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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퍼온 글>

 

17년 동안 되풀이 되는 동생 만나기


박래군(유가족,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봄날의 끝자락이다. 어느새 녹음은 짙어지고, 산마다에는 흰색의 아카시아 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곧 뻐꾸기가 우는 초여름이 될 것이다.

1년 중 나는 이 기간을 가장 침울하게 보낸다. 나와 동생에게 5월은 계절의 여왕이 아니었다. 광주학살 원흉 처단 투쟁을 매년 벌여야 했던 투쟁의 계절이었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경찰에 맞서고 쫒기면서도 뜨겁게 외치고, 거리를 내달려야 했던 그런 계절이 5월이었다.

우리 형제에게 5월은 투쟁을 요구했고, 우리 형제는 그 투쟁을 외면하지 않았다. 1986년 5월말에 난 감옥을 가야 했고, 1988년 6월초에 동생은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나의 아름다웠던 투쟁의 계절은 거기서 끝이 났다. 노동운동에 대한 꿈도 접고, 나는 유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그 길에서 발견한 인권운동의 길을 가고 있다. 동생의 뜻이 몇 사람의 분신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도 오늘도 난 동생과 약속한 이 길을 가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해방의 세상을 만들자는 그 약속을 안고 벌써 17년째를 살아내고 있다.

내게 동생은 나이 어린 동생만이 아니었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독재의 시기에 함께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던 동지였다. 그런 동지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처음 동생이 죽었을 때 환청과 환시에 시달렸던 나날이 있었다. 늘상 난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대화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그가 죽었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여느 유가족들처럼 아무에게나 보일 수 없는 가슴 속 비밀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가는 술에 취해 동생과 자취하던 집을 찾아가고, 그 앞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깨고는 했던 날들이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를 추억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17년이 지난 오늘에도 스물여섯의 청년으로만 기억된다. 과도한 책임감으로 민중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가장 문학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살았더라면 더 풍부해진 세상과 삶에 대한 인식으로 열정적인 시를 쓰고 있을까?

오늘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산산이 부서져 보수정치인들의 득세에 이용되고 있고, 소득수준은 높아졌다고 해도 오히려 빈곤층은 증대한다. 진보운동은 분열하고, 약화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형식과 절차만 발전할 뿐, 이전의 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해 민주주의는 오히려 질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광풍은 이미 우리 사회의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으며, 한반도에는 전쟁의 위기가 쉴 새 없이 밀려든다. 그가 죽던 그날보다 세상은 그래도 나아졌다고 위안해야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감추어진 우리 시대의 추악함 앞에 난 다시 절망한다.


올해도 다시 난 그의 무덤 앞에 설 것이다. 그의 유작시인 ‘동화’가 적힌 묘비가 있는 그 무덤 앞에서 그래도 꺾을 수 없는 새 세상에 대한 의지를 되살려내야 한다. 그렇게 결심하고, 그 결심으로 1년을 살고, 지나온 세월처럼 다시 무덤 앞에 서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가장 행복하게 동생이자 동지였던 래전이와 만난다. 작은 인간의 아들이고자 했던 그의 염원, 그리고 열사들의 염원을 다시 확인한다. 죽은 자를 욕되게 하지 마라, 그의 뜻을 받아 열심히 살아가자 그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형제는 이어지고, 동지는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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