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말하기
-새(bird)는 어떻게 사랑을 할까?-


사랑은 가장 은밀함과 동시에 가장 열린 신체와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한다. 여기서 사랑을 향한 은밀함은 그 어떤 사회적 장치나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은밀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신체는 훨씬 자유롭게 열리고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보통 우리들은 사랑을 하거나 애인과 섹스를 하고 싶을 때에는 말이나 합리적인 언어보다는 얼굴표정이나 상대방의 눈빛, 그리고 신체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들을 서로 살피고 교감한다. 소통되지 않는 섹스는 거짓이고 일방적인 권력의 작동이다. 사실 사랑이나 섹스는 서로 끌리거나 꼴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한쪽만 뜨거워져서 '우리 한번 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쑥쓰러운 일은 없다. 왜? 상대방과 충분히 교감하거나 접속이 되질 않으므로...!


1. 말을 한다는 것-권력

말을 한다는 것은 권력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언어권력'이라고 표현한다. 말이나 언어를 통해서 표시되는 '기표'는 그 순간 의미가 고정되고 확정된다. 우리가 책상 위에 과일을 보고 "사과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과일은 '사과'라는 하나의 의미로 고정된다. '사과'라고 외친 발언자의 언어가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력으로 작동되어서 '사과'라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렇게 기표의 의미작용은 권력의 문제로 드러난다.
학생들을 줄맞춰서 세워놓고 혼자서 연단 위에 올라가 일장연설을 토하는 초등학교 교장은 파시즘의 중요한 결과물이다.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하고, 9시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사건들을 앵무새처럼 나열하는 것도 '언어권력'의 하나이다. 그 지겨운 소리들, 듣기 싫어도 들리는 말들.


2. 말을 한다는 것-관계

끊임없이 논리정연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는 인간은 가장 권위적이고 권력적인 인간이다. 그 권위의 확산을 위해 끊임없이 떠드는 자의 의도는 그 말이나 언어로 인해 자기 주위의 배치와 관계가 변화하기를 바랄 뿐이며, 이미 그것을 기대하거나 예상하고 지껄인다. 말이 바뀌면 사람이 변한다. 그 주위도 변한다. 그렇지 않은 말은 말이 아니다. 즉 말은 하나의 중요한 '관계'이자 새로운 '관계형성'이다.


3. 푸코의 말과 사물, 그리고 '무의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이 관계와 권력의 문제를 담론(discourse)을 통해 설명한다. 푸코는 담론 분석을 통해 '일정한 담론이 가능할 수 있는 역사적 층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는 주체(말)와 말하는 대상(사물) 사이에 맺고 있던 지식(인식)의 태도와 그 곳에서 재주를 피우게 된 언어의 새로운 모습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과 사물의 관계를 보면,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작동해서 어떻게 '말해지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지식과 권력을 자신의 내부에 흡수함으로써 '말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합리적인 언어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권력)와 '언어의 감옥'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들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자유로운 인간은 '무의미한 독특한 의미(가타리)'를 긍정하는 인간이다. 의미작용은 항상 권력의 문제이다. 반대로 '무의미'는 일방적인 권력을 해체하고 다양성을 긍정하게 만든다.
'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려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푸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언어의 횡포를 넘어서 권력에 대한 저항을

언어에서 작동되는 권력을 보고 '말하지 않기'를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말하기'를 생각해 보자.
물론 '암묵적 동의'를 악용하는 남성이나 권력집단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권력자들은 분명히 '침묵'을 점령하고 있으며 자기들 잣대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침묵만 인정한다. 침묵이라는 일탈의 거리 측정은 자본과 권력자들의 무서운 무기이다. 그러나 통제 가능한 억눌린 침묵보다는 열린 교감이 훨씬 자유롭고 풍만하다. 그 열린 교감과 새로운 소통은 혁명과 사랑에 의해서 극대화된다.
혁명은 끝없는 사랑이다. 혁명은 무한한 타인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기애(自己愛)이자 자기에 대한 배려(푸코)이다. 혁명은 변증법이 아니다.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의 변증법의 아니라 끊임없는 끓고 있는 새로운 구성이다.

문제는 언어가 권력에 의해 장악 당했으니, 우리는 평생 올바르게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 탈주' 즉, 새로운 다양한 생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언어를 점령한 권력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끊임없이 스스로 변형된다. '터미네이터2'에서 나타나는 액체사이보그는 항상 우리 곁에 달라붙어서 어느 시공간에서나 존재하고 출현한다. '터미네이터2'는 새로운 권력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출현가능하고 이미 존재한 권력(거시권력과 더불어 더 끔찍한 미시파시즘)때문에 저항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있기 때문에 권력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태초에 권력이 존재하고 저항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탈주가 존재하므로 그것을 재영토화 하는 권력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저항과 탈주는 인간 생성의 원인이면서 발전의 원동력이다. 새로운 말하기는 새로운 저항이다.


5. 새는 어떻게 사랑할까-'새로운 말하기'

생물학적 특성상 얼굴근육이 고정되어 있고 다양한 눈빛을 표현하지 못하는 새(새의 눈동자는 고정되어있다!)들도 사랑을 표현한다. 새들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향해 몸체를 돌려서 '옆으로 비스듬히 쳐다보기'로 사랑을 표현한다. 깃털의 변화을 통해서 표현하기도 한다...합리적이고 권력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위대한(?)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

논리적 표현과 합리적 언어를 넘어서는 새로운 말하기는 가능하다. 여성의 언어로 말하고, 어린이의 언어로 말하기. 사랑의 뜨거운 언어로 말하기. 이것은 권력의 획일화와 지층을 해체하는 말하기이다.

최고의 말하기-사랑의 교감은 다양하고 항상 열려있는 것이다. 섹스, 부대낌, 눈빛, 느낌, 교감, 영혼, 자세, 떨림, 피부색깔, 소리(파롤parole), 닭살...엄청난 보여주기, 고음과 저음, 흔들림......다양한 침묵들(날카로운 침묵, 냉소적인 침묵, 즐거운 침묵, 오르가즘을 위한 침묵, 파쇼를 향한 얼음장같은 침묵-파시즘은 침묵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투표거부, 협상거부, 대표거부, 더 나아가 집단으로 말하기, 아우성, 들끓음, 웅성웅성, 부글부글...)....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무한하게 열린 감성적 텔레파시(telepathy)들을 사용하자. 그리고 느껴보자!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개인의 에너지와 그로 인해 끊임없이 풍만하게 퍼지는 집단적 에너지들을!!!

 

 

200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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