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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노동운동사 -1

* 이글은 "Canadian Labour History"라는 이름의 8페이지 짜리 교육자료로 캐나다 노총(Canadian Labour Congress)의해 만들어 진 것을 제가 공부 좀 해볼라고 제멋대로 번역 해보았습니다. 원문자료는 여기(http://action.web.ca/home/clcedu/attach/labourhistory.pdf)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캐나다가 역사책에 등장하는 정치가나, 군인이나, 사업가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들의 나라는 숲을 개간하고, 토지를 경작하고, 운하를 만들고, 철도와 도시, 우리들의 공장과 기타 천연자원 산업을 만들어 낸 인민들의 노동과 땀으로 건설된 것이다. 우리들이 이들의 삶과 경험을 공부할 때, 우리는 우리들의 뿌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캐나다가‘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었다면 이는 캐나다 내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는데 고된 노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업과 모피 무역, 농업과 벌목은 캐나다 정착민과 그 가족들만으로 수행해야 하는 힘든 일이었으며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와 비교하면 수공업 노동은 희귀하고 특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프랑스령이나 영국령 캐나다를 막론하고 수공업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이 사회적 존경과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이민사회에서 숙련노동자들의 공급은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그들이 받아야할 임금은 요구하는대로 올라갔지만 동시에 기술 혁신을 통해 숙련노동자들을 대치해야 할 필요성 또한 같이 높아져갔다. 1812년 전쟁 중에 헬리팩스, 쌩 존 그리고 퀘벡에 존재했던 초기 조합의 존재 근거는 그들 작업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다른 조합들, 예를 들면 1830년대의 몬트리올 제화공 조합나 토론토의 인쇄공 조합은 숙련노동자들이 자신의 기술과 상태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여기서 되풀이 되는 중요한 요인은 실업, 질병, 극빈자의 장례와 같은 재앙에 대항한 상조회의 결성이었다. 아직까지는 많은 초기 노동사가들이 지적하듯, 조직화의 혜택은 몇몇 행운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1859년 이전에 모든 조합들은 기술자 연합회(Amalgamated Society of Engineers. ASE)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지역 조합들이었다. 이 영국의 조합은 1853년 몬트리올에 첫번째 캐나다 지회를 1857년에 해밀튼에 두번째 지회를, 1858년 토론토와 브랜트포드에 각각 지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1859년을 지나며 캐나다의 조합주의는 점차 더욱 더 국제화되기 시작했다. 즉, 조합에 소속된 조합원들의 본부와 조합원의 자격이 다른 나라와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술자 연합회(ASE)는 18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주형공 조합(1859), 기차 기술자조합(1864), 식자공 조합(1865), 성 크리스핀의 기사들(제화공 조합)(1868), 시가제조공 조합(1869) 등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1871년 이전에 벌써 통 제조공 조합이 나타났고, 벽돌공과 석공 조합(1872), 기관차 화부조합(1976), 노동기사단(1879), 선로감독관 조합(1881), 미국 목수 형제단(1882), 열차 승무원 조합(1885), 그리고 도장공과 장식공 조합(1887)등이 이어진다. 영국과 미국의 이민자들은 본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조합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다른 경우는 좀 더 크고 강한 조합을 원하는 캐나다의 지역 조합들과 캐나다에 어려운 시절이 닥쳤을 때 자유롭게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원하는 조합원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0년대에서 1880년대에 동안에 대부분의 캐나다의 노동자들은 순수한 지역, 지방에 국한된 조합들을 만들어 나갔다. 오랜 세월동안 이 다양한 조합들은 심지어 같은 도시나 마을에 있거나 하더라도 서로간에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893년 12월 해밀턴의 몇몇 조합들이 적어도 1875년까지는 대륙을 통괄하는 노조들의 대리자 자격으로 통합된 노동조합, 직능단체들을 구성했다. 1891년 다섯개의 직능 조합이 Toronto Trades Assembly (1871-78) 을 조직했고, 곧이어 Ottawa Trades Council (1872-76), St. Catharines Trades Assembly (1875) 등이 이어진다. 1873년에는 토론토 어셈블리가 전국 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그 당시 캐나다에는 수백개의 조합들이 있었지만 회의에는 온타리오 전역에서 31개 지역 14개의 노조만이 대리인을 파견했었다.(몬트리올과 퀘벡의 식자공 조합에서도 동의를 표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는 했었다.) 이 회의에서 캐내디언 노동조합이라는 첫번째 전국 중앙 조직을 만들어냈고 1874, 1875, 1876 그리고 1877년에 다시 회의를 가졌다. 1870년대의 경기침체는 지역과 전국 중앙조직 그리고 수많은 지역 노조들, 특히 국제조직의 지부들을 위기에 빠지게 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1883년에 전국 조직의 결성을 위한 또 다른 노력이 시작되었고 3년 뒤 이 조직은 Trades and Labor Congress of Canada (TLC)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TLC는 현재 캐나다의 전국 주요조직 중의 하나인 캐나다 노총의 전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이 지도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다양한 지역에서 뽑히고, 특정한 커뮤니티의 노동조합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노동조합의 지방단체들이 만들어 지고, 지방 단위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유아기의 캐나다 노동운동은 1872년 토론토 인쇄공 파업을 통해 9시간 노동제 쟁취라는 의미심장한 법률적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글로브(현재 글로브&메일이라는 캐나다 전국신문 중의 하나의 전신)의 조지 브라운을 필두로 하는 대부분의 토론토 인쇄 장인들은 반 노조진영에 서 있었다.그들은 식자공 조합 위원회의 13명의 지도자들을 선동 음모혐의로 체포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조합이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법원은 영국 일반법의 불충분한 점들이 반영된 캐나다 법이 (식민지인)캐나다까지 아직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노조지도자들을 석방하게 됐고 온타리오의 조합들은 영국의 조합들이 1791년에 누리던 법적 지위를 1872년에도 여전히 가지게 됐다. 노조 지도자들은 캐나다의 법률이 영국과 똑같아지도록 작업하기 시작했다. 존 A 맥도날드 경은 전년도 영국법들을 모델로 한 노동조합법과 형법 개정안이라는 두 개의 법안을 자유당과 함께 식민지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캐나다 노동조합이 이루어낸 첫번째이자 커다란 성공적인 정치행위였다. 검사는 기소를 포기했고 파업은 승리했다. 국가성장정책(1879)의 채택, 캐나다 태평양 철도 건설(1881-1885)과 함께 캐나다의 산업이 회생,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합도 회생했다. 이들 초기 조합의 일부는 사회 변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원칙적인 수공업자들의 조합이었다. 그들은 현상유지에 만족하는 걸로 자신들을 변화시켰다. 오늘날 그들은 “bread-and-butter unions” 이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이들 소규모 노동조합들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했었다. 모든 캐나다 노동조합 운동가들이 최저 생계유지에 매달려 있거나 모든 커뮤니티에 이득을 줄 진보적인 사회정책에 관심을 가질는 것이 배제된 ‘사업을 위한 조합주의’나 또는 그런 식의 정책에 우선권을 주려는 정당을 지원하는 것에 관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운동의 초창기 이런 식의 조합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캐나다의 조합들은 노인연금과 실업보험 같은 사회보장 정책을 위해 싸우는 최전선에 있었다. 1880년대의 가장 극적인 특성은 노동기사단의 등장과 성장이다. 실제로 노동기사단은(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캐나다, 영국, 벨기에, 호주, 뉴질랜드등으로 퍼져나갔다)은 1881년 가을 캐나다에서 시작됐다. 십여년간 그들은 300개가 넘는 지역조직을 100여개 이상의 도시, 마을에 조직해냈다. 오직 예외라면 프린스 에드워드 섬과 오늘날 사스캐츄원이라고 불리는 주만이 그들의 조직이 없었다. 대부분의 지역 조직들은 단명했고 세기를 넘기면서 일부만이 살아남았지만 1887년 당시에는 200여개에 가까운 조직이 건재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노동기사단의 주요 대상이 비숙련 남,녀 노동자(이전에는 매우 적었던)와 작은 마을의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숙련노동자라는 점을 무시하지 않았다. 캐나다에 있어 그들의 첫번째 큰 공헌은 위니펙에서 노스 시드니까지 북미 연합 전신노동자 조합의 45지역 소속으로 30개의 전신노동자 지역 조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조직은 1883년 여름 국경 양쪽에 모두 존재하는 대규모 전신회사를 상대로 북미 역사에 남을 국제적인 파업을 이루어낸다. 파업은 실패하고 캐나다의 전신 노동자 조직은 사라졌지만 기사단은 목수에서 시계상자공(원문은 watchcase maker - 이런 걸 따로 만드는 직업이 존재했다니...), 석공에서 음악가 까지 거의 모든 수공업 노동자들을 조직했었다. 최초의 조직화 행동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면서 지역과 전국 조직 건설을 위한 움직임도 다시 시도되었다. 새롭게 만들어 지는 지역과 전국 중앙 조직은 의식적으로 일관되게 자신들을 “직업과 노동 평의회(Trades and Labour Councils)”라고 불렀다. “직업"이라 는 말 속에는 비숙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파업권, 시위권, 보이콧 같은 노동조합의 권리들은 사용자들의 비교할 수 없는 권한과는 달리 제한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은 사용자들의 해고, 블랙리스트, 파업파괴자 고용과 같은 공격적인 행동에 대한해 아무런 안전장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01년부터 1913년 사이 노동자들은 14개의 전국 규모의 파업 – 일부는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던- 을 겪었다. 그 중 11개의 파업에 민병대나 군대가 동원됐었다. 법은 노동자들이 단체협상을 조직하게나 자신의 일을 지킬 권리보다 사적 소유권과 사용자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권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게다가 파업파괴자들과 사용자들은 특수 무장 경비와 일반 경찰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소유물을 지켰다. 지역과 지방의 경찰력은 종종 집시법, 계엄령 등을 발표하고 민병대와 육군을 이용해 공공 집회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국제 노동조합들에 의해 TLC가 만들졌고 TLC는 국제 노동조합 조직들과 연대에 주저하지 않았다. 1902년 노동기사단을 비롯해 모든 조직들은 TLC의 노동조합들과 대결 상태에 들어간다. 대부분의 산업에 있어서 국제조직들은 그들이 해내야 할 일에 대해 인력과, 경험과 자금을 갖고 있다는 것을 TLC는 알고 있었다. 1902년 TLC에 의해 추방된 조합들은 1908년 캐나다 노동자연맹(CFL)이 될 캐나다 전국 노총을 결성한다. 그리고 1920년에는 TLC의 지부였던 노바스코샤의 주(주)노동자 협의회를 흡수하게 된다. 1919년 위니펙 총파업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서부지역의 노조활동가들은 TLC와는 거리를 둔 혁명적 공장 노동조합주의에 경도된다. 그리고 국제노동조합들을 결성하면서 프래이리와 브리티쉬 콜롬비아의 TLC 조직의 커다란 부분을 떼어내 One Big Union을 만든다. OBU의 존재는 TLC의 구조가 새로운 대량 생산 시대에 맞추어 늘어난 비숙련, 반숙련 노동자들의 요구를 담아내기에 부적절하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었다. 1901년과 1921년 사이에 소규모 카톨릭 노조(아마도 노동기사단의 지역 조직이 전신이었을)들이 퀘벡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의 보호 아래 등장했다. 이들은 1921년 캐나다 카톨릭 노동자 총연맹을 결성한다. 1927년 CFL과 다른 전국 규모 노조들은(특히 1917년 TLC에 들어갔다가 1921년 추방된 캐나다 철도 고용인 형제회) 산업과 전국적 노동조합주의를 표방하는 전캐나다노총(ACCL)을 결성한다. 1935년에 이르러 공산주의 노동자 동맹을 포함해 순수 캐내디언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조합의 절반에 이르렀다. 두 진영은 이제 통합되어 있다. TLC가 수련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동안 ACCL은 전 산업을 포괄하는 노조단체가 되어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경기는 급강하해 10년 전의 수준으로 돌아갔고 실업률은 기록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정부는 실업자들과 가혹한 임금삭감과 노동조건에 맞서 싸우는 파업참가자들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보였다. 정부의 무능으로 실업률이 급증하자 브리티쉬 콜롬비아에서 오타와에 이르기 까지 베넷 보수당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정부는 연방경찰로 하여금 오타와에서 이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시킨다. 실직 노동자들은 총상을 입거나 구제 캠프에 보내졌다. 그러나 저항의 씨앗은 이미 심어졌다. 이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산업별(제너럴 모터스 같이)이냐 아니면 기술별로 노동조합을 조직할 것인가에 대해 커다란 논쟁에 휩쌓여 있었다. 대량생산 산업에 있어서 비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요구는 점점 확대 일로에 있었고 조직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노총(AFL)은 비숙련노동자들을 산업별 노조로 조직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전에 언급했던 OBU와 ACCL의 경우처럼, 새로 만들어진 산별 조직 회의는 이들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대표했다. 이 구조는 미국과 비슷한 산업환경을 가진 캐나다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TLC는 CIO의 캐나다 지부들을 어쩔 수 없이 조직으로부터 추방해야 했지만 미국노총은 흔들리지 않았다. AFL 산하 노조들(캐내디언 노조의 수가 훨씬 더 많았던)로부터 가상의 최후통첩을 받게 되자,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게 되었고 1939년 캐내디언 CIO는 추방 당했다. 노동조합만큼 노동하는 인민의 생활을 변화시킨 것은 없었다. 전시 중 일련의 충돌들, 1943년 초반에 최절정에 이른 제철노동자들의 비공인 파업에 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연맹(CCF)의 극적으로 늘어난 지원과 함께, 캐나다 노조운동가들은 미국 노조들이 1935년 와그너 법안 아래 이루어 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P.C 1003으로 알려진 Privy Council Order 1003이 1944년 2월 발효되었다. 마침내 노동조합과 사용자 간의 불공정한 관행들을 억제할 노동관계법이 정비가 된 것이다. 노동자는 노조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단체협약을 체결할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미 일부 다른 주에서는 그런 규정들을 갖고 있었지만 p.c. 1003을 통해 연방과 주 정부의 법률기관들이 노사관계에 대한 불변하는 기초 법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해인 1945년 말 랜드 원칙에 의해 보강된다. 이 해법은 포드 자동차와 북미자동차노조 사이에 체결된 협약에 기초한 것으로 노동자가 노동조합이 제시한 임금안과 복지사항에 동의할 경우 노동조합비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에이전시 샵이란는 인상적인 형태로, 이반 랜드 판사는 노동조합의 안정성에 대한 강력한 힘을 지닌 타협안을 제출한 것이다. 전후 노동조합의 형태는 1946년과 1947년의 파업을 거치며 완성되었다. 급속히 성장하는 시장으로 인해 강력한 반노조 정책을 지닌 기업들이라 하더라도 시장상황이 갑자기 좋아질 때는 타협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조합의 임금안과 그 영향을 받은 비노조 부분의 임금은 경제활성에도 도움을 주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거의 3분의 1에 이르는 캐나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자원 관련 산업과 제조업종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비노조 기업들은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을 노동조합이 있는 타사에 맞추어야만 노동자들을 자신의 공장에 묶어둘 수 있었다. 1949년에 닥친 불황에도 불구하고 캐나다인들은 자신들의 행운이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연금과 건강보험은 집과 차와 별장과 보트를 소유하는 것 처럼 기본이 되었다. 확실히 노조들을 긴 파업들을 경험했지만 폭력이 개입되는 것은 초기 시절에는 드문 일이었다. 1957년 머독빌이나 1959년 뉴펀들랜드 벌목공 파업같은 패배의 경험 역시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고, 패배했다 하더라도 뒤이어지 싸움엑서 승리함으로써 복수하고 했다. 조직적 측면에서 노조들 사이의 통합을 위한 첫걸음은 , 역설적으로, TLC에 대한 첫번째 영향력있는 반대운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ACCL과 캐나다 산별노조 위원회는 1940년 노총 자체와 산별노조의 지부를 포함해 완벽한 자율성을 갖는 캐나다 노총(CLC)만들어 통합하기로 합의한다. 대부분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생 조직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성장하고 강력해졌다. 대량생산 산업들을 조직하고, 노동자 교육과 노동관계법 등 노동 관련 연구들을 수행해내는 선구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15년간 TCL과 CCL 양자는 거의 매년 조직의 통일에 대해 해법을 주고 받고, 1948년 부터는 일반적이 되어가는 문제들에 대해 대응해 공동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두 개의 미국 중앙 조직이 멍청이들(원문 loggerheads) 손에 있는 상황에서 캐나다 본부는 재통합을 위한 작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TLC의 규약에 의하면 AFL 산하 노조가 되는 이중 멤버쉽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통합을 토론하는 것에 동의했을 때 이 조항은 사라져 버렸다. 1953년 말 두 개의 캐나다 노총은 통합위원회을 결성하기로 약속하고 첫번째 협약으로 상대 조직의 조직원을 빼앗아 가는 일을 금지하는 “노라이딩 협약”을 체결했다. 1955년에는 머저 협약을 채결했다. 두 개 노총의 회의 결과로 통합안이 비준되고, 머저 협약은 힘을 갖게 되었다. 1956년 4월 통합노총의 결성을 위한 회의가 열리게 된다. * 반틈 너머 더 남아있는데 그건 내일 올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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