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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29
    짐을 버리며(2)
    Navyblue
  2. 2005/06/29
    오랫만에 사람을 만나서(1)
    Navyblue
  3. 2005/06/19
    노동계급에게 역사란
    Navyblue
  4. 2005/06/08
    [펌]bella ciao(안녕 내 사랑) - 이태리 빨치산 민요
    Navyblue
  5. 2005/06/08
    [펌]적군 합창단 구 소련 국가와 가사 해설
    Navyblue
  6. 2005/06/07
    뒤척뒤척....
    Navyblue
  7. 2005/06/07
    2005년 캐나다 노동조합의 상태
    Navyblue
  8. 2005/06/07
    캐나다 노동운동사-2
    Navyblue
  9. 2005/06/06
    캐나다 노동운동사 -1
    Navyblue
  10. 2005/06/04
    첨밀밀을 다시보다 -2
    Navyblue

짐을 버리며

이사를 준비해야 한다. 그 덕에 그나마 쌓여 있는 짐을 배낭 두 개로 줄이기로 결심했다. 좀 더 '도'에 이르르면 배낭 한 개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며... 작은 방에 널려 있는 물건 중 버릴 것들을 고르며, 뭐 참 별 게 다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내 맘도 지저분해 있었으리란 생각도 했다. 짐을 버리는 김에 근심도, 걱정도 다 버리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확 다 버려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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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사람을 만나서

떠나와 산 지 6년이 되어간다. 그간 참 많은 사람을 낯선 땅에서 만났고, 헤어졌고, 부대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 살기 힘들고 고달픈 이 즈음에 그나마 먼 곳에서 벗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좋은 사람을 소개로 새로 만나기도 해서 즐겁다. 건조하고 메마른 삶에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말 통하는 사람과 만나 되지도 않은 수다라도 모국어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긴장하지 않고, 감추지 않아도 되고, 드러내고 말하기 참 오랫만이다. 즐거웠던 주말이었다. 바쁜 사람 붙잡고 귀찮게 하지 않았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좀 있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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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에게 역사란

Historical information about employers is non-value-added information so we destroy it. - A General Motors manager When you come right down to it, history is the only teacher workers have. - David Montgomery This is my faith. For all these years we have advanced because we, the people, do learn. - George Burt The Canadian Autoworker - birth and transformation of a union 의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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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bella ciao(안녕 내 사랑) - 이태리 빨치산 민요

/* 요 며칠간 지금은 남미에 가 있는 후배의 블로그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글들을 읽으며 다들 참 다양한 고민과 관심꺼리들을 갖고 있구나, 그리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결론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하고 감탄하는 중이다. 워낙에 빠릿빠릿한 인간이 못되었던 나는 진보넷에 들리면서, 또 사람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참 난 심심하게 살아왔지 않은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다들 다양한 분야들에 관심을 갖고 있고, 또 관심을 가진 분야를 집요하게들 파헤치는 것 같다. 특히 음악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음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앨범이 끝이었으니까. 그  뒤론 거침없이 뒤로 회귀... 아저씨 취향으로 가고 있다. 김추자의 노래들이나, '봄날은 간다' 등등...

 

  다시 원래로 돌아와서, 최 모군의, 아니 이제는 최 모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그 친구의 블로그 글들을 살피다가 "The bells 그리스 레지스탕스 군가_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빌려온 글 2004년 07월 28일 20:42 "라는 글을 발견하고 문제의 링크 고니소리로 이동.

  이 분의 글을 살피던 중,  예전에 영어버전의 인터내셔날을 배워볼려고 찾아다니다 발견한 싸이트에서 인상깊게 들었던 노래 - bella ciao에 대한  해설과 다양한 버전의 같은 노래들이 있어 옮겨 적어둔다. */

 

/** 원래 인상깊게 들었던 이 노래의 다른 버전은 여기서 찾아 들을 수 있다. 아래 링크된 노래는 무언가 열린음악회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 듯한 분위기가 나지만 내가 찾아낸 노래는 마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느 산골 할머니의 구전 민요를 채록해 들려주는 듯한 분위기(?)가 난다. ^^; 시간이 난다면 모두 한 번 들어보고 비교해 보시길... **/

 

/*** 링크된 노래를 다 들어보았다. 맙소사! 아랑이 도대체 누구야!!! ***/



♪ 러시아 사이트에서 찾아낸 같은 노래 ♪

 

Bella Ciao (안녕 내사랑)  끝나지 않은 노래 http://blog.naver.com/gonysori/60000973160

  2' 35"


 

 

악보보기

 

 

Bella Ciao 안녕 내사랑

-이탈리아빨치산민요-

 

Una mattina mi son svegliata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Una mattina mi son svegliata

Eo ho trovato l'invasor

 

O partigiano porta mi via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O partigiano porta mi via
Che mi sento di morir

 

E se io muoio da partigiano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E se io muoio da partigiano

Tu mi devi seppellir


 

Mi seppellirai lassu in montagna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Mi seppellirai lassu in montagna
Sotto l'ombra di un bel fior

 

Cosi le genti che passeranno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Cosi le genti che passeranno

Mi diranno che bel fior


 

E questo e il fiore del partigiano
O bella ciao, o bella ciao, o bella ciao ciao ciao
E questo e il fiore del partigiano

Morto per la liberta.

 

이 아침 나는 일어나 오 내 사랑 안녕,
안녕 내 사랑 안녕, 안녕, 안녕
이 아침 나는 일어나 침략하는 적을 맞으러 가야한다네
오 빨치산이 나를 멀리 데려가네
내 사랑 안녕, 안녕, 안녕
내가 빨치산과 함께 죽거든 그대 나를 묻어주오
아름다운 꽃 그늘이 진 산악지대에 그대 나를 묻어주오
지나가는 이들이 말하겠지
오 아름다운 꽃이여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붉은 꽃이여

 

 

: 현재 전세계 신자유주의반대운동, 반전평화운동의 집회장에서 대표적으로 불리우는 노래입니다.

프랑스의 국민배우 이브몽땅, 칠레의 깐시온 폴클로레 낄라빠윤, 독일의 포크가수 하네스 베이더, 한국의 아랑등 각국의 노래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에 흐르는 노래는 그리스의 국민가수 마리아 파란투리의 애절한 음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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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적군 합창단 구 소련 국가와 가사 해설

/* 자주 가는 사이트 중 하나가 kpug.net인데 오래 전 올라온 자료실 내용 중에 지금도 즐겨듣는 Red Army Choir의 구소련 국가에 대한 소개글과 mp3파일이 있었다.

   웹서핑 중 문득 생각이 나서 잊어버리기 전에 옮겨 적어 놓으려고 한다. 가끔씩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곳에서 이런 것들을 만나게 되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이런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참 러시아 적군 합창단의 노래들은 p2p를 통해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여러가지 버전을 접해본 결과 'best of red army choir라고 돌아다니는 zip 파일이 가장 들을 만 했다.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 노래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건 카츄샤, 아무르 빨치산의 노래, 러시아 군 행진곡이다. 물론 가사를 알리야 없지만 듣는 것 만으로도 어떤 기분을 만들어 낸다.

 */

 

 

 김영진 ( 2005-04-24 23:15:41 , Hit : 596
 http://yachess.com
 Russian_Red_Army_Choir___Soviet_National_Anthem.mp3 (3.32 MB), Download : 254
 Russian_Red_Army_Choir_Hunt_For_Red_October.mp3 (4.67 MB), Download : 194
 [MP3] 붉은군대 합창단 곡들

첫번째는 소비에트연합시대의 국가입니다.
두번째는 영화 '붉은 10월'의 주제가입니다. 아마 원래는 군대의 합창곡인 듯 합니다.

현재 가사는 완전히 다르게 개작되었습니다. 93년에 옐친이 다른 곡으로 완전히 국가를 교체하였으나, 이 명곡의 반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고, 푸틴이 집권하자, 2001년 똑같은 곡을 공산주의가사를 바꿔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곡의 가사는 가장 오랜기간 사랑받은 가사이며 현재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가사는
http://www.funet.fi/pub/culture/russian/html_pages/soviet.html 이곳에 44년 원곡, 77년가사 (스탈린 격하운동으로 2절부분에서 스탈린 이름이 사라짐) 2001년 가사가 있습니다.  (러시아어는 브로우저를 KOI인코딩으로 전환해 보세요.)  올려진 곡은 77년 가사입니다.

저도 몰랐는데, 바로 원곡을 작사한 사람이 바로 "시베리아에서 사랑을" (원제:시베리아의 이발사)을 을 감독한 니키타 미칼코프의 아버지(시인)더군요.  


원문과 1절만 번역

Союз нерушимый республик свободных  
사유즈 네루쉬믜 레스뿌브맄 스바보드니흐
    -자유공화국들의 깰수없는 결속
Сплотила навеки Великая русь  
스쁘라찌라 나베끼 벨리까야 루스
    -굳건하고 영원한 위대한 러시아
Да здравствует созданный волей народов
다 즈드라스트부옛 사즈다늬 볼레이 나로답
    -영원하라! 인민의 투쟁으로 세워진
Единый, могучий Советский Союз!
예디느이 마구치이 사벳스키이 사유즈!
    -가를 수 없는 강한 소비에트 연맹!

        Славься, Отечество наше свободное,
        스랍샤, 아톄-체스트바 나셰 스바보드나예
                -찬양하라, 우리의 자유의 땅을,
        Дружбы народов надёжный оплот!
        드르쥐븨 나로답 나됴즈늬 아쁘롯!
                -형제애로 뭉친 인민들의 듬직한 요새!
        Партия Ленина - сила народная
          빠르찌야 레니나 - 실라 나로드나야
                 -레닌의 당 - 인민의 저력
        Нас к торжеству коммунизма ведет!
        나스 끄 또르줴스트부 꼼뮤니즈마 베둇!
                 -공산주의의 성공으로 약진하자!

Сквозь грозы сияло нам солнце свободы,
스끄보즈 그로즤 시얄라 남 손쩨 스바보듸,
    -폭풍을 헤치고 우리에게 자유의 햇살이 비췄네.
И Ленин великий нам путь озарил:
이 레닌 벨리끼이 남 뿟 아자릴:
    -위대한 레닌이 우리의 길을 밝혔네
На правое дело он поднял народы,
나 쁘라바에 젤라 온 뽀드냘 나로듸,
    -그는 인민들을 진리로 깨우쳤네.
на труд и на подвиги нас вдохновил!
나 뜨루드 이 나 뽀드비기 나스 브다흐나빌!
    -성실과 용맹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줬네.
    
         (후렴같음)
        Славься, Отечество наше свободное,
        Дружбы народов надежный оплот!
        Партия Ленина - сила народная
         нас к торжеству коммунизма ведет!


В победе бессмертных идеи коммунизма
프 뽀베뎨 베스스메르뜨늬흐 이뎨이 꼼뮤니즈마
     -공산주의의 승리는 불멸의 이상
Мы видим грядущее нашей страны,
믜이 비딤 그랴두셰에 나셰이 스뜨라늬,
     -우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네
И красному знамени славной Отчизны
이 끄라스노무 즈나메니 스라브나이 앗치즈늬
     -영광의 나라의 펄럭이는 붉은 깃발
Мы будем всегда беззаветно верны!
믜이 부뎸 프시그다 베즈자베뜨나 베르늬!
    -그를 위해 진실로 혼신을 다할 것이다!
        (후렴같음)
        Славься, Отечество наше свободное,
        Дружбы народов надежный оплот!
        Партия Ленина - сила народная
         нас к торжеству коммунизма веде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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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가사,

The Hymn of the Soviet Union

Unbreakable Union of freeborn Republics,
Great Russia has welded forever to stand.
Created in struggle by will of the people,
United and mighty, our Soviet land!

        Sing to the Motherland, home of the free,
        Bulwark of peoples in brotherhood strong.
        O Party of Lenin, the strength of the people,
        To Communism's triumph lead us on!

Through tempests the sunrays of freedom have cheered us,
Along the new path where great Lenin did lead.
To a righteous cause he raised up the peoples,
Inspired them to labor and valorous deed.
[Or, the old way:
Be true to the people, thus Stalin has reared us,
Inspire us to labor and valorous deed!]

        Sing to the Motherland, home of the free,
        Bulwark of peoples in brotherhood strong.
        O Party of Lenin, the strength of the people,
        To Communism's triumph lead us on!

In the vict'ry of Communism's deathless ideal,
We see the future of our dear land.
And to her fluttering scarlet banner,
Selflessly true we always shall 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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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뒤척....

잘 나가던 일을 때려치고, 공장으로 간 지 두 달여... 복귀를 위한 전초전이라 생각은 하지만 몸이 힘든 건 사실이다. 벌써 바지들이 한단계씩 늘어나 버렸다. 몸이 줄어들었다는 소리지 뭐. 일하는 와중에 보게 되는 온갖 종류의 인종들은 아직까지도 신기하다. 늙어가는 탓인지 새치는 머리에 가득해져서 모자로 감추고 다니고 있는 중이고, 밤잠도 줄어 곧 일 나갈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뒤굴거리며 인터넷에 매달려 있다. 이러다 오늘 죽지... 어쨌건 그러던 와중에 오래 전 알고 지내던 후배가 블로그를 개설하려 하는 움직임을 포착, 독촉하는 메일도 하나 보내고 그 친구의 그림도 뒤적여 찾아내 보고는 푸하하하 하고 웃었다. 맞아 맞아... 음식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유난히 열을 냈었지 하며... 아직 30이 되기 전이었던가 아님 조금 아주 조금 넘었을 때 였던가... 아 자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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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캐나다 노동조합의 상태

/* 캐나다의 사회주의자 잡지 중의 하나인 'canadian Dimemsion'에서 퍼왔습니다. 주소는 http://www.canadiandimension.mb.ca/v39/v39_3dk.htm 입니다. */ State of the Unions, 2005 by David Kidd May/June 2005 The Canadian labour movement has a false sense of security about the state of unionization in Canada because in self-congratulation we compare our situation to that of the U.S. But our unionization rate or density is in decline, and this weakens the ability of union members to stand up for our rights and for the union movement to be anything but reactive to capitalist restructuring. The overall union density in Canada has dropped, according to the Workplace Information Directorate, from 36 per cent in 1994 to just 30 per cent in 2003, and the decline is most pronounced in the private sector. Union Density Is Falling The private sector in Canada generates over three-quarters of all jobs, but less than a fifth of them are unionized. Between 1997 and 2002 the private sector created 1.3 million jobs, but only 88,000 were added to private-sector union membership. Both Ontario and B.C., with half of Canada’s workforce, have had significant declines in union density since 1997. What has kept our overall density at the level we do have is the unionization rate in the public sector. While Mike Harris attacked Ontario’s public sector in the 1990s, the public-sector density remained roughly constant, while private-sector density declined (from 19.4 to 17.4 per cent). But now, due to privatization and government legislation, there are also significant threats to the public-sector unionization rate, as well. Canadian workers have faced ongoing restructuring cycles over the last 15 years in both the private and public sectors. Private-sector workers have experienced both the export of jobs and the remaking of industry due to trade liberalization. The world of workers in manufacturing has been turned upside-down. According to Statistics Canada, half of all industrial plants that existed in 1988 had closed up shop by 1997. New plants opened since then, but they produced only half the number of jobs that disappeared. Large warehouse operations have closed, as plants now limit their inventories and have shifted to just-in-time production. Companies have carved up their operations and sourced out certain production and service work to other operations. How much of the growth in the auto industry in Ontario has gone to non-union parts plants? The public sector now faces a constant threat of privatization of all services, from child care to homecare, from public payroll administration to the billing of taxes and permits, from our most basic resources, like water and hydro, to public infrastructure, like roads and recreation centres. Like the private sector, many public-sector employers are creating a number of incorporated bodies to weaken bargaining strength by breaking up bargaining units or to privatize certain services they provide. The federal and provincial governments have passed legislation to weaken the strength of unions, as was done recently in B.C. and Newfoundland, or force union representation votes that set up dog-eat-dog competition between the unions involved. Where Is the “Movement” in the Labour Movment? Internally the union movement is not much of a movement, these days, but a collection of individual unions pre-occupied with servicing the membership they have and competing with other unions for new members. As a movement, we are not in the lead when it comes to social issues or for fighting for the dignity and equality of all workers. Where is our voice in the campaign to eradicate racial profiling from the police and immigration forces, or to stop the escalation of war in the Middle East? We are not in the forefront on public insurance, or rising tuition costs, or standing in solidarity with community partners on the issues of homelessness, poverty and the destruction of the family farm. The CLC’s own polling has shown that it is these issues that attract many non-union workers to consider unions as an option. We have been more engaged in fighting one another for membership than in finding ways to pull more workers into the union movement. Many unions in the same sector, provincial federation or labour council do not even have a minimal working relationship with one another, even though they face the same employers at the bargaining table, the same attacks on their pensions and benefits and the same draconian legislation. A go-it-alone strategy will not work any longer for even the biggest unions to protect their current members’ best interests, let alone attract new energy and new members. Multi-union organizing has to be on the agenda. Where are the Resources for Organizing? There’s also a problem regarding the lack of resources for organizing. A 2003 Human Resources Development Canada (HRDC) study has revealed that only 15 per cent of union staff are involved in organizing, while 43 per cent are involved in direct servicing. This study also revealed that unions on average use only 6.8 per cent of their resources for organizing, and less than half of unions surveyed had someone with overall responsibility for organizing. We are not going to make a dint into increasing union density without increasing the priority for organizing by increasing resources. Who is doing the organizing is another important issue. Kate Bronfenbrenner and Robert Hickey of Cornell University have studied successful organizing drives in the U.S. They have concluded that what works best is a three-way combination of union staff working with activist organizers working with contacts both inside and outside the workplace. This success is based on the use of activists who know the type of workplace and its culture and have workplace contacts who have knowledge of the particular workplace targeted. Most Canadian union organizing currently only uses a two-way plan, with the union organizer working with workplace contacts. Fortunately, that may be changing, as the HRDC study also revealed that 56 per cent of the unions polled are training activists to organize. The B.C. Federation of Labour set up an Organizing Institute eight years ago, and has trained more than 500 union activists. Still an issue, unions need to use organizers who reflect the changing gender, ethnic and racial demographics of today’s workplaces. Unions are reluctant to organize the increasing number of small workplaces due to the large servicing costs and the difficulties associated with bargaining the first collective agreement. To respond to this challenge, there needs to be strategic orientation to organizing that will lead either to flexible composite locals of a number of bargaining units or industry-wide bargaining success. A sectoral strategy will also require ending the competition among unions for representation, and developing multi-union bargaining of the same employers to force them to negotiate industry-wide contracts. Targeting Precarious Workers Other challenges to which the union movement must respond are the growth of precarious employment and the culture of suburban sprawl. Economic restructuring has meant an increase in the casualization of labour, where a significant number of jobs are part-time or non-permanent. Almost one in every five jobs in Canada is now part-time, and this impacts both the public and private sectors. We need to bring these workers into the union movement, so that the bargaining position of all workers is not weakened by the development of a two-tier system. This workforce may also require a different type of organizing strategy, like the development of workers’ centres aimed at fighting for the rights of precarious-employment workers. Much of the new private-sector growth has taken place in the new suburbs, previously rural and farm land, while the old industries have been replaced in the traditional urban areas. These communities have developed different traditions and cultures than the older downtown areas, and require different organizing strategies to win these workers to unionization. The labour movement needs to develop a plan that will encourage an organizing culture and increase cooperation between unions. I think this would best be realized with the CLC not engaging in a coordinating role, but playing a facilitating role, providing more resources to the local level. This would mean supporting provincial federations to develop organizing institutes like that of the B.C. Fed., and increasing resources to local labour councils. There also needs to be support for training of activist organizers and the development of workers’ centres like the Workers’ Organizing Resource Centre (WORC) in Winnipeg to address the needs of contract and part-time workers. The CLC and affiliates, provincial feds and labour councils should report annually on union organizing. We need to take the first steps to encourage multi-union bargaining by organizing conferences for unions engaged with the same jurisdictions and employers. Annual employer targets need to be set with ways and means so that the union or unions involved can utilize the resources of other unions. We provide support to one another in strike situations — we need to provide it in organizing drives, too. The targets could be industry-based, like Wal-Mart in retail, or Extendicare in homecare; or it could be local targets such as notorious non-union areas like Mississauga, Ontario, or Alberta. There are also low-union-density sectors with significant numbers of workers, where strategies need to be developed to organize. This includes the financial sector, retail, hospitality, call centres and the privateers who want to poach public services. Overall, then, the union movement needs to develop a strategy to respond to the decline in union density. This strategy must have both an intentional plan to put a class interest and a social-movement orientation back into the union movement. The union movement needs to be the leader of all working-class struggles. It must put forth an active vision of workers’ interests in the building of our economy and our communities, not stances reactive to and dependent upon capitalist development. At the same time, the union movement needs to reassert its place as one of the key movements that fought for social institutions like medicare and public education, and broad issues like the fight against racism and discrimination and the rights of individuals and their families to enjoy the fruits of their labourand time away from work. Part of the success of the CIO organizing drives in Ontario in the 1930s was the support of the organizers for the plight of the unemployed and for tenants who faced eviction. These same unemployed and tenants in turn supported factory picket lines and occupations that led to unionization. Unorganized workers are attracted to unions not just for better wages and working conditions, but also for justice and dignity. David Kidd is an executive member of a Toronto municipal CUPE local, and a member of CD’s Editorial Coll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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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노동운동사-2

*나머지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정치 참여는 캐나다 노동운동이 마주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캐나다 노동조합들에게 있어 주(州)노동법의 개정은 최우선 순위였고 일부 초기 조합들의 관점에서 정치적 행동이란 이런 노동법에 나타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일부 노조들은 이런 관점을 갖지 않았지만 중앙 노동조직의 산하 노조들을 세월이 지나며 점차 노동조합의 철학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견해들을 달리하게 된다. 1956년 캐나다 노총은 첫번째 전국회의를 열어 CCL과 TLC 양 파벌의 정책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주(州) 단위 연맹 조직과 지역 협의회 그리고 자치권을 가진 노조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조직체를 찾아 가입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정치교육 위원회가 다른 자유노조들, 농장 조직들, 협동조합운동 단체들과 함께 토론을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즉 “법률적, 정치적 영역에서 공동행동을 모색하게 개발하는” 대신, CCF와 ‘의회에서 법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른 단체들'과 이 문제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의회가 새로운 정당 형태를 모색하는 토론을 위해 같은 목적을 가진 단체들을 소집했던 1958년 총선 이후까지 이 합의는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농장 조직들과 협동조합들(주로 농부들로 구성된)은 거부되었지만 CCF는 참가가 허락되었다. 1961년 CLC와 CCF, 그리고 다양한 동조자들은 “새 정당 클럽”을 만들고 신민당에 자금을 지원했다. 의회는 새 정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20만에 가까운 조합원들이 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클럽은 독립적인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신민당은 비당파적인 미국 AFL의 전통보다는 직접적 정치행동에서 승리했던 전통을 가진 영국 노동계급 이민자들의 전통을 대변하려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캐나다의 노동운동이 미국의 노동운동과 독립적인 길을 가게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지표 볼 수 있다. 1979년 CLC와 산하 노조들(주로 전 CCL의 산하 노조들)은 신민당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결의하게 된다. 이것은 비이데올로기적 기반의 미국 노동운동과 정치적 전망을 함꼐 하는 수공업 조합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 분화는 1980년대 초반 건설업 직종(전문기술직)과의 갈등과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조합주의의 역사는 노동 인민의 승리의 역사이다. 1911년에 캐나다에는 단지 133000명의 조합원이 있었을 뿐이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아직 166000명이었다. 1919년에는 두 배에 가까운 378000명 이었고, 1924년에는 261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932년에는 322000명으로 다시 늘어났고 공황이 도래했을 ㅤㄸㅒㅤ는 281000명이 되었다. 하지만 1938년에는 1919년 보다 조금 더 많은 숫자의 조합원을 갖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급격한 산업의 발전과 대량생산산업의 증가로 조합원은 전전보다 두 배로 늘어났다. 그리고 1949년에는 백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1958년 부터 1964년까지 총 조합원의 숫자는 정체를 거듭했지만 1965년에는 다시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주와 연방, 지방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운동의 파고가 급격히 높아지는 시기로 볼 수 있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새로운 조합원은 여성들로서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었다. 이 문제들은 업무중단율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1969년에는 정부통계에 의하면 거의 매일 8백만명이 업무를 중단해 산업내 충돌 기록이 갱신되었다. 이 갈등의 주원인은 임금의 문제로, 노동자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잃게 된 그들의 구매력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노동자들을 일터로 돌아가게 하는 법안을 발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강제조정을 포함해 공공부분에서 노동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캐나다에서 사회보장제도 – 전국적 의료보험, 연금보험, 고령자 수입 보장 보험, 지금은 연방과 주정부가 함께 비용을 지불하는 산후 휴가, 병가 등이 포함되어 있는 확장된 고용보험 정책이 실시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단체협상과 정치적 부문 양자에서 사기업 노조와 공공부문 노조들에 의해 수많은 이득을 얻어낸 시기이기도 했다. 1972년 퀘벡의 노동조합들은 보라사 자유당 정부에 대항해 연대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공공부분 노조들을 중심으로 한 투쟁체를 만들어 주 전역에 걸친 가장 커다란 파업투쟁을 이끌었다. 이 투쟁은 노동자들이 타협안을 거부하자 정부가 노조들에 대한 벌금과 지도자들에 대한 투옥, 중단 법안을 발의 함으로 끝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노조의 요구안은 정부안에 가까웠다. 1970년대 중반, 정치, 경제적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노조들은 그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호전적이었고, 단체협상에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안건은 항상 통과되었다. 이 시기 동안 온타리오의 플렉 앤 인코 파업을 필두로 중요한 파업들과 저항이 생겨났었다. 캐나다 우편노조(CIPW)는 그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업무 복귀 명령을 받았고 지도자 장 클로드 페롯은 노동자들에 대한 업무 복귀 명령을 거부한 이유로 투옥되었다. 정부의 공격은 계속 되었고 주와 연방 정부는 단체협상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정부의 삐엘 트뤼도 수상은 높아지는 인플레율과 성난 노동자들과 싸우는 방식으로 임금/물가 연동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연방 정부에 있어 역사적인 단계로서 노동조합의 임금협상능력에 제한을 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에 의한 이 공격은 노동자들의 권리와 단체협상의 하한 금지제에 대해 기본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6년 10월 14일 CLC의 지도하에 캐나다 전국적으로 임금/물가 연동제와 트뤼도 정부에 대한 저항의 날을 선포했다. 임금/물가 연동제는 1978년 철회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이 기간 동안 임금협상에서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이 시기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 기본부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선거와 다양한 사회적 운동 등 정치적 행동에 더욱 개입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또다른 노조들에 의해 의미심장한 행동들이 진행되었다. 연방정부 사무원들은 공공서비스 연합의 소속으로 대부분 여성이었고 아주 적은 임금을 받았었다. 정부는 이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체계적인 불평등을 알지 못했고 이들 사무원들은 1980년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여성 노동자가 맞닿드린 임금과 복지혜택의 불평등에 촛점을 맞춘 여러 파업 중의 하나였다. 이 파업으로 인해 여성 노동자의 불평등 문제는 노조들과 여성운동의 주요쟁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 다른 쟁점들중 하나는, 전미자동차노조(UAW) 조합원 들이 일하는 하우데일(오샤와), 베네딕스(윈저) 공장에 경영진이 공장폐쇄 결정을 내리면서 생겨났다. 하우데일 공장의 경우 아직까지 공장은 가동하지 않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임금과 연금을 수령률이 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공장폐쇄가 결정된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지급과 관련하여 온타리오 주정부를 비롯한 여타 주정부들이 보다 나은 임금 보장제도를 입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캐나다 경제는 하향국면에 들어가고 높은 인플레 율과 고이자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1년 11월 21일 CLC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커다란 노동자 집회를 갖고 정부의 화폐정책에 저항했다. 노조들은 연방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에 반대입장을 천명하고 양보를 거절했다. 노조를 희생양으로 삼는 정부의 의도적 공격이 시도되었다. 이 공격은 몇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전국에 걸쳐 우익 주정부들은 노조의 파업과 단체협상을 거절하거나 거부하는 입법안을 발의했다. 1982년 연방정부는 단체협상을 제한하고 임금인상율을 매년 6 퍼센트에서 5 퍼센트로 하향 조정하는 법안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주정부들이 이와 유사한 법안을 발의했으며 사용자들은 당연히 그 뒤를 따랐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노조원들 사이에 전투적 기운이 고양되고 수많은 파업이 뒤따랐다. 1983년 브리티쉬 콜롬비아의 우익 사회신용당 정부의 빌 베넛은 노동자의 권리와 인간적, 사회적 권리를 공격하는 26개의 법안을 도입하면서 교육과 사회보장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노동운동과 커뮤니티 그룹들은 대규모 시위와 이 공격적 법안을 저지하는 동조파업을 유도하는 저항의 날을 시도했다. 이 공격으로 수많은 권리와 혜택이 사라졌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다. 1985년 법체계변경은 노동조합의 조직과 단체협상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에드몬튼에서는 전미 음식 상업 노동조합에 의해 게이너 육류가공회사에서 길고 어려운 파업 일어났다. 파업 중단 명령과 파업파괴자들, 경찰의 노조와해 공작들은 실패했다. 이 파업은 알버타 주 전역에 걸친 노동운동에 성공적인 노동법 개정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버타 노동연맹(AFL)과 캐나다 노총은 게이너 육류제품에 대한 전국적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이튼 백화점과 시어스 백화점 그리고 캐나다 제국상업은행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운동은 노동자들에 대항해 싸우는 거대 회사에 맞서 대중의 협조와 압력을 증가시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는 언제나 조직화가 어려운 거대한 비조직 소매, 서비스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조합의 의미있는 전진이었다. 이 성공적인 작업은 더 이상 유지, 확산할 수 없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노동조합 진영의 시작점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시기는 또한 캐나다의 노동운동이 국제 노조들에 대한 더 많은 자율권을 행사하게 된 시기였다. 국제 노조의 캐나다 지부들은 미국의 지도부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와는 아주 다른 배경을 갖고 있었다. 최근의 단체협약에서 캐나다 노조들은 미국의 노동조합 형제들이 단체협상안에서 보이는 방식과는 다르게 양보안에 더욱 거세게 저항하고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캐나다 자동차 노조는 전미자동차노조에서 분리했다. 캐나다 제지노동조합은 1974년에 이미 분리를 경험했다. 에너지 화학노조, 국제목재산업노조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노조의 입장에서 국제노조의 산하로 남는 것은 캐나다 쪽 노조에 정치적 자율성과 함께 조합원들에게 캐나다식 결정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다. 캐나다 노총은 시민권과 윤리 조항을 강령에 포함하고 캐나다 노총에 가입한 노조들이 민주적으로 사업하도록 감독하고 있다. 캐나다 헌법의 수정조항과 권리장전의 전문, 법체계는 이제 노동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새로운 힘으로 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단체협상에 대한 권리는 정치적 결정들과는 달리 권리장전의 “결사의 자유” 항목과, 대법원의 일련의 판례들은 이 권리들이 권리장전에 의해 보장 받지 못하고 정부와 법원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 퇴보의 시기에 노동조합들은 법원과 정부, 사용자들이 이끄는 결정에 따라 조합원들에 대한 행동을 제한받았다. 레이빈 판례라고 불리는 대법원의 또 다른 판례에 의하면, 노동조합비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 민주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 경우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에 관련되어 있다. 이 모든 판례들은 노동조합에게 법 체계가 노동조합의 권리들을 제한하고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것을 제한 하는 등 노동조합의 편이 아니라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치적 작업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멀로니 정부는 미국과 FTA 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전국에 걸쳐 수많은 사회운동 그룹들은 이 협정이 전국적 관심사에 대해 캐나다의 주, 연방 정부가 독자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협정은 기업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만들겠지만, 캐나다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 기준과 캐나다인의 생활방식에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많은 그룹들이 연합을 이루어 이 협정에 맞서 싸웠고 이 협정은 1988년 선거에서 주요 이슈가 되었다. 노동조합른 이 협정이 임금과 노동조건에 있어 낮은 기준을 도입하게 되고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단체협상의 권리를 제한하는 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또한 FTA가 캐나다 인민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권리를 근저에서부터 빼앗아 간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싸우게 된다. 이 싸움은 한편으로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리고 누가 캐나다인을 위해 결정을 내릴 것인가?”라는 캐나다 인들에게 일어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하도록 대중적인 토론을 요구했다. 불행히도 보수당이 다시 집권했고 FTA를 승인했다. FTA는 대처가 이끄는 영국과 레이건의 미국 정책을 따르는 보수당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였다. 교통과 다른 중요한 기준들에 대한 철폐, 정부기관과 공사합동기업, 국철의 사유화, 연방세 삭감들이 그들의 주요정책이었다. 교육, 보건과 사회복지에 대한 주정부 보조금에 대한 큰 폭의 삭감은 공공 서비스의 축소와 일자리 삭감을 불러왔다. 캐나다 체신노조 파업(1987, 1991), 캐나다 공공서비스 노조(PSAC, 1991) 등 수많은 파업은 정부의 공공부분 노동자에 대한 정규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화에 맞선 투쟁이었다. 사기업 분야에 있어 사용자는 노동자들이 양보안을 받아들일 때 까지 공장을 폐쇄하는등 FTA를 이용해 노동자와 맞섰다. FTA가 체결된 지 4년 뒤, 수백개의 공장이 문을 닫고,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이 일자리들은 환경규제가 약하고 저임금을 받아들이는 미 남부와 멕시코로 이전했다. FTA에 이어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캐나다와 미국, 멕시코 사이의 기업간 무역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문턱을 더욱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우익기업적 협정안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은 보수당의 정책들에 대항한 캠페인을 펼치는 것과 다른 대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동맹으로서 TLC는 사유화와, 국철 축소, 의료보험 잠식, 연방세, 교육, 사회보장보험 축소, 고용보험 삭감과 연금재조정에 맞선 수많은 캠페인을 이끌었다. 1993년 5월 15일 CLC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실업율을 무시하는 보수당 정부에 맞서 고용창출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보수당 멀로니 정부가 1993년 연방 선거에서 패배하는 분깃점을 만들었다. 노동운동의 구성원과 활동가들이 변화를 겪었다. 노동운동은 내부적으로 지난 10년간 내적 민주주의의 문호를 개방했고, 여성과 유색인종, 캐나다 인디언, 게이 레즈비언들, 장애인 노동자, 은퇴한 조합원과 젊은 조합원에 대해 더 많은 활동을 해왔다. 캐나다 노총은 연맹과 소속 노조들에게 자신들의 조합원을 대변할 수 있게 운영위원회에 더 많은 자리를 만들었다. 위원회들, 지방회의들, 전국회의들과 학교들이 노동자들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토론하고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 곳에 조직되었다. 이들 조합원에 의해 새로운 활력과 다양성이 도입되고 여러가지 관심사들이 등장했다. 노동자들은 캐나다와 세계 여러나라에 걸쳐 사회적, 동등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과의 연계를 확장하고 공고히 했다. 그 한 예로 캐나다 노총은 1996년 전국 조직인 빈곤에 대항하는 여성들의 행진의 전국행동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행진은 전국에 걸쳐 일자리와 정의라는 테마를 그들의 커뮤니티에 각인시켰다. 캐나다 노총은 또한 노조와 사회운동그룹들, 아시아-태평양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적절한 노동, 사회, 환경적 기준에 걸맞는 통상협정이 체결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캐나다 노총은 또한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트럭노동자와, 교사, 간호사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연구기관과 지원세력으로서 노동조합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에 이득을 주고 있다. 하지만 조직된 노동자들의 관심은 고용조건과 노동조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캐나다인의 노동조합은 항상 최전선에서, 계속해서, 더 나은 보건, 교육, 주택, 연금과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다. 모든 캐나다인들은 캐나다 노동조합의 설립자들의 혜택을 받고 있다. 토론과 쟁점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노동자와 시민들의 이익은 기업의 이익이 아니다.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야만 하는 법적, 사회적 권리는 언제든 우익 정부가 정권을 잡으면 사라질 수 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정의에 대한 싸움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이 투쟁은 우리 커뮤니티와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글로벌 사회 전체에 걸친 싸움이다. 우리는 공정한 노동과 사회적, 환경적 기준, 을 가질 것이며, 전세계의 부는 평등하게 분배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 전망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조합은 그들의 싸움을 계속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노동의 역사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이 교훈을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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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노동운동사 -1

* 이글은 "Canadian Labour History"라는 이름의 8페이지 짜리 교육자료로 캐나다 노총(Canadian Labour Congress)의해 만들어 진 것을 제가 공부 좀 해볼라고 제멋대로 번역 해보았습니다. 원문자료는 여기(http://action.web.ca/home/clcedu/attach/labourhistory.pdf)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캐나다가 역사책에 등장하는 정치가나, 군인이나, 사업가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들의 나라는 숲을 개간하고, 토지를 경작하고, 운하를 만들고, 철도와 도시, 우리들의 공장과 기타 천연자원 산업을 만들어 낸 인민들의 노동과 땀으로 건설된 것이다. 우리들이 이들의 삶과 경험을 공부할 때, 우리는 우리들의 뿌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캐나다가‘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었다면 이는 캐나다 내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는데 고된 노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업과 모피 무역, 농업과 벌목은 캐나다 정착민과 그 가족들만으로 수행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으며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와 비교하면 수공업 노동은 희귀하고 특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프랑스령이나 영국령 캐나다를 막론하고 수공업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이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이민사회에서 숙련노동자들의 공급은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그들이 받아야할 임금은 요구하는대로 올라갔지만 동시에 기술 혁신을 통해 숙련노동자들을 대치해야 할 필요성 또한 같이 높아져갔다. 1812년 전쟁 중에 헬리팩스, 쌩 존 그리고 퀘벡에 존재했던 초기 조합의 존재 근거는 그들 작업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른 조합들, 예를 들면 1830년대의 몬트리올 제화공 조합나 토론토의 인쇄공 조합은 숙련노동자들이 자신의 기술과 상태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여기서 되풀이 되는 중요한 요인은 실업, 질병, 극빈자의 장례와 같은 재앙에 대항한 상조회의 결성이었다. 아직까지는 많은 초기 노동사가들이 지적하듯, 조직화의 혜택은 몇몇 행운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1859년 이전에 모든 조합들은 기술자 연합회(Amalgamated Society of Engineers. ASE)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역 조합들이었다. 이 영국의 조합은 1853년 몬트리올에 첫번째 캐나다 지회를 1857년에 해밀튼에 두번째 지회를, 1858년 토론토와 브랜트포드에 각각 지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1859년을 지나며 캐나다의 조합주의는 점차 더욱 더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즉, 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의 본부와 조합원의 자격이 다른 나라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자 연합회(ASE)는 18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주형공 조합(1859), 기차 기술자조합(1864), 식자공 조합(1865), 성 크리스핀의 기사들(제화공 조합)(1868), 시가제조공 조합(1869) 등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1871년 이전에 벌써 통 제조공 조합이 나타났고, 벽돌공과 석공 조합(1872), 기관차 화부조합(1976), 노동기사단(1879), 선로감독관 조합(1881), 미국 목수 형제단(1882), 열차 승무원 조합(1885), 그리고 도장공과 장식공 조합(1887)등이 이어진다. 영국과 미국의 이민자들은 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조합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다른 경우는 좀 더 크고 강한 조합을 원하는 캐나다의 지역 조합들과 캐나다에 어려운 시절이 닥쳤을 때 자유롭게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원하는 조합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0년대에서 1880년대에 동안에 대부분의 캐나다의 노동자들은 순수한 지역, 지방에 국한된 조합들을 만들어 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이 다양한 조합들은 심지어 같은 도시나 마을에 있거나 하더라도 서로간에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893년 12월 해밀턴의 몇몇 조합들이 적어도 1875년까지는 대륙을 통괄하는 노조들의 대리자 자격으로 통합된 노동조합, 직능단체들을 구성했다. 1891년 다섯개의 직능 조합이 Toronto Trades Assembly (1871-78) 을 조직했고, 곧이어 Ottawa Trades Council (1872-76), St. Catharines Trades Assembly (1875) 등이 이어진다. 1873년에는 토론토 어셈블리가 전국 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그 당시 캐나다에는 수백개의 조합들이 있었지만 회의에는 온타리오 전역에서 31개 지역 14개의 노조만이 대리인을 파견했었다.(몬트리올과 퀘벡의 식자공 조합에서도 동의를 표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는 했었다.) 이 회의에서 캐내디언 노동조합이라는 첫번째 전국 중앙 조직을 만들어냈고 1874, 1875, 1876 그리고 1877년에 다시 회의를 가졌다. 1870년대의 경기침체는 지역과 전국 중앙조직 그리고 수많은 지역 노조들, 특히 국제조직의 지부들을 위기에 빠지게 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1883년에 전국 조직의 결성을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시작되었고 3년 뒤 이 조직은 Trades and Labor Congress of Canada (TLC)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TLC는 현재 캐나다의 전국 주요조직 중의 하나인 캐나다 노총의 전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이 지도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다양한 지역에서 뽑히고, 특정한 커뮤니티의 노동조합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방단체들이 만들어 지고, 지방 단위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유아기의 캐나다 노동운동은 1872년 토론토 인쇄공 파업을 통해 9시간 노동제 쟁취라는 의미심장한 법률적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글로브(현재 글로브&메일이라는 캐나다 전국신문 중의 하나의 전신)의 조지 브라운을 필두로 하는 대부분의 토론토 인쇄 장인들은 반 노조진영에 서 있었다.그들은 식자공 조합 위원회의 13명의 지도자들을 선동 음모혐의로 체포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법원은 영국 일반법의 불충분한 점들이 반영된 캐나다 법이 (식민지인)캐나다까지 아직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노조지도자들을 석방하게 됐고 온타리오의 조합들은 영국의 조합들이 1791년에 누리던 법적 지위를 1872년에도 여전히 가지게 됐다. 노조 지도자들은 캐나다의 법률이 영국과 똑같아지도록 작업하기 시작했다. 존 A 맥도날드 경은 전년도 영국법들을 모델로 한 노동조합법과 형법 개정안이라는 두 개의 법안을 자유당과 함께 식민지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캐나다 노동조합이 이루어낸 첫번째이자 커다란 성공적인 정치행위였다. 검사는 기소를 포기했고 파업은 승리했다. 국가성장정책(1879)의 채택, 캐나다 태평양 철도 건설(1881-1885)과 함께 캐나다의 산업이 회생,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합도 회생했다. 이들 초기 조합의 일부는 사회 변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원칙적인 수공업자들의 조합이었다. 그들은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걸로 자신들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그들은 “bread-and-butter unions” 이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이들 소규모 노동조합들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했었다. 모든 캐나다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최저 생계유지에 매달려 있거나 모든 커뮤니티에 이득을 줄 진보적인 사회정책에 관심을 가질는 것이 배제된 ‘사업을 위한 조합주의’나 또는 그런 식의 정책에 우선권을 주려는 정당을 지원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운동의 초창기 이런 식의 조합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캐나다의 조합들은 노인연금과 실업보험 같은 사회보장 정책을 위해 싸우는 최전선에 있었다. 1880년대의 가장 극적인 특성은 노동기사단의 등장과 성장이다. 실제로 노동기사단은(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캐나다, 영국, 벨기에, 호주, 뉴질랜드등으로 퍼져나갔다)은 1881년 가을 캐나다에서 시작됐다. 십여년간 그들은 300개가 넘는 지역조직을 100여개 이상의 도시, 마을에 조직해냈다. 오직 예외라면 프린스 에드워드 섬과 오늘날 사스캐츄원이라고 불리는 주만이 그들의 조직이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조직들은 단명했고 세기를 넘기면서 일부만이 살아남았지만 1887년 당시에는 200여개에 가까운 조직이 건재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노동기사단의 주요 대상이 비숙련 남,녀 노동자(이전에는 매우 적었던)와 작은 마을의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숙련노동자라는 점을 무시하지 않았다. 캐나다에 있어 그들의 첫번째 큰 공헌은 위니펙에서 노스 시드니까지 북미 연합 전신노동자 조합의 45지역 소속으로 30개의 전신노동자 지역 조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조직은 1883년 여름 국경 양쪽에 모두 존재하는 대규모 전신회사를 상대로 북미 역사에 남을 국제적인 파업을 이루어낸다. 파업은 실패하고 캐나다의 전신 노동자 조직은 사라졌지만 기사단은 목수에서 시계상자공(원문은 watchcase maker - 이런 걸 따로 만드는 직업이 존재했다니...), 석공에서 음악가 까지 거의 모든 수공업 노동자들을 조직했었다. 최초의 조직화 행동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지역과 전국 조직 건설을 위한 움직임도 다시 시도되었다. 새롭게 만들어 지는 지역과 전국 중앙 조직은 의식적으로 일관되게 자신들을 “직업과 노동 평의회(Trades and Labour Councils)”라고 불렀다. “직업"이라 는 말 속에는 비숙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업권, 시위권, 보이콧 같은 노동조합의 권리들은 사용자들의 비교할 수 없는 권한과는 달리 제한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은 사용자들의 해고, 블랙리스트, 파업파괴자 고용과 같은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해 아무런 안전장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01년부터 1913년 사이 노동자들은 14개의 전국 규모의 파업 – 일부는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던- 을 겪었다. 그 중 11개의 파업에 민병대나 군대가 동원됐었다. 법은 노동자들이 단체협상을 조직하게나 자신의 일을 지킬 권리보다 사적 소유권과 사용자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게다가 파업파괴자들과 사용자들은 특수 무장 경비와 일반 경찰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소유물을 지켰다. 지역과 지방의 경찰력은 종종 집시법, 계엄령 등을 발표하고 민병대와 육군을 이용해 공공 집회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국제 노동조합들에 의해 TLC가 만들졌고 TLC는 국제 노동조합 조직들과 연대에 주저하지 않았다. 1902년 노동기사단을 비롯해 모든 조직들은 TLC의 노동조합들과 대결 상태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산업에 있어서 국제조직들은 그들이 해내야 할 일에 대해 인력과, 경험과 자금을 갖고 있다는 것을 TLC는 알고 있었다. 1902년 TLC에 의해 추방된 조합들은 1908년 캐나다 노동자연맹(CFL)이 될 캐나다 전국 노총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0년에는 TLC의 지부였던 노바스코샤의 주(주)노동자 협의회를 흡수하게 된다. 1919년 위니펙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서부지역의 노조활동가들은 TLC와는 거리를 둔 혁명적 공장 노동조합주의에 경도된다. 그리고 국제노동조합들을 결성하면서 프래이리와 브리티쉬 콜롬비아의 TLC 조직의 커다란 부분을 떼어내 One Big Union을 만든다. OBU의 존재는 TLC의 구조가 새로운 대량 생산 시대에 맞추어 늘어난 비숙련, 반숙련 노동자들의 요구를 담아내기에 부적절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1901년과 1921년 사이에 소규모 카톨릭 노조(아마도 노동기사단의 지역 조직이 전신이었을)들이 퀘벡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보호 아래 등장했다. 이들은 1921년 캐나다 카톨릭 노동자 총연맹을 결성한다. 1927년 CFL과 다른 전국 규모 노조들은(특히 1917년 TLC에 들어갔다가 1921년 추방된 캐나다 철도 고용인 형제회) 산업과 전국적 노동조합주의를 표방하는 전캐나다노총(ACCL)을 결성한다. 1935년에 이르러 공산주의 노동자 동맹을 포함해 순수 캐내디언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조합의 절반에 이르렀다. 두 진영은 이제 통합되어 있다. TLC가 수련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동안 ACCL은 전 산업을 포괄하는 노조단체가 되어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경기는 급강하해 10년 전의 수준으로 돌아갔고 실업률은 기록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정부는 실업자들과 가혹한 임금삭감과 노동조건에 맞서 싸우는 파업참가자들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보였다. 정부의 무능으로 실업률이 급증하자 브리티쉬 콜롬비아에서 오타와에 이르기 까지 베넷 보수당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정부는 연방경찰로 하여금 오타와에서 이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시킨다. 실직 노동자들은 총상을 입거나 구제 캠프에 보내졌다. 그러나 저항의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이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산업별(제너럴 모터스 같이)이냐 아니면 기술별로 노동조합을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커다란 논쟁에 휩쌓여 있었다. 대량생산 산업에 있어서 비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는 점점 확대 일로에 있었고 조직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노총(AFL)은 비숙련노동자들을 산업별 노조로 조직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에 언급했던 OBU와 ACCL의 경우처럼, 새로 만들어진 산별 조직 회의는 이들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표했다. 이 구조는 미국과 비슷한 산업환경을 가진 캐나다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TLC는 CIO의 캐나다 지부들을 어쩔 수 없이 조직으로부터 추방해야 했지만 미국노총은 흔들리지 않았다. AFL 산하 노조들(캐내디언 노조의 수가 훨씬 더 많았던)로부터 가상의 최후통첩을 받게 되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게 되었고 1939년 캐내디언 CIO는 추방 당했다. 노동조합만큼 노동하는 인민의 생활을 변화시킨 것은 없었다. 전시 중 일련의 충돌들, 1943년 초반에 최절정에 이른 제철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에 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연맹(CCF)의 극적으로 늘어난 지원과 함께, 캐나다 노조운동가들은 미국 노조들이 1935년 와그너 법안 아래 이루어 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P.C 1003으로 알려진 Privy Council Order 1003이 1944년 2월 발효되었다. 마침내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의 불공정한 관행들을 억제할 노동관계법이 정비가 된 것이다. 노동자는 노조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미 일부 다른 주에서는 그런 규정들을 갖고 있었지만 p.c. 1003을 통해 연방과 주 정부의 법률기관들이 노사관계에 대한 불변하는 기초 법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해인 1945년 말 랜드 원칙에 의해 보강된다. 이 해법은 포드 자동차와 북미자동차노조 사이에 체결된 협약에 기초한 것으로 노동자가 노동조합이 제시한 임금안과 복지사항에 동의할 경우 노동조합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전시 샵이란는 인상적인 형태로, 이반 랜드 판사는 노동조합의 안정성에 대한 강력한 힘을 지닌 타협안을 제출한 것이다. 전후 노동조합의 형태는 1946년과 1947년의 파업을 거치며 완성되었다. 급속히 성장하는 시장으로 인해 강력한 반노조 정책을 지닌 기업들이라 하더라도 시장상황이 갑자기 좋아질 때는 타협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조합의 임금안과 그 영향을 받은 비노조 부분의 임금은 경제활성에도 도움을 주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거의 3분의 1에 이르는 캐나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자원 관련 산업과 제조업종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비노조 기업들은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을 노동조합이 있는 타사에 맞추어야만 노동자들을 자신의 공장에 묶어둘 수 있었다. 1949년에 닥친 불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행운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금과 건강보험은 집과 차와 별장과 보트를 소유하는 것 처럼 기본이 되었다. 확실히 노조들을 긴 파업들을 경험했지만 폭력이 개입되는 것은 초기 시절에는 드문 일이었다. 1957년 머독빌이나 1959년 뉴펀들랜드 벌목공 파업같은 패배의 경험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고, 패배했다 하더라도 뒤이어지 싸움엑서 승리함으로써 복수하고 했다. 조직적 측면에서 노조들 사이의 통합을 위한 첫걸음은 , 역설적으로, TLC에 대한 첫번째 영향력있는 반대운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ACCL과 캐나다 산별노조 위원회는 1940년 노총 자체와 산별노조의 지부를 포함해 완벽한 자율성을 갖는 캐나다 노총(CLC)만들어 통합하기로 합의한다. 대부분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생 조직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성장하고 강력해졌다. 대량생산 산업들을 조직하고, 노동자 교육과 노동관계법 등 노동 관련 연구들을 수행해내는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15년간 TCL과 CCL 양자는 거의 매년 조직의 통일에 대해 해법을 주고 받고, 1948년 부터는 일반적이 되어가는 문제들에 대해 대응해 공동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개의 미국 중앙 조직이 멍청이들(원문 loggerheads) 손에 있는 상황에서 캐나다 본부는 재통합을 위한 작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TLC의 규약에 의하면 AFL 산하 노조가 되는 이중 멤버쉽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통합을 토론하는 것에 동의했을 때 이 조항은 사라져 버렸다. 1953년 말 두 개의 캐나다 노총은 통합위원회을 결성하기로 약속하고 첫번째 협약으로 상대 조직의 조직원을 빼앗아 가는 일을 금지하는 “노라이딩 협약”을 체결했다. 1955년에는 머저 협약을 채결했다. 두 개 노총의 회의 결과로 통합안이 비준되고, 머저 협약은 힘을 갖게 되었다. 1956년 4월 통합노총의 결성을 위한 회의가 열리게 된다. * 반틈 너머 더 남아있는데 그건 내일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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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을 다시보다 -2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다. 나 역시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 보았던 감상을 지금은 떠올릴 수가 없다. 어떤 느낌이었는지. 하지만 이제는 영화에 배어있는 배우들의 시선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가슴을 찌를 듯하다. 수없이 많은 중국인 불법 체류자들. 먹고 살 길을 찾아서, 새로운 삶을 찾아서 신세계로 온 그들의 첫번째 단계는 같은 민족들에게 착취 당하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상의 제약 - 물론 여기선 미국의 이민국처럼 나서서 불법 이민자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사람도 없다. 여태 그런 경우를 당했다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에다가, 영어가 전혀 안된다는 점은 그들을 자기 민족의 커뮤니티에서 먹고 살 길을 찾게 만든다. 그 결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라는 전형적인 착취 구조에 자신들의 목을 집어넣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아예 캐나다에 밀입국할 때 부터 밀입국에 필요했던 돈을 다 갚을 때 까지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우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최저 임금 시간당 7.45불, 중국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커뮤니티에서 받는 돈, 시간당 3-4불, 물론 잠자리와 먹을 것은 합숙으로 해결한다. 이 합숙소가 한 번은 캐나다 경찰에 적발되어 신문에 난 적이 있었다. 구로동 쪽방과 별 다를 것 없는 형태지만 이 나라 인간들에겐 적잖이 충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하튼 내일은 오늘보다, 어제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라는 미신에 속아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희망에 부풀어 홍콩의 거리를 달리는 여명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이곳에선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모습들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를 내일에 대한 기대는 합법적 신분으로 희망의 나라에서 풍요를 누리고 싶다는 그들의 소망은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야비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란 경쟁을 기본 원리 중의 하나로 하는 사회. 여기서 밀리면 갈 곳없이 죽는다는 비장함은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게끔 만든다. 어디 하나 등기댈 곳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들과는 다른 소위 부르조아의 모습을 한 이민자들이라면 단연 한국인과 대만, 홍콩인들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나처럼 가난한 인간들도 분명 있을테지만 대부분은 적어도 1억 이상의 현금을 들고 이곳에 이민와 처음에는 취직을 노려보다, 결국은 소규모 사업에 종사하게 되는 계층이다. 캐나다에 와서 음식점에서, 구멍가게에서, 기타 작은 각종 가게들에서 마주치게 되는 동양인들이 이 부류들이다. 정말 부자들, 이 사람들은 평일날 골프장에 가면 잔뜩 만날 수 있다. 들은 말로는 특히 밴쿠버가 이곳 토론토 보다 심하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소위 잘나가는 아시아의 나라에서 왔지만 돈 없고, 취직이 않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밟아가는 길은 각종 현금박치기 일에 종사하다가 결국 들고온 쥐꼬리만한 돈이 떨어져 갈수록 눈높이를 낮추고 마지막에는 공장으로 가게 되는 사람들이다. 좀 정리를 해보고 이들의 이야기를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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