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후기

2010/09/09 00:10

가만히 눈을 감고 앉으면 평온함은 사라지고

온갖 기억과 생각들이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수많은 망상들...

그 망상에 온몸과 마음이 지쳐 비로소 호흡을 본다

그렇게 간신히 바라본 숨은 또다시 나타난 생각에 가려 사라진다

 

의식이 물질보다 빠르다

 

- 호흡명상을 다녀와서(8일이 지난 후)  2010.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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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따와나] 숨-붓다의 호흡 명상

2010/08/19 16:05

2010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동안 제따와나 선원에서 준비한 호흡 명상 수련회이다

 

나는 2010. 8.20. ~ 8. 31. (원주 푸른솔 명상센터)로 마음을 내고 들어간다

몇 달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시간.

 

그간의 탐욕과 거짓, 부정을 깊히 참회하고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목숨을 걸고 정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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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따와나

2009/08/31 11:05

제따와나(jetavana)

2009. 8. 29. 토요집중수행 ; 들숨날숨에 대한 챙김(아나빠나사띠/부처님의 호흡명상법)

 

제따와나 초기불교 선원 http://www.jetavana.net/

다음카페 제따와나 http://cafe.daum.net/jetavana

 

- 다시 (마음)공부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함부로 내려놓지 않겠다. 精進하리라!!! (2009.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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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진언

2007/06/13 09:15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

 

- 인간의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반배 염송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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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2007/01/19 16:04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한 톨의 밥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 짜는 이의 피땀이 서려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일체중생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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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무아(無我) 코뮌주의

2007/01/19 16:00
코뮌적 관계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가 저절로 코뮌적 주체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자의식의 견고한 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런 시행착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노마드가 되고 싶다면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강렬하게 접속하되 집착과 소유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 것. 활동이 하나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다른 활동들로 흘러 들어가게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어야 한다.

- 고미숙 지음. 2004.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p.247~248.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그것은 안심입명의 도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든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 정토회 [수행법요집]의 수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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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붓다들의 꿈

2007/01/19 15:44

2004. 01. 01~ 01. 04.
명상과 통합적 예술매체(무용, 심리극, 미술, 음악)를 활용한 자아존중감 향상 프로그램

 

 

[누렁이에 대해]

누렁이는 영빨을 받아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엉덩이가 뜰것 같아서 똥구녕을 땅에 대고 있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나도 누렁이가 웃는것인지 평화로운것인지
서서 "당신은 참으로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임다"하면서
눈물을 줄줄흐르는데, 찡한 기운이 표면을 뜹디다.
실은, 내 자신 현실에 대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환장하겠습디다. 영빨 받아 현실(물론 이때 현실이란
개와 노예들의 자본척도의 현실과 다른)과 접촉하는 누렁이가
너무 부럽습디다.

<희랍인조르바>란 소설이 있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누렁일 보고 교주라고 했습니다.
허버 즐겁고 유쾌한 교주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 누렁이와
뭘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와이키키란 이름을 쓰고 내 고민을 털어놨고,
이걸 사이코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누렁이가 이걸 해줬습니다.
존나 잘해줬습니다.

자기전에 잠시 나누던 성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습니다.폴리네시아의
사랑에 대해서는 감동적이고 나도 빨랑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누렁이는 나보고 '선배'라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병헐럼의 습관이 붙어 있어 사람 만날때
연줄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회학과 연줄이 거기에는 들어있습니다.
또 누렁이는 나에게 네트웍이란 말을 쓰지말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염병헐럼의 네트웍이냐 이거죠.
네트웍이란 부르조아가 하는것입니다.
돈빨아먹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바로 연대입니다.
요런걸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누렁이는 정말이지 공부해볼만한 인간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웃긴거 인데,
나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웃긴 사람을 좋아한다는 너무
당연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젼에서 누구 보고 흉내내는 웃김이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그런 웃긴걸
좋아합니다.
다 아는데, 털어넣기 힘든 어떤 걸
파악 공격욕 없이 나오는 어떤 힘~~요런것이 바로 개그의
힘인데, 그런면에서 누렁이는 참 힘이 있습니다.
부럽습디다.





[명상프로그램, 참여후에..]


명상치료 프로그램 이름은 "붓다들의 꿈"이었습니다.
붓다란 말은 '깨달은자'라는 말입니다.
참 싸가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불교가 어떤점이 맘에 드는데,
다른 어떤 가르침이나 이성적인 교육,지식과는 달리
이미 깨달은 것에서 시작해 '연역'해서 찾아나선다는 의미가
강하지요. 모든이가 깨달은이니, 누가 누굴 가르칠수 있다는 말인가요.
참 싸가지 있는 발상입니다. 개새끼들은 이런 태도를 교육을 부정했다
느니 해대겠지요. 이점 생각해봅니다.


누렁이의 지령으로
-이 어감을 보세요. 이제 '누렁이'선배가 아니라 누렁이입니다.-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전사들과 함께 한 최초의 프로그램
참여입니다.


춤을 춰서 자기를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자기를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울라고 했습니다. 웃으라고 했고, 날뛰라고도 했습니다.
가끔은 나이트 분위기도 났습니다.
여자활동가 들과 껴안기도 했습니다.


나는 주로 마징가를 그렸습니다. 내 이름은 '와이키키'였습니다.
누렁이는 영빨을 받아 교주로 등극했습니다.


밥은 천천히 먹었습니다. 밥공양하는 공산주의자를 만났습니다.


오는길에 호박엿이랑 추주뿡이랑 날개랑을 생각했습니다.
이년들아, 니기들도 와야 했다, 이런 걸 나누고 싶었습니다.


명상참여후에 가진 묵직한 어떤것은..
<~~되기>를 위해서
<전략적>인 태도가 아닌 사람 자체의 공산주의적인 인간형을 위해서
명상은, 그것도 집합적인 명상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좋고/싫고의 판단중지를 하면서 <~되기>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집단적으로. 수행을 중놈들이 절하고, 신부들이 기도하고,
또 섹스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걸, 삶자체를 '수행화'하는 것이야 말로 공산주의적 인간이라는것.

또 공산주의자란...
자본에 물든 노예가 아닐터인데
그 구분은 역시 예술로서...예술적 감이 없다면? - 나처럼- 그걸 키워야
한다는 것. 훈련을 통해. 소리치고, 그리고 흔들고 싸대는 난교를 통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수카님. 안녕하세요? 저, "와이키키"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저는 누렁이랑 함게 맑은공기 집에 가서 한잔 꺽고
광주로 내려왔는데 집에 오니 꽤 되었더군요.
3박 4일간 즐거웠습니다. 내려오면서 사람들 이야길 하다가
아스카님이 귀엽다는 것에 우리 모두 영빨을 받고 동의했습니다.
남자도 귀여울수 있다고 누렁이교주는 말하더군요.
반가웠습니다. 건강하시고요. 가끔 들어와 구라 혹은 투덜대거나
해도 될까요?^^



2004년 1월4일부터... 저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아니, 찾은걸가요?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내 주변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습니다.
이번캠프 주제가.. '자아찾기' 던가요?
내 안의 고통과 슬픔, 기쁨, 고민들을 다 털어버리고 나니까..
이제 다른것을 받아들이는게 너무 쉽습니다.
얼마나 울기도 많이 울었는지.. 이제는 얼굴에 웃음을 담아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수원으로 올라오는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차한잔하면서 집에 전화를 했어요.
엄마에게 반갑게.. '사랑해요.. '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이에요..
너무나 좋아하시는 엄마.. 아빠... 왜 진작 이렇게 쉬운말 한마디 하지 못했을까요?

집에 돌아와.. 역할극에서 만났던 성훈씨와 그 여자친구에게
하고싶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밥 한번 함께 먹은적이 없는 우리..
신년회식을 하기로 했지요.. ^^

그리고, 오늘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여.. 사람들을 한번씩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좀 부담스러워 하더이다.. 히히.. 그래도 좋아하던걸요.
그러고 나니, 너무나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해보니.. 정말 쉬워서 좀 실망이 들 정도였었습니다.

이제 조금 화가 나는 일도 극복이 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준 전북지역의 활동가들과 계속 함께갈 것을 설득해준 아스카..

부족한 형편을 알고 재정을 지원해준.. 행동연대 회계님..^^
맘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준 저의 일터 사람들과..
그 공간을 싸게 제공해주신 임실의 목사님 내외분..
좋은 음식으로 제 몸을 가볍게, 편하게 만들어주신 동지들..
저를 맘과 성의를 다해서 꼬옥 안아주던 4일간 식구였던 사람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낍니다.
나도.. 여러분도.. 너무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 밝고 행복한 에너지가 느껴져서 간직하고 싶은 글^^ 200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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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의 금강경 강의

2004/10/01 18:42

* [펌] http://www.transs.pe.kr/ 2004. 4.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昔在燃燈佛所 於法所得不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室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菩薩 莊嚴佛土不

 不也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卽非

 莊嚴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

 摩 하 薩 應如是生淸凈心

 不應住聲香味触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須菩提言 甚大世尊

 何以故 佛說非信 是名大信



  

   1.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요. 잘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음식, 주거환경운동 명상 등. 명상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생각을 정지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생각의 정지란 몸의 정지입니다. 그것은 호흡만 빼고 몸이 완전히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완전히 정지시키는 것. 몸을 정지 하고 있으면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꼈던 상태에서 일어나던 것 밖의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현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한 순간 전에 사유된 인식 결과의 총체물이며, 그것이 또한 다음 순간 마음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을 정지하고 생각을 정지하는 것은 이제까지 의식의 흐름 안에서만 이해한 것을 너머 의식 밖의 것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 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습관에 의해 파악된 나이며, 업종자의 흐름에 종속된 자아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기 관찰을 하다보면, 한순간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자타가 함께 열리는 삶이 느껴집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과 타인의 마음의 흐름이 함께 어우러진 삶이.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자아, 즉 자신의 영역이 사라지면서 무아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건전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무아를 통해 발생하며, 이건 몸을 정지하고 오래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 명상하는 것. 그건 자신만을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자기 우주가 한없이 넓어져 사회영역을 미세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는 것, 그게 명상입니다. 이 명상행위는 정지상태 같지만 실은 역동성을 동반합니다.

 몸을 수행하면서 자신을 열어 가면 열어갈수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이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명상은 잘 살기 위한 첫 번째 길입니다. 현재적 자신을 있게 하는 습관적인 흐름이 바뀌어야합니다. 습관적인 기운과 종자를 전부 바꾸는 것, 이전까지의 자신을 바꾸는 것,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깍지를 낄 때 신발 신을 때를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요. 우리는 습관대로 행동합니다. 오른발을 먼저 내미는지 왼발을 먼저 내미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요. ‘습관’ 이란 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사유는 습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발을 신는 동작 자체를 자각할 때 우리는 다른 삶 살 수 있습니다. 오른발 왼발, 신을 신던 습관적 기운과 다른 흐름을 스스로 만들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위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고, 그건 집중된 마음으로 행해지는 자기관찰을 통해 이뤄집니다.





   2.

 ‘개념’ 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를테면 소라는 것을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왜 소를 소라고 할까요. 그건 다른 것과 다른, 소의 특성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의 본질에 해당하는 성(性)은 없습니다. 소라는 성을 보는 우리의 봄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라고 하는 것의 특성을 보는 것.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성을 본다는 것. 이 봄에 의해 규정된 성은, 이제까지 자신이 인식한 대상의 결과물이 그와 같이 우리 앞에 인식된 것입니다. 즉 본다는 것이 성을 결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는 일. 일체의 어떤 것들을 떠나서, 다른 것과의 대비를 떠나서, 그 자체로서의 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앎을 그 자체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묘하게도, 알려고 하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앎을 다 놓을 때, 역설적으로 앎이 드러납니다. 견(見)과 비견(非見)이 동일한 지표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함께 존재합니다. 견이면서 비견이고, 비견이면서 견인 그런. 그게 앎의 형태입니다. 우리의 사유의 결과물이 언어로 표상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삶 자체가 언어를 통해, 사유를 통해 드러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언어 이전에 마음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연기적 상황에서 총체적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은 따뜻한 흐름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온전한 자기표현은 배움만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배움 없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배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결과물인데, 이 결과물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결과가 경직되면, 삶의 역동성을 묶습니다. 이런 묶임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 무아.

 나는 ‘무엇’ 이다 라는, 규정성이 사라지는 것이 무아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무아로 열릴 때, 사회적 연대가 자비로운 흐름으로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현행과 습기가 일시에 소멸하게 됩니다.

 이전의 자심상속에서, 열린 마음을 통해 타심상속으로 변환돼 가는 것. 습관에 의한 기존의 인연 조건이 달라져 열린 세계로 가는 것. 꼬리뼈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그 흐름 기운이 수미산에 흐르는 지구적 기운과 일치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우리와 동떨어진 독보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만이 중생을 온전히 존경한 분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은,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존경할 수 있는 마음 내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근거 자체가 무아적이며, 관계적이라는 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중생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니, 국회의원들이 서로를 지칭 하는데, “존경하는 누구누구 의원님”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서로를 존경하는 걸까요. 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존경할까요. 국회의원들이 부처님처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할 때, 정말 ‘존경하는 의원님’ 이 있을 겁니다.



  


   3.

 우리의 삶은 주로, 업종자의 훈습에 의해 ‘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 ‘아’와 ‘비아’ 가 전체적으로 연기적 상황을 열어갈 때만 삶은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삷의 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해야 합니다. 오랜 자기관찰 끝에 마음의 일시적인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비약은, 자기도약은, 묘하게도 정해진 모습이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자기 삶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모든 수행자들은 함께 사는 삶 안으로, 열린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열어 같이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청정함을 내야 합니다. 그건 사유가 정지될 때부터, 몸이 정지 될 때부터, 하여 삶이 전체적 어울림이라는 것을 알 때부터 가능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큰 불이 났습니다. 주인은 자신의 상황이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지만 이웃들은 그 상황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불을 끄려 움직입니다. 주인의 마음에는 집에 대한 집착, 즉 고착된 아의 흐름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불을 끄려는 행위가 불가능합니다. 그저 정신을 멍하니 놓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웃들은 불을 끄기 위해 행동합니다. 집착, 얽매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얽매임을 놓지 않으면 어울림의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무엇이라고 규정된 얽매임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외부대상의 얽매임으로부터 내재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 마음의 내부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명상 등을 오래하면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습관에 의한 우리의 정신과 몸의 얽매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감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통해 ‘아’ 의 훈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눈, 코, 귀  등등 모든 습관 훈행의 인식장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몸의 감각을 열어 다른 몸이 돼야 합니다. 무아적 삶으로 사회적 연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한 몸으로 느끼고 한 삶으로 숨 섞어가는, 머리와 논리와 이해의 삶이 아닌, 온몸의 삶을.



  4.

 깨달음의 내용이 각 종교간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한 가지. 세상에 과연 같은 것이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과연 같습니까. 아닙니다.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도 그 둘은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은 없고, 차이 그 자체도 그 자체로서 같질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하나의 가치의 차이를 인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판단 근거가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무엇이 같은가의 범주에서 다른 종교들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다른가에 의해, 즉 차이에 의해 종교 깨달음의 내용을 논해야 합니다.

  내 판단근거가 가장 높다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종교 그룹이 인정하지 않는데. 불교는 자기존재의 근거가 불경이고, 기독교는 성경입니다. 불경에는 불경의 견해, 성경에는 성경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견해를 갖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 먼저 따뜻한 마음을 내야합니다.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에 의해 종교의 깨달음의 내용을 논의해야만 합니다. 자기인식을 버렸을 때만이 어울림 속에서 ‘상호이해’ 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종교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공포스럽게 느끼게 한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종교입니다. 이웃 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오려보면 충분히 공포스럽습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하는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어야 알게 됩니다.

 흔히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신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부처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분이였습니다. 함께 어우러진 장에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지녔던 분입니다. 삶의 연기적인 모습을 내신 분입니다.

 본래적 모습으로 삶이 흐르는 것. 그 생명의 모습이 바로 부처이며 부처님은 그 모습의 구현체입니다. 일체 중생의 모습 그대로의 상황, 그 자체가 부처입니다. 부처는 그러니까 부처의 모습, 즉 모든 중생이 어울린 모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깨달아서 얻는 게 아니고, 우리 모습의 당위성이 바로 부처입니다. 자기 마음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됩니다. 어울림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그것이 여래입니다. 위아래 규정하는 것과 어떤 상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형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무상, 무아의 지향점이 같은 것입니다. 한 개체가 무상과 무아인 앎의 장, 연기적 삶을 열어가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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