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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학살의 기억, 빈곤의 현실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아직까지 한번도 기념비나 추모탑을 세워야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기념비나 추모탑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 잔혹한 역사와 죽어간 이들을 기억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비석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잊지 않는 것'이고 동티모르인들은 삶에서 그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날라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살지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렇지 않은 곳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만큼 학살이 자행된 땅에서, 학살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찾고자 했음은, 그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사건을 기억해내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었음은 이방인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될 듯 했다. 학생운동가로 독립운동을 해왔다는 유리코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이슬람 종교 운동가 안와르도 91년 발생한 '산타 크루즈 대량학살'의 피해자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아노 고메스(Sebastiano Gomes)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 크루즈 묘지에 모인 동티모르 평화시위대열에 인도네시아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최소 250여명 최대 90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서방인 저널리스트의 비디오에 그 참상이 담기면서 당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논리에 갇혀 철저히 외면받던 동티모르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사망자들을 트럭에 실어 바닷가에 내다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집단 매장했다고 한다.

유리코도 안와르도 이 사건을 알리는 흔적하나 세워지지 않았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24년 인도네시아 무력 강점기간 동안 인구의 1/3이 죽어갔지만 그래도 '산타쿠르즈 학살'은 우리네의 광주항쟁쯤으로 인식될만한 '사건'이었기에 '표식'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던 '산타 크루즈' 묘역에선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넋들이 묻힌 자리를 '찾아가보고 싶다'고 딜리에 도착한 날부터 졸라보았지만 그들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너무 쉽게 역사의 무게를 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답변은 그제야 '맥'이 잡힌다.

이곳이 학살지임을 알리는 나무 십자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로스팔로스에서 실려 온 사람들은 이 강물에 던져졌다. 어떤 사람들은 차에 갇힌 채 던져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몸에 쇠덩이나 바위를 달아야했다. 학살은 어린아이나 노인, 임산부 등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으며, 사람들은 악어의 먹이가 되거나 산채 수장됐다.


정의 세우기

가슴으로부터 동티모르인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티모르내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의 과거청산이며, 식민지 시절 동티모르내의 인도네시아 부역 세력에 대한 청산이다. 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2002년 5월 유엔의 신탁 통치를 거쳐 자국 정부를 갖게 된 이래 전쟁범죄자,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엔의 결정 하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 내에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가 설립돼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검찰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조무래기들 18명만을 기소하는데 그쳤고, 또한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3년의 유죄를 선고했을 뿐이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99년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이, 딜리지방법원 내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이 설립되긴 했지만 기소된 사람 중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은 끝내 진행되지 못했다. 형식적인 조사와 처벌은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내의 정치, 사회적 지형이 낳은 결과로 동티모르인들이 외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이는 발전도 평화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를 위해서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99년 8월 독립투표를 전후해 인도네시아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당시의 파괴행위로 인해 부서진 채 아직도 수리되지 못한 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해왔던 청년들이 사회의 올바른 설립을 꿈꾸며 만든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인간적으로 용서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못 밖는다. 그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게릴라가 되어 산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아버지가 독립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할 뿐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사라져갔고 그 역시 사물을 인식했던 나이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고 한 이웃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이뤄진 뒤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피해자가 손을 내밀어 가해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화해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티모르에 세워진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 '뉴그'는 정의세우기의 이유를 자국으로부터 찾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아직도 자국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은 정부가 불쌍한 동티모르를 지원한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동티모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의 굴절된 역사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는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를 생각해봐라.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 군이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조사관 '뉴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화해와 진실위원회 건물이다. 위원회는 2005년 7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활동을 종료한다.


수탈의 역사가 남긴 경제적 상흔

'정의세우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 '경제'라고 할만큼 경제문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티모르의 최대현안이다. 국민들의 체감 실업률이 90%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티모르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한 형편이다. 수도인 딜리에서조차 하루에 1달러를 벌기위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집 인근의 과실나무에서 따왔음직한 과일을 팔러 나온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버스 도우미로 일한다. 해진 뒤 물이 빠진 바다에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조개를 줍거나 해초를 캐는 일상은 '낭만'이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전투다. 해방을 맞은 도시는 출퇴근 시간조차 '활기롭기'보다는 '침울'하고, 밤을 맞은 도시는 '침묵'으로 가득 차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같은 느낌마저 준다.

딜리 시내에서 가장 큰 오픈 마켓, 꼬모스 시장. 사람들이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몇가지 종류의 과일과 야채, 가축이 전부다.


40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와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는 동티모르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심각한 빈곤을 가져왔다. 커피 등의 주요 작물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시절에 들어왔던 유럽이나 미국인 '거대' 회사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사람들은 수익을 빼앗긴다. 농부들은 긴 식민지배 하에서 '고리대금'의 방식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거나 장기간의 피난 생활로 기반을 상실했고, 도시의 대부분 땅과 비옥한 농토는 포르투갈인이나 포르투갈 시대에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 그리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경제 수탈정책 하에서 제조업이 전혀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세제, 신발 등의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는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동티모르엔 공장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이러다보니 고용은 창출되지 못하는 반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며, 이런 악순환으로 빈곤은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교사 등의 공무원 임금이 한달 평균 120∼150달러인데 비해, 한끼 식사가 3∼5달러에 달하고 펜틴 샴푸가 10달러에 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사관 및 유엔 직원 등의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있는 도시 딜리는 정확히 외국인 거주지역과 내국인 거주지역으로 양분된다. 경계는 밤이면 더욱 또렷해진다. 전기 수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이틀에 하루 꼴로 저녁 7시를 전후해 전기가 나가는데, 대사관을 비롯해 대사관 직원 등이 묵는 거주지와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호텔과 레스토랑, 바 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정전사태는커녕 늦은 밤까지 꺼지는 법이 없다. 아직 전기선조차 구비되지 않는 집들이 즐비하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암흑 속에서 밤을 나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전기불은 단순한 불빛이 아닌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상징한다.

단 돈 1달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지만 정부 역시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99년 독립 이래 동티모르 정부의 모든 재원은 유엔과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기구, 외국의 무상 원조로 충당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정부 역시 재원마련을 위해 매년 '예산 계획서'를 작성, 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행히 티모르 해에서 유전이 발견돼 2004년부터 개발에 착수, 2004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1년간 2억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이 발생했다. 이는 동티모르 정부의 한해 예산의 1/4에 달하는 금액이다. 유전 개발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지만, 다른 물적 기반이 전무하고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를 탈출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유전이 개발 중인 티모르 해 지도. Bayu-uedn의 유전은 2004년부터 개발이 시작됐으며, Greater Sunrise지역의 유전은 '공동수역' 문제로 현재 호주와 협의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2005년부터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동티모르 노동자 1만 여명의 해외취업을 알선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 발표했다. 실업문제 해소와 우수한 해외 기술의 이전, 노동자의 질 향상 등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국은 바로 한국. 현재 계획에 따르면 올 해 연말까지 200여명의 동모르인들이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년에서 3년간의 기간동안 한국에서 건설현장이나 공장 등에 투입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 겪어야할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동티모르에서 '평화캠프'를 준비하고 있는 종교단체 '개척자'의 박윤애 씨는 "이주노동을 희망하는 이들에 대해 정부가 하는 교육이라곤 '무조건 참고 버티기'"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첫 타자가 잘하고 와야 다른 동티모르인들에게도 기회가 생기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아야한다'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동티모르 청년들은 기회에 갈급하고, 생계는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무실에조차 한달에도 몇 명씩 '일자리가 없냐'고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일 수밖에 없다.

한편 심각한 동티모르의 경제적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생산해 낸 값싼 물자, 그리고 식민지배를 통해 익숙해진 인도네시아의 물품들이 동티모르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 인도네시아는 식민지배가 끝난 지금, 동티모르의 최대 무역 수입국으로 자리잡으며 동티모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에 나설 경우 동티모르의 경제는 벼랑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상황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사회적 부분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해 동티모르를 압박하는 권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경제적 '예속의 질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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