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2000년부터, 아마 그 쯤부터 '분노로 시작하는 또는 조직하는 (어떤 변화를 위한) 집단적인 저항이나 투쟁은 실패한다.'고 말했다. 분노는 사람들을 쉽게 모이게 한다. 분노를 기반으로 하는 선동이나 말하기,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 분노는, 온 힘을 다하여 크게 말하고 때로는 육신을 동원하여 악을 쓰며 울먹이듯 표현하면 된다. 분노는 본래 파괴적인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대나 타자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는 분노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분노라는 정서적 분위기와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분노는 사실 인간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분노는 그 에너지의 소모량이 많아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한다. 그렇게 지쳐서 사라진 '분노'의 자리에는 허무함이 등장한다. 이 허무한 정서적 공백은 곧 사람에 대한 질투와 시샘이 끼여들어 분탕질을 한다. 질투와 시샘은 저항이 아니다. 질투와 시샘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수 없다.

 

2.
분노가 아니면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가? 나는 '사랑'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인류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가슴 속에 지니고 내려온 소중한 삶의 목적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저항과 투쟁을 시작한다면...죽음이나 분노가 아닌 사랑!! 

 

3. 
(사랑은 집단적이지 않다. 집단적인 사랑은 파시즘을 동반한다.)

사랑은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며 은밀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각각 개별적이고 너무나 구체적이며, 그 독자적인 사랑의 질감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과 내용과 강도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과 같은가? 다른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매번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 내가 저번에 했던 사랑과 이번에 하고 있는 사랑이, 그리고 또 앞으로 하고 싶은 사랑이 같은가? 다르다. 각각의 '존재'가 모두 다르고 독자적이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마광수는 사랑은 반드시 권태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자가 늙어갈수록 남자는 권태와 환멸을 느끼게 되고, 여자 자신도 젊은 시절의 정초한 아름다움보다는 질투심과 심통만 늘어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랑이 갖는 원초적 비극성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작가 김훈도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은 곧 지겨워질 수 있으니 연민이 작동해야 사랑이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기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연민은 서로를 가없이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5.
권태나 연민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 마광수, 2013,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읽기>, 책읽는 귀족, 81쪽
** 김훈, 2019,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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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나오미 2019/10/07 02:55

    (사랑의 기간은 어쩌면 치킨보다 못하다. 아래의 글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출처 : 김연수, 2003,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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