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7-14) 高大文化 [50호]


노동 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강 수 돌 (고려대 국제정보경영학부)

1.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하는 21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은 과연 희망의 시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전례 없이 비참한 종말의 시대가 될 것인가? '더 이상 착취당할 기회마저 상실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현재의 지구촌을 둘러보면, 최소한, 21세기는 희망의 시대가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비참한 종말이 자동적으로 다가온다고 믿고 싶지도 않다. 결과는 우리들의 집합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기 책임성(self-responsibility)과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를 기본 원리로 하는 '풀뿌리 자율성 운동'이 그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개되는가가 핵심일 것이다. 결국 절망의 시대를 희망의 시대로 전화시켜낼 수 있는 거대한 힘은 시장 경쟁력에도 있지 않고 국가(또는 엘리트) 권력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민초들의 자율 역량에 내재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렇다면 자율 역량의 문제와 노동거부의 문제는 과연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또한 노동권, 즉 노동에 대한 권리와 노동에 대한 거부권의 상충적인 개념들을 민중의 자율성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부분적으로만 문제시되고 있는 노동중독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노동거부와 삶의 자율성 강화를 이루기 위한 탈구들은 어떤 것일까? 이런 점에서 노동시간단축 운동을 다르게 자리매김할 수는 없을까?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들이다.
자유로운 노동 내지 노동 해방을 향한 외침은 오래되었으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에 관한 노동자 내부의 논의는 그리 깊지 않다. 내가 보기에 자유와 해방을 향한 돌파구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당연한 듯 '신성시'하는 '노동'의 권리를 되짚어보는 것에서, 둘째, '자본'을 닮아있는 우리 자신의 의식과 행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에서, 셋째, 삶의 재생산과정이 전적으로 화폐의존적으로 변하고 있는 경향성에 맞서는 것에서 찾아지리라 본다. 이 세 가지 사례는 원래 노동시장, 노동과정, 생활과정이라는 세 범주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


2. 노동권과 노동거부권

* 에피소드 1: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 마을의 아침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이 노인이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그 노인이 행복하게 잠자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찍어댔다. 그런데 이 찰칵거리는 소리에 그만 이 고기잡이 노인은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 그만 ...…, 이거 어떡하지요?"
"......"
"그런데 할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
"벌써 새벽녘에 한 번 다녀왔구만."
"아, 그러세요? ... 그러면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 참, 할아버지두, 고기 많이 잡으면 할아버지의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쟎아요?"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씬 빨리, 한결 많이 ..."
"음... 그 다음에는?"
"그야,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그렇게 되면, 한꺼번에 뭉칫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 이 마을에 생선 가공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
"흠...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이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네."
"......"(원작 하인리히 뵐; 강수돌 <경영과 노동> 제14장 참고)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 '뿌듯함'을 느낀다. 성과가 나타나거나 돈을 버는 데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 즉 노동이란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으로서의 노동이기 때문에, 이 노동은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켜 주는 한에서만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지극히 역사적인 개념이다. 한마디로, 여기서 노동은 곧 자본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실업과 해고라는 삶의 위험성 앞에서 노동을 할 권리(das Recht auf Arbeit), 즉 노동권을 주장해왔다. 그 위에서 오늘날 노동3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노동자에게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노동기본권으로 되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이러한 노동권조차도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토대로서의 자본종속적인 노동을 당연시하고 나아가 노동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부터 주장되고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자연과 부단히 교류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생명 활동을 수행하던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의 형태로 거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동권 개념이 나왔던 것이다.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은 달리 보면 민중들의 삶의 자율성이 거세되는 과정이었다. 삶의 문제를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여 노동시장에 경쟁력 있게 내다 팖으로써 해결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노동자들은 노동권이야말로 '생존권'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자본 아래 실질적으로 복속되어 노동을 해야지만 임금이라는 소득이 생겨 비로소 삶의 문제(먹고사는 문제, 자녀 양육 문제 등) 해결이 가능하므로 '노동할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실업과 해고는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에게는 죽음이다. 그것은 경제적 토대의 박탈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정체감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자신의 노동이야말로 '자아실현'의 기회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량실업 시기에 자살율이 높은 것은 경제적 위기 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위기 의식이 극단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제 발로 선 자본주의의 역사 200년만에 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는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대량실업이 활개를 치게 되었고 민중들의 노동권에 대한 강한 정열은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더 활활 불타오른다: "노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바로 이런 맥락에서, 노동거부권(das Recht auf Faulheit), 즉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 여유롭게 살 권리는 결코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요구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완전고용'을 이룰 수 없는 시장의 실패 문제나 정책의 실패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 자체가 이미 삶의 기쁨이 아니라 삶의 억압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다. 가변 '자본'으로서의 노동은 그 자체로 자본이므로 마치 흡혈귀처럼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을 부단히 흡수해야지만 시장경쟁 구조에서 생존이 가능하다. 또한 '가변' 자본이기 때문에 자본의 몸뚱어리를 갈수록 더 크게 변화시켜주어야 한다. 이 과정이 바로 삶을 억압하는 과정이 아닌가. 만일 일시적으로나마 삶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가변자본이 증식시켜 준 자본의 떡고물을 좀더 많이 분배받을 때뿐이다(임금인상과 휴가, 승진, 복지라는 형태로).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하는 사람들을 억압 구조 속으로 더욱 더 단단히 묶어놓는다. 따라서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삶의 기쁨은 그 안에는 없다. 따라서 단호한 요구가 나온다. "노동거부!" 어차피 시장경쟁 속에서 20%도 안되는 '똑똑한' 자들 뒤에서 80% 이상이 들러리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나만이라도 20% 대열에 합류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에피소드 속의 노인처럼 삶의 자율성의 누리며 '주인공'으로 살 필요가 있다! 또한 실업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실업자의 취업 능력(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업을 낳는 구조(경쟁 구조) 자체를 타파해야 하지 않을까? 20%의 경쟁력 있는 노동력과 80%의 경쟁력 없는 노동력으로 갈라지는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서로 처절히 경쟁하지 않고 모두가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분열과 경쟁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노동시장(labor market)이라는 공간 위에서 나름대로 사회적 인정을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결코 진정한 대안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본증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서로 경쟁하는 그런 노동을 거부하겠다는 구호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새로운 햇살을 강하게 받고 있다.


3. 노동중독증에 대한 고백

* 에피소드 2: "30대 후반의 직장인입니다. 이상하게 저는 주말이나 휴일에도 일을 안하고 쉬는 것을 못 견딥니다. 불안한 데다 컨디션도 평소보다 더 나빠지곤 합니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물론 일을 할 때도 몸의 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쉬는 날보다는 낫습니다."(1999. 8. 25. 서울 논현동의 한 회사원)

* 에피소드 3: 주부 박아무개(35)씨는 요즘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원만한 가정생활을 했다. 그런데 지난해 초부터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 '일찍 나가야 되니 건드리지 말라'고 신경질을 냅니다. 저도 남편 들어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죠."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그때부터 남편은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모른다"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회사에 출근했다. 평일에도 밤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박씨는 "사는 게 허무할 뿐"이라고 말한다. 격무에 시달려 일만 쫓아간 남편의 생활이 부인한테 우울증세를 유발한 것이다.(한겨레 21, 99. 8. 26)

일찍이 110년 전에 맑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일중독증'에 사로잡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외친 적이 있다. 그만큼 에피소드에서 묘사되고 있는 일중독증은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사회적 병이다. 그런데 알코올중독증이나 마약중독증, 섹스중독증, 쇼핑중독증 등 다른 중독증과는 달리 일중독증만큼은, 위 에피소드들의 사례에서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권장'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과 성과를 내야지만 편안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진는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란 우리 사회에서, '미친 놈, 한가한 소리한다'고 욕먹을 가능성이 크다.
대개 사람들은, 늦게 자더라도 일찍 일어나 다음날 할 일을 일일이 리스트로 작성하고 정말로 일에 흠뻑 빠져 일을 즐기면서 하는 이들을 두고 성실하고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경영학에서는 '직무몰입'이나 '조직몰입'과 같은 용어를 쓰면서 이것이야말로 조직의 성과를 내는 데에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정신과 의사들은 그런 사람들을 일중독증 환자라고 문제시한다. 의사들의 정신이 이상한 것인가, 아니면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이상한가? 정확한 답은, 오늘날 한 해 동안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 버금가는 '과로사'(work to death) 숫자가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 심각성이 사회문제화 되기는커녕 '국가경쟁력 강화'니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니 하면서 자본은 더욱 많은 사람들을 일중독에 빠지도록 몰아간다.
일반적으로 중독증의 이면에는 모종의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이하 Heide 1999, 강수돌 1997a 제14장 참고). 이 두려움은 사실상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전일적 삶의 총체성에 대한 이해의 결핍(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는 대립과 경쟁을 조장하는 자본제 사회는 갈수록 이를 부채질한다)에서 온다. 만일 만물의 삶과 죽음 일체에 대해 전일적으로 심층 이해하게 된다면 그 두려움은 극소화되고 대신 삶의 자율성이 극대화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의 부족으로 생긴 두려움을 적극 끌어안거나 올바로 극복하려는 내면적 자율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회피'하기 위해 다른 대체물에 의존하게 된다. 일중독 또한 삶의 자율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삶의 전반적 불확실성에 대한 은근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을 통해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삶의 불확실성이란 사실은 인간이 자연과(그리하여 동시에, 자기의 내면적 본성과) 맺는 관계가 잘못된 데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적대시하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 외면과 내면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또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적대시할수록 인간은 결코 스스로 평화로이 살 수 없는 것이다. 삶이 불안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고 마침내 그 수단에 종속된다. 그러나 결코 원래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가 없고 공허감만 커져, 갈수록 그 수단에의 종속도가 커지는 것이다. 일중독자의 경우 갈수록 더 많은 성취(가시적 성과)를 이루어야지만 뭔가 하는 것 같고 성공적인 것으로 비춰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는 결코 진실한 만족감을 갖다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큰 공허감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에 젖은 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이 일중독에 빠져들게 된다.
다른 병들이 그러하듯 일중독증도 가장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열심히 일에 파묻힌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칭찬과 보상이 일중독증을 드러내기는커녕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성실성과 일중독증을 동일시하는 문화 자체를 단호히 타파해야 한다: "노동거부, 여유로울 권리!"


4. 노동자에게 내면화된 자본 털어내기

* 에피소드 4: "…그분은 결국 회사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짝사랑의 보람도 없이 문 밖으로 쫓겨나면서도 여전히 회사를 사랑한다는 그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온갖 수발을 다 들다가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고도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비련의 여인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심봉사(회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정상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인당수(해고)에 빠졌던 심청이를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 심청이를 희생시키고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심봉사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웃들의 도움에 의해서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임원택 1998)

* 에피소드 5: "… 남성들은 회사 다니면서, 회사생활에 적응하면서 '회사가 내 목을 쥐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성을 회사의 스케줄에 따라 조절하지요. 이른바 회사형 인간이 되는 거예요. 회사가 '너 오늘은 성관계 하지마' 이렇게 대놓고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따르는 순응적인 인간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회사 일정에 성 스케줄을 맞추면서도 그게 자연스럽다고 느끼고 또 자기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게 제일 비극이죠."(엄인희,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작가)

일(성과)과 자신(행복)을 동일시하는 문화를 극복하는 것은 곧, 노동하는 사람들 속에 내면화된 자본의 논리를 훌훌 털어내는 것이다. 가변 '자본'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노동이란 곧 자본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 털어내기 운동'은 앞서 말한 노동 거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의 에피소드에도 나오듯이, 내가 회사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냉정히 깨닫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돈벌이 기계(회사)의 스케줄에 삶의 세계를 종속시키지 않는 것 등등 매우 많다. 몇 가지 현실적 사례들을 더 살펴보자.
노동자들이 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거나 다른 회사의 소액주주가 되는 경우에 그들은 노동자의 모습과 자본가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굳이 그러한 지분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노사 협력 하에 '파이를 많이 늘여야지만 나눠먹을 파이가 생긴다'라고 생각하는 때부터 이미 그들은 자본을 닮게 된다. 여기서 자본의 핵심은 본전 생각하기, 끝없이 불려나가기, (그러기 위해서라도) 모든 살아있는 것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기('상품화'하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경쟁과 분열하기 따위에 숨어 있다. 이른바 '물신주의'는 자본의 논리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전화되는 통로이다(상품 물신, 돈 물신, 자본 물신 등에 대해서는 힌켈라메르트 1999 참조).
따라서 우리가 돈을 은행에다 맡기고 높은 이자를 기대하거나 더 높은 이자를 주는 은행을 찾아다니는 것은 바로 자본의 모습이다. 은행에 예금된 돈은 자본으로 투자되어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영행위가 이뤄진다면 가변자본(노동력) 덕택에 불어나게 된다. 이 불어난 자본의 일부를 이윤분배, 이자, 배당금의 형태로 사람들이 나눠먹는 것이다. 크게 보아 한마디로 우리는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여 경영의 수익성 내지 경쟁력 향상이나 위기 관리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공동경영자'(Co-Management)가 되는 길이다. 물론 노동자가 철저히 배제되어 어떠한 영향력 행사도 어렵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그러나 경영 참여의 과정이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과 삶의 자율성 향상을 위해 일관되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익성과 경쟁력, 생산성의 울타리에 새로이 갇혀 자본의 합리성을 앞장 서서 대변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본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요컨대 '내 마음 속의 자본'(internalized capital)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자본의 모습을 닮아있거나 닮아 가는 행위 논리와 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 발본색원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 운동은 생활임금 쟁취와 노동시간 단축, 고용안정성 유지, 노동 환경 개선, 인격 대우 및 평등 대우, 복지 향상 등과 같은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하는 차원에서는 지극히 정당한 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바로 그러한 노동조건의 개선이 역설적으로 임노동관계의 강화와 일중독증을 부채질하는 역설적 한계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노동이 자본 안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게 보면 노조운동도 사실은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경쟁 업체를 물리쳐야만 안정된 고용과 소득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적 딜렘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노동운동은 스스로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정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허재영 1997 참고).


5. 삶의 화폐의존도 줄이기

* 에피소드 6: "그는 월 30만원을 벌고 그 돈으로 한 달을 산다. 그는 시인이다. 게다가 다른 직업이 따로 없는 '전업시인'이다. 시는 많이 써야 한 달에 두어 편 정도. … 그 친구는 시 한 편당 2만-5만 원을 받는다. 가난한 잡지에 시를 발표할 경우엔 그나마 원고료도 못 받고 대신 그 잡지의 정기구독권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게 된다. … 한 달에 30만 원으로 살려니 그건 생활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극기훈련이다. 우선 집밖을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버스를 타도 거금 500원이 들기 때문이다. 방안에 틀어박혀 사는데도 전화코드를 빼놓는다. … 대신 누군가에게서 '호출'이 오면 코드를 꽂아 전화를 한다. 누군가가 호출을 했다는 건 술이든 밥이든 사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내 시인 친구의 화려한 외출은 그렇게 이루어진다."(김중식, 돈에 관한 쓸쓸한 삽화 둘, <공동선> 1998년 5·6)

* 에피소드 7: "몇년 전부터 농사는 내 먹을 만큼만 하고 나무를 주로 키워. 없는걸 만들어내는 건 농업밖에 없어. 상업이야 있는 물건 사고파는 거고 공업도 모양만 바꾸는 거 아냐. 식물만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내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건 그것들로부터 세상살이 이치를 배우기 때문이지. 한 자도 안되는 도라지는 겨울 땅 속에서 완전히 얼었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살아나. 시련을 달게 이기고 일어서는 게 사람보다 나아. 나무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지 뻗으며 사는데 빛 많이 받는 남쪽가지가 북쪽보다 길고 크지. 그렇다고 북쪽 가지가 남쪽으로 가진 않아. 사람은 어떤가. 편하게 살겠다고 농촌을 버리고 다들 도시로 갔잖아. 그래서 남은 게 뭐야. 눈에 쌍심지 돋우고 분초 다투며 산 끝에 다들 나가 떨어지잖아. 도시에서는 요즘 매일 30명이 자살을 한다며. 남 탓할 것 없어. 서울가면 큰 수나 날 줄알고 몰려간 거 아냐. 어떤 사람이 취직해 열심히 일했더니 과장 부장 사장된 다음 송장이 되더라는 농담도 있더구만. 내가 좋아하는 도연명 말처럼 '헛살아야 해'. 이루지 못하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해서 아쉬워할 거 없어. 괜히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저 살아있으니 산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살면 돼. 마누라는 오륙년 전에 죽었고 애들(3남3녀)은 모두 나가 살아. 고등학교 나온 놈도 있고 초등학교만 마친 놈도 있어. 막내딸은 공부 지지리 못했는데 시집가서 잘만 살아. 처음 혼자 됐을때는 미치겠더니 차차 익숙해지더구만. 혼자사니 생활이 단순해져 좋아. 결국은 혼자 살고 죽는거야. 잘 산다는 건 옳게 사는거지 사람 많은데 따라가며 사는 게 아니야. 한 삼십년 쉼없이 움직거리며 일하다보니 일에는 워크(Work)와 레이버(Labor)가 있는 거 같아. 워크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고 레이버는 팔기 위해 노동을 하는 거지. 요즘 직장잃은 사람들 많은데 그렇다고 일(Work)이 없어진 게 아니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벼룩은 보통 한번에 3m를 뛴데. 2m 유리병에 벼룩을 가둬놓았더니 유리병을 치워도 1.8m만 뛰고 말더라구만. 사람도 똑같애. 직장은 어쩌면 유리병같은 거라구. 인생은 사는 길이 참 많아. 남들이 옳다고 하는 관습, 상투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해.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말이야."(경북 봉화에서 강아지와 함께 사는 전우익씨, 동아일보 1998. 5. 6)

실업자가 많아지면 한편으로는 자살율이 높아지지만 다른 편으로는 범죄율이 높아진다. 정상적인 소득원이 사라지게 되므로 비정상적인 소득원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성마저 상품화하게 된다. 갈수록 교도소가 많아져야 하므로 교도소의 민영화가 이루어지는 반면에, 소수의 부자들은 불어나는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사설 경비원을 두고 자기들만의 성곽을 구축하게 된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돈'을 통해 해결하려는 구조를 강화해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라고 하지 않던가. 다시 말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영리주의가 삶의 전 과정을 돈벌이의 합리성 속으로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시스템이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고 말했다. 이미 우리 모두의 생활은 충분한 돈이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지는 식으로 바뀌고 있다. 생활비가 오르면 노동자는 임금인상투쟁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고, 임금이 오르면 자본가는 물가를 올린다. 그리하여 갈수록 삶의 문제 해결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먹는 것도 재료부터 요리까지 사서 먹어야 하고, 옷도 사서 입어야 하고, 집도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사람들 사이에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줄어드니까 신문이나 잡지를 사서 보아야 하고 재미나는 놀이 문화를 스스로 하지 못하게 되니까 노래방과 오락실을 찾거나 게임 프로그램을 사야만 한다. 심지어는 집안 일이나 계단 청소까지도 돈을 주고 해결한다. 육아, 교육도 모두 그러하다. 도둑이 설치니까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 경비 체계도 구축한다. 특히 광고와 유행(패션)이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따위를 통하여 인간 본연의 욕구를 지속적으로 조작하고 '자본친화적으로'(kapitalfreundlich) 변동시켜 나가기 때문에 소비중독, 돈중독, 이윤중독의 경향성이 커진다. 나중에는 별로 필요 없는 상품마저 이미지나 유행 때문에 구매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긴박한 필요가 없이도 많은 돈을 지출해야만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도 벌어진다. 이런 식으로 삶의 전 과정이 화폐를 통해야 해결되는 양상으로 가다보니 결국 화폐의존도가 높아지는 대신 삶의 자율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임금노동에의 종속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결국 일을 더 많이 해야지만, 또 소속된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더 높여야지만 돈을 많이 벌게 되므로, 생활의 화폐의존도 강화는 마침내 일중독증을 구조적으로 부채질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반면에 위 에피소드의 시인이나 농부처럼 화폐의존도가 지극히 낮은 생활방식을 하나씩 실험해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생활구조를 근원적으로 혁신하여 '돈'이 별로 필요 없는 삶의 문화를 만들거나, 갈수록 돈이 적게 들도록 바꾸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미국의 애미쉬 공동체나 일본의 야마기시 실현지처럼 '자발적 간소함'과 '내면적인 풍요'를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공유하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도 곳곳에 그러한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생활과정에 돈이 별로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중독에 빠지기보다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이 가능하고 또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일을 나누어 가지면서 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삶의 질 향상에 꼭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하려 하니 그렇게 많은 노동을 할 필요도 없어지고 대신에 창의적인 문화생활을 할 여유가 많아진다. 혹시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함께 사는 이들이 각자의 역량에 맞게 도와가면서 하게 되니까 비교적 거뜬히 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일종의 '자율자치 공동체'일 것이다.
굳이 마을 단위의 구조변화가 아니라도 먹거리의 자립도를 높여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텃밭이나 주말농장 따위를 통해서 당장이라도 간단한 야채는 스스로 경작하여 먹어보자. 품질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다. 동시에 흙과 물, 공기와 햇볕, 벌레와 곤충 따위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시야가 확장되면 인간이 우주 만물과 맺는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원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만나 교류하고 마을을 만들고 또 그 마을들이 연대하게 되면 우리를 억압하던 커다란 삶의 구조마저도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사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사람이 가지는 새로운 삶의 원리(다른 사람과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가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되는가이다.


6. 다시 생각하는 노동시간단축 운동

대개 사람들은 그러한 '자율자치 공동체'라는 밑그림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현실적 조건은 자본과 국가의 억압이 첨예화되고 일상적인 노동자의 생활이 임노동에 묶여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대안적 밑그림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우선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실성이라는 것조차도 결코 저절로 주어지기보다는 사람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얼마나 절박하게 열망하는가에 따라, 그리하여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가면서 그 얼마나 새로운 돌파구들을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리 두려움에 사로잡혀 현실적 조건 타령만 하고 앉아있다가는 아무 것도 현실화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바로 우리들의 의식적 행위와 온갖 분열의 벽을 뛰어넘는 연대 활동이 새로운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새로운 조건 속에서 더욱 넓은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세계 변화의 원리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우리가 공동전선을 칠 수 있는 구호가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 그것은 단연코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아닐까 한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건강의 수호와 노동의 인간화라는 차원, 일자리 나누기라는 사회 연대의 차원, 여가 선용과 시간주권의 확보라는 차원 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간의 생산성 향상이나 기술발전, 노동자 의식과 욕구의 변화, 대량실업과 불완전고용의 증대라는 조건들은 노동시간 단축운동의 현실적 절박성을 더 크게 해 주고 있다.
만일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일할 수 있다면 삶의 구조는 엄청 달라질 것이다. 텃밭을 일구며 새로운 감각을 키울 것이고 삶의 기쁨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다양한 사회운동 속에서 진보의 방향과 내용을 세우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주권이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고 일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파열구들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어중간한 노동시간 단축보다는 과감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비록 단기간에 어려울지라도.
그런데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노동시간의 단축은 잉여노동의 감소를 초래하므로 자본은 당연히도 잉여노동을 더 많이 추출하기 위해 노동시간의 유연화 전략을 들고나올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실질임금 문제는 물론이요, 노동시간의 유연화 문제까지도 함께 걸려 있어, 전 사회적인 지혜와 힘의 결집이 없는 한 관철되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의 상호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시점이다.



7. 맺음말

'노동거부!'라는 구호. 이것은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동, 자본을 지속가능하게(sustainable) 만드는 노동, 그리고 자본의 생존 논리 그 자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경쟁과 분열의 패러다임 속에서 온갖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켜 자본의 몸불리기에 동원해내는 이 구조적 모순을 깨닫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구조와 그 구조를 온존시키는 삶의 방식을 어디서부터 바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아이디어가 가능할 것이다.
첫째, 유능한 노동능력과 왕성한 노동의지를 갖춘 노동력을 양성하는 사회적 공장인 학교를 바꾸어야 한다. 커리큘럼을 바꾸고 학습방식을 바꾸고 선생과 학생 사이의 관계맺기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일류주의, 일등주의, 엘리뜨주의, 기능주의, 적응주의, 국가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기존 학교에서의 참교육 운동, 새로운 대안 학교 건설 운동, 그리고 이들 사이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교류가 필요하다.
둘째, 경쟁력과 생산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파괴시키면서 자본증식에 혈안이 된 일터를 바꾸어야 한다. 작업방식을 바꾸고 노동시간을 과감히 줄이며(예컨대 하루에 한나절 노동) 생산물의 내용을 사회·생태적 필요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동료끼리, 상사와 부하끼리 맺어진 관계들도 과감히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생산력주의, 경쟁지상주의, 효율지상주의, 이윤주의를 타파해야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하되 차별과 지배가 없는 일터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노동운동이 매우 중요하긴 하나 그 근본적인 내부 혁신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특히 노동시간단축 운동은 노동운동, 여성운동, 생태계운동이 내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개인주의화되고 물신주의에 젖어 가는 마을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마을을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공동체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삶의 자립도와 자율성을 증대시켜 나가야 하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증진시키는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개발해야 한다. 두레나 품앗이에 의한 건강한 집짓기와 건강한 먹거리 만들기, 건강한 옷 만들기, 건전한 놀이 공간과 문화 공간 조성하기, 교환가치를 중심에 두는 거래의 경제가 아닌 선물의 경제를 확대시키기 따위가 구체적인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구조를 갈수록 화폐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화폐독립적인 것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탈상품화' 전략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중요하다.
요컨대, 이 세 가지 핵심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란,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따라서 자본)을 직·간접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보람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본 원칙에 동의하는 다양한 실험과 노력에 대해서는 많은 수의 "예스!"가 필요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여전히 경쟁과 분열, 억압과 지배, 착취와 수탈, 오만과 남용의 패러다임을 고집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이구동성으로 "노우!"를 외쳐야 한다("one No!, many Yes!").
이러한 대안적 운동에 필수적인 요소 두 가지는 첫째, 지금까지 우리를 억눌러 온 온갖 피해의식이나 의무감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기자신에게 책임성을 가지며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일이며(self-responsibility), 둘째, 어떠한 엘리뜨나 지도자에 의해 상층 중심적으로 이끌려가는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조직화를 통해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만들어져 가는 운동(self-organizing)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노동자의 권리(내지 '노동권')란, 한편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동을 할 권리와 다른 편으로 반생명적이고 물신주의적인 노동을 거부할 권리의 통일물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진정한 삶의 자율성(life autonomy)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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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노동 거부: 시대착오적 망상? 대안의 돌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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