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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다중>에 실린 추기 요약

 

네그리/하트: “다중”은 정치적 조직의 형성과 정치적 기획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좌파를 부활하거나 개혁하는, 혹은 정말로 재발명하는 과제에 기여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다. “다중” 기획의 비판들을 검토하기 전에 우리는 이 개념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1)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본 다중: 이는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역사적 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스피노자가 절대적이라고 부르는 자유를 창조하는 다중이다.1)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나 인류는 권위와 명령을 거부해 왔고, 특이성의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표현해 왔으며, 무수한 반란들과 혁명들에서 자유를 추구해 왔다. 이 자유는 물론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장애들과 한계들을 부단히 극복함으로써만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목적을 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항상 영속적인 현재 속에서 자신의 자유와 능력을 실현하고 있는 다중의 표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2)역사적 다중 혹은 아직 아닌 다중: 이 다중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즉 만들어져야 할 다중이며, “정치적 주체화”로서의 다중이다. 하지만 이 두 유형의 다중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다. 다중이 이미 우리의 사회적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잇지 않다면 우리는 다중을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쌍의 비판: 1)다중은 자생적 정치조직관에 입각해 있다.(즉 아나키즘이다), 2)다중은 새로운 종류의 전위주의다.(즉 권위주의이다.)

네그리/하트: 1)에 대하여: 다중은 자생적 정치조직관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정치조직을 당과 그것의 헤게모니, 중앙집중적 지도의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다중은 지도와 아나키 사이의 양자택일에 제한되지 않는다. 다중의 조직화는 아나키즘적이거나 자생적이지 않으며 특이한 사회적 주체들의 협력을 통해 출현한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은 명령과 지성의 어떤 중심성에 의해 지휘되지도 않고 개인들 사이의 자생적인 조화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사이 공간에서, 소통의 사회적 공간에서 출현한다.

2)에 대하여: 이 주장은 주로 해체주의나 포스트콜로니얼 진영에서 제기된다. 왜 “다중들”이 아니라 “다중”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와 특이성의 자유로운 표현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우리는 “공통되기”가 실제적인 차이들을 부정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다중 개념은 단수적인 것과 복수적인 것 사이의 양자택일을 파괴한다. “다중”은 곧 “다중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치적 기획 속에서 우리는 “다중들”보다 “다중”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중이 구성적인 정치적 역할을 맡고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결정을 내리고 활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수인 “다중”은 그러므로 어떤 통일성이 아니라 다중의 공통적인 사회적,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둘째 쌍의 비판: 1)다중은 산업노동계급을 무시한다. 2)다중은 결국 노동계급만을 중시한다.

네그리/하트: 1)에 대하여: 이들은 다중론이 산업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숫자가 감소한다는 주장을 한다고 오해한다. 우리는 산업노동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산업노동의 헤게모니가 비물질노동에 밀려 헤게모니적 지위를 잃었고, 이 비물질노동이 그 자신의 특성에 따라 여타의 생산부분들과 사회를 변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산업노동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이 패러다임 내에서 그렇다.

2)에 대하여: 이 비판의 첫 번째 형태는 우리가 기존의 산업노동계급이 아니라 비물질노동자들을 또 하나의 전위로 내세운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비물질노동에 대한 강조가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다중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노동의 일반적인 소통과 협동을 형성하는 경향이 현재의 조건들에 들어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 비판의 두 번째 형태는 다중 개념이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등의 다른 사회적 차이와 위계의 역할을 보지 않는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삶정치적 생산”의 맥락에서 경제적인 것,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사이의 분할은 흐려지고 있다. 다중은 그러므로 삶 전체에서 나타나는 각종의 특이적인 것들의 소통, 공통-되기를 향한 정치적 실천을 이끈다.


셋째 쌍의 비판: 1)헤겔주의자들-다중은 불충분한 변증법이다. 2)해체주의자들-다중은 결국 변증법적 일자다.

네그리/하트: 1)에 대하여: 이들은 제국과 다중을 마치 일자와 다자, 혹은 변증법적 테제와 안티테제의 관계로 바라본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다중의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 제국 없이는 다중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이성과 다수성의 동학이 일자와 다자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제국과 다중은 대칭적이지 않다. 제국이 다중과 다중의 사회적 생산성에 의존하는 반면 다중은 잠재적으로 자율적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창조할 능력을 가진다.

2)에 대하여: 이들은 “당신들은 서발턴을 망각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모든 동일성은, 심지어 다중조차도, 그 나머지 것에 의해서, 그 외부에 있는 사람들 - 이들을 배제된 자, 비천한 자, 서발턴, 타자 등 무엇이라고 부르던 - 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동일성-차이의 배제적이고 제한적인 논의가 특이성-차이의 개방적이고 확장적인 논리로 바뀔 수 있다는 것과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제한적이고 불확정적인 성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비판: 다중론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론이다.

네그리/하트: 우리는 다중이 단순히 우리의 현재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이고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오히려 다중을 위한 구체적인 조건들이 우리의 사회적 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고, 또 다중의 가능성이 그러한 경향에서 출현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또 다른 세계, 더 민주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러한 세계를 향한 욕구를 품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다중은 그러한 욕구를 위한 하나의 상징이다.


1) 스피노자, <에티카> 5부와, <국가론>(정치론) 1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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