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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인 사람들 “개새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잘못 들은 것임에 틀림없다며 다시금 물었다. 보다 또렷한 음성이 귀에 와 닿는다. 분명 “개새끼”였다. 한국 공장에 다닌다는 리아와의 첫 만남에서 머쓱함을 피하기 위해 아는 한국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지거리였다. 마사에게 각인된 말도 다르지 않다. 마사는 “야, 임마”라는 성난 소리를 가장 자주 듣는다고 했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모르지 않으면서 그래도 남의 집 안방까지 가서 그리 험한 짓 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마닐라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까비테에 닿자마자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필리핀 내 4개의 수출자유구역 중 가장 크다는 까비테에 자리 잡은 250여개 공장 중 해외기업의 30~50%는 한국기업. 다른 기업들이 그러하듯 한국기업들 역시 수출자유구역이 주는 장기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값싼 노동력을 찾아 이곳에 왔다. 공장들이 문을 열자마자 가족부양과 가난의 무게를 진 필리핀 노동자들이 앞 다투어 줄을 섰다. 리아와 마사 역시 5년 전, 여고생 교복을 벗자마자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해외진출 한국기업들 횡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일해요. 주문량이 밀리면 토요일은 물론이고 밤을 새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하지만 할당량제라서 초과 근로 수당이나 야근수당은 거의 없어요. 연일 야근이 계속되면 몸이 못 견디는데 맨 처음에는 겁 없이 ‘하루 쉬겠다’는 말도 했었죠. 어떻게 됐느냐고요? 한국인 관리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쉬어도 된다고 하기에 쉬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필리핀 상사가 불러서 해고됐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있은 후론 아파도 쉬고 싶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 혹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고된 사람들이 있기에 2살 된 딸의 엄마이면서도 싱글이라 속이고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리아. 그는 매일 녹초가 된 몸으로 공장에 충성을 바치고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채 못 미치는 월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라도 일할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예고도 없이 폐업을 하거나 “경기가 안 좋다”며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는 공장이 많기에, 그 알량한 월급조차 체불돼 제때 받지 못하는 노동자도 많기에. 거기에 6개월 이상 일한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도록 한 필리핀 노동법 망을 피하기 위해 기업들이 5개월 이상의 계약을 하지 않다보니, 다음달부터는 꼼짝없는 실업자 신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화장실에 머무르는 시간까지 체크해요. 관리자들의 대부분이 남성이다보니 생리라도 하는 날엔 얼마나 끔찍한지….” 마사가 몸서리를 친다. ‘한국인’임이 창피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희롱도 건너 뛸 수 없는 화두다. 툭툭 몸을 건드리거나 슬쩍 껴안는 것은 예사고 어떤 관리자들은 공공연히 성적 요구를 해오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해고시키겠다고 협박을 해온단다. 공단 내 일본, 대만 등의 기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만 한국기업처럼 성희롱이나 욕설이 일상화된 공장은 없다는 게 노동단체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필리핀 노동자들이 한국 공장을 가장 ‘나쁜’ 일터 중 하나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현지서 가장 나쁜 일터로 꼽혀- 넌지시 노조를 만들거나 싸움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떠본다. 한숨 섞인 답변이 되돌아온다. “일곱 식구가 저만 쳐다보고 있어요. 한번 눈 밖에 나면 지금 다니는 공장은 물론이고 다른 공장에 취직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당신이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꿈이라곤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전부라는 사람들. 너무나 소박하지만 돈에 눈먼 한국 기업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투자자 유치’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자국 정부의 방관 속에서 한없이 아득해진 그네들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필리핀 까비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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