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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0

 

{서설 §30 번역에 앞서서: 서설 §29에서 이야기 된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은 서론에서 문제되었던 회의주의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회의주의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저 관조하겠다고 하는 정신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회의주의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회의주의에 나타나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으로 구별되지 않는 끝없는 과거형이다. 이런 회의주의에 시간성을 적용하는 것은 학문(정신=헤겔)이 하는 것이지 회의주의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헤겔은 서론에서 자인한다. 앞 문단 마지막 문장에서 전환하기만(의식의 형태를 불어넣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Fürsichsein>의 시간성과 연계하여 보면 서론에서 제기된 문제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의식(Für-Sich)이란 의식하는 한 <지금>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현재성>을 갖는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회의주의를 어떻게든지 현재에 갖다 놓겠다는 것과 같다.

문제는 전환되었다고 해서 과연 의식이 정신의 곁으로 한발 다가 갔는가란 문제다. 서설 §30 첫 문장에 나오는 표현 을 어떻게 번역하냐에 따라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질 수 있겠다. 에 스며있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강제로 취하다> <그대로 영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가 있겠다. 은 희랍어 나누다, 할당하다, 분배하다; 목장으로 할당하다, 방목하다>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의 명사형이 인데, 어디에 악센트를 두냐에 따라서 목장>이란 의미와 >이란 의미가 있다. 독어에서는 로 명사화 되었다. 전자는 <강제로 취하다>라는 의미가 있고, 후자는 귀를 기울여 듣다>, nunft/이성>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방을 강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행위다.

정신과 형식으로 전환하는 의 운동을 손님을 대하는 자세와 비교하여 살펴볼 수가 있겠다. 손님을 <나의 다른 모습>으로 생각하고 대접할 수가 있겠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 취하는 자세다. 그런데 손님이 주인(정신) 집에 머무를 때 주인을 과연 <나의 다른 모습>으로 생각할까? <어둠이 깔리기 전에 어둠과 이미 인사를 나눈>[1] 손님이 정신의 집에 숙박과 식사를 구하려 들른다. 정신이야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서 손님이 <나의 다른 모습>이라고 알아볼 수가 있겠다. 관련 한스-디터 바르(Hans-Dieter Bahr)는 손님에게 이름은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얼 원하는가 물어보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한 문화도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손님이 주인의 현재시간(presence)으로, 주인의 코앞에 있는 것으로 재현(re-presentation)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 또 그래서는 안됨을 느낀 결과라고 한다.[2]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서설 §30 번역에 착수하겠다.}  

     

(§30) 이와 같이 <기억 속에 잠겨있는 개념> <자기의식의 형식>으로 전환하는 운동을 여기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3]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많지만] 다할 필요는 없다. [특히 힘든 일인] 실존자를 지양하는[4] 운동에는 우리의 노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5] 그러나 [우리가 올라와 있는 경지에서 볼 때] 보다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뜯어고쳐야[6] 하는 나머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기의식의] 형식을 접해보고 나서 그에 대한 표상을 갖고, 그럼으로써  [자기의식의] 형식을 모두 다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자.] 정신의 실체로 환원한 실존자는[7] 위와 같은 최초의 부정을 통해서[8] [자기의식을 모두 다 아는 경지에 올라왔다고 자신하지만 사실 그가 올라온 경지는] 이제 겨우 <자기>라는 [정신의] 터전에 옮겨졌다는 것 외 아무것도 내 놀 수가 없는[9] 상태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란 터전에 이전함으로써 스스로 취득한] 그의 재산이 되는 것은 실존자에서와 같이 [아직] 그것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직접성과[10] [가치가 살아있는 노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어디에나 갖다 될 수 있는 부동의 [절대적인] [11] 성질을 갖는다. 위와 같은 식이라면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는 겨우 [Fürsichsein] 표상으로[12] 이전된 것일 뿐이다. —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환원한] 실존자가 겨우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확인된[13] 것으로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이[14] 더 이상 취급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Fürsichsein의 형식으로 현존하는] 정신은 그것을 더 이상 다루지도 않고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실존자를 이렇게 처분하는 활동이 단지 [덜 떨어진] 특별한, 자신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Fürsichsein으로서의] 정신이 하는 운동이라면, 지는 이와 반대로 특별한 정신의 표상에 대립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표상으로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접해본 것이라고[15] 장담하는 [덜 떨어진] [rsichsein]에 대립하는 것이다. 지는 이렇게 보편자로서의 자기가 활동하는 것으로서, [이런 보편성이] 바로 사유가 애써[16] 지향하는 것이다.



[1] Paul Celan의 시집 문턱에서 문턱으로>에 실려있는 시 <손님/der Gast>의 처음 두줄.

[2] Hans-Dieter Bahr, Die Sprache des Gastes, Eine Metaethik, 1994, 19쪽 참조.

[3] 원문

[4] 원문 . <줍다>라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여 <보관하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리다>, <폐지하다>란 세가지 의미가 있다. 변증법적인 운동이 이 세가지를 담보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5] 이 이미 운동을 했기 때문에. 지양하는> 운동의 주체가 실존자/Dasein이다. 에서의 2격은 주어격 2격이다 (genitivus subjectivus).

[6] 원문

[7] 원문

[8] ürsichsein>의 형식으로 전환함으로써

[9] 원문

[10] 원문

[11] 원문 ültigkeit>

[12] 원문

[13] 원문

[14] 원문

[15] 원문

[16]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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