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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6/02
    첨밀밀을 다시보다 -1
    Navyblue

첨밀밀을 다시보다 -1

6시 45분 이른 아침에 불현듯 눈을 뜨고는 어딘가에선가 받아온 첨밀밀 파일을 열었다. 꽤 오랫만에 보게 되는 것 같다. 왜 이걸 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그냥 돌아가는 동영상 파일을 멍청히 보는 와중에 머릿 속으로는 쉴새없이 여러가지 생각이 지나간다. 이제 이민 6년차. 부푼 희망을 안고 캐나다 땅에 도착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것 중의 하나가 이민이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이민이란게 그렇게 문턱이 높지 않았었고, 운동이라고 할 적에 익혔던 서류위조기술(?) 덕분에 대학교 중퇴, 곧 고졸의 학력으로 무리없이 영주권을 따내고, 바닥에서 익혔던 기술 덕분에 쉽사리 취직을 하고 먹고 살게 되었다. 97년 운동판에서 건강을 이유로 한 발 물러서게 됐을 땐 이렇게 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아뭏튼 그 때 가장 당혹스러워던건 20대를 운동판에서 보낸 30대 초반의 고졸 남자가(경력도, 사회에서 인정해 줄 수 있는 경력말이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습게 살아왔었던가를 잘 알 수 있었다. 그간 단 한 번도 보통 사람들처럼 돈 벌어 밥먹고 사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30대 초반이 되도록 남이 먹고 사는 문제로 싸워온 인간이 자신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선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물론 일용직으로 일을 하려면야 자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그도 나이가 걸리는 곳이 많았다. 어중간 했다는 것이다. 40을 넘기지도, 20대인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그야 말로 최악이었다.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하든 활동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만 하면 되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만을 만들어내면 되는 문제였지만 이젠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벌거벗겨져 광장 한 복판에 내동댕이 쳐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돈 없는 문제야 우리 집안이나, 일가친척이 엇비슷한 문제였고, 고장난 몸이 어느 정도 수리가 되자 먹을 걸 만들어 내야만 했다. 어찌어찌 일을 구하고 살기 1년여만에 이민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뭐 특별히 뭔가를 할 수 있다거나 공부를 해야겠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한국에서 도저히 살아나가기 힘들었던 것, 또 당시 마누라 또한 활동가 출신으로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편입되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는 점도 뭔가 획기적으로 먹고 살 길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99년 캐나다에 랜딩, 직장을 잡고, 먹고 사는 일을 보통 사람들처럼 위장한 채 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동안 마누라는 ex-wife가 되었고, 난 또 한 번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두어달 전 두 명의 활동가가 안식년 기간 동안에 나 사는 곳에 들렀다 갔고, 지난 주에는 베네주엘라로 떠나는 후배가 한 명 머물다 갔다. 수많은 생각들이 여전히 머릿 속에서 웅웅거리는 동안에 난 첨밀밀을 이른 새벽에 다시 보고 있다. 그들의 희망과 절망을 눈 앞으로 스쳐보내며 내 인생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제 나갈 시간! 저녁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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