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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컴터를 연구실에 둔 채 오랫동안 아이폰으로만 인터넷을 한 지라, 긴 글을 통 쓰지 못했다. 대신 여러 메모들을 해 두어서 기록 차원에서 남겨둔다. 시간 날 때 긴 글로 만들어야겠다.
1. 엘 시스테마
노다메의 세계와 엘 시스테마의 세계를 대립시켜야겠다. 내 안의 그 몹쓸 부르주아선망의 한 부분을 무너뜨려보자긔.
#엘 시스테마_ 재능은 타고나지 않고, 연습은 고독하지 않다. 악기를 배우기전에 먼저 오케스트라를 배운다. 천재적 개인의 음악이 아니라 집합적 감응의 음악. 이것이 오히려 앙상블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게 아닌가.
#엘시스테마_ 최연소로 LA필 상임이 되었다는 두다멜은 수십만명의 커다란 집합적 음악실천의 한 일각이라는 생각. 그런점에서 국가가 천재관리를 하는 "사회주의적 천재"와도 다른 "코뮤니즘적 천재"
#엘시스테마_시몬볼리바르유스오케의 연주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꿈틀댄다. 게다 그들의 음악엔 위계가 없다. 모차르트는 피아졸라보다 위대한가?
#엘시스테마_ 그러나 그 기이한 평등주의는 선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연주함으로써 강림한다. 콘서트는 오케뿐만 아니라 관중의 함성과 박수까지 더해져 음악이 된다. 지휘자부터 A석까지 하나의 평면이 창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홀 전체가 출렁인다!
#엘시스테마_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http://bit.ly/cUydLT 보고 있음 심장이 터질 거 거 같다.
#엘시스테마_ http://bit.ly/9tjL9E 좀더 긴 동영상. 아까 올린 것과 같은 공연.
#엘시스테마_ 아아아아 오늘 하루종일 빠져서 허우적대주겠어ㅠㅠ Gustavo Dudamel at the Proms - Arturo Márquez - Danzón Nº 2 http://bit.ly/bo0ksh
#엘시스테마_ 쇼스타코비치를 열대음악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무산계급의 청년들. http://bit.ly/9XA70m
2. 경찰
경찰은 정권을 지키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킨다. 그것의 이름이 '질서'다. 오늘날 질서라는 단어는 경찰과 더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저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정동길 지나는 이들의 촛불을 굳이 꺼뜨리고 보내는 이유다.
3. 신적 폭력의 구원론
1) 벤야민은 "죄를 지우며 그것을 용서하는 폭력"을 신화적 폭력으로, "면죄하는 폭력"을 신적폭력으로 부른다. 전자는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하며 권력을 정립하는 폭력이며, 후자는 그것을 해체하는 폭력이다.
2) 그렇다면 "값없는 은혜"의 종교라는 기독교 신자들이 누구보다도 죄에 관해 생각하고 입에 달고 다니며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3) 해방하시는 신은, 삶-의-형식을 제공하는 성서의 신은 기독교인들에게 법-의-신이 되고 만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의 정체성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신만이 권력자로 높여진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한 켠에서 몰래 함께 높여진다.
4) 신은 신화를 깨뜨리며 도래한다. 죄인의 정체성이 깨어지는 데서 우리는 신을 만난다. 예수가 위대한 건 그가 신의 제 이 위격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그가 가는 곳마다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차원에 있다.
5)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 사건은 반복된다. 죄인의 낙인이 해체되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오늘날 죄인의 낙인은 무능력의 담론과 함께 비정규직, 미혼모, 동성애자, 이주민, 청소년.... 들에게 찍혀 있다.
6) 그런데 이 "죄인의 낙인"의 해체를 체제 혹은 신화(둘은 언제나 함께다.)는 "폭력"으로 경험한다. 이 폭력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폴리스다. 수단으로서의 비폭력-폭력 논의는 사실 이들에겐 무의미하다.
4. 북조선과 남한기독교
우리민족끼리 @uriminzok 트윗을 보고 있자니 기독교가 왜 그렇게 북한을 싫어하는지 확실히 알겠다. 하는 짓이 서로 똑같거든. 예수님 찬양이나 장군님 찬양이나. 킁.
똑같은 형식에 내용 아무리 바꿔도 구원 못받는다. 장군님이 예수님으로 바껴도, 그 반대도. 형식 자체가 바뀌어야지.
장군님 위해 메스게임 준비하는 거랑 두란노에서 티 바지에 넣어입고 춤추는 거랑 뭐가 달라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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