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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장례를 치루면서.

무덤을 다지면서 상여꾼들이 부르던 노래

 

 

몸도 마음도 여러가지로 힘들고 아팠던 지난 두달은 어쩌면 마지막을 힘겹게 보내고 계신 할머니를 기억하라는 신의 배려였던지도 모르겠다. 목요일 점심, 살짝 몸살기가 있던 몸을 힘들게 일으켜 세수하고 나가려던 무렵,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불렀다. 동생한테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고 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그 순간 느껴진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최근에 나는 계속 일상에 지쳐 있었고, 월요일마다 의욕있게 한 주를 시작했다가도 주의 중반이 넘어가면 공부도,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손에 잡지 못하고 겨우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잠시 그런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그리고 지난 1년 반 동안 병상에서 움직이지도, 말도 못한 채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셨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슬픔이나 후회는 그 다음이었다. 

 

3일 동안 무척 바쁘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주 오랜만에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상이 모두 끝날 때까지 함께 일하면서 서로 위로하고 또 우리 세대에 맞이한 새로운 가족들(그러니까 내 아내라던지, 매형이라든지)과 '화학적'으로도 결합하는 과정을 겪었다. 아버지께서 퇴직하셨음에도 500명 가까운 손님들이 오셔서 정신없이 일정을 치뤄야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아주 차분했다. 23년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려보면 한국의 장례문화와 주거문화가 그간 얼마나 빠른 속도로 변화했는지 놀랄 뿐이었다. 그 때는 동네에서만 수백명이 찾아왔고, 그 모든 손님을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 맞이했었다. 가족들이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장례는 전형적인 한국식으로 치뤘고,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보았던 '한국식' 잔치(?)였던 듯 하다. 이번엔 잘 준비된 병원 장례식 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신교 의례로 장례를 치루었다. 손님들도 대부분 상주들과 여러가지 사회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었고, 의례적인 곡 소리는 역시 의례적인 찬송가 소리가 대신했다. 음식을 함께 준비한 동네 아주머니들, 할머니들 대신 상조회사와 병원의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보면서 새삼 내가 이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한 자리에 뿌리박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연을 잘 맺고 관리하면서 살아온 동생의 손님은 - 물론 그가 한 회사의 정규직 사원이라는 점도 한 몫 했지만 - 꽤나 많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여러가지 모양으로 떠돌아 다닐 테고 이렇게 집안의 대소사를 지낼 때는 동생의 힘을 많이 빌리겠구나 싶기도 하다. 살아온 방식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굳이 그 모양새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인생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분명하고, 그걸 기분 좋게 부담할만큼 나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 같다. 

 

힘든 장례일정이었지만, 선산에 할머니를 묻어드리고 온 마지막 날은 참으로 빛나는 하루였다. '기독교 식으로' 장례를 치룬다는 이유로 상여에 굳이 여러 색깔의 꽃들을 빼고 부적 대신 조금은 촌스러운 성화와 성구를 붙인 게 오히려 외설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상여를 매온 동네 분들과 가족들이 함께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그리고 햇볕 따뜻하게 비추이던 무덤 앞에서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누고 매장의 의례를 치루는 그 시간은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 속의 풍경 같았다. 상여꾼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덤의 흙을 다지면서 부르는 노래는 찬송가보다도 우리 마음을 더 위로했다. 새끼 줄에 지폐를 한장씩 꼽아 건내고 마지막엔 손자 손녀들이 함께 무덤 위에서 흙을 다지면서 장례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았다. 아버지는 마지막 인사를 하시면서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리셨고, 우리도 그랬다. 그리고 따뜻한 봄의 햇살 속을 천천히, 가벼워진 마음으로 내려왔다. 

 

내가 요즘 체력이 좀 더 좋았다면 이 모든 과정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거란 후회가 살짝 남는다. 감정을 느끼고 유지하는 것조차 몸의 힘에서 나온다는 걸 알았다. 내 영성의 색체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의 색체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 내가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건 큰 숙제로 남았다. 다행히 장례를 주관한 교회의 예배는 전반적으로 성숙한 편이었지만, 위로 예배를 드리러 온 교회 중 한 두 모임은 그 설교를 아예 듣고 싶지 않을만큼 유치했다. 하지만 내가 - 특히 가족의 경조사를 치루기 위해 - 교회를 완전히 떠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유럽처럼 교구와 행정단위가 별로 다르지 않은 곳에서야 일평생 교회를 떠나 있다가도 가족의 의례를 위해 교구의 사목자들을 모실 수 있겠지만 한국처럼 신앙생활이 개교회 단위로 이루어지는 곳에서 어찌해야 할지 여러가지 고민이 남는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조금 버겁기는 하다. 회복이 조금 더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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