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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야 걷자 (7월 9일 긴급 보도자료)

긴/급/보/도/자/료

발 신 :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 행진단
단장 :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변연식(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송태경(팽성주민대책위 기획부장)
수 신 : 각 언론사 사회부
일 시 : 2006년 7월 9일
문 의 : 김정아 (평화 행진 언론팀장, 인권운동사랑방, 010-6348-2607)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1. 귀 언론사에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2.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에서 긴급 취재 요청을 드립니다. “평화야, 걷자!”는 오늘(7/9)로 마지막 날은 맞고 있습니다. 어제(7/8)밤부터 오늘(7/9)새벽까지 평화 행진단은 원정삼거리에서 주민들을 귀가를 불허하고 안정리 상인연합회의 폭력을 방조하고 경찰의 만행을 항의하는 투쟁을 평택역과 평택경찰서 앞에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새벽3시경 경찰의 폭력 침탈과 무차별 연행이 자행되어 40여명의 행진참가자들이 현재 강제연행되어 있습니다.
오늘 행진단은 오후 12시 평화행진을 탄압하는 평택경찰서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기자회견 주요 순서 : 규탄 발언 기자회견문 낭독

오늘 1시 행진단은 행진의 마지막 코스인 대추리까지 가기 위해 또다시 행진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번 평화행진은 9일 저녁 5시 대추리 지킴이대회에서 마무리될 예정이며 이는 이미 보도된 바있습니다. 어제밤과 새벽 경찰의 폭력과 직무유기로 인해 평화롭고 합법적인 행진을 가로막혔던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적인 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후 1시 행진 결의대회를 마치고 행진의 마지막 코스인 대추리까지의 행진을 진행할 것입니다.

행진단은 오늘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과 행진 결의대회와 행진을 진행할 예정이오니 꼭 취재하셔서 보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① 경찰 폭력규탄과 평화행진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 일시 : 2006. 7. 9 오후 12시
- 장소 : 평택경찰서 앞

② 평화행진 결의대회
- 일시 : 2006. 7. 9 오후 1시
- 장소 : 평택역 앞

어제 평택경찰서는 밤이 새도록 원정삼거리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주민들을 가로막았고 이는 명백히 불법적인 검문행위입니다.
둘째, 합법적으로 보장된 행진단을 폭력으로 위협하는 상인연합회의 조직된 폭력을 고의적으로 방기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은 것은 경찰의 직무유기입니다.
셋째, 이러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의의 뜻을 전하고자 평택경찰서 앞에 모인 행진단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한 것은 명백히 평화 행진단에 대한 경찰의 폭력 침탈입니다.
지금 이곳 평택에서는 경찰의 통제할 수 없는 불법과 폭력만행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 운동을 보도해 온 언론사들의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보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많은 취재와 보도 요청드립니다.


규탄기자회견문

평화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야만의 밤이었다.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한미 FTA 협상 반대를 위한 285리 평화행진 “평화야, 걷자!” 행진단은 7월 8일 평택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밝힌대로 평화행진의 최종 종착지인 대추리로 향했다. 평택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추리로 들어서는 행진단은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원정삼거리에서 경찰의 봉쇄로 인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과 ‘안정리 상인들’이라고만 밝혀진 사람들이 대추리로 돌아가는 지킴이를 차량에서 끌어내 폭행을 가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었다. 어떠한 물리적 충돌도 반대하는 행진단은 가던 길을 멈추고 대기했지만 안정리 상인들은 행진단에게까지 쫓아와 각목으로 위협하고 돌과 계란을 던졌다. 그 과정에서 행진단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으며, 가던 길을 돌려 평택역으로 향했다. 평택역으로 돌아온 행진단은 여전히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이 경찰의 불법적인 봉쇄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택경찰서에 항의의 뜻을 전하러 갔다. 평택경찰서는 우리의 정당한 항의에 귀기울이기는커녕 집회를 마치고 뒤돌아서는 행진단의 후미를 둘러싸고 토끼몰이식 무차별 연행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여성행진단의 배를 발로 차고, 머리채를 휘어잡아 끌고, 심지어 무차별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평화를 위해 떠난 285리 대장정은 경찰의 폭력과 직무유기로 인해 대추리로 들어서지 못하고 무참한 피해를 당한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발걸음을 폭력으로 가로막는 경찰의 만행을 만천하에 공개하며 강하게 규탄하려 이 자리에 모였다.

먼저, 경찰은 불법적으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이동을 봉쇄하고 거리에서 노숙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법적인 근거도 없고, 설득할만한 이유도 대지 못하는 경찰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주민들을 막고, 농활대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밤을 풍찬노숙하게 만든 것이다. 도대체 경찰은 무슨 근거로 주민들의 통행을 막는 것인가? 이동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현저한 위험성’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막아선 경찰은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저 말만 들으라고 윽박지를 뿐이다. 우리는 경찰의 명령이 지긋지긋하다. 적법한 근거와 절차를 내놓지 않는다면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국가기관이 아니라 소수의 권력을 위한 사병집단에 다름아니다.

둘째 경찰은 안정리 상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의 폭력에 수수방관하며 미온적으로 대응해 더 큰 폭력을 만들어냈다. 안정리 상인들의 폭력 행위는 한 두 번이 아니다. 어제 밤도 술에 취한 상인들은 각목과 돌을 들고 행진단에게 위협을 가했다. 우리는 상인들이 행진단이 있는 곳으로 오기 전부터 이러한 위험이 있다는 것을 경찰에게 알리고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이 우리의 바로 앞에 오기까지 길을 터주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현행범을 보고서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행진단에게 되돌아 갈 것만을 요구했다. 미군기자 확장 문제를 주민간의 갈등인 양 조장하는 이러한 상황에 행진단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이들에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시위대의 마스크까지 시위용품이라고 우기며 폭력시위로 몰아붙이면서 각목까지 휘두르는 현행범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폭력배들의 야비한 공격처럼 해산하는 행진단의 후미를 치고 폭력적으로 연행한 경찰의 극악무도한 인권유린에 끌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 우리의 항의 행동이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려 45명에 이르는 행진단을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미란다 원칙 고지와 같은 기본적인 절차도 밟지 않고, 마치 짐승을 끌고 가듯이 행진단은 처참하게 연행되어 갔다. 기절한 여성, 경찰의 발길질에 업혀있는 행진단을 철저히 무시하고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며 평화행진 나흘째 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경찰에게 수차례 평화행진을 보장하라는 요청을 했지만, 경찰에서 보여준 것은 야수적인 만행뿐이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경찰에 의해 유린당했으며 이는 평화의 적이 다름 아닌 경찰이라는 것을 평택경찰서는 스스로 보여준 꼴이다.

우리는 평화로운 285리 발걸음을 중단할 수 없다. 평화는 이러한 폭력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쟁취된다. 이제 우리는 평화로운 발걸음을 가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다시 대추리로 행진한다. 평택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은 도처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경찰은 원정삼거리에 차벽을 둘러치고 안정리 상인들은 우리의 행진을 다시 막겠다고 다시 모이고 있다. 곤봉과 방패, 각목과 돌을 든 이들에 비해 우리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다. 행진단의 평화에 대한 열정, 기어이 평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은 보무도 당당하게 대추리로 향할 것이다. 거리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에게 열정적인 선전전을 벌이고, 비바람과 뙤악볕에서도 평화의 맘으로 춤추며 노래하고 이곳까지 왔다. 우리의 힘찬 행진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평택의 평화를 염원하는 더 많은 이들이 행진단에 합류하기 위해 속속 평택으로 모여들고 있다. 큰 함성으로 그들을 맞는다. 생명의 땅 평화의 땅 대추리 도두리로 우리의 걸음은 멈추리 않을 것이다.

2006. 7. 9.

“평화야, 걷자!” 평화행진단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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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③ (끝)

희망과 절망의 '경계' 국가, 동티모르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③ (끝)
식민잔재의 우울함 언어

식민지 잔재의 우울함은 동티모르의 언어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현재 동티모르의 공식어는 떼뚬어(Tetum)와 포르투갈어다. 이는 오랜 기간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자국언어인 떼뚬어 사용이 금지되다보니 언어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한정된 어휘와 정비되지 않은 문법체계로는 정확한 의사전달에 한계가 있어 이를 포르투갈어로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되거나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떼뚬어'보다는 포르투갈어 구사능력이 중요하다. 포르투갈어는 동티모르에서 '엘리트 계층'을 상징한다. 식민지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어를 동티모르의 공식어로 지정하고 학교는 물론 교회와 지방정부에서도 포르투갈어만을 사용하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당시 교육의 수혜를 받은 계층이 한정적이다 보니 이후 이들은 동티모르의 엘리트 계층으로 성장하게 됐다. 또한 인도네시아 통치기간동안 인도네시아 정부가 포르투갈어를 쓰지 못하도록 강요한 바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포르투갈어를 더욱 확산시키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는 분석도 있다. 여하튼 이런 영향 때문인지 독립 이후 동티모르의 많은 법제와 양식들이 포르투갈을 본보기로 삼아 정비되고 있고, 이러한 과정은 자국어보다는 '포르투갈어'를 선호하는 풍조를 낳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의 국가, 포르투갈의 유령을 동티모르에 남기고 간 것이다.


희망을 일구는 땅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식민의 잔재와 경제적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의 미래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혹자는 암울한 동티모르의 현실을 보며 "독립은 어찌 보면 인도네시아가 행사하던 권력이 이제 사회 내부의 기득권층에게 이양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비판을 던지기도 하지만 독립은 분명 동티모르인들에겐 새로운 '희망'을 의미한다. 적어도 내가 만난 '활동가'들은 그 희망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쉽사리 극복되지 않는 빈곤과 정치적 혼란의 무게 때문에 '독립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우리는 지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2살부터 느껴왔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볼 수는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닌도는 "사람들이 정치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경제 문제에 대해 토로할 수 있는 것조차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상황으로 인해 학업은 무기한 중단됐지만 그는 지난 4년간 한 푼의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소리없는 자들의 소리'가 되기 위한 방송국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왜 이일을 계속하냐는 질문에 닌도는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닌도에게 독립은 '공포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가족과 젊은 시절을 빼앗겼지만 '정의'가 세워진다면 이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독립과 정부 설립 이후 사회재건을 위해 구석구석 해야 할 일이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를 위한 연대'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인권시민진영의 움직임도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티모르의 승리를 통해 '국제사회의 지원과 연대'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은 지금, 인도네시아의 또 하나의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의 해방에 자신들의 힘을 쏟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웨스트 파푸아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컨퍼런스를 준비하고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다.

그들의 작지만 끈질긴 힘은 동티모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꾸게 한다. 끊임없는 학살과 침탈이 자행된 땅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투쟁한 역사를 지닌 민중에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으로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극도의 공포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계'가 묻어나지 않던 동티모르인들의 선한 눈빛으로부터 그 희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이것이 '희망'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아데우스(안녕)! 동티모르.

사나나 리딩 룸에 게시된 사진들. 동티모르가 헤쳐와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지금도 동티모르는 채 완성되지 못한 '과거청산'의 과정 속에서, '사회재건'이라는 과제 속에서 쉼없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글쓴이 주]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해방이후 굴절된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새로운 사회와 질서를 꿈꾸는 활동가의 '희망'을 안고 동티모르 여행길에 올랐다. 400년이 넘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이제 독립한 지 6년, 자국 정부 수립 만 3년밖에 안 되는 땅이기에 뭔가 '천지개벽'을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자유'가 주어지고, '변화'가 모색되는 땅에, 어쩌면 '국가'라는 씨를 처음으로 뿌리고 있을 땅에, 어떤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는지가 못내 궁금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머리가 아닌 삶으로 공포의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입장에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이방인이란 위치에서, 불과 한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동티모르를 이해하려 한 것은, '씨앗'을 보고 싶었던 '허황된 꿈'이었다.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공식적' 혹은 '정확한' 정보 역시 제대로 구한 것이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티모르의 '오늘'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덤비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일 뿐이다. 정보에 목말라 인터넷을 뒤지고 싶었지만 한 시간에 6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설사 인터넷을 한다고 해도 그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까지 망설임이 길었다. 하지만 이해한 수준만큼, 본 만큼이라도 동티모르에 짙게 그리운 수탈의 역사를 알려야할 것 같다는 욕심은 '감상'과 '단상' 뿐인 서툰 글쓰기를 재촉시켰다. 여행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행기일 수밖에 없는 글에 대한 부디 넓은 아량과 이해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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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②

아이들과 여성을 덮친 폭력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②
 
참혹한 역사의 최대 피해자, 아이들

열악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한 현 동티모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아이들이다. 무력침공과 학살의 역사 속에서 아이들은 1차적인 식민의 피해자들이었고, 지금 동티모르의 빈곤은 다시금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내몬다.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뜨거운 더위를 감수하며 생선 장수로, 과일 장수로, 그리고 버스 도우미로 나선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가하게 차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풍경 건너편으로, 1.8 리터 짜리 물병만 들고 아무런 세차도구도 없이 손으로 그들의 차를 세차하는 소년을 보는 것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2002년 구성된 정부는 무상교육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현실화된다고 해도 하루 한 끼를 챙겨먹는 것조차 버겨운 아이들에겐 어쩌면 학교란 '사치'에 불과할 수 있다. 그나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도 방과후에 할 수 있는 '놀이'라곤 공터를 뛰노는 것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동티모르엔 단 한 개의 서점도 없다. 서점이 없다는 것은 '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뚜뚜 왈라 지역에 위치한 학교 건물 내 외부 모습. 동티모르의 미래가 이 곳에서 자라나고 있다.


주거공간은 어른인 나에게도 약간은 '공포스런' 기억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밤을 지내야하는 것, 공동으로 세면장과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집안에 수도와 전기시설이 없는 것은 그만큼 위생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얼마 동안 받아두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물로 몸을 닦고 양치질을 하고, 설거지통과 빨래통은 구분되지 않는다. 생쥐와 생활공간을 공유하고 벼룩과 이는 사람 몸을 놀이터로 삼는다. 집에서 키우는 맷돼지며 닭 등의 가축들이 집안을 헤집어 놓는 일은 차라리 애교다. 집이라곤 하지만 4면과 지붕을 막아놓은 것이 전부인 집들은 지방과 산간 지역뿐만 아니라 딜리 시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질병발생률은 높은 반면 의료시설(국공립 병원은 무료로 운영된다)과 위생교육은 턱없이 부족하고 '민간요법'에 기댄 치료 등이 계속되다 보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임신여성과 영·유아의 사망률은 독립이후에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딜리 시내 중앙에 위치한 '구스마오 사나나 리딩 룸'. 우리네로 치면 국립도서관 정도에 해당하지만 불과 40여 평 정도밖에 안 되는 협소한 공간에 소장된 책은 불과 몇 백 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장된 책 역시 '영어'나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것들이 많아 동티모르인들의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하는데, 그래도 동티모르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이곳을 방문해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곤 한다.


여성들의 정의 세우기

여성단체가 주장하는 동티모르의 가장 큰 여성문제는 '(특별히 법적인 측면에서) 여성들의 정의가 부정되는 것'이다. 18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REDE FETO의 우발다는 "가정폭력은 심각한 반면 가정폭력에 대한 규정은 없다"고 설명한다. 현재 동티모르 법원은 동티모르 형법이 제정되기까지 과도기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형법을 차용해 사용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형법은 신체적 폭력과 성적 폭력만을 규정할 뿐 정신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 등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 사건의 경우 여성들이 모든 증거를 제출해야하는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이 현재 제정 과정을 거치고 있는 동티모르 형법에서 보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작성 중인 법안은 포르투갈어로 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물론 의회가 여성단체의 의견을 듣는 어떤 자리도 만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단체들은 어떤 내용으로 법안이 작성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여기에 현재 동티모르의 법원이 제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 역시 '부정의'를 존속시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동티모르는 3심제를 채택하고는 있지만 현재는 과도적으로 3개의 지방법원과 1개의 고등법원만이 운영되고 있다. 게다가 운영되고 있는 법원조차도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의 인력부족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재판을 원할 경우 재판 가능지역으로 옮겨오는 수고를 감수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판을 포기하게 된다. 특히 가정폭력을 '폭력'의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혹은 '여성의 책임'으로 치부하는 법 집행관들의 분위기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조차 없는 사회적 풍조는 사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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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학살의 기억, 빈곤의 현실
독립의 땅을 찾아-동티모르 방문기 ①
"아직까지 한번도 기념비나 추모탑을 세워야한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기념비나 추모탑은 없지만 사람들은 그 잔혹한 역사와 죽어간 이들을 기억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비석을 만들고 행사를 여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잊지 않는 것'이고 동티모르인들은 삶에서 그것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문에 '현답'이 날라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학살지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렇지 않은 곳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할만큼 학살이 자행된 땅에서, 학살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찾고자 했음은, 그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비 앞에서 당시의 사건을 기억해내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었음은 이방인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될 듯 했다. 학생운동가로 독립운동을 해왔다는 유리코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이슬람 종교 운동가 안와르도 91년 발생한 '산타 크루즈 대량학살'의 피해자들이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 학살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아노 고메스(Sebastiano Gomes)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 크루즈 묘지에 모인 동티모르 평화시위대열에 인도네시아 군대가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최소 250여명 최대 903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 서방인 저널리스트의 비디오에 그 참상이 담기면서 당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 논리에 갇혀 철저히 외면받던 동티모르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군은 사망자들을 트럭에 실어 바닷가에 내다버리거나 큰 구덩이를 파서 집단 매장했다고 한다.

유리코도 안와르도 이 사건을 알리는 흔적하나 세워지지 않았음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 보였다. 24년 인도네시아 무력 강점기간 동안 인구의 1/3이 죽어갔지만 그래도 '산타쿠르즈 학살'은 우리네의 광주항쟁쯤으로 인식될만한 '사건'이었기에 '표식'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했던 '산타 크루즈' 묘역에선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넋들이 묻힌 자리를 '찾아가보고 싶다'고 딜리에 도착한 날부터 졸라보았지만 그들은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었다. '너무 쉽게 역사의 무게를 잊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답변은 그제야 '맥'이 잡힌다.

이곳이 학살지임을 알리는 나무 십자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로스팔로스에서 실려 온 사람들은 이 강물에 던져졌다. 어떤 사람들은 차에 갇힌 채 던져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몸에 쇠덩이나 바위를 달아야했다. 학살은 어린아이나 노인, 임산부 등을 가리지 않고 자행됐으며, 사람들은 악어의 먹이가 되거나 산채 수장됐다.


정의 세우기

가슴으로부터 동티모르인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티모르내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와의 과거청산이며, 식민지 시절 동티모르내의 인도네시아 부역 세력에 대한 청산이다. 99년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2002년 5월 유엔의 신탁 통치를 거쳐 자국 정부를 갖게 된 이래 전쟁범죄자, 학살자들에 대한 처벌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엔의 결정 하에 1999년 9월 인도네시아 내에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가 설립돼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 검찰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조무래기들 18명만을 기소하는데 그쳤고, 또한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3년의 유죄를 선고했을 뿐이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유엔임시행정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99년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이, 딜리지방법원 내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이 설립되긴 했지만 기소된 사람 중 대부분이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은 끝내 진행되지 못했다. 형식적인 조사와 처벌은 국제사회의 이해관계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내의 정치, 사회적 지형이 낳은 결과로 동티모르인들이 외치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이는 발전도 평화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를 위해서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99년 8월 독립투표를 전후해 인도네시아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동티모르 전역에서는 당시의 파괴행위로 인해 부서진 채 아직도 수리되지 못한 집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해왔던 청년들이 사회의 올바른 설립을 꿈꾸며 만든 라디오 <라캄비아>(RAKAMBIA)에서 일하는 닌도는 "인간적으로 용서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책임을 묻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못 밖는다. 그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게릴라가 되어 산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아버지가 독립이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로 아버지의 죽음을 인식할 뿐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서 사라져갔고 그 역시 사물을 인식했던 나이부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고 한 이웃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이뤄진 뒤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그런 피해자가 손을 내밀어 가해자에게 악수를 청하고 화해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티모르에 세워진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인 '뉴그'는 정의세우기의 이유를 자국으로부터 찾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아직도 자국 정부가 동티모르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람들은 정부가 불쌍한 동티모르를 지원한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동티모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의 굴절된 역사는 계속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는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를 생각해봐라.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 군이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한다.

조사관 '뉴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2002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화해와 진실위원회 건물이다. 위원회는 2005년 7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활동을 종료한다.


수탈의 역사가 남긴 경제적 상흔

'정의세우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 '경제'라고 할만큼 경제문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티모르의 최대현안이다. 국민들의 체감 실업률이 90%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티모르에서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 불가능한 형편이다. 수도인 딜리에서조차 하루에 1달러를 벌기위해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집 인근의 과실나무에서 따왔음직한 과일을 팔러 나온 사람들로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버스 도우미로 일한다. 해진 뒤 물이 빠진 바다에서 반찬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조개를 줍거나 해초를 캐는 일상은 '낭만'이기보다는 '생계'를 위한 전투다. 해방을 맞은 도시는 출퇴근 시간조차 '활기롭기'보다는 '침울'하고, 밤을 맞은 도시는 '침묵'으로 가득 차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같은 느낌마저 준다.

딜리 시내에서 가장 큰 오픈 마켓, 꼬모스 시장. 사람들이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몇가지 종류의 과일과 야채, 가축이 전부다.


40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와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배는 동티모르의 모든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고 심각한 빈곤을 가져왔다. 커피 등의 주요 작물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 시절에 들어왔던 유럽이나 미국인 '거대' 회사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사람들은 수익을 빼앗긴다. 농부들은 긴 식민지배 하에서 '고리대금'의 방식을 통해 농토를 빼앗기거나 장기간의 피난 생활로 기반을 상실했고, 도시의 대부분 땅과 비옥한 농토는 포르투갈인이나 포르투갈 시대에 관료를 지냈던 사람들, 그리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다.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경제 수탈정책 하에서 제조업이 전혀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세제, 신발 등의 생필품을 비롯한 모든 물자는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동티모르엔 공장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이러다보니 고용은 창출되지 못하는 반면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으며, 이런 악순환으로 빈곤은 더욱 심화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교사 등의 공무원 임금이 한달 평균 120∼150달러인데 비해, 한끼 식사가 3∼5달러에 달하고 펜틴 샴푸가 10달러에 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사관 및 유엔 직원 등의 외국인이 많이 들어와 있는 도시 딜리는 정확히 외국인 거주지역과 내국인 거주지역으로 양분된다. 경계는 밤이면 더욱 또렷해진다. 전기 수급사정이 좋지 않다보니 이틀에 하루 꼴로 저녁 7시를 전후해 전기가 나가는데, 대사관을 비롯해 대사관 직원 등이 묵는 거주지와 해변가를 따라 위치한 호텔과 레스토랑, 바 등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정전사태는커녕 늦은 밤까지 꺼지는 법이 없다. 아직 전기선조차 구비되지 않는 집들이 즐비하고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암흑 속에서 밤을 나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도시에서 전기불은 단순한 불빛이 아닌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상징한다.

단 돈 1달러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지만 정부 역시 빈곤하긴 마찬가지다. 99년 독립 이래 동티모르 정부의 모든 재원은 유엔과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기구, 외국의 무상 원조로 충당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정부 역시 재원마련을 위해 매년 '예산 계획서'를 작성, 제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행히 티모르 해에서 유전이 발견돼 2004년부터 개발에 착수, 2004년 6월부터 2005년 5월까지 1년간 2억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수익이 발생했다. 이는 동티모르 정부의 한해 예산의 1/4에 달하는 금액이다. 유전 개발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지만, 다른 물적 기반이 전무하고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위기를 탈출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 하다.

유전이 개발 중인 티모르 해 지도. Bayu-uedn의 유전은 2004년부터 개발이 시작됐으며, Greater Sunrise지역의 유전은 '공동수역' 문제로 현재 호주와 협의 중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티모르 정부는 2005년부터 향후 5년간 단계적으로 동티모르 노동자 1만 여명의 해외취업을 알선하겠다는 계획을 올해 초 발표했다. 실업문제 해소와 우수한 해외 기술의 이전, 노동자의 질 향상 등이 그 이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국은 바로 한국. 현재 계획에 따르면 올 해 연말까지 200여명의 동모르인들이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년에서 3년간의 기간동안 한국에서 건설현장이나 공장 등에 투입될 전망이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 겪어야할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동티모르에서 '평화캠프'를 준비하고 있는 종교단체 '개척자'의 박윤애 씨는 "이주노동을 희망하는 이들에 대해 정부가 하는 교육이라곤 '무조건 참고 버티기'"라고 말한다. "속된 말로 '첫 타자가 잘하고 와야 다른 동티모르인들에게도 기회가 생기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아야한다'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동티모르 청년들은 기회에 갈급하고, 생계는 절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무실에조차 한달에도 몇 명씩 '일자리가 없냐'고 찾아오는 청년들이 있습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동티모르인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일 수밖에 없다.

한편 심각한 동티모르의 경제적 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생산해 낸 값싼 물자, 그리고 식민지배를 통해 익숙해진 인도네시아의 물품들이 동티모르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것. 인도네시아는 식민지배가 끝난 지금, 동티모르의 최대 무역 수입국으로 자리잡으며 동티모르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가져가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에 나설 경우 동티모르의 경제는 벼랑에 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적 상황의 역학관계는 정치적, 사회적 부분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작용해 동티모르를 압박하는 권력으로 행사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경제적 '예속의 질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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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p동티모르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동티모르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동티모르는 이미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지배와 억압에 신음하는 웨스트 파푸아와 아체에게는 동티모르 승리의 역사가 커다란 희망이자 자신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동티모르 독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독립을 염원한 수십만 명의 희생 그리고 광범위하게 확산된 국제사회의 연대와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만나는 수많은 활동가들은 동티모르의 승리를 기억하며 투쟁의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는데 인색한 우리가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할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산타크루즈 묘지. 인도네시아 군대는 1991년 11월 12일 산타크루즈 묘지 앞에서 평화행진을 하던 동티모르인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는데, 이 때 약 270여명이 사망하고 약 250명이 실종되었다.


동티모르인들의 계속되는 투쟁

그러나 동티모르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까지 동티모르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가 1975년 12월 7일 동티모르를 침략한 이후 1999년까지 수많은 살인·고문·성폭행·강제실종·불법감금 등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을 저질렀는데도, 아직까지 이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처벌을 위한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5월 5일 인도네시아·포르투갈·유엔이 동티모르인들에게 독립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1999년 초부터 동티모르 독립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이를 막기 위한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의 만행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국민투표가 진행된 1999년 8월 30일을 전후해서는 학살과 재산파괴가 절정에 달했다. 유엔은 1999년 약 1,3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독립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파견된 유엔 직원들도 공격당했다.

유엔은 '동티모르 국제조사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Inquiry on East Timor)를 임명하고 1999년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는데, 국제조사위원회는 국제법정을 설립하여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인도네시아, 단 한 명만 유죄판결

하지만 유엔은 인도네시아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체적으로 1999년 9월 '인권침해 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into Human Rights Violations in East Timor, KPP HAM)를 설립하여 포괄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임시인권법정'(Indonesia Ad Hoc Human Rights Court on East Timor)을 설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검찰총장은 실제 책임자는 배제한 채 위로부터 지휘를 받고 움직인 18명만 기소했고, 임시인권법정은 그 중 한 명에 대해서만 징역3년의 유죄판결을 확정했다.

한편 동티모르 독립 이후 설립된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1999년 사건 조사를 위해 동티모르 검찰총장 산하에 '중대범죄진상조사단'(Serious Crimes Unit)을, 재판을 위해 딜리지방법원 안에 '중대범죄특별법정'(Special Panel for Serious Crimes)을 설립했다. 중대범죄란 △대량학살(Genocide) △전쟁범죄(War crimes) △반인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살인(murder) △성폭행(Sexual offence) △고문(Torture) 등이다. 동시에 유엔임시행정위원회는 '화해와 진실위원회'(Commission on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를 설립하고 중대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는 화해를 통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중대범죄특별법정에 95건, 총 440명이 기소되었는데 이 가운데 339명은 인도네시아 등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어 재판을 진행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 군대 서열 6위이며 반인륜범죄를 지휘했던 위란토에 대해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지만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다.

바우카우에 있는 1999년 파괴된 건물들. 동티모르 여행을 하다보면 1999년 파괴된 건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진행된 사법절차는 독립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 또는 유엔이 동티모르에 들어온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의실현 측면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의 실제 책임자에 대하여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동티모르인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티모르인들, 국제전범재판 요구

동티모르인들과 국제시민사회단체는 유엔에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에서 진행된 중대범죄사법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며 국제법정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유엔은 올해 2월 18일 '전문가 위원회'(Commission of expert)를 구성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전문가위원회는 5월 26일 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동티모르 정부에 대해서는 중대범죄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계속 진행하고 △이에 대해 유엔이 지원하며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정한 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조사와 재판을 다시 진행하라고 권고했다.

또 전문가위원회는 두 정부가 위 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유엔은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해야 하고 국제전범재판을 설립하지 않을 경우 국제형사재판소의 활용가능성을 고려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 및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동티모르 정부는 유엔의 권고사항을 따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두 정부는 2004년 12월 14일 설립하기로 합의한 '진실과 친선위원회'(Commission of Truth and Friendship)에서 1999년 문제를 일괄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이 위원회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도 사면을 권고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사실상 지원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한 미국·영국·호주도 인도네시아와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1999년 사건에 대한 국제전범재판 설립을 반대하고 있다. 높은 비용과 비효율을 형식적인 이유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1999년 동티모르에서 발생한 살해·고문·불법감금, 동티모르인들에게 가해진 집단 살해는 명백히 유엔헌장과 로마규정에서 정하고 있는 반인륜범죄이고 대량학살이므로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 약 4년 전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1999년 4월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가 수십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던 리키샤(liquica)를 방문해, "가해자 처벌을 통해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2004년 11월 9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가해자가 처벌될 수 있도록 유엔 회원국들의 협력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2003년 7월 전 인권고등판무관 로빈슨도 '동티모르 1999, 반인륜범죄'라는 보고서에서, "유엔은,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특별한 책임이 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동티모르 국제법정을 설립해야 한다. 안전보장이사회와 사무총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리키샤에 있는 교회. 인도네시아 군대와 민병대는 1999년 4월 6일 그들의 공격을 피해 이 교회에 숨어 있던 노인, 여성, 아이들 58명을 교회 마당에서 살해했다. 이 때 교회에서 도망간 사람들을 합쳐 총 103명이 살해당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동티모르 정부가 더 이상 정의실현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상 국제전범법정을 설립해 동티모르 내에서의 정의를 완성해야 할 것이다.


1999년 이전 범죄도 처벌해야

그리고 1999년 사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침략 이후부터 자행된 반인륜범죄와 대량학살에 대해서도 전범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티모르 헌법에서도 "1974년 4월 25일부터 1999년 12월 31일까지 발생한 반인륜범죄, 대량학살,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국내 또는 국제 법정을 통해 사법조치를 취해야 한다(제160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많은 동티모르인들은 정의가 없으면 평화도 발전도 없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동티모르 침략 및 반인륜범죄와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포기할 경우, 보복을 통한 또 다른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25년간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인권침해를 자행했기 때문에 조사와 재판을 통해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기록을 남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로 옮겨간 동티모르 학살자들

그러나 무엇보다 동일한 인권침해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범재판의 설립은 절실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인권침해를 주도한 군장성들을 승진시켰고 2004년 초 전 동티모르 경찰 간부였던 팀빌 실랜(Timbil Silaen)을 웨스트 파푸아 경찰 간부로 임명했다. 동시에 악명 높았던 동티모르 민병대장 유리코 구테레스(Eurico Guterres)를 와메나(Wamena) 지역에 임명하고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1999년에 발생한 동티모르 학살사건에 연루된 자들인데, 동티모르에서 한 것과 똑 같은 반인륜범죄를 웨스트 파푸아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동티모르 인권침해의 실질적인 책임자들이 사실상 면책을 누리는 이상, 아체와 웨스트 파푸아 사람들은 동티모르인들이 겪은 고통의 길을 그대로 밟게 될 것이다.

5월 29일 발리에서 열린 구스마오와 위란토 회담 직전, 딜리에서 국제전범재판을 요구하며 피고발인들의 사진을 들고 서 있는 동티모르 시민


그래서 동티모르인들은 국제전범법정의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시민사회단체, 동티모르 내 국제 시민사회단체, 학생조직 등 42개 단체가 '국제전범법정 설립을 위한 동티모르 연대모임'(East Timor National Alliance for an International Tribuanl)을 구성하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후부터 1999년까지 발생한 전쟁범죄 및 반인륜범죄 등에 대한 국제법정 설립을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하는 등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진정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티모르인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동티모르=이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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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따따 두 번째 이야기

내 친구 따따 두 번째 이야기 “아, 따따 보고 싶다” 이건 불치병이다. 고작 1주일 다바오에서 떠나있었을 뿐인데, 말도 잘 안 통하고 게다가 나를 골려먹을 궁리만 하는 따따가 보고 싶다니. 그것도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번번이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날 올 적마다 따따가 생각나다니, 이건 분명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다. 말로 뱉어낸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전화를 걸어본다. ‘뚜~ 뚜’ 전화는 종일 통화중이거나 아무도 받는 이가 없다. 진작부터 주인장이 딸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던 터라 허공에 울리는 전화벨 모양새에 주인장이 서울로 떠났음을 알아챈다. “살판이 났겠구만. 이제 밥이나 제대로 얻어먹고 다닐 수 있을까” 쩝하고 궁시렁 거려보지만 입가엔 묘한 웃음이 감돈다. 일주일을 예정했던 마닐라 행은 마닐라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수빅과 클락 방문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졸지에 2주일로 불어나버렸다. 3월 한국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들과 어울리면서 필리핀이 아닌 ‘한국’인 것처럼 살았던 1주일은 모두 끝나버렸다. 모처럼 맛보는 한국 음식에 넋이 나가 허리살 부는지 모르고 음식에 눈독을 들이던 날도,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라며 은근히 술자리를 탐했던 시간도, 영어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데다 비슷한 일을 했던 이들을 만난 즐거움에 얘기가 잘 통한다며 끊었던 담배를 슬쩍 다시 집어 들었던 새벽도 안녕이다. 우리에 갇힌 새가 하늘로 비상을 시작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비행기의 차창너머로 탁 트인 바다와 끝없이 이어진 산맥, 그리고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다바오다” 나도 모르게 반가움과 안도가 흐른다. 없는 게 없는, 그래서 삶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마닐라지만 서울과 닮았기에 ‘숨’이 막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따스한 햇살이 전해져 온다. 뜨겁긴 하지만 분명 마닐라의 햇살과는 다르다. 무거운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생면부지의 낯선 다바오 땅에 도착했을 때의 ‘평온’이 감돌면서 따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집안엔 잔치가 벌어졌다. 주인장 없는 틈을 타 따따가 그네의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한 것. 도착할 것임을 알면서도 판을 벌였다는 것이 괘씸하긴 하지만 평생 못 누려보았을 ‘호사’임을 알기에 또 묘한 웃음이 스친다. ‘Oh, I miss you'라고 따따가 말한다. ‘진짜로’하며 얼굴을 찡그려보지만 금세 실토하고 만다. 나 역시 그리웠다고. 그렇게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하숙집 핼퍼와 하숙객의 관계를 넘어 ‘친구’가 됐다. 따따에게 배운 것들 고백하건대, 아마도 연민이었을 게다. 누구는 ‘연민’과 ‘책임’이 성립되는 관계는 불행한 것이라 거침없이 내뱉기도 하지만 따따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것은 그의 처지에 대한 안쓰러움과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마음에서부터였을 게다. 하지만 두 달을 지내면서 그는 더 이상 ‘연민’의 대상만은 아니다. 교만한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아무 것도 버리지 않았다. 가난함이 삶이되었기 때문일 수도, 아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삶을 너무 오래 동안 살아서인지 몰라도 따따는 남은 음식은 물론 비닐봉투 심지어는 종이 한 장도 쉽사리 버리지 않는다. 때론 내가 콩나물을 씻는다며 떼어낸 머리 꼬대기를 모두 모아 음식을 만든다. ‘이건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지만 따따의 눈초리가 무섭다. 8년을 헬퍼로, 남의 집 살이로 아득바득 살았지만 따따의 통장에 든 돈은 고작 800페소(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6,000원). 두세 번인가 책을 산다며 따따와 장보기에 나서보았지만 따따의 주머니에서 10페소 이상 나오는 것을 본 적은 그네 딸에게 보내기 위한 속옷을 살 때뿐이었다. 한국에서 ‘짠순이’로 소문난 나도 그녀의 ‘씀씀이’를 따라잡기엔 너무 소비에 익숙해져 있다. 만들어 쓰기를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그에 투여되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싸다’는 이유로 ‘나중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 ‘필요없다’ 쉽게 버린다. 하지만 가난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지구의 80%가 빈곤에 허덕이는 사회에서 이건 사치다. 그걸 따따는 내게 원망의 눈초리와 그의 삶으로 가르친다. 해되지 않는 생명은 미워하지 않아야한다는 것도 따따에게서 배운다. 유난히 곤충(?)이 싫었다. 지하 방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집안에 유난히 온갖 종류의 곤충들이 많았다. 바퀴벌레가 밥상에 출몰하는 것은 기본이고 송충이가 신발장에 붙어있거나 이불위에 귀뚜라미가 출몰했던 일들은 유년시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공포 그 자체였다. 음식물의 작은 잔재라도 남은 곳엔 어김없이 개미떼가 행렬을 짓지만 따따는 개미를 죽이는 법이 없다. 다만 손으로 툭툭 치거나 ‘오’하며 까르르 웃을 뿐이다. 집안 곳곳을 기어다는 도마뱀도 따따에겐 그저 나를 놀려먹기에 좋을 존재일 뿐이다. 천정 위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는 작은 도마뱀에 소스라쳐 그를 불렀던 시간에도 따따는 ‘It's good(해충을 잡아먹는 존재라는 의미)’이라며 ‘푸하하하’ 웃는다. 절대 쫒거나 잡는 법이 없다. 따따가 잡는 곤충이라곤 바퀴벌레 정도.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큰 바퀴가 날라 들어올 때면 사정없이 슬리퍼를 집어 던지며 ‘Not good'을 연발한다. 그래서 해되지 않는 곤충은 죽이지 못한다. 매일 쉬도 때도 없이 작은 개미들이 얼굴에 몸에 올라타며 미끄럼을 타지만 이제는 툭툭 쳐낼 뿐이다. 언제가 읽은 책 제목이 기억난다. ‘지구를 살리는 풍뎅이’라는.(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책인데, 당시에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다시 배운다. 책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삶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임을. 따따가 그리운 이유 하지만 무엇보다도 때론 되도 않는 똥배짱을 튕기는 따따를, 대책없이 게을러 가끔은 끼니조차 거르게 하는 따따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대한 따스함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아닌 무관한 존재들을 향해서도 닫히지 않는, 그 사람 눈높이에 맞춘 그의 배려다. 향수병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때 슬쩍 자리를 피해주는 배려를, ‘아픈 것 같아’라는 말에 서툴게 끓여 내주던 죽 내음을, 매운 것은 죽었다 깨도 못 먹으면서도 한국음식 먹고 싶을 거라며 김치를 담겠다며 고춧가루 양념의 간을 맞추던 날도,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닭을 튀겨주던 모습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이 흐른다. 동전 몇 푼을 얻으려 이집 저집은 전전하는 아이를 보면 주인장 몰래 만들어다 팔고 있는 아이스캔디의 수익을 내어주고, 자신의 접시에서 빵을 덜어주는 것도 따따다. 매번 종을 흔들며 온갖 잡일을 시키는 주인장이지만 내가 싫은 낯이라도 보일 때면 ‘no!’라고 말하는 것 역시 따따다. ‘연수’라는 명목으로 떠나오긴 했지만 마음 가는 데로 떠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여행이기에 짐 되는 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짐이라고 해봤자 갈아입을 옷 몇 벌에 책 몇권 든 가방하나가 전부. 여기에 ‘정’은 금물이었다. 그저 길 위에서 만난 ‘좋은 인연’정도로 스쳐가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벌써부터 따따가 그립다. 힘겨운 현실 앞에서도 웃음을 보내지 않는 그의 밝음이, 사람들의 발아래 선 듯하지만 가슴 안에 서있는 그가, 그래서 더욱 여행객의 가슴을 울리는 따따가 그립다. 나는 안다. 이곳에서 떠나면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이집 저집 핼퍼로 떠도는 인생이기에 편지 부칠 주소한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따따가 그립다. 이 그리움을 안고 다바오를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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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자신의 거주지에서 평화롭게 살 권리

지난 4월 26일 밤 12시경 필리핀 마귄다나오(Maguindanao)의 한 마을에서 무장 군인들이 부인과 그의 아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앞에서 하킴(가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3일 동안 하킴의 온 몸을 꽁꽁 묶고 조사하였으나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자 되돌려 보냈다. 물론 군인들은, 체포영장 제시는커녕 체포 이유에 대하여 전혀 고지하지 않았으며, 체포 당일에는 하킴을 고문했다. 같은 날 그 무장군인들은 하킴 집 근처에 있는 두 집에 영장도 없이 무단 침입하여 무기를 찾는다며 가재도구를 헤집어 놓았다. 사건 내용만 보자면,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권침해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피킷에 있는 코코넛 나무. 맨 앞에 있는 나무는 온 몸에 총알 흔적 투성이다. 윗 부분은 폭탄으로 잘려졌다.

그러나, 이곳 피해자들은 동트기 전 자신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떠나 다른 동네로 도망가야만 했다. 언제 또 군인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이들은 동네를 떠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 것이냐는 질문에, 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떠나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터뷰가 사건 발생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 이루어졌는데, 그 때까지도 그들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민다나오의 국내 난민들

민다나오 섬은, 1997년·2000·2003년 정부와 이슬람해방전선(MILF, Moro Islamic Liberation Front) 사이의 세 차례 큰 내전을 겪었다. 민다나오 섬에 가면 아직도 전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총알 흔적이 남아 있는 코코넛 나무들과 완전히 전소해 버린 집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직까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수만 명의 국내 난민들(Inernally Displaced Persons, IDPs, 아래 상자설명 참조)이 전쟁의 비극을 그대로 전달해 준다. 2003년에는 약 20만 명의 국내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피투폰(pitoopon)에 있는 난민센터

무고한 이들은 생명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전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는 친척집으로 피난갔으나, 대다수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의 학교나 관청 마당에 모였다. 몇 개월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한 후 부근 빈터에 임시 처소를 짓고 공동생활에 들어갔다. 식량 배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자선단체에서 식수를 위한 우물을 만들어주기 전까지는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설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농민인지라, 피난과 동시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이들은 피난 생활 초기에는 교실이 없어 학교에 못 갔고, 계속되는 피난생활 기간 동안에는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이 종료 된지 2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더라도 마땅히 먹고 살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전쟁으로 경작지와 경작에 사용한 동물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도 이들의 발길을 막고 있다. 실제로 지난 2월, 격전지 중 한 곳이던 피킷(Pikit)에서 불발탄이 터져 밭에서 일하던 주민이 큰 상처를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난민센터이든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아이들이었다.

하킴의 가족들과 난민센터에서 만난 분들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것이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다. 그냥, 자신의 집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나선 사람들

민다나오 섬에 사는 국내 난민들은 난민에 대한 지원과 안전한 복귀를 주장하는 시위를 통해 그들의 힘(Bakwit power, Bakwit은 따갈로그어로 국내난민을 의미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면서, 전쟁 감시 역할을 자처하며 주민들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쟁 감시를 위하여 주민들이 '반타이 시스파이어'(Bantay Ceaserifre, 전쟁감시)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지역 주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전쟁과 군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은 전쟁과 인권침해에 상당 부분 노출되어 있다.

"평안하셔야 합니다. 제발…아무 일 없어야 합니다." 하킴 부인의 손을 잡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민다나오=이상희]

국내 난민에 대하여

'국내 난민'(IDP, IDP가 국내유민, 피난민, 국내 유랑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은 '무력충돌,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폭력 상황, 인권침해, 자연 또는 사람에 의해 발생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기존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거나, 떠나도록 강요받은 사람들'로서, 국경 안에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반면, '난민(refugee)'이라 함은 국경 밖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1999년 발표된 미국 난민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 국내 난민 발생률이 4위라고 한다. 필리핀에서 국내 난민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무력충돌(특히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이다. 그리고,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나 경제 특구 등의 정부계획으로 도시 빈민들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촌에서는 경작지를 비경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다국적 기업의 광물 채취과정에서 많은 국내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많은 국내 난민들이 불안, 공포, 충격, 산만 등의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유엔은 국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내 난민 가이드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internal displacement)을 제정하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시민들이 비자발적이고 무분별하게 주거지로부터 이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정부 당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난민기간 동안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고, 복귀나 재정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위 원칙에서 금지하고 있는 비자발적 이탈에는, 1)정치적 분리나 인종 청소, 기타 민족적·정치적·인종적 구성인원을 변경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이탈 2)무력충돌 상황에서 안전보장이나 군인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탈 3)강제와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4)피난을 갈 정도로 안전이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재앙 때문에 이루어지는 이탈 5)대규모 처벌로 이루어지는 이탈 등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매해 발생하는 수재민은 국내 난민으로서 위 원칙에 따라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전 예정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하여 국내 난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위 원칙의 적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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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재앙의 땅에서 만난 아이들
미군기지 철수의 땅, 수빅과 클락 방문기
 
"과학자들조차도 사방가도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되는 지역이라며 땅의 심각한 오염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정부에 지역폐쇄와 경고문구 게시를 요구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차는 이미 밀라 '국제 미군기지정화운동 연합'(Alliance for Bases Clean UP International: ABC International) 사무국장이 가리 킨 위험지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입구부터 시작된 인가는 뜀 없이 이어졌다. 10여분쯤 더 달린 후 차는 어느 집 대문 앞에 멈췄다. 하나 둘, 아이를 안은 엄마들이 집으로 모여들더니 작은 마당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아이는 님플,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육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존말이에요. 간에 문제가 있지요. 이제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아이는 자궁질환을 갖고 태어났고, 조지와 에드워드는 각각 11살인데 둘 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요. 그리고 이 아이는……."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대신해 밀라가 아이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학용어로 시작된 설명은 끊임없이 이어지더니, "아이들 대부분이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가는 것조차 어렵다"는 말로 끝났다.

갑자기 화가 북받쳤다. '왜 계속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미 아이들로써 그 심각한 위험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하지만 화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았다. 누구라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저주받은 땅을. 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부터 조금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미군에 의해 저주받은 클락(Clark)의 사방가도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방가도는 미군의 기지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클락에서도 환경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 중 하나이며,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에드워드와 그의 엄마. 그의 웃음은 너무 해맑았다.


사방가도의 아이들. 미군이 남긴 재앙이 언제 이들의 웃음을 빼앗아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88년 미군 주둔의 역사

마닐라에서 불과 70∼80킬로미터 떨어진 수빅(Subic)과 클락이 미군기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건 필리핀과 미국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뒤부터. 1880년대까지 스페인 해군의 선박수리소가 있었던 수빅에는 1903년 해군기지(Subic Naval Station)가, 클락에는 1910년 공군기지(Clark Air Base)가 만들어졌다. 1946년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두 기지는 굳건히 유지됐다. 필리핀과 미국은 1947년 기지협정(Military Bases Agreement)을 체결하고 99년간 무상 기지임대에 합의했다.

하지만 1966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미군기지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면서부터 철옹성 같던 기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르코스는 기지협상을 재개하여 임대기간을 25년으로 감축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기지 사용과 관련된 보상 문제를 제기해 일정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1991년 필리핀 상원은 미군 기지임대 연장안을 거부했다. 88년 미군기지 주둔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미군은 91년 철수했고, 두 지역에는 기지전환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빅과 클락은 경제특구로 지정됐다. 미군의 아시아 최대 기지였던 수빅과 클락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레저, 경제지구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수빅과 클락의 재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떠난 기지에 드리운 재앙

"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수빅 피해자들의 조직 '수빅 자연자원보호 운동본부'(Yamang Kalikasan Aming Pangangalgaan: YAKAP, 아래 수빅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리노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일흔을 넘긴 리노는 1957년부터 미군기지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군을 위해 일했으며, 괌 기지에서 일하기도 했다. 35년 동안 미군기지에서 일하면서 그는 석면을 비롯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오염됐다. 그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이미 결핵 등의 질환으로 고인이 된지 오래다. 마일도 마찬가지다. 미군기지에서 청소일을 했다는 마일은 "쓰레기를 치우다가 (화학물질 냄새에) 여러 번 기절했습니다. 관리인은 이 사실을 다른 동료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 저는 계속 몸이 안 좋았지만 직장을 잃을까봐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폐암을 선고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리노. 그는 수빅 미군기지를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다.


마일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산다고 했다. 폐는 물론 심장과 혈액에도 이상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재앙은 수빅기지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일했던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의 자녀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미군 철수 이후 기지로 사용됐던 건물들이 공장 등으로 임대되면서 그곳에서 일했던 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이어졌다. 제이슨(8)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제이슨의 아빠는 해군기지에서 일했으며, 엄마는 미군철수 이후 핸드폰 조립 공장으로 임대된 미군건물에서 3년간 일했다. 그때 잉태된 제이슨은 생후 3살 이후부터 백혈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일했던 동료 가운데 한 명은 유산했으며, 한 명은 제이슨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낳았다. 회사에 책임을 묻기도 했지만 사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6개월에 한번씩 수혈받아야 한다는 제이슨은 "내가 더 아파지는 거냐"고 묻는다고 한다. 제이슨의 다른 다섯 형제들 역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거나 잦은 두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조지(가명)는 24년 동안 미군의 무기공장에서 '무기재료'를 만드는 일을 했다. 본인은 신장에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때 낳은 두 자녀 모두 심각한 뇌성소아마비를 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은 혼자 힘으로는 몸을 뒤집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하수구멍을 통해 오염된 물이 미군기지 안에서 하천과 바다로 무단 방류됐다.


'미군기지정화 민중운동본부'(People's Task Force for Bases Cleanup: PTFBC) 필리핀 대표인 부기는 "턱없이 부족한 재정과 전문적인 조사인력 확보의 한계, 게다가 미군이 정수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물질을 바다와 강 등으로 방류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상황을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미군기지 노동자로 일하면서 화학물질 오염으로 숨을 거둔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95년 수빅 관리청이 투자유치를 위해 수빅 44개 지역에 대해 실시한 환경조사에 따르면, 사격연습장·병원소각장 등 11개 지역에서 오염물질이 검출됐다.


화산폭발로 미군기지에서 생활…최대 피해자는 아이들

클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991년 6월 클락 미군기지 인근에 있던 피니투보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존의 터전에서 내몰린 주민들은 미군이 철수한 기지 안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클락 공군기지 본부로 사용됐던 캅콤(Clark Air Base Command: COBCOM)에만 약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미군기지로 사용됐던 땅위에 집을 짓고 밭을 가꾸고, 우물을 파서 식수로 사용하면서 2년에서 5년가량 생활했다. 가끔 물에서 냄새가 나거나 이물질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생존'이 절박했던 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산폭발로 캅콤에 이주해서 3년을 살았습니다.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씻기 위해 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 온 가족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물 때문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손자는 뇌성소아마비를 앓고 있고, 저 역시 피부병과 두통, 위장장애 등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클락 피해자들의 가족을 위한 공동행동'(Sama-Samanhg Aksyon at Ugnayan ng Mga Pamilyan ng Biktima: SAUP, 아래 클락 공동행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마가 말했다. 노마는 "캅콤에서 나오고 나서 알았습니다. 물이 오염됐으며 이로 인해 저희 가족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질환을 앓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을. 저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을 원할 뿐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캅콤에 거주했던 다른 이들의 상황도 전혀 다르지 않다. 케빈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다. 11살인데도 제대로 발육이 되지 않아 6∼7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미 케빈의 동생은 병마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았다. 10살이 채 되지 않은 라베스 역시 독극물에 의한 오염으로 인해 뇌성소아마비와 백혈병을 앓고 있다.

노마와 그의 손자. 노마는 사람들이 클락을 잊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꼭 다시 만나자"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케빈은 혼자 힘으로는 혼자서는 물조차 마실 수 없다. 그래서 케빈의 엄마는 24시간 그의 옆에서 떠나지 못한다.



정부 독극물 오염 확인…보상과 복구는 전무

상황의 참혹함은 이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조사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96년 캐나다 병리역학 전문의인 로살리 베르텔 등 독극물 전문가들이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클락 공군지기 인근 13개 지역에 거주중인 여성 761명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독극물에 감염된 상태였다. 특히 캅콤에 거주했던 여성들 가운데 당시 임신을 했거나 아이들이 있었던 경우에는 아이들의 상당수가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병, 암 등의 질환을 보였다.

이후 진행된 다른 조사에서도 많은 수의 아이들이 중추신경 마비, 선천성 심장병 그리고 언어장애 등 희귀병에 걸려 있음이 확인됐다. 환경오염 문제가 붉어지면서 클락 개발공사 역시 우물과 지하수 수질 검사와 토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 결과 폴리염화비페닐 등이 검출됐으며, 14개 지역이 폐쇄되거나 개발이 보류된 상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치료와 배상은 물론이고 환경오염지역에 대한 복구 정화작업 역시 시행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미군이 철수한 클락 캅콤에 많은 재원을 들여 엑스포공원을 건설했다. 하지만 부서진 미군 건물 등에서 끝없이 날리고 있는 석면 등의 화학물질과 토양에 스며든 오염물질의 악취 등으로 인해 엑스포 공원은 개장 후 바로 문을 닫았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도 몇 명의 아이들이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 우물은 99년 필리핀 정부가 사용금지 명령을 내린 곳이다.


여전히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오염된 땅에서 밭을 갈고 농작물을 키우고 있다. 바로 인근에는 대규모 한국 농산물 작물 단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야채와 과일 등은 필리핀 각처의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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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quot;

[아시아 민중의 인권현장]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위해 사용해달라"
인도네시아의 또 하나의 식민지, 웨스트 파푸아의 외침
 
"내용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청중 중 한명이 도나(Donna, 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의 활동가)에게 발제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저기서 격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영어를 잘못해서 혹시라도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는 도나의 떨리는 목소리 위로 2005년 웨스트 파푸아(WEST PAPUA)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과 여성들의 삶의 흔적이 드리워졌다.

회의가 열리고 있는 장면. 왼쪽에 걸려있는 것이 웨스트 파푸아의 기 ‘모닝 스타’다.


참혹한 땅 웨스트 파푸아, 인도네시아 자국 군에 살인과 협박 면허 부여

우리에겐 그저 파푸아 뉴기니(PAPUA NEW GUINEA) 정도로 알려져 있는, 지도에서조차 그 국명을 잃어버리고 인도네시아 령으로 표기된 웨스트 파푸아는 19세기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거쳐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 땅이다.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고 40년에 걸친 독립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5번째 국제회의가 2005년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대학교(Universty of Phillippines, UP대학)에서 열렸다. 아시아와 태평양 인근 국가 등 과거 식민상태를 경험했거나 이 국가들의 독립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는 15개국(동티모르, 아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영국, 아이슬란드 등)에서 40여명의 인권 활동가들이 참석한 이 국제회의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필리핀 정부와 필리핀 대학교 등에 압력을 가해오면서 4일 내내 팽팽한 긴장과 보안 속에서 치러졌다.

국제회의는 15개국에서 4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국제 연대는 작은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정' 속에서 시작됐다. 웨스트 파푸아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필리핀으로 날아온 베니(Benny)는 "인도네시아는 대규모의 이주정책과 발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웨스트 파푸아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으며 웨스트 파푸아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책들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인도네시아 군과 경찰은 파푸아인에 대한 살인과 협박, 납치 면허를 가진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고 웨스트 파푸아의 상황을 설명했다. 도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과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소개했다. 도나는 "보건의료와 법, 경제적, 사회적인 면 등 모든 일상에서 위기가 발생하며 최근 몇 년 사이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매해 1600여명 이상의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의료서비스가 부족해 죽어가고 있으며, 아이들은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또한 일상적인 강간과 납치 등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며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했다.


논쟁보다는 '실천'에 무게 둔 국제회의

두개의 기조발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곧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몇 시간에 걸쳐 쏟아져 나왔다. 장시간에 걸친 회의였음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뜨지 않는 진중함 속에서 참석자들은 논쟁보다는 구체적 실천을, 거대한 계획보다는 가능하고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논의했다. 이것은 동티모로의 독립 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동티모르를 위한 아시아태평양 연대회의(Asia-Pacific Conference for East Timor, APCET)'의 결성과 활동을 통해 그들이 터득한 '운동의 지혜'였다. 또한 현재 식민지 상태 혹은 수탈을 겪고 있는 민중이나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왔던 활동을 토양으로 한 '고민'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진지했다. 참석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제안했다.


3일간의 회의를 통해 참석자들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인근 국가들의 인권침해에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아시아태평양연대회의(Asia Pacific Solidarity of Coalition, APSOC) 결성을 결의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를 위한 국제연대 준비위원회(Steering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Meeting on West Papua)'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캠페인의 시작을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과 현재 웨스트 파푸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를 근절하는 것이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참석자들은 웨스트 파푸아를 점령하고 살해와 고문, 강간 등 참혹한 인권침해를 일삼고 있는 인도네시아 군의 전원 철수를 주장했다. 또한 웨스트 파푸아의 정치적 수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국가와 집에서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웨스트 파푸아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강력한 지원과 국제적 법률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참석자들의 목소리다. 참석자들은 12월 1일을 '웨스트 파푸아 국제연대의 날'로 정하고 앞으로 인도네시아의 인권침해 사례와 증거 수집, 교육자료 편찬, 이슬람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로비 및 연대 활동 등을 강화해나갈 것이다.


결연한 고백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63년 인도네시아의 점령이래 인구의 10%가 살해되고 매일마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의 현실을 다시금 인지하고 참석자들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금 핍박받는 땅, 웨스트 파푸아로 돌아가야 하는 베니와 도나에 대한 걱정은 참석자들 모두에게 묵직한 무게였다. 이미 자카르타 공항에서 인도네시아 공안경찰이 혐의를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베니가 조만간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다행히 베니와 도나는 아직까지는 건재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웨스트 파푸아의 미래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그런 나를 바꾸었고,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매우 큰 힘을 받았습니다. 회의 결정에 따라 나는 모든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세계의 무관심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수탈의 역사를 살고 있는 웨스트 파푸아는 말한다.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데 사용해달라(Please use your freedom to promote ours)"고. 또한 한국 사회가 무엇을 했으면 좋겠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한다. "그것은 오직 당신(한국민중)만이 알며,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하라고(Only you know. Please now do what you can 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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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quot;

[인터뷰]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겐 독립"
도나(웨스타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 활동가)
 
도나-위험하다는 것은 알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는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 안전을 위해 얼굴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제5차 국제회의가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두명의 웨스트 파푸아 활동가들이 참석해 웨스트 파푸아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다. 그 가운데 한 명인 도나를 인터뷰했다.

도나는 파란색이 좋다고 했다. 그 색이 자신에겐 '희망'을 상징한다며.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는 도나는 그저 자신을 평범한 '웨스트 파푸아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 소개했다.


◎ 당신이 하는 일과 당신의 조직을 설명해달라

나는 웨스트 파푸아 여성과 아동의 권리증진을 위한 연합(Association for the Empowerment of Papuan Women and Children)의 활동가다.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일하며 특히 독립을 위해 일한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여성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웨스트 파푸아인으로서의 '자기결정권'을 갖기 위한 교육의 시행을 주장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나는 내 나라가 독립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피해갈 수만은 없다.

◎ 지금 웨스트 파푸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성과 아이들이며, 그들이 적절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권리를 갖는 것이다. 또한 자기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파푸아인이 계속해서 사라져가고 있다(파푸아인의 인구증가율은 0.3∼1.5%에 불과하며, 인도네시아에 의한 학살과 대규모 이주정책으로 인해 파푸아인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만약 여성과 아이들을 계속 잃는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들을 찾을 수 없다.

◎ 당신에게 있어서 독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립을 한다고 해도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여성과 아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우리가 자유롭게 모든 분야에서 일할 수 있다면, 좋은 건강을 가질 수 있고, 마음 놓고 정원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겐 독립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여성과 아동의 문제도 풀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웨스트 파푸아 문제와 관련해 한국사회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는가?

이미 발제 때도 언급했다. 제발 당신의 자유를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데 사용해달라고. 파푸아의 상황과 문제에 대해 고민해라. 그리고 한국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해라.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한국 사회만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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