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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한국, 어디에 있는지를 묻다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고 싶어 라디오 방송국을 차렸다는 유리코의 사무실은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위치해있습니다. 동티모르 4대 방송국 중 하나라고 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자신있게 방송국 이름을 외쳐봅니다. 하지만 택시는 한참을 헤맨 뒤에야 락카로 ‘라캄비아(RAKAMBIA)’라고 쓰인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섭니다. 방송국으로 사용되는 단층 건물은 인도네시아 군대가 던진 폭탄 흔적이 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커다란 구멍이 군데군데 나있고, 창문은 성한 것보다는 깨진 것이 더 많습니다. 방송국 기자재라곤 1평 남짓한 작은 방송실 하나와 문서작업만 되는 컴퓨터 2대가 전부입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로 기억하는 탓에 총리의 종교적 신앙마저 그를 공격하는 근거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종교차별해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안와르의 사무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식당 겸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회의공간과 컴퓨터 한대가 그들의 활동을 지원할 뿐입니다. 빠듯한 단체 운영에 안와르는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갑니다. 99년 해방이전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학생들은 버려진 건물은 사무실 삼아 아동과 여성인권을 고민합니다.


한국의 가난한 단체도 이들보다는 호사스럽다 느껴질 만큼 열악함에 고개가 흔들어지지만 이들은 국제연대를 꿈꿉니다. 지원받기위한 연대가 아니라 지원하기 위한 연대를. 63년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이래 국민의 1/10이 죽어나간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모읍니다. 한 시간 사용료가 하루 수입에 맞먹을 만큼 비싼 지출을 감수하며 인터넷 방에서 정보를 모으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 수고를 감수합니다.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에서 독립해 정부와 국가를 갖게 된 지 이제 3년. 해서 과거청산부터 사회재건까지 구석구석 해야 할 일엔 끝이 없지만 국제연대를 터부시하진 않습니다. 항상 ‘국외’보다는 ‘국내’사안이 우선이고, 국제연대는 몰라서가 아니라 ‘여력’의 문제라며 뒷전으로 미뤄왔던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유리코가 말합니다. 웨스트 파푸아는 불과 몇 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가 없었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고.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에서 아버지와 친구들을 잃은 닌도가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루 세끼를 먹는 문제와 정치적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그래도 죽음의 공포에선 벗어나 있다”고. 그러면서 묻습니다.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은 무엇을 할 거냐”고.


필리핀 분쟁지역에서 만났던 이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습니다. 25살의 평화운동가 빙은 “언제든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로 몰려 죽을 수 있다”며 두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런 빙에게 외부세계의 ‘연대’란 활동의 방패이자 삶을 지탱시키는 힘입니다. 거듭된 교전으로 농사지을 땅과 가축을 잃고 고향을 떠나온 에모다스에게도 ‘연대’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공포에 떨며 살아온 지난 30년 동안 한국은 어디에 있었냐”고 절규하더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인권의식이나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발달해있지만 국외 문제에 대해선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성명서’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긴 해도 물적, 인적 자원을 쏟아 부으며 긴 호흡으로 이들과 동고동락 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권운동’을 해왔다는 저 역시 공포에 질린 그들의 눈을 보기 전엔,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다시금 깨닫기 전엔 ‘조건’만을 탓하며 ‘국제연대’는 특별한 사람, 단체의 몫인 것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제쯤이면 ‘국가’라는 공간을 넘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절규와 공포에 어깨를 걸 수 있을까요?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한국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도 사용해달라는 사람들의 호소를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2005. 7. 22 동티모르 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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