼

우리사회를 그대로 비춰 보여준 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값진 성과를 얻은 거다.

가진자를 위한 사회 시스템과 정부, 관리, 뿐만 아니라

자칭 풀뿌리를 대변한다는 거대 환경운동, 시문운동의 모습은

지율이라는 거울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거대한 타이타닉의 체제,

개발성장, 착취와 환경파괴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자본주의 체제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환경운동은  유사시에 소수의 인원만을 태울수 있도록

구명보트를 마련하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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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귀족'이 환경운동을 망치고 있다"  
  "때깔나는 자리만 찾아다녀" "권력인줄 착각해 폼 잡고 겉멋 부려"

    
   최근 '환경운동의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환경운동 안팎에서 연이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들은 공통적으로 시민과 유리된 환경운동이 급속히 제도화되고 있는 것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어 주목된다.
  
  "'환경 귀족'이 환경운동의 위기 부추겨"
  
  최근에 나온 <환경과생명> 2005년 봄호(통권43호)는 이례적으로 편집자의 글과 외부 필자의 기고글을 통해 현재 환경운동의 모습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장성익 <환경과생명> 주간은 '풀뿌리와 함께, 현장으로'라는 글에서 "전국의 수많은 환경단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비장하게 '환경비상시국'을 선언했지만 시민 여론의 반향은 냉랭했고, 천성산 싸움도 지율스님 개인의 고독한 정진이 두드러졌을 뿐 환경단체들이 실질적으로 수행한 역할은 미미했다"며 "그 와중에 우리 국토를 치명적으로 망가뜨릴 각종 법제와 정책들이 쉼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대응은 무기력해 보였다"며 환경운동의 현실을 진단하며 글을 시작했다.
  
  장 주간은 "다양한 진단과 분석이 있겠지만, '환경 귀족'의 문제를 우선 짚어보아야 한다"며 "노동운동 본연의 순수한 운동성, 진정성, 계급성을 잃어버리고 자본과 타협함으로써 변질과 오염의 길을 걸은 '노동 귀족'에 빗댄 '환경 귀족' 문제를 우리 환경운동에서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환경운동은 눈부신 초고속 압축성장을 거듭해왔지만 이러한 양적 성장에 걸맞은 질적 성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이 성장 과정에서 언론의 각광과 대중적 명성을 독과점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들은 우리 사회에 환경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개화시키는 소중한 공적을 일궈냈음에도 오늘날에 와서는 환경운동의 진정성, 치열성, 순수성을 훼손함으로써 환경운동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사회적 지지에 상처를 입히는 경우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환경운동의 힘이 갈수록 커지면서 운동 단체를 마치 기업체처럼 운영한다든가, 대중의 추앙과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때깔 나는' 자리만 찾아다닌다든가, 현장의 풀뿌리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 하기보다는 고위 관료ㆍ정치인ㆍ기업체 간부ㆍ기자 등과 같이 '힘깨나 쓰고 권력깨나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에 더 익숙해진다든가, 여기저기 행사장마다 얼굴 내밀고 사진 찍고 악수 나누는 일에 몰두한다든가, 언론에 입맛에 맞는 운동 주제와 방식을 선호함으로써 언론에 보도된 양으로 해당 운동의 성공 여부를 판단한다든가 따위의 건강하지 못한 관행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마치 무슨 큰 권력이라도 쥔 것 같고 대단한 자리라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폼 잡고 겉멋 부리는' 운동을 펼쳐 오지는 않았느냐"며 '환경 귀족'의 행태를 꼬집었다.
  
  그는 "많은 시민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환경운동에 대해 지지와 성원을 철회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환경운동이 위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환경운동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전국의 환경 파괴 현장을 순례한 초록행동단. ⓒ초록행동단

  "정부 들러리만 서는 환경운동, 아직 제도화할 단계 아니다"
  
  <환경과생명>에 '환경의 위기인가, 환경운동의 위기인가'를 기고한 한겨레신문사의 조홍섭 환경전문기자는 '환경운동의 제도화'에 대해서 강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조 기자는 "정부가 겉으로는 경제 성장과 환경 보전의 양립을 추구하는 듯이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권위주의적 국가는 여전히 개발 이데올로기의 전도사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참여 민주주의가 꽃피어 환경과 경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서유럽의 어느 나라처럼 한국의 환경운동이 체제 안의 파트너십에 안주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어색하다"고 꼬집었다.
  
  조 기자는 "아직 한국에서 환경운동은 제도화할 단계가 아니며 뒤집어 얘기하면 체제 속에 안주하는 환경운동은 대중의 불신 속에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김대중ㆍ노무현 두 정부 들어 정책 참여가 활성화되면서 환경운동은 눈에 띄게 활력을 잃었다"며 "환경운동이 체제 안에 자리를 잡을수록 활동가들은 하는 일은 많아지면서도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활력을 잃지 않은 반핵 운동과 자연 생태 분야에는 현장과 지역 주민이 있다는 특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성익 주간도 동감을 표시했다.
  
  장 주간 역시 "환경운동이 정부와 파트너십을 유지하거나 정책 과정에 참여하면서 운동의 원칙과 기준이 훼손되는 것이 문제"라며 "특히 환경운동이 정부와 같은 일을 하는 데는 '힘의 균형'이 중요한데 여러 가지 층위에서 국가와 자본의 힘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환경운동은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에 들러리를 서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장 주간은 또 "환경운동이 정부와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것이 대개 격렬한 갈등이 불거진 다음 사후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라며 "이 경우 심하게 말하면 정부가 골치 아픈 일의 '설거지'를 환경단체에게 떠넘기는 격이라고 할 수 있고, 정부가 저지른 일의 사후적ㆍ결과적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비판은 에너지대안센터 이필렬 대표도 이미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통권127호)에 기고한 '위기의 환경운동, 이제 변해야 한다'에서 제기한 바 있다.
  
  이 대표는 이 글에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의 정책수립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시민들을 좋게만 보지 않는다"며 "어떤 때는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극단적인 반대 운동을 벌이면 시민들은 혼란스럽다"고 지적했다. 환경운동이 좀더 원칙에 입각해 한계를 분명히 정한 상태에서 정부와 관계를 맺어나갈 것을 주문한 것이다.
  
  "입맛 따라 골라먹는 언론 의존도 피해야"
  
  한편 10여년 이상 환경운동의 목소리를 정확히 보도해온 조홍섭 기자가 환경단체의 지나친 언론 의존을 꼬집은 것도 눈길을 끈다.
  
  조 기자는 "언론 기관은 아무리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운동 단체가 아니며, 대중 매체가 생산하는 담론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시장의 소비자이지 세상을 바꾸려는 시민들이 아니라"며 "환경단체로서는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이 효과적으로 보이겠지만 언론은 그들이 원하는 것만 골라 먹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론을 활용하는 기술이 특출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린피스조차도 언론을 경계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며 "언론을 대상으로 하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소홀하게 만들고 대중이나 현장과 직접 맞부닥치는 것을 꺼리는 운동가는 이미 활동가보다는 기업체 홍보 담당자에 가깝다"고 일침을 놓았다.
  
  장성익 주간은 "환경운동의 위기는 갈수록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그리고 제대로 이겨내야 한다"며 글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환경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풀뿌리 대(민)중 속으로, 현장 속으로, 지역과 생활 속으로 환경 운동의 뿌리와 더듬이가 뻗어 나가는 것이다. 환경운동이 끝내 지켜야 할 자리는 현장이며, 온 정성을 다해 만나야 할 사람은 풀뿌리들이다. '높은 곳'에 서기보다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높은 자'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낮은 자'들과 어깨동무하자. '부안'의 경험에서 여실히 보았듯이, 국가와 자본에 가장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맞설 수 있는 참된 저항의 동력은 바로 현장의 풀뿌리들에서 나오는 법이다."  
    
  
  강양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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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달거리대 만들기 워크샵 오세요!

  • 등록일
    2005/03/21 22:32
  • 수정일
    2005/03/2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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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독도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의 것이다 - 변홍철

  • 등록일
    2005/03/21 09:22
  • 수정일
    2005/03/21 09:22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을 둘러싸고, 또한번 '반일 열풍'이 불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모처럼 하나의 목소리로써, 이 사태를 '도발'로 규정하고 일본정부와 우익을 규탄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이 군국주의화, 팽창주의화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라는 우리사회 전반의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는 물론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나 교과서를 통한 역사왜곡 문제 등 과거사 왜곡의 문제 등과 겹쳐,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각별한 위기감으로 다가오는 것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독도 문제'를 두고, 우리사회가 갑자기 좌와 우도, 여와 야도 없이 획일화된 목소리로 '반일'을 외치는 이같은 상황을 결코 건강한 사회적 반응이라고 두고 보기에는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어제(3월 16일) 민주노동당의 소위 '지도부'가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 사태와 관련해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은 평소 관심을 가지고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지켜보던 한 시민으로서,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소위 진보정당다운 신중하고 품격있는 발언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 특히 최근 들어 '천성산 문제'등 주요현안과 관련해 비교적 성실한 태도로 대응하여온 것과 아울러 '2005년 당 사업계획' 등에서 환경 관련 내용을 주요한 사업 목표로 채택하는 등 의미있는 변신의 노력을 민주노동당 스스로 기울이고 있다고 전해 듣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 이번 독도 사태 관련 성명의 내용이 상당히 실망스러울 뿐더러, 매우 위험한 발상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열기(광기에 가까운)의 확산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위 진보정당의 역사적/사회적 책무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팽팽한 긴장 대신, 은근슬쩍 분위기와 시류에 편승, 영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독도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면서, '독도 국군주둔', '독도 개발' 따위를 주문했다는 것을 읽고는, 차라리 수치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것이 다만 민주노동당이라는 한 '진보정당'의 입장이고 그 수준의 반영이라면 우리가 새삼스레 이러한 입장 표명에 대해 우려를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진보' 혹은 '좌파'의 관점과 입장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과 개발 논리, '국익'이라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와 유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워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민주노동당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의 인식과 현재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아니 오히려 현재 전반적인 '반일' 분위기는 이러한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어제, 민간인의 독도 입도 규정을 대폭 완화하고 되도록 자유롭게 독도를 방문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국민 여론'에 대한 나름의 수렴과 판단을 거친 것임을 짐작할 때에, 상황전개가 앞으로 상당히 우려스러운 쪽으로 흐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다시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성명으로 돌아가서 -- 그 작고 여린 돌섬 위 어디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섬의 어느 부분을 개발하라는 것인가! 독도를 우리의 '소유'로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 그 작고 여린 섬을 마치 '새만금'이나 '천성산'처럼 메우고 구멍을 뚫어 '개발'함으로써, '경제성장'과 '국익'에 보탬이 되도록 하기라도 하자는 것인가! 독도에 해상 러브호텔이라도 짓고, 요즘 그 악랄하게 진행되는 골프장 열풍을 동해(일본인들이 '일본해'라 부르는) 한복판까지 불어넣어 해상 골프연습장이라도 세우라는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환경, 소위 '국토'를 대하는 우리사회, 특히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의 저열한 인식 수준을 무심결에 드러내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진보정당은 두고라도,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망발'을,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뱉어버린 것에 다름 아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좀더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상상력과 언어와 실천이 필요하다. 이러 한 때에 '국익'의 이데올로기적 광기에 합류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차라리 우리는 일본의 시민사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백번 옳다.

"독도는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풀뿌리 민중들은 그러한 자연의 섬인 독도를 인간의 탐욕과 국가주의적 논리로 '소유(영유)'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리석은 자본과 국가의 개발/팽창 논리로부터 이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그동안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섬인 이 아름다운 섬을 당신네 지도자들과 우익 세력이 굳이 이제와서 차지(소유)하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굳이 이런 식으로 우리 평범한 민중의 삶 속에 긴장의 날을 세우려 하는 여러분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획책하려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당신네 일본 정부가 과거, 우리 한국의 민중들에게 어떠한 고통을 끼쳤는지 여기서 새삼 길게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 한국 민중은 이번 독도에 관한 당신들 지도자들의 움직임이, 과거에 그랬듯이 또다시 동북아시아와 세계에 '제국주의적인 힘'으로써 팽창해 나가겠다는 터무니없고 부도덕한 야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우려는 여러분, 일본 민중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팽창과 정복, 전쟁에의 유혹은 어느 나라든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지배세력과 권력엘리트들의 것이지, 하루하루를 노동하여 정직하게 먹고사는 풀뿌리 민중의 이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것을 일본의 형제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독도는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민중은 원래 자연은 인간이 '소유'하거나 함부로 훼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옳다고 우리 조상들로부터 배워왔습니다. 아마 당신들 일본의 풀뿌리 민중도, 당신들 지배자나 탐욕스런 우익들과는 달리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모든 양심적인 시민 여러분! 우리, 제발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양국 풀뿌리 민중의 오랜 지혜와 전통에 입각하여, 독도가 독도로서, 자연이 자연으로서 그냥 아름답게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것은 국가를 뛰어넘어 우리 모든 민중의 의무입니다. 제발 자연을, 독도를,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라는 더러운 명분으로 같이 짓밟는 어리석음에 동참하지 맙시다. 독도는 독도이기도 하고, 당신들에게는 '다케시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 독도는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것입니다."

이 정도의 발언으로써, 저들을 '부드럽게 설득 혹은 제압'하는 것이 백번 정당한 처사이다. 우리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전세계 풀뿌리 민중의 국제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신뢰와 연대의 원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되며, 더구나 "생태적으로 지탱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인류보편의 비전을 놓쳐서도 안된다.

특히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자칫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광기가 더욱 확산될 수도 있는(이것은 전체 민중과 진보진영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사태에, 부디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을 엄중하게 촉구한다.

특히 오는 20일로 예정한 민주노동당 대표단과 의원단의 독도 방문을 재고하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럴 바에는 일본의 진보세력 및 양심적/평화적 시민단체들과의 긴급 회동을 기획하여, 이번 기회를 통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풀뿌리 민중의 차원에서 논의하고 협력하는 연대의 기회로 삼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필요하다면, 그러한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노력을 도모하고 리드할 수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민주노동당이 나름의 구실을 해 줄 것을 충심으로 촉구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를 경계하고, 한-일 민중과 평화주의 세력의 연대로 이러한 '도발'에 맞서 싸우는 것은 물론 긴급한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과제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대응(처방)'은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라크 침략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견해 놓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철군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전범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지고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일본의 팽창과 군국주의화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천성산과 새만금 파괴, 골프장과 기업도시 열풍과 같은 반환경적, 반민중적 거대국책사업으로, 우리 땅 전체와 민중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이 참혹한 '일상의 전쟁상황'을 우리가 제지하지도 못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하기 위해 독도를 '개발'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사회 진보정당의 수준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파렴치함과 야욕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고이즈미가 가당찮게도 양국 정부의 '냉정'을 주문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는 분명히 냉정을 찾아야 하며, 문제의 본질을 우리의 변함없는 원칙 속에서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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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격차의 심화

  • 등록일
    2005/03/14 10:56
  • 수정일
    2005/03/14 10:56

2000∼2004년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6%, 임금소득의 평균 증가율은 2.4%이지만 기업소득의 평균 증가율은 18.9%다. 2004년의 경우 자본소득 증가율은 무려 38.7%에 달했다.

-디지털 말의 기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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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이주노동자 연대의 밤

  • 등록일
    2005/03/14 09:25
  • 수정일
    2005/03/14 09:25
* 이 글은 no chr.!님의 [어제/이주노동자 연대 밤] 에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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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D-Day를 준비하며

  • 등록일
    2005/03/12 14:58
  • 수정일
    2005/03/12 14:58
그래 9월 D-Day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계속 생각한 건데,
직장 생활을 청산할 준비를 슬슬 해야 할 것 같아.
먼저 생각한건, 회사의 룰에 묶여 그 일정대로 따르는 노예의 부지런함을 버리고
내 스스로 조직하는 부지런함을 습관화해야 한다는 거야.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예전에 놀아봐서 아는데,
일없이 빈둥거리면 몸버리고 맘버리기도 쉽상이거든.
그래서 회사에서 일하는 것만큼의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지만,
늘 공허한 시간이 생기지 않게끔 스케줄을 관리하는 게 중요할 듯싶어.
그래서 지금부터 약 6개월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좀 열심히 생각해보려고 해.

또 한 가지는 돈쓰는 버릇을 확실하게 뜯어고쳐야해.
점심을 사먹는 밥값만 해도 이동네에서는 사오천원이 드는데,
조금만 부지런히 점심을 싸면 한달에 10만원정도를 절약할 수 있거든.
또 택시 같은 거 안타는 것도 중요하고(오늘은 늦어서 택시 탐 ㅜㅜ),
밖에서 되도록 밥 안 사먹도록 하고,
친구들과 휩쓸려 이리저리 카페나 술집에서 만나는 것도 자제해야하고,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 같은 건 아예 싹을 잘라야 해.
요즘 돈 나가는 거 보면 “이러다가 이런 회사생활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이 생기는 게, 이게 흔히 일반 직장인들에게 보이는 중독현상인거 같아.
내 주위의 직원들을 보면, 쇼핑에 중독되어 카드빚을 내는 사람들도 있고,
점심, 저녁을 별 생각 없이 근사한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척척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생일날이면 남자로부터 10만원이 넘는 꽃바구니와 역시 1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수입화장품을 선물로 받고
저녁에는 1인분에 3만 5천원 정도하는 그릴 스테이크가 나오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한잔에 5000원 하는 와인과 함께 고기를 써는 삶이란,
예전에 너무 전형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는데, 회사에 몇 년 다니고 보니
그게 전형이 아니라 몇몇 부류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고,
또 그 부류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렇게 하고 싶다는 고결한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세빠지게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남자는 능력이 있어 돈이 많아야 한다는 강박,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
이 두 개의 강박이 무슨 수학공식처럼 아귀가 딱딱 맞는 게 아주 신기할 정도거든.
주말이면 2만원씩 돈을 내는 네일아트숍에서 손톱과 발톱 손질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10만원을 호가하는 파마를 했다며 그날 점심은 컵라면으로 해결하는 동료도 있지.
살찌는 것에 대한 강박, 날씬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 피부가 고와야 한다는 강박,
그러한 강박들이 어쩔때는 나름대로 초연한 나를 물들이기도 해.
그러니까 싸구려 스킨 하나를 사러 들어간 화장품 가게에서 점원이
“어머 손님은 여드름이 나면서 얼굴은 너무 건조하군요.
그러면 이게 아니라, 저걸 써야해요.”하며 내미는 울트라 인텐시브 XX시리즈로 나가는
고가의 화장품을 내밀 때면, 나도 모르게 혹하게 된다는 거야.

요즘 일본어 시간에 읽는 책은 [탈 개발: 서브시스턴스 지향으로]라는 책인데,
내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인 부분에 밑줄을 쳐보면,
개발주의의 강고함, 즉 개발주의가 생각의 전환만으로 바뀔 수 없는 이유란,
그것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래.
이 사회에서 남보다 잘 살기 위한 경쟁해야 한다는 관념과 실천,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이 스며있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거지.

과연 그래.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얘기가 너무 비약하는 거래.
자기 같은 경우는, 남만큼만 살자주의라나? 그 말도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네.
내 주위에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만큼만 소박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면 그 남만큼만 살자주의란
밑바닥까지는 떨어지지 말아야한다는 강박의 대표격인 거야.
그러니까 “남보다 잘살자”주의가 포져티브한 개발주의라면
“남만큼 살자”주의란 네거티브한 개발주의가 되는 거지.
남만큼 살자주의는 늘 앞에 “난 별로 욕심이 없어”하는 머리말을 달면서,
“근데, 이런 저런 집안이나 친구들 경조사에 부주는 꼬박꼬박 챙겨야지 인간 도리를 했다고 하겠지”,
“뭐 떵떵거리며 살진 못하겠지만 평생 살 집 하나쯤은 마련하고, 형편이 좀 되면 차도 굴릴 수 있었으면...”
“애가 생기면 기죽이기는 싫으니까 학원은 기본으로 한두 개만 보내야지” 하는
“소박한” 희망을 늘어놓는 게 일반적이야.
그걸 회사에 대입하면, ‘남보다 성공해야 한다’는 “사장 마인드”와는 조금 구별되면서
동시에 그것과 쌍을 이루는 “직원마인드”가 되는데,
결국에는 개발주의 마인드의 위계 속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지.
그게 바로 직원들이 사장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제 삶을 아주 통짜로 내주어 버리는 시스템인 거야.
욱해서 사표를 던지려는 순간 애들 양육비며 학원비가 눈에 아른거리는 거지.

또 고등학교 때부터 “그래도 대학은 들어가야지”하는 거,
학교를 졸업하고도 “그래도 일은 대기업에서 해야지. 뭐 여건이 안 되면 좀 괜찮은 중소기업도 나쁘진 않아.”하는 것도
남보다 잘 살겠다는 게 아니라 남만큼만은 살자는 소박한 바램인 거야.
남만큼 사는 것만도 뼈빠지는 세상에서 남보다 못사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울까?
비정규직 블루칼라와 여성노동자, 실업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숙자의 존재는
늘 이런 사람들에게 공포심의 대상으로 다가와서 “그래도 남들만큼은 살아야지”하고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계기가 되지.
그래서 아마도 평생을 밑바닥과과 천장 그 중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들,
“중간층”이건, “대중”, “시민”이건, “국민”이건, “서민”이건, 뭐라 부르던 간에
그들은 사실 위를 향해 뛰는 게 아니라, 밑을 공포스럽게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는 중력으로 제자리걸음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는 생쇼를
평생 벌이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결국에 이 지긋지긋한 임금노동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런 소박한 꿈보다 좀 더 근사하고 멋진 자본가의 꿈 혹은 대박의 꿈을 꾸던가,
아니면 그 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길 뿐인 거지.
사실 개인적으로 전자에 더 재능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자를 더 훌륭하게 생각하는 날 누가 보면 "잉여"라 할 거야.

그런 후자의 삶의 방식을 거칠게 늘어봐 보면,
외부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조직되는 삶,
소비와 안 친해지기,
노예의 부지런함이 아닌 자율적인 근검, 절약, 부지런함의 대안,
어제 할아버지가 얘기한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다는, “의식적인 보이콧”,
비폭력 직접행동,
자급에 기반한 공동체 만들기,
잉여에서 필요로 탈출하기(소위 사회의 “잉여적” 존재들(잡민들)이 보다 쉽게 필요로 탈출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해),
학교독 회사독 조직독 빼기,
밑바닥으로부터 상상하고 거기에 적응하기,
결국엔 서브시스턴스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등등.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것들이 아까 그 후자의 삶을 이루는 것들인 것 같아.
사회니, 뭐니 하니까 거창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긋지긋한 회사를 안 다니면서 어떻게 잘 수 있을까 하며
나름대로 고민한 것의 해답이야.

그러니까 근검, 절약, 부지런함 덕목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성공한 자본가가 아닌,
성공한 룸펜을 꿈꾸는 것이지, 멋지잖아?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 성공한 룸펜이 한 사람 있는데,
내가 늘 존경해마지 않는 조XX란 사람이지.
어쩔 땐 십 원 한 장 안 쓰는 모습이며, 회사도 안 다는 것이 이일 저일 시간 없다고
야박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인간미며 오만정이 똑 떨어지다가도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며 철저히 자기를 조직하는 아나키스트인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

맞다, 맞다, 내 스스로의 생활을 조직하고,
또 그와 비슷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 해도 과연 진정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존의 삶의 규모를 유지하게 위해 내일도, 내일 모레도, 노예노동에 매달려야겠지.
평생

그래 확실히 결심한다. 9월 회사 때려치우는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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