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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웨스트 파푸아를 다녀와서> 학살의 땅에 남겨진 사람들 선배에게. 예정된 출발이었지만 도망치듯 짐을 꾸렸습니다. 마지막이 될 거란 베니 교수의 작별인사에 ‘꼭 다시 만날 거라’ ‘다시 올 거라’ 말했지만, 정말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그의 조국,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에서 가장 위험에 처해 있는 인물 중 한명이고, 저는 그의 나라를 감싼 질식할 것 같은 공포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혼자만 떠나왔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학살이 판치고 있는 땅에 남겨둔 채. 집회 참여와 사진 촬영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들의 감시와 노골적인 협박, 그리고 2번의 체포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엄습하는 불안을 ‘설마 외국인을 함부로야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떨치려 애썼고, 머무르는 1주일 내내 작은 소리와 사람들의 몸짓에도 놀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흘린 서러운 눈물 속엔 ‘안도’도 스며있었습니다. 하지만 파푸아인들에겐 저와 같은 탈출구란 없습니다. 죽음은 마치 예정된 순서와도 같고, 공포는 차마 공포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일상적입니다. -공포에 휩싸인 웨스트 파푸아- 유엔과 미국의 공모, 그리고 국제사회의 침묵 속에서 1969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어떤 사람들은 면도칼로 베어져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생식기에 뜨거운 철이 넣어져 살해당했다고 했습니다. 살해된 남편과 아버지의 시신을 먹도록 강요당한 가족도 있답니다. 임신부들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에 의해 배가 절개된 채 죽어갔습니다. 독립운동 혐의가 있다며 아들을 잡아가 고문한 것도 모자라 그의 어머니는 배설물이 가득 담긴 컨테이너 안에서 한달을 지내야 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성폭행당한 후 수장됐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잔혹할 수 있을까 소름 돋는 광기가 웨스트 파푸아를 휩쓸고 지나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작전 수행, 독립운동가 색출이라는 미명 하에 군인들이 지나간 마을은 쑥대밭이 됐고, 화를 피해 산으로 도망을 간 사람들은 질병과 굶주림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구의 10분의 1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학살된 웨스트 파푸아 땅에서, 파푸아인들은 생명을 가진 ‘존엄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전멸시키고 짓밟아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파푸아인의 아이들 중 절반이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영아와 산모의 사망률은 최고 수치에 이릅니다. 파푸아인 중 겨우 1%만이 대학을 다닐 수 있고, 땅은 인도네시아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해 훼손되고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무장한 장갑차와 군인이 시내 도로를 질주하고, 항구에 정박한 군함의 화포는 도시를 향합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의 이해관계 속에서, 국제 시민사회의 무지 속에서 아직도 웨스트 파푸아는 고립돼 있습니다. ‘역사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 아니 믿음이기보다는 읊조리는 ‘주문’만이, 언젠간 국제 시민사회가 ‘연대’해줄 거라는 희망만이 파푸아인들의 삶을 지탱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항상 도망칠 수 있는 이방인의 입장이었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 따위는 심어주지 말았어야 했을 것을.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의 무뎌짐만을 탓하는 활동가라면, 시선조차 돌리지 말 것을 그랬나봅니다. -국제사회 외면속 오늘도 절망- 조국의 기,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만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양심수가, 하나님도 외면하시는 듯해 독립운동의 전선에 섰다는 목사님이, 그리고 여대생 미라의 모습이 마음을 붙잡습니다.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미라가 답하더군요. “저는 웨스트 파푸아 사람이고,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과 함께 있어요. 두려워도 저에겐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을 위해 소리 높일 책임이 있어요.” 그렇다면 저에겐, 그리고 우리에겐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그 책임은 파푸아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황을 잘 모른다는 말로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일까요? 아직 웨스트 파푸아엔 봄이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2005.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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