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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3/04

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 박상훈 대표 강연(2009. 03. 02)

정치는 '제도'가 아닌 '리더'가 중요하다
 
[박상훈 대표 강연] 한국,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리더가 필요하다
 
안일규
 
 
지난 주까지 7주간 경향신문과 문지문화원 '사이'의 기획으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 강연이 이어졌다. 지난 주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강연에서 발제문과 달리 리더십에 관련해 버락 오바마, 막스 베버에 초점을 뒀다. 이 날 박 대표는 50분 간 강연을 통해서 리더십에 대한 정치이론이 적고 어려운 주제여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한다. 최근 리더십 유형을 설명하는 것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며 그나마 리더십에 대한 정리가 잘 된 것으로 박 대표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라고 본다. 아래부터 박상훈 대표의 강연을 정리한 전문이다.
 
정치의 불편한 진실, 통치자와 피통치자와의 관계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이하 박상훈) : 인간사회에 가장 중요한 본질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다. 많은 사람들은 이걸 빼고 싶다. 통치와 피통치는 관념적으로 썩 듣기 좋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의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리더십이든 통치의 개념을 좋아하기가 어렵다. 통치와 리더십의 문제는 권위주의이전에 인간이 필연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걸 버려버리고 나면 정치학 모두를 버린 것과 똑같다. 통치 또는 리더십 표현이라 하면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걸 말하지 않고 정치를 말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허위의식일 뿐이다. 우리가 대면하기 싫은 진실이지만 무자비한 진실을 피하지 말고 그걸 어떻게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안에 묶어서 잘 다룰 수 있어야 그래도 우리가 정치를 통해서 사회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정의를 생각하면 일반 시민의 통치, 지배, 인민의 주권, 통치와 같이 여러가지 개념을 통해 말할 수 있는데 그건 하나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건 틀리지 않지만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통치와 피통치의 분리라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아니든간에 정치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문제는 피통치가 원하는 또는 동의하는 정치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 사이를 메꾸는 것은 여러제도나 법도 있고, 기구도 있고 조직도 있겠지만 인간의 현실을 제도로 환원해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는 게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정치학을 경제학과 비교해보면 경제학은 체계가 있어서 어느 경제학을 보든간에 주제는 비슷할 수 있고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학은 불가능하다.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연역적인 학문이 아니고 원리와 같이 환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인간의 불확정적인 실천이 정치현상의 중심이다. 공통의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견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정치학은 잘하기 어렵고 아주 수준있지 않으면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정치와 학자가 이해하는 정치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어느 면에서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다도 실력이 더 나을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 학문적인 개념을 덜 쓸 뿐이지 여러분이 고민하는 것과 정치학자가 고민하는 것에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가가 된 것을 본 적 있나? 경제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경제학을 안하면 안된다. 경제정책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나? 경제학은 전문가가 있어야 된다. 정치학자가 뛰어난 정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학자들이 왜 정치를 안했겠나? 뛰어난 정치가가 되는 것이 뛰어난 정치학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만큼 정치가 어떻게 해야된다는 행위존칙이 분명치 않다. 누군가에 의해서 계도되거나 교육받아서 하기 어려운 상당정도는 그 사람의 뛰어난 감수성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자질이 필요하다. 정치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정치학자들이 말하는데 그 중에 7~80%는 틀린 얘기를 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이 주제와 관련되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바마가 거쳐 온 '과정'과 '방식'에 관심가져야
 
박상훈 : 민주주의가 되었다는 얘기는 가장 좋은 매력은 보통사람들이 큰 일을 칠 수 있는 게 가장 좋은 정의라 본다. 누가 정의했는 줄 아나?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버락 오바마 책에 보면 있는데 아주 좋은 정의라 본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정치체제의 이상형이라 하면 모든 갈등이 사라진 어떤 곳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필요와 지식의 자각만 있어도 공동체 속 다수를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으면 된다고 본다. 이번에 오바마는 잘 실현시켰다.
 
정치학을 배우고 싶다면 나는 오바마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고 싶다. 오바마의 사례나 쓴 책 두 권은 좋은 정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어떤 것보다도 훌륭한 교재가 될 것이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나 한국정치에 미치는 방식 등 좋지 않다보니 경시하는 면이 있는데 어느 사회나 통치와 피지배로 설명할 수 없는 다소 그런 게 정치의 현실이기 때문에 오바마의 사례는 매우 보편적인 정치를 다루고 있다고 보고 보통의 사례가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선 소개가 잘 안돼서 오바마의 승리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데 이번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 비율이 몇 %인지 아시는가. 13%다. 오바마는 그 어느 민주당 후보가 얻은 표보다도 많이 얻었을 뿐만 아니라 백인 민주당 후보들이 백인들에게 얻은 표보다도 더 많이 얻었다. 히스페닉을 합쳐도 22%다. 아시아는 2%밖에 안된다. 73%에 이르는 백인 유권자 속에서 당선된 건 쉬운 게 아니다. 오바마의 이번 성과는 격렬함만 동반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혁명적인 일이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목적이 하나인데 표를 많이 얻으면 된다. 통치는 다르다. 목적이 수만가지가 되고 전선도 수천가지가 된다. 우리가 기대한 만큼 오바마는 좋은 성과를 못 거둘 가능성이 훨씬 많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과정은 우리에게 경험적인 현실이고 배울 게 많다. 몇 가지만 더 본다면 오바마가 당선된 뒤 가장 먼저 한 게 무엇인줄 아는가. 시카고에서 직장 폐쇄에 공장 점거한 노조원들에 대해 당선자 신분으로 기자회견에서 뭐라고 했을까. 오바마는 단호하게 점거한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했다. 친노동자여서?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방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고 경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이 있는 것이다. 그럼 가장 먼저 사인한 법안은 무엇일까? 남녀임금고용평등법이다. 그 다음 법안은 관급공사에 노동자 탄압 등의 기업엔 배제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 "정치는 '매우 위험한 것'이자 '인격화'가 중요"
 
박상훈 : 베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막스 베버를 이해하기 굉장히 어렵다. 막스 베버가 1920년에 죽는데 죽을 때 마스 베버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말년에 가서 훨신 진보적이었다. 1919년에 뮌헨 대학에서 당시 군국주의자들이 베버에게 시위를 많이 하고 했는데 베버는 당시 군국주의자들의 과도함에 대해 많이 비판했고 가장 완숙적인 모습을 보였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1919년 가을에 나왔는데 1919년 1월달 강연을 책으로 옮긴 것인데 레디컬한 이들의 봉기 등으로 고조되는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진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강연 요청을 거절했다가 아주 진보적인 정치학자에게 강연 섭외 소식에 베버가 말려서 한 것이다.
 
막스 베버는 정치는 매우 위험한 직업이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합법적인 폭력을 누가 독점할 것인가에 따르는 경쟁이다. 그렇지만 본질은 '폭력'이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은 좋은 뜻으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가지는 파괴적인 속성이라거나 정치란 선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정치의 세계로 과도하게 뛰쳐나가서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게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을,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데 강연문 제일 마지막에 보면 학생들에게 제안을 한다. 10년 뒤에 다시 이 주제를 가지고 논해보자. 여러분들은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실망할 것이고 왜냐면 정치를 통해서 사회, 경제를 많이 바꾸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그것만으로는 왜 부족한지, 그래서 신중함이 필요한지에 대해 한참 얘길했으니 10년 뒤에 얘길해보면 내가 왜 이렇게 얘기했는지 알 거라는 내용이다.
 
막스 베버가 정치에 대해서 두 가지 메시지를 줬는데 하나는 방금 말한대로 정치는 폭력이라는 아주 위험한 무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단순한 것만으론 곤란하고 한 정치가가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에 대해 충분하게, 신중하게 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다. 10년 뒤에 옳다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이런 정치를 하겠다고 강요해선 안되며 다른 한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치가 왜 중요하냐. 리더십에 대한 것이다. 베버는 이 책에서는 충분히 다루지 않았지만 베버의 사회학에서 중심적인 테마는 인간사회는 근대화라는 충격을 흡수하면서 필연적으로 사회는 관료화되고 제도화되고 체계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떻나, 매우 비관적이다. 인간이 이성에 천착하면서 합리적인 개성이 발휘되기보다는 체제 한 부분으로 작동하면은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럼 뭘로 바꿀 수 있을까. 그걸 변화시키는 걸로 생각한 게 정치다. 막스 베버에게서 정치는 합리화다. 이성이 중심인 곳이 아니고 충돌, 열정, 지배욕구가 이뤄지는 곳이다. 인간의 불확정적인 힘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정치의 세계다. 그러면 이 정치의 세계가 그렇다면 그러면 정치 안에서도 질서가 있어야될 거 아닌가? 그것이 리더십이다. 베버는 체계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카리스마라는 것으로 말했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합리적이고 토착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것인데 이성의 반대 개념으로 불러들인 신화적인 용어다.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정당이 될 수도 있고 리더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조직이 될 수도 있다. 정치의 특징을 말하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우리 정치에 무언가를 제도화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베버다운 게 아니다. 베버는 여전히 가장 큰 특징은 인격적인 것이다.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법을 어떻게 만들고 제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실천하느냐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막스 베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지겹도록 물고 늘어지는게 결국 나치즘을 전파한 거 아니냐고 할만큼 막스 베버에 있어 리더십이나 정치적인 것의 핵심은 '인격적'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탁월함이 막스 베버에서 리더십이 핵심이다. 이것이 없으면 정치질서? 글쎄. 베버는 내각제, 비례대표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게 정치를 제도나 추상적인 것에 의해 비유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가 작동되는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없는 현 정부의 정치와 리더십은 바뀌어야
 
▲ 지난 25일 서울 동교동 소재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위기를 극복한 리더십"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대자보
박상훈 : 그래서 막스 베버는 민주주의는 두 가지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는 리더십 없는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있는 리더십이다. 그런데 이걸 체계적으로 자세히 하지 않았다. 다만 막스 베버는 리더십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말한 것은 인격적 요소의 내용, 윤리성, 끌리는 힘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이 정치체제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파벌의 득세라 봤다. 전체적인 질서를 운영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작동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부분적인 것들, 파벌과 이해관계, 권력추구 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묻고 싶은 건 리더십이라는 것이 없이 합리적인 제도와 규범으로 정치를 할 수 있을까?
 
막스 베버는 책에서 마지막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증명할 수 있는 요인, 그것이 리더십이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로 하자면 진보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를 평화의 비용으로 생각하고, 기업을 돕는 것도 좋지만 IMF 이후 지난 10년동안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경제적 위기가 크다고 생각하는 게, 보수에게 사회통합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만큼,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이익만이 아니라 보통의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도 생각하자고 하면 리더십이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기득세력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회전체적인 것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리더가 있을 필요가 없다. 리더십이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파당적인 요소를 뺄 수 없지만 사회전체적인 이익을 병행할 수 있는 사회전체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사회의 중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은 공익적인 요소를 병행시킬 수 있는 일을 지도자라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보수세력이 집권했다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듯 보수적이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거기서도 좋은 가치가 있고 병행할 수 있는데 그런 게 없이 생으로 보수라면 문제다. 진보도 마찬가지다. 사회전체의 지도자로서는 부족한 것이다. 사회전체적인 것이 병행될 수 있는 것을 기대했던 거지 지금대로라면 보수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가공할만한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의 적나라한 이익들이 관철되어도 좋다고 해석하는데 이건 문제가 있다. 사회 부분 이익을 전체 이익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명박 정부는 정치와 리더십에 대한 기본원리와 배치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교정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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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말하는 건 &quot;정치의 문제&quot;

'다시' 발전을 말하는 건 "정치의 문제"
 
[책동네] 경제위기, 신자유주의 이후를 말하는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1)
 
안일규
 
 
지속적인 자유시장이 선진국의 비결?
 
▲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 아일린 그레이블 덴버대 교수의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부키
부유한 국가들은 자유무역과 금융 자유화로 번영했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은 20세기 초 산업화된 국가들이 채택했던 보호무역주의가 실패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세계는 모두가 점진적 규제철폐와 자본 이동의 자유화로 가게 될 것이라 한다. 이 대목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금융자유화는 시장을 통한 투자자금의 배분, 투자자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보호, 투명성 유지를 담고 있는데 국제적 자본 이동을 시장 자율에 맡기게 하는 일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하는 정책입안자들의 성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도 주장하는데 그들은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이 막대한 예산적자와 외채, 높은 물가 상승률 등 경제혼란을 유발할 뿐이라고 본다. 90년대 개도국들의 경제위기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유치산업보호', '수입대체산업화', '국유화(국영기업)' 등의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은 옳지 않은 것일까? 이에 장하준 교수는 산업화 성공의 '비밀'이 오늘날 산업국가들이 초기 산업화 이후에도 운용한 개입주의정책에 있다고 말한다. 18C 영국과 2차대전 이후 일본, 유치산업보호정책의 지적인 모국인 미국 등을 예로 든다. 특히 미국은 '슈퍼 301조' 조항 하나로 전세계적인 규제국가에 해당된다.
 
장 교수는 시장의 나라 미국마저 산업정책에 의존했다고 하는데 국방, 제약 등 연구개발 부문에 국가가 막대한 투자와 지원을 했으며 농업 지원금, 트랜지스터, 레이더, 컴퓨터, 핵분열, 레이저 기술, 인터넷 등의 개발도 연방정부의 국방 관련 보조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다고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대까지 국제자본이동이 강력하게 통제되었던 시기에 자본의 갑작스런 이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안정과 자국경제를 보호하고자 했고 정책입안자들이 금융위기 방지와 국익을 위해 시장개입과 재조정을 서슴치 않았다. 얼마 전 시티은행을 사실상 국유화시킨 미국도 이에 알맞은 사례다.
 
개도국이 발전하는 것도 잘 설계된 국가개입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대다수 개도국들은 자유시장정책을 펼친 80년 이후부터 2차대전 이후 개입주의 시대 때 더 우수한 결과를 만들었다. '한강의 기적'이라 하듯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금융안정, 최근 중국과 인도의 급격한 발전도 적극적인 국가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다른 체제들은 줄곧 실패하고 신자유주의만 성공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만이 생활 수준을 높이고 민주주의의 투명성을 높인다고 한다. 시장의 역할을 강화하고, 민간부문과 사적소유권을 강화하며 균형 예산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낮은 인플레이션을 이뤄야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정부의 역할 축소는 예산 적자와 물가상승에 대한 압박을 줄였으며 시장경쟁과 효율성, 민간부문의 주도력, 기업가정신의 활성화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개도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어떻게 볼까? 그들은 시장 경제와 연관된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치적으로 독재와 부정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주의, 바람직한 지배구조, 건전한 경제정책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국가의 정책 수행과 비즈니스 관행도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게 한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개도국들의 잦은 금융위기에도 신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충실하지 못해서 일어났다며 더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그럼 신자유주의가 아직 유효한 것일까? 그들이 주장하는 '경제 성장'부터 실패했다. 90년대에 이미 최악의 저성장을 보여줬다. 이 책에 의하면 50~80년대 개입주의 시대보다 90년대 신자유주의시대에 더 높은 평균 성장률을 보여준 나라가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뿐이다. 아르헨티나는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로 급격한 몰락을 가져왔고 칠레는 보조금 정책과 자본 이동 통제 정책 등 신자유주의 정책과는 거리가 있었다. 산업국가들 또한 1인당 연간소득 성장률이 60~80년대 3%에서 80~00년대에 2%로 하락하고 그동안 개도국은 3%에서 1.5%로 떨어졌다. 그나마 비 신자유주의 국가였던 중국과 인도의 고성장때문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도입 국가에 미친 악영향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신자유주의 도입 그 자체로 발생하는 사회 경제적 비용마저 수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파이'를 키움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과 달리 은행, 환율시스템의 취약성을 악화시키고 금융위기의 상시화와 불평등, 빈곤의 확산을 가져온다. 사회적 지출 억제로 인해 삶의 기반을 잃은 사람들에게 보상할 수단 조차 없다.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신자유주의는 "조세 기반을 줄이고 균형예산에 우선순위를 두며,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기업과 투자자에게는 과세하기 힘든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국가 내부와 국가들 사이의 불평등도 심화시키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제 민간 자본의 흐름은 생산적인 경제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자본이 풍부한 북반구 국가로 집중되는데 2000년에는 외국인 직접투자 총액 중 15.9%와 금융자산의 국경 간 총 투자액 중 5.5%만이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로 갔을 뿐이다. 남반구에 투자된 금액마저 일부 특정 국가에 몰렸다.
 
이로 인한 국가간 불평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는데 60년대 세계부유층 20%가 가장 가난한 20%보다 총소득이 30배나 남았으나 80년에는 45배, 89년에는 59배, 97년에는 70배로 높아져 갈수록 심해졌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득 집중현상의 급속 심화로 국가내 불평등도 심해졌는데 신자유주의로 체제를 전환한 국가들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OECD 국가들, 영미형 국가들이었다.
 
영국의 상위 1% 계층 차지 소득 비중이 76년 5.37%에서 98년 9.57%로 늘어났고 미국은 상위1% 가계 세후 소득이 79년에서 97년까지 157%나 증가한 반면 중위계층 가계 소득은 10% 증가에 그쳤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최상위 부유층 소득은 높아진 반면 중산층은 위축되고 극빈층은 더 가난해졌다. 반면 스웨덴은 하위 10% 가계소득이 미국 하위 10%보다 6% 정도 높으며 94년 1일소득이 11달러 미만인 인구가 6%에 불과해 14%에 달한 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책임과 다원주의, 국가의 자율성의 약화를 가져온다. 특정국가가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전략을 추진할 때 그 나라로부터 투자금을 회수할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서 국가 정책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게 만들고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금융위기를 통해 국가 운영에 IMF 등의 국제기구의 영향력을 크게 높인 것은 미국과 국제금융집단들의 이해관계를 국제기구를 통해서 내정간섭하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필연? 신자유주의=세계화?
 
신자유주의자들은 흔히 세계화는 19세기에 시작된 통신, 운송혁명의 산물이라 한다. 그들은 "세계화가 기술진보의 산물이라면 이런 추세를 늦추거나 거스르려는 노력은 부질없고 시대역행적"이라며 세계화의 지연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막아 지구적으로 생활 수준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성장률의 감소, 개도국 빈곤의 영구화를 가져온다고 한다. 투자와 비즈니스의 자유를 제한한 국가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버림받을 것이란 경고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진실은 이와 달랐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단절될 수 있다. 세계화는 국가 수준에서 다양한 개방정도와 개방유형들로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으며 50~60년대 개도국 산업국가들은 수많은 규제 속에서도 급속한 세계화를 진행해왔다.
 
'신경제'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최고다?
 
신자유주의자들은 90년대 미국의 '신경제'를 미국식 경제모델의 역동성과 우월성의 징표라 말한다. 90년대 미국경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생산성 증대, 낮은 실업률과 저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는 게 그들의 주장. 반면 유렵과 일본은 개입주의적 경제 등이 실패했고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거나 미국식 경제 개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이 책은 '신경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미국의 GDP 평균 성장률은 후퇴했고(70~73년 4.8%->82년~86년 4.4%->91년~95년 2.7%) 90년대 후반에 높은 성장률을 보이긴 했지만 딘 베이커가 말하듯 미 정부의 측정기법 변화에 따른 것이다. 생산성 증가 또한 GDP 평균 성장률과 마찬가지여서 90년대 후반의 생산성 증가 또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없다.
 
결정적으로 90년대 미국의 경제호황이 일반 미국 국민의 삶에는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고 미 주식 시장의 거품 붕괴로 기업 부패와 왜곡된 자원 배분 등 미국경제의 혼란스런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특히 이 시기에 대폭 확대된 스톡옵션과 같은 경영자 보수 인센티브 제도로 인해 경영자와 일반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가 70년 39배에서 99년 1천 배로 자원배분왜곡 현상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다.
 
90년대 미국의 급속 성장 또한 영미형 국가의 우위를 보여줄 수 없다. 90~00년대 영미형 이외의 국가들 성장률 또한 높았기 대문이다. 싱가포르는 이 기간에 5.3%나 성장했으며 노르웨이 3.1%, 핀란드 2.4% 등 크게 뒤지지 않는 경제성장을 거뒀다. 이에 장 교수는 영미형 국가들이 80~00년 신자유주의 시대에 거둔 경제성장률이 60~79년대 개입주의 시대와 비교해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모델은 끝났고 영미형 모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동아시아 모델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특이조건 때문에 성공한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이 특수한 모델은 다른 지역에선 사용할 수 없으며 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일본 경기침체로 더 이상 쓸 수 없는 '실패한 모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에선 신자유주의자들이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특이조건으로 내걸은 다섯 가지의 특징을 모두 반박한다. 유교문화 공유로 인해 인재들이 관료직을 선호한다는 데서 그동안 동아시아 국가들이 관료가 뛰어나지 못해 국가가 공무원의 경쟁력 강화에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사례들을 제시했다.
 
인종 단일국가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규정과 달리 싱가포르는 '다민족' 국가이며 타이완은 두 민족의 대립관계에 놓여있다. 그나마 한국이 단일민족이나 높은 수준의 지역갈등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이)인종 단일국가여서 국가적 합의가 용이하다"는 건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다. '천연자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19세기~20세기 초반의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 국가들'이 자원이 풍부했으며 일본 식민주의의 혜택에 대해서 이 책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당시 한국보다 식자율이 높았던 아프리카 국가는 적어도 12개 나라가 넘는다"며 반박했으며 원조 등으로 인한 호의적인 외부 환경이 동아시아 국가들에 조성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국방비 부담과 젊은이들의 군복무 등으로 인한 희생, 한국전쟁 등을 들며 사실이 아님을 보여줬다.
 
다만 보호 무역과 지적재산권에 관대했던 국제환경의 덕택을 입은 건 저자 장 교수도 인정한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이 추구한 전략의 상당수가 GATT 체제에서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어서 허점을 중심으로 활용했던 만큼 현 WTO 체제에서도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한다. 장 교수는 개도국들에게 구체적으로 "WTO와 다른 다자간 협정에 압력을 가해 오늘날의 산업 국가들이 과거에 효과적으로 활용했던 비신자유주의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며 방법론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또다른 주장인 영미형 신자유주의가 보편적 모델이란 것에 대해서도 이 책에선 반박한다. 영국의 식민지와 노예, 아편무역을 서슴치 않았고 지적재산권 침해에 앞장선 역사를, 미국의 광대한 영토와 대규모 이주노동자, 부존자원과 천연자원의 풍부함을 따진다면 보편적인 모델이 아니란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80~9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던 여러 국가들이 그 변화에 실패한 바 있다. 이 부분에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직 하나의 발전경로만이 보편적'이 아니라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하거나 촉진할 수 있는 다양한 범위의 정책들을 검토해야 된다는 것이다.
 
정치인과 공무원은 무조건 나쁘다? '정치적 독립'과 '전문 관료'만이 답?
 
신자유주의자들은 흔히 경제정책을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맡길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공공부문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공무원의 자기 이익 추구를 공익으로 연계시킬 제도적 인센티브가 결여되어있다고 본다. 이는 민간부문의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사적 이익과 사회적 공익이 결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개도국에는 미성숙한 민주주의와 법률 시스템, 불투명한 제도와 감시체제, 미비한 반부패 정치와 무능만이 존재해 정부의 부패와 비효율성과 직결돼 경제발전을 저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개도국에서 정책기관의 '정치적 독립'과 '전문 관료'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정책입안을 중앙은행, 통화위원회 등 정치적으로 독립된 강력한 정책기구를 전문 관료에 맡겨 효율성을 높이고 국내외 투자자의 신뢰도를 높여야 된다고 한다. 이에 IMF, 세계은행, WTO 등 국제기구들의 개도국의 경제정책의 투명성과 수준 향상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많은 국가에서 공공부문과 공공 기관이 경젲발전에 중요한 위치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공무원은 본래 부패하거나 정책 결정과정을 왜곡시킬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책결정권한은 비선출적인 전문관료에 맡기는 것이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며 책임성과 투명성과 반대로 가는 것이라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IMF와 세곙느행은 자신들의 의제를 결정하는 강대국 정부와 국제금융집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독립된 중앙은행과 통화위원회는 금융집단의 이해를 위해 움직인다.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와 대기업들은 WTO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장기적 경제성과 향상과도 거리가 멀다. 사회취약계층의 경제적 부담이 높아지는 데다 투자자, 대부자, 기업들의 요구가 공공의 이익보다 우선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의 문제가 만든 현재, 결국 '정치의 문제'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작금의 세계경제위기. 몇 년전부터 시작되었던 '워싱턴 컨센서스 이후'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가 더 탄력받고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교리를 벗어나 책 제목처럼 '다시 발전을 요구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또한 세계화 방식 중 하나이며 그동안 피해를 입어왓던 개도국들은 정책적 선택을 다양화함으로서 '자국을 위한 세계화'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안은 없다"는 지나치게 위험할 정도로 그릇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정치의 문제다. 신자유주의 파탄으로 몰아넣은 것도, 지금 신자유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것도 다 '정치'다.
 
* 장하준 교수와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의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의 서평은 두 편에 걸쳐 게재되며 2편은 이 책의 '신자유주의 극복 정책 대안'을 주제로 3월 중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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