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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앞 베트남 유학생들의 항의 기자회견

오늘 조선일보앞에서 베트남 유학생들의 항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21일) 사회면 기사에 대한 것이였습니다.

기사의 카피는 "베트남 처녀들 희망의 땅, 한국으로"입니다.

 

 



 

사실 좀 황당한거죠. 웬 왕자님???

 

제가 잘아는 베트남 유학생인 한친구는 이날 아침에 이 기사를 보고 하루종일 머리가 띵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이런 기사를 썼는지 그 기자의 머리속이 궁금해 졌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와우리라는 시민단체에서 이 기사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조직했구요,

오늘 베트남 유학생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나중에 듣자니 이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사과는 당연한 것이고 조선일보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하는데 물론 안하겠지요.

어쨌든 이 문제는 아마도 생각외로 커질 듯 합니다.

베트남의 유명한 일간지인 한신문에서 공식적인 기사가 어제 나왔구요 앞으로 후속 보도기사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좃선일보 너네 딱 걸렸어!!

 

***에피소드 하나...

위의 사진 중에 조선일보 입구에서 일인시위하는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위 아저씨가 나오더니 자기네 건물이라고 찍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게 어딨냐 찍겠다고 했더니 마구 막더라구요. 그럴때 일수록 흥분하지 말아야 하는데 괜히 흥분해서 대판 싸웠습니다. 이 아저씨가  미운게 아니었는데...쩝....

 

 

이날 기자회견과 관련된 기사가 시민의 신문에 났습니다.

http://www.ngotimes.net/news_read.aspx?ano=36228

 

그리고 이 기사에 대한 베트남의 유학생의 편지가 기자회견에서 발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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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트남 여자다
작성자 : 응웬티흐엉센Nguyen Thi Huong Sen(응웬티흐엉센, 나와우리 회원, 서울대 사범대학)

 

 

나는 베트남 여자다. 오래전에 한국에 와서 이 나라의 문화, 풍습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외국인 중 한명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주변에서 “한국 사람에게 시집왔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불쾌함을 느낀 적이 많다. 그래서 택시를 타거나 길을 걸을 때 한국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된다. 내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 십중팔구는 내가, 아니 나와 같은 베트남 여성들이 전부다 ‘한국에 시집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싫다. 정말로 싫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불행히도 한국에 시집오는 베트남 신부들은 나날이 많아지고 있다. 베트남에서 방영하는 한국 방송 프로그램들이 많아지면서 베트남 신부 수도 급증하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에서 한창 뜨거운 한류 열풍, 그리고 양국의 활발한 외교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주변에서 점점 더 많이 베트남 신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처음에는 같은 나라 여성으로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아침, 난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평소 나를 아껴주시는 한국 분이 보내신 건데, 그 내용은 조선일보에 난 <베트남 처녀들 “희망의 땅, 코리아로”>라는 제목의 기사에 대한 것이었다. 기사 때문에 내가 틀림없이 기분이 나쁠 것이라 생각했던 그분은 이메일에 이렇게 쓰셨다. '혹시나 부끄러워할 것 같아 망설이다가 보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한국 여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너도 나도 미국행을 부러워했었지. ‘가난은 창피한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단다.'


참 고마운 말씀이었다. 어쨌든 난 이 메일을 보고 인터넷에서 기사를 찾아 읽었다. 그분의 메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사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기사를 읽기 시작하자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게 뭐야 ’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기사 제목부터가 꼭 광고 같았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합시다>라고 적힌, 흔하디흔한 플래카드를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기분이 상했다. 정말로 신문에 실린, 그것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불쾌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친한 선후배들이 하나둘씩 전화를 걸어 왔다. "너도 그거 봤냐"고 물어와 “응, 나도 봤다. 기분 나빠서 더 이상 이야기 꺼내기도 싫다”고 대꾸했다. 그런데 친구들은 “종이 신문으로 확인해 봐야 된다”고 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나에게 스캐너로 만든 파일이 왔다. 기사와 함께 커다란 사진이 실려 있었고, 거기엔 정말로 ‘웃기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 주오…… '기사의 내용은 정말 심각했다. ‘한국에서 구독률이 가장 높은 조선일보의 기사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누구나 사정을 뻔히 아는, 국제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국 남자들을 왕자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도 기막혔다. 또한 ‘반지를 교환하고 축배를 드는 간단한 의식의 베트남 결혼식’ 같은 표현을 보고는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해 쓸 때는 신중하게 공부한 다음에 써야 한다는 충고를 하고 싶어졌다.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물론 국제결혼으로 큰 이익을 얻는 한국측의 비양심적 중개업체와 베트남측의 뚜쟁이들이 중간에 있기 때문에 결혼이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것인데, 기자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쉽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결혼 의식은 복잡하고 의미 깊은 여러 가지 행사들로 이뤄진다. 한국의 결혼 문화와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다. 이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베트남의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것을 모르고 쓰니 왜곡될 수밖에 없다. 기사를 쓰려거든 제발 공부 좀 하고 나서 쓰라고 말해주고 싶다.


신문에 실린 커다란 사진, 그리고 불쾌한 기사를 한꺼번에 찢어버리고 싶다. 인권침해라고 해야 할까, 여성을 낮게 본다고 할까, 기사 내용이 온통 거짓이라고 할까…… 한국말로 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할 말은 하고 싶다.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신부의 수는 통계로 나와 있지만, 이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시련 속에 던져져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보다 객관적으로 보도해 주었으면 한다. 언론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

 

내 고향도 큰 도시에서 몇 시간 가야 하는 가난한 농촌이다. 얼마 전 고향 사람이 나에게 부탁을 하나 해왔는데,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를 몰라 마음의 짐이 되어 있다. 마을의 아가씨 한 명이 한국으로 시집을 가고 나서 그 어머니가 매일 울며 지낸다고 한다. 고작 백만 동(한국 돈으로 10만원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딸을 한국으로 보냈는데, 결혼해 비행기를 타고 떠난 지 거의 한 달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애태우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그 한국인 사위는 외국인 장인, 장모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딸도 처음에는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꿈을 가지고 한국으로 시집간다는 결정을 했을 것이다.

진실한 생각과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니냐는 질문을 조선일보의 편집 책임자와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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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땐 민간인 학살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더니 이제는 이런 말도 안되는 기사로 또다시 베트남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젠 미안해서 베트남 친구들을 볼 면목이 없어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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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지역순회상영회를 제안합니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지역순회상영회를 제안합니다!


제안배경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습니다.

대한항공 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고-그것도 건국 이래 단 두 번 했던 것을 한해에 해버리고-, 쌀비준안을 농민들의 분신에도 불구하고 통과시키고, 집회에선 시위대를 때려죽이고, 몇 십억 비자금을 건네준 삼성을 무혐의로 처리하고, 황우석에 대해선 배타적 민족주의로 여론몰이하고, 평택에선 농민들을 자신의 땅에서 몰아내려고 하고 있고, 새만금사업은 다시 시작하고, 천성산 터널은 막무가내로 진행되고...

너무나 사건들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광기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사건들이 많기에 너무도 빨리 그리고 쉽게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은 편파적이고 파편적으로만 보도되고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도대체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론에선 10대 사건류 식의 보도만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사람으로, 그리고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큐멘터리로 이러한 사건들을 엮어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여 프로젝트 작업-이름을 뭐라고 부르든 -을 제안합니다.

- 이마리오 (제안서 초안 중에서)



성난 눈으로 현실을 바로보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생각의 단상을 짚어봅니다. 우리사회는 노무현정권의 극적 탄생과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통해 진보적인 변화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지 아무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IMF를 열 개 합쳐놓고 있다는 한미 FTA가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사회가 우려의 수준을 넘어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정권과 자본가들 그리고 보수언론의 트라이앵글은 침묵을 강요하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덮어버리는데 급급합니다. 이른바 죽음의 트라이앵글입니다. 농민들을 자신의 땅에서 못 살게 하고 노동자들을 자신의 일터에서 내쫓고, 서민들은 치솟는 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지금의 대한민국.

  우리사회의 우울한 단면들을 모아서 한 편의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합니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들을 직시할 때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가 작은 희망을 키우는 단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편의 대한민국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5월 14일 제작을 마칩니다.

  5월 18일부터 6월 10일까지 전국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순회상영회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지역에서 널리 이 작품이 상영되기를 기대합니다.


상영지원형태


● <상영형태>는 동시다발적인 지역순회 상영회입니다.
● <서울 상영회>(5월 15일, 8시, 미디액트)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해 가는 방식으로 추진 할 계획입니다.
● <작품의 상영료>는 지역의 여건과 현실에 맞게 자율적으로 지역에서 결정합니다.
● <작품상영 포맷>은 지역의 현실에 맞게 지원합니다.
● <작품의 포스터>를 지원해드립니다.
● 상영회 행사와 연계한 다양한 강연회를 기획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연락처

상영을 계획하시거나 추진할 단체나 개인이 있으시면 연락해주세요.

한국독립영화협회 배급팀 김화범 02-334-3166, 016-513-3332 indie@kifv.org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이마리오 감독 011-9052-1985 leemario@korea.com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블로그 http://blog.jinbo.net/craz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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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티저

블로그 주소 http://blog.jinbo.net/crazykore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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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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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의 年代記 또는 聯隊記

 

불타는 필름의 年代記 또는 聯隊記


이마리오



0. 제안배경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습니다.

대한항공 파업에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고-그것도 건국이래 단 두번 했던것을 한해에 해버리고-, 쌀비준안을 농민들의 분신에도 불구하고 통과시키고, 집회에선 시위대를 때려 죽이고, 몇십억 비자금을 건네준 삼성을 무혐의로 처리하고, 황우석에 대해선 배타적 민족주의로 여론몰이하고, 평택에선 농민들을 자신의 땅에서 몰아내려고 하고 있고, 새만금사업은 다시 시작하고, 천성산 터널은 막무가내로 진행되고...


너무나 사건들이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광기가 이 사회를 지배하고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사건들이 많기에 너무도 빨리 그리고 쉽게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은 편파적이고 파편적으로만 보도되고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도대체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언론에선 10대 사건류 식의 보도만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한사람으로, 그리고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는 사람으로써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큐멘터리로 이러한 사건들을 엮어 우리들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여 프로젝트 작업-이름을 뭐라고 부르든간에-을 제안합니다.

-제안서 초안 중에서



1. 왜 프로젝트 작업인가?


위에서 언급된 사건들을 누군가 혼자서 작업하려고 한다면 2-3년의 기간은 족히 필요할 것이며 무수히 많은 제약들과 한계가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제약들과 한계를 어느정도나마 극복할 수 있는 작업방식이 프로젝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재의 한국사회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다양한 사건들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경향 혹은 흐름들을 그 사건의 중심에서 작업을 했던 사람과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시각과 관점들을 이야기하고 모아내는 방식의 프로젝트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단기간(?)에 해내기 위해서는 프로젝트 작업방식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작업은 이전의 프로젝트 작업(이주 프로젝트, 국보철 프로젝트, 신자유주의반대 프로젝트)의 연장선(각 시기마다 긴급하게 혹은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을 한다는 의미에서 보자면)입니다.

-제안서 초안 중에서



2. 작업방식에 대하여 - 하나의 장편docu로 작업하자. 왜?


새로운 방식의 프로젝트 작업에 대한 고민이 있다. 이전의 프로젝트 작업이 각 연출자들의 작품을 동일한 주제 혹은 소재를 다양한 입장과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펼쳐 놓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면, 이 프로젝트의 경우 펼쳐진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을 갖는 이야기로 만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애초에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각 연출자들의 이야기를 모아서 하나로 보여질 때 갖을 수 있는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모자이크 혹은 각 부분을 훑어 보다보면 어느 순간 한국사회의 지형도가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는 것이다.

-기획서 초안 중에서


이 작품은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바라본 한국사회의 여러 단면들이다. 과거에 벌어졌던 혹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들의 단면들을 모으고 재조합하여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어떠한지 그려보고자 하는 첫번째 시도이다.

-기획서 중에서




3. 배급활동에 대한 계획들


특히 이번 프로젝트 작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급부분이다. 보다 적극적인 배급에 대한 고민이 프로젝트 모임 초기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 동시다발적이고 집중적인 배급행동을 통해 입체적인 상영회 활동 모색

․ 긴급히 요청되는 상영을 현실화시켜낼 수 있는 네트워크 토대 마련

․ 한미 FTA 저지투쟁과 관련한 사회운동 진영의 대응과 함께 갈 수 있는 상영회 모색


․ 5-6월 집중 상영 기간 설정(5월 15일 - 6월 10일)

  1차 : 기존의 공동체상영운동네트워크를 통한 거점 상영화 확보(20여곳)

  2차 : 웹 홍보와 사회운동 단위를 통해 진행되는 상영회 확보(20여곳)



4. 내가 프로젝트 전문 감독(?)이 된 이유


독립영화 진영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사회운동과 연대를 하는게 아니라 우리는 이 사회 구성원 중의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현재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분명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하는 현재의 방식이 아닌 구성원 개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러한 목소리들이 모여져서 이 사회가 운영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나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며, 독립영화를 하는 이들은 독립영화로 그러한 목소리를 내야 하며,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위치-일반적인 질서 안에 포섭된 구성원이 아닌 경계에 서 있는 애매한 혹은 자유로운 위치-는 이러한 것들을 누구보다도 쉽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싫은 혹은 체질적으로 안맞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같은 거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에서 두번의 프로젝트 작업-이주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 &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을 제안했고, 두번째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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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님의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 선언문] 에 관련된 글.

드디어 시작인가 봅니다.

오래 걸리는 싸움이 될 거구요.

아마 싸움의 중심에 한미FTA가 있을 것이고

진영은 보수우익+보수언론+친미적인 행정관료+자본 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되겠지요.

 

아마 이 싸움의 승패(?)에 따라서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이 굉장히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드네요.

쉽지는 않겠지만 무언가라도 해야겠지요....

 

현재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http://blog.jinbo.net/crazykorea/)라는 프로젝트 작업 중입니다.

이 작품이 잘 활용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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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기면허...

지음님의 [원동기 면허증에 관한 웃긴 기사 두 개] 에 관련된 글.

내가 원동기면허를 딴지도 벌써 3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2000년 새로 갱신하는 주민등록증(플라스틱)을 만들기 싫어서 구 주민등록증의 효력이 없어지기 직전에 여권을 하나 만들었다. 그래서 그걸 가지고 별문제 없이 잘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혹시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경우나 나중에 여권을 갱신할 때 신분증이 필요할 것 같아서 원동기 면허를 땄다. 2번만에 실기시험을 통과해서..ㅋㅋㅋ

 

나같은 경우는 솔직하게 말해서 반쪽짜리 주민등록증 거부자이다.

여권도 있고 원동기 면허도 있고 그리고 아무생각없던 고등학교때 지문날인하고 받았던 옛날 주민등록증도 있으니 말이다.

 

며칠전 한겨레 신문에 같이 딸려오는 신문(?)에 청소년의 글을 보고 뜨악했다.

주민등록증 발급에 대한 이야기인데 10손가락 지문을 찍고 주민증을 받고 나니 책임감이 생겼다나...

사실 그건 이 청소년의 문제가 아닐거다. 왜냐면 주변에서 주민증이 이런저런 인권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걸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테니까.

 

어쨌든 청소년들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고 한국사회에서 신분증을 확보할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딱 하나이다. 바로 원동기 면허증...

원동기 면허증은 만16세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가능하다.

실제 면허시험장에 가보면 대부분이 청소년들이다.

이 얘기는 곧 주민증 만들기 전에 원동기 면허를 따서 그걸로 여권도 만들고 하면서 살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닐 거다.

왜냐면 주민등록전산망에 그 사람에 대한 지문과 사진 정보가 없어서 여기저기서 조금은 귀찮은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물론 이때 목소리 크게 그리고 자신감있게 대처해 나가면 되기는 하지만 한국사회의 공무원들이 별로 고분고분하지 않을 뿐더러 나이가 어리면 무조건 내려다보는 습성이 있어서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내가 아는 독립다큐멘터리 감독 중의 한명도 지문날인 거부자이어서 주민증이 없고 대신 운전면허증만 있었는데 갑자기 여권이 필요하게 되어서 마포구청에 가서 여권신청을 하자 주민증만 신분증으로 인정한다는 황당한 소리를 듣고 싸웠지만 결국 그날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 황당한 세상에 우린 살고 있는거다.

전산망에 사진과 지문정보가 나오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니...ㅋㅋㅋ

그럼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기를 증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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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일 대~한민국 만세!!!!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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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논란에 대한 나의 생각(프로메테우스 인터뷰 기사)

“영화인들, 뼈저린 자기반성 해야”
이마리오 다큐멘터리 감독 인터뷰
강준상 기자 메일보내기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미친시간>을 연출한 바 있는 이마리오 감독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에서 그 기운이 남다른 감독이다.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의 좌충우돌하던 열혈청년에서, 베트남의 생존자들의 기억을 통해 한국 군인들의 민간인학살을 다룬 <미친 시간>까지, 또 광주에 대한 인디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그의 기운이 느껴지는 행보.

△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 서울영상집단

 

그는 99년 스크린쿼터 투쟁이 한창일 때 그 선봉에 함께 섰던 바 있다. 투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스텝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삭발투쟁을 하기도 했다.

최근 스크린쿼터 축소논란에 대해 독립영화인으로서 그가 느끼는 것은 90년대 후반과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그는 “스크린쿼터는 할리우드의 독과점에 대한 자국영화의 보호 장치로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주류 영화인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고 말하며 일침을 놓았다.

그로부터 스크린쿼터 축소와 관련된 생각을 들어보았다.

 

프로메테우스 : 90년대 후반에 어떤 계기로 참여하였고 어떤 역할을 했었나?

이마리오 : 당시 처음으로 스크린쿼터 축소 얘기가 나왔고, 영화인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거기에 한독협도 참여를 한 것. 스크린쿼터의 내용만 대충 알았고, 그런 수준에서 참여한 것이다. 그때 99년 겨울 서울영상집단에서 <노래로 태양을 쏘다>라는 스크린쿼터 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난 촬영스텝으로 참여했다. 그때 김진균, 심광현 교수 등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스크린쿼터가 단순히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큰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그때 작업하면서 알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 : 스크린쿼터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한 부분으로 보는 흐름이 있다. 하지만 스크린쿼터 운동의 주체들에 다양한 면면이 있을 것 같다. 실체가 뭔지? 집단이기주의라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밥그릇싸움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식이 없는 것이 문제

△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와 <미친 시간>을 연출한 이마리오 인디다큐멘터리 감독.
ⓒ 프로메테우스 강준상 기자

 

이마리오 : 참가했던 사람들 안에서 왜 쿼터를 지켜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드물 것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자기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그것은 현재와 99년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밥그릇싸움이라 해도 그게 왜 중요한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계속적으로 사람들이 비난을 한다. 가령 왜 외제차 타냐는 그런 식이다. 여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얘기하고 있는 상태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스크린쿼터에 의해 한국영화 잘 되었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니 국산품 애용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비난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 : 스크린쿼터를 지키자는 이유가 문화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가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영화다양성을 위해 영화인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며 스크린쿼터 축소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크린쿼터와 자국 내 영화 다양성은 다른 차원의 문제

이마리오 : 기본적으로 스크린쿼터는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다. 스크린쿼터는 할리우드에 대항한 자국영화의 의무상영일수다. 자국 내 영화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것을 섞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

문화관광부의 4천억 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그 두 가지를 섞어서 보게 하려는 의도이다. 굉장히 기분 나빴다.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비슷하게 올려놓고 지원해주겠다는 것은 약 올리는 것 같다. 스크린쿼터 줄이면서 지원 해주겠다는 것은 영화진영 내부를 이간질시키는 것이다. 쿼터 폐지 하고 4천억 지원했을 때 실재로 독립영화진영에 얼마나 지원이 되겠나.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99년 투쟁 이후 현재까지 오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주류의 상업영화진영이다. 그리고 문화정책을 짜는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비주류 영화에 대해 아무런 지원책을 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화인들, 99년 이후 과연 한 일이 무엇인가?

△ 지난 2월 8일 있었던 스크린쿼터 사수 집회. ⓒ 프로메테우스 자료사진

 

99년 스크린쿼터 투쟁의 한 축이었던 독립영화에 대해 상업영화 진영이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실미도>나 <태극기를 휘날리며>나 <왕의 남자>와 같이 한 영화가 스크린 전체의 1/3 이상에 동시에 걸리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안 해왔다. 그러니까 정부의 논리에 먹히는 것이다.

극장은 돈만 벌면 되니까 한국영화든 외국영화든 상관없다. 제작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제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안을 만들어야 한다. 수백억 벌었으면 자기 영화로 인해 개봉하지 못한 소수 영화들에 대한 지원책을 고려해야하는데 한 것이 뭐가 있나. 하나도 없다. 우린 여전히 같이 싸우겠지만 99년과는 다를 것이다. 예전에는 당연히 같이 했지만 지금은 자국 내 문화다양성에 대해 말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 : 근본적으로는 스크린쿼터투쟁과 영화다양성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상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 폐지위협이 있으면서 소위 한국영화의 국가경쟁력의 필요성에 대한 많은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언제까지 쿼터가 유지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영화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만들어냈다. 그 중심에 강제규, 강우석 감독 등이 있었고 그들은 일단 한국영화를 살려야 한다며 경쟁력을 위해 할리우드 시스템, 스타, 마케팅 비용 늘리기 등의 산업논리로 갔다.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이 역설적으로 한국영화산업의 모순을 만든 측면이 있지 않나?

 

돈 되는 영화만 만들면서 문화다양성을 말하는 것은 이율배반

이마리오 :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스크린쿼터 제도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스크린쿼터가 있건 없건 그런 시스템으로 갔을 것이다. 스크린쿼터 제도를 정확하게 봐야한다. 할리우드의 독과점을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을 자국 내의 이야기로 치환시키게 되면 스크린쿼터 자체가 별로 필요 없는 것처럼 된다. 다른 층위의 얘기라는 것이다.

사실은 충무로 영화계가 스스로 함정을 판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승인을 했으면 당연히 영화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했어야 하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동참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했다. 그러다보니 위기에 몰렸을 때 누가 연대해 주겠나? 스스로 함정을 판 거다. 내부에서 그런 것들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이다.

또 현재의 한국 영화들은 무국적 영화들이 상당수이다. 그런 충무로 영화들을 만들면서 문화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라고 말하면서 돈이 되는 영화만 만들고 있다. 이율배반이다. 영화인들이 각성해야 한다.

 

프로메테우스 : 90년대 후반 스크린쿼터를 사수한 이후가 더 문제일 수 있겠다.

 

영화인들 스스로의 책임이다

이마리오 : 그렇다. 그때 스크린쿼터를 싸워서 지킨 영화인들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본다. 후속작업을 하지 않았다. 왜 스크린쿼터가 지켜져야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 정책과 실천을 위한 노력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스크린쿼터 투쟁 이후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바뀐다. 그러면서 내부구성이 보수적인 사람들에서 젊은 사람들로 완전히 바뀐다. 하지만 그 과정을 보면 대학교수, 영화제작가들, 감독들이 전부 그 자릴 차지했다. 새로 변화된 영화진흥위원회 내부에서도 비주류영화, 예술영화, 독립영화에 대한 정책을 입안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스텝들? 처우개선 무엇이 되었나? 결국 스텝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들게 되었다. 독립영화 전용관? 그때부터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제야 논의되기 시작한 상태다. 자승자박하는 것이다. 만약 이번 싸움 이후 전과 같이 간다면 다음번에는 완전히 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 : 스크린쿼터 축소가 독립영화에 줄 영향은 무엇일까?

이마리오 : 직접적 영향은 없다. 하지만 최근 2년 독립영화들이 극장개봉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개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스크린쿼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안녕 사요나라>나 <다섯은 너무 많아>와 같은 독립장편영화가 만약 쿼터가 73일인 상황이었다면 개봉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프로메테우스 : 독립영화 제작자들이 극장상영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나?

이마리오 : 극영화의 경우 단편영화들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독립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대학에서 영화과 출신들이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다. 독립영화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의 단편은 많지 않다. 중편과 장편을 만드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아트플러스가 있긴 하지만 상영한계가 크다. 모색을 하고 있는 단계라고 보면 된다.

 

프로메테우스 :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독립영화 제작자들이 해야할 것은 주류의 시장인 극장에서 독립영화가 상영되어지기 위한 노력보다는 주류영화의 시스템을 부정하고 새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상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위해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가령 프랑스 영화감독 고다르는 할리우드 자본주의 스타일에 투쟁하는 영화가 혁명적인 영화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의 투쟁이 오히려 독립영화 제작자들이 해야할 것이 아닌가?

 

독립영화가 시민운동단체들처럼 제도화되지 않아야 한다

이마리오 : 주류시스템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배급의 다른 가능성들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충무로에 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갔다. 영화과 학생들은 충무로에 가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단편영화를 한다. 그런 상황이다.

걱정되는 지점이라면 독립영화가 현재 시민운동단체들처럼 제도화되는 것이다. 전체 영화의 시스템 안에서 제도화되고 단체화되는 것. 그렇게 되면 독립영화가 아니다. 미국의 B급영화와 같은 시스템 말이다. 그것은 독립영화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 마지막으로 스크린쿼터 운동에 어떻게 참여할 계획인가?

이마리오 : 집회하면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99년에 싸웠던 만큼 열심히 싸우지는 않을 것 같다. 싸움을 하더라도 그 내에서 투쟁과정을 통해 영화인들이 의식적인 부분의 각성을 해야 한다. 스타들 불러놓고 눈물 한 번 흘리게 해서 여론을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면 안 된다. 영화정체성에 대해 각성해야한다. 공부도 좀 더 해야 한다. 그렇게 가지 않으면 끝장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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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 & 스크린쿼터 축소에 대한 한독협 성명서

 

[성 명 서]


정부는 스크린쿼터제를 볼모로 더 이상 국민을 호도하지 말고,

농민의 삶을 파괴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악화시킬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즉각 중단하고,

스크린쿼터제 축소 방침을 즉각 철회하라!!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자유무역협정(이하 FTA)의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하겠다는 발표와 이후 벌어지고 있는 스크린쿼터제 축소 여부에 대한 논란을 보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토론되어야할 핵심 의제는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여부가 아니라 한미 FTA 체결이 과연 정당한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느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스크린쿼터제 축소 방침은 미국이 요구하는 FTA를 위한 것이기에, 지금 사태의 본질은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요구대로 FTA를 체결하기 위해 의당 거쳐야할 사회적 합의 과정을 무시한 것에 있는 것이다. 스크린쿼터제의 축소가 타당한가만 토론하는 것은 본질은 도외시한 지엽적인 것일 뿐이다.



스크린쿼터제만 축소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오는가?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가 자국의 국민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장밋빛 청사진만을 남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크린쿼터제가 한미 FTA의 유일한 장애요소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해 왔다.


기실 정부가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근거로 들고 있는 국내 한국영화의 점유율은 영화의 문화적 속성은 배제된 산업적 속성의 한 단면일 뿐이다. 정부는 점유율 50%가 한국영화의 국제 경쟁력에 대한 지표인지, 국내 경쟁력에 대한 지표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채, 그저 이만하면 경쟁력이 갖춰졌다고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산업이 아닌 문화의 경쟁력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설사 한국 영화가 산업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기반으로 문화 산업의 자유 교역을 주장해서는 곤란하다. 국제적 문화 교류는 자국의 고유한 문화들에 대한 상호 인정에 기반해 공존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스크린쿼터제는 전 세계 영화 시장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 영화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주권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전경련 등 한미 FTA가 체결되길 요구하는 집단들은 교묘하게 스크린쿼터제가 국내 영화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지 못해 실효성이 없다며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이는 자국 영화의 유일한 보호막이라는 제도의 효용성을 외면한 의도적 조작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스크린쿼터제가 할리우드 독과점 시장 안에서 한국영화의 존재를 지키는데 실효를 가지고 있음에 동의한다.


자국의 문화정책은 초국적 자본의 요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책적 판단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스크린쿼터제는 이러한 문화에 대한 자주적 정책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제가 각 국의 고유한 문화가 무차별적으로 통상협상의 대상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국제법으로 제어하자는 문화 다양성 협약이 만들어지는데 주요한 근거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의 체결을 바라는 보수 언론은 이러한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왜곡된 의견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으며, 많은 연예 저널리즘들은 영화인들의 투쟁을 가십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런 왜곡들은 스크린쿼터제의 효용성을 호도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한미 FTA가 가져올 부정적 영향들에 대해 토론할 기회조차 봉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현재 추진하고 있는 망국적 한미 FTA 협상을 즉각 중단하라!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이 초국적 자본과 강대국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한미 FTA의 무리한 체결에 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NAFTA 이후 최대 규모인 한국과의 FTA을 앞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체결할 FTA의 황금율로 생각하고 전례없이 완전한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국이 요구하는 100%에 가까운 시장 개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국민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그저 FTA를 체결하면 대미 수출이 늘어나며,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장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100% 순도의 FTA는 단지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쌀을 포함한 농업 시장의 전면개방은 물론이고, 교육, 보건의료 등 공공서비스 부분들이 시장 개방과 자유 무역이라는 미명하에 전면 개방될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민중의 삶과 농민의 삶의 터전을 붕괴시킬 한미 FTA의 추진에 반대한다. FTA라 하더라도 농업 분야, 문화 분야, 공공서비스 분야 등 모든 부분을 전면 개방될 필요가 없음은 다른 FTA의 사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통상 협상이 필요하다면 국제경쟁력이 있고 통상 협상이 시급한 분야를 가지고 협상 가능한 상대와 추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개방하지 않으면 협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진 미국과 무리하게 협상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최근 농림부가 미국과의 FTA 협상에서 쌀은 반드시 시장개방 품목에서 제외되어야 하고, 축산과 과실류 등 일부 품목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로든 민감성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밝힌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농림부의 발표로 현재 미국과의 FTA 추진이 행정부 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할 정도로 토론되고 있지 못하고 성급하게 추진되고 있는 졸속 행정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부는 미국의 무역촉진권한 시한에 맞춰 무리하게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국민에게 FTA의 긍정적, 부정적 효과를 설명하고 보다 심도 깊은 토론을 제안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 영화 문화 다양성 붕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한국영화 시장이 양극화된 것에는 메이저 영화 자본에게 많은 책임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모든 책임이 메이저 영화 자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진흥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 온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에게도 양극화의 책임이 있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산업 중심의 영화 진흥 정책을 펼쳐 시장의 양극화를 방조해 왔다. 영화 산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산업화의 이면에 나타나게 될 부정적 영향에 대한 대응책은 필요했다.


영화 산업이 독과점 지향적인 산업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영화 시장 양극화와 노동의 문제는 이런 영화 산업의 속성에 의한 것이다. 영화 시장 양극화의 책임은 스크린쿼터제가 가진 정책적 한계가 아니라 영화 진흥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정책 당국의 책임이다. 영화 정책을 책임지는 문화관광부는 이런 상황이 닥쳐오기 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 세우고 실행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영화의 성공에 도취해 온 것은 아닌지 가슴 깊이 반성해야 한다.


스크린쿼터제의 축소로 입장이 선회되었음을 밝히는 자리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은 스크린쿼터를 줄이는 대신 4,000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이 발표에서 기존의 영화 진흥 정책과 차별화된 어떠한 철학도 찾아낼 수 없었다. 문화의 진흥은 단순히 얼마의 기금 지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자본화되고 있는 문화 산업의 영역에 어떻게 공공적 관점을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철학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4,000억원의 기금이 조성된다 하더라도 절대 양극화를 해소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영화 문화를 위한 정책이 산업적 이해에 기반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단순히 예술영화 상영관 100개의 확보, 독립영화/예술영화/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제작 및 배급 지원, 시네마테크의 지원이라는 몇 개의 진흥 사업이 해답이 될 수 없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는 세계 3대 영화 강국 실현이라는 성장주의적 명제에 집작하지 말고, 산업화되어가는 영화를 어떻게 문화적 관점으로 재구성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공공 정책들을 펼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미FTA를 용인하는 대가로 내놓은 4,000억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


현재 문화부가 지원책으로 밝힌 4,000억원의 지원금은 한미FTA의 체결을 위한 대가일 뿐이다. 우리는 농민의 삶과 민중의 삶을 담보로 한 지원금은 땡 전 한 푼 받을 생각도, 계획도 없다. 진정 다양성을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면 필요에 의해 대가 없이 지원되어야 마땅하다. 한국 영화의 관객인 민중의 삶이 파괴될 상황에서 영화인들을 입막음하기 위한 지원금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만약 영화계가 한미FTA를 용인하는 대가로 지원금을 받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집단 이기주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현재 한미FTA 협상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이 얼마나 사회를 황폐화 시켰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냉소적 비난과 한미 FTA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은 사회 양극화의 심화가 심화되어 민중의 삶이 그만큼 더 궁핍하고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사회 양극화를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욱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님을 우리는 확신한다. 필요한 것은 부의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또 다시 국민들이 내몰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현재 상황이 우리를 되돌아보며 보다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다시 내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2006. 2. 15.


한국독립영화협회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

부산독립영화협회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전북독립영화협회

대전독립영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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