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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작불님의 [장애를 가지다? 장애가 있다? ] 에 관련된 글.

나에게 장애인이란 표현은, 그것을 변형시켜 장애가 있는 사람 아니면 장애를 가지 사람이라고 고쳐 써도 생소하다. 아니 생소하다기 보다는 얼른 목구멍, 혓바닥, 그리고 입술을 넘어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시골고향에서 사람들이 장애인이란 낱말을 쓰지 않아서 귀에도 생소하다.

 

소꼴을 베었던 논둑과 함께 미꾸라지 붕어를 잡고 놀던 개울도 어디론가 사라진 정리된 들판을 걷고 있었다. 저만치서 낫 익은 아저씨가 온다.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는데, 얼굴은 그때 그대로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왔어요.> <, 그래, 00이 왔구나.> 초등학교 다닐 때 고향을 떠난 후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데 아저씨는 날 어제 헤어진 사람같이 금방 알아본다. 수많은 날들과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야 셀 수 있는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날 금방 알아본다. 아저씨는 눈이 먼 봉사다. 눈이 멀쩡한 사람도 날 금방 못 알아봐서 좀 그랬는데, 눈 먼 아저씨가 이렇게 날 금방 알아봐주니 이제야 <고향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 언제부터 이런 말이 쓰여지기 시작했는가?

 

장애역사(Disability History)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사람을 특정한 신체적, 심리적, 그리고 정신적 특징에 기반하여 <장애>, 그리고 <정상>이란 범주를 적용하여 구별하였는지 연구한다. 이런 접근은 <장애>라는 범주를 적용하는 것과 [항상] 연계되어 있는 권리침해, 차별대우, 그리고 제외를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물적 역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차단의 결과물로, 그리고 문화적 가치, 기대, 그리고 사회적 행위(practique)의 생산물로 이해한다. 이에 따르면 <장애> 혹은 <정상>은 개인에게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체제 안에서 <장애><정상>의 상호종속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학문적-정치적 담론에서, [노동력을 관리하는] 관료주의적 기구 안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범주다.” 이런 맥락에서 19세기 말 생리학에 기반한 의학이 마련한 바탕에서 진행된 장애담론에서 “[인간의 기계적] 성능과 생산성이 결정적인 사회적 가치기준으로 형성되었다”. (Elsbeth Bösl, Die Geschichte der Behindertenpolitik in der Bundesrepublik aus Sicht der Disability History.  in: Aus Politik und Zeitgeschichte, 독일연방정치교육센터, 201023 참조)

 

무슨 말인가?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 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합리화>란 이름아래 몸과 마음을 기계적인 작동체계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안을 제시한다.

 

노동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분리한 자본은 우선 육체노동을 완벽하게 빨아먹기 위해서 몸의 동작을 스톱워치를 가지고 분석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차대전을 전후로 해서 독일에서 개발된 <정신공학/Psychotechnik>을 한번 살펴보자.

 

<정신공학>이 발전하게 된 배경은 일차대전 후 노동력이 절대로 부족한 상황에서 상이군인을 노동전선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관련 진행된 연구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신체분석, 출처: Staatliche Kunsthalle Berlin und Neue Gesellschaft fuer bildende Kunst의 1984년 전시회 "합리화" 82쪽)

 

 

(좌계표로 줄질하는  동작분석. 출처: 같은 책 83쪽)

 

(팔이 잘린 상이군인. 출처: 같은 책 85쪽)

 

 

("정상"인과 "팔없는 사람"이 줄질하는데 소요하는 시간. 초로 계산되어 있음. 출처: 같은 책 88쪽)

 [놈들은 이렇게 "살아있는 노동력"을 빨아먹기 위해서 면밀하게 분석한다. 다 빨아먹은 몸뚱이는 폐기처분하는 경향이고, 이제 정신노동이란 것을 집중적으로 빨아먹기 위해서 갖은 분석을 다하는데 이번에도 놓치면 안 되겠다.]

 

(Heinrich Hoerle, Denkmal der unbekannten Prothesen/무명의 인간장구 기념. 같은 책 76쪽)

 

(Heinrich Hoerle, 공장노동자 1922. 출처: 같은 책 91쪽)

[자본이 몸을 어떻게 보는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애담론"은 자본주의에서 진행되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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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2

 

(§32)[1] 표상을[2] 분석하는 일은 [인식론의 시초자 데카르트가][3] 본격적으로 했던[4] 일인데, 그가 그런 분석을 통하여 지향했던 것은 이미 그때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표상의 형식, [뭔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그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형식을 걷어치워 없애버리는[5] 일이었다[6]. 어떤 표상을 그 근원적인[7] 요소로[8] 분해하는 일이란 표상 안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 그 표상을 지탱하는 축을[9]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최소한 갖춰야만 했던 것은 어디에서인가 주워온[10] 것들과 같이 표상된 것의 내용에 속하고[11] 표상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축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근성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형식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12] 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런 자기가 표상을 지탱하는 축이 되었고, 이 축은 또 자기가 소유하는 재산의 전반이 되었다.[13]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분석은 [아쉽게도] 다시 단지 알려져 있고, 고정되어 있고, 자족하는[14] 규정뿐인 사상으로 [15]이어졌지만, 하지만 이 분석이 [인식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는데][16] 그 핵심은 이와 같이 [현실계의 다른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거기서 분리되어 나와[17] [존재의 자기근거를 갖는] 저승세계에서 그림자로 존재하는 혼과 같은 자기라는 것이다.[18] 왜냐하면, 구체적인 <>[19]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찢어내어 자신에서 벗어난[20] 현실 저편의 것이 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찢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오성이 발휘하는 힘이고[21] [끊임없이] 진행하는 작업이다. 오성은 이렇게 경이롭기 그지없고 더없이 위대한, 아니 절대적인 강제력이다[22]. 실체로서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아 그 요소들이 그 실체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고 모든 요소들이 결집된 상태로 자존하는 원은 이런 경이로운 관계를 자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원은 그를 벗어나려고 하는 [둘레의] 점 하나하나를 다[23] 유지하는 실체로서 바로 알아볼[24]수 있는 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원의 둘레에서 벗어난 일개의 점이 홀로 존재하는 것 마냥, 어쩌다 뚝 떨어진 것이[25], 다시 말해서 [사유 주체로서의 자기가 반듯이 사유에 묶여있듯이] 다른 것에 꽉 묶여있고 다른 것에 기생하여야만[26] 비로서 실재성을 갖는 것이[27] 독자적인 존재와[28] 아무런 구속이 없는[29] 자유를 획득하게 해준다는 데에 부정의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사유, 즉 순수자아의[30] 에너지다. 앞에서 말한 현실 저편의 것을 죽음이라고 하면,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고, 이렇게 두려운 것을 확실히 부둥켜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하는 것인바 부정의 힘보다 더 위대한 힘은 없다. 힘없는 아름다움은 오성을 미워한다. 그 이유는 오성이 힘없는 아름다움이 감당할 수 없는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의 삶이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모든 폐허와 겁탈로부터 자신을 지켜 자신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는 삶이다. 정신이란 어찌해도 다시는 본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까지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 즉 절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자기를 찾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31] 차지하게 된다. 부정된 것에서는 눈길을 떼는 긍정으로서의 정신이 이 같은 강제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대할 때 흔히 그러하듯,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함으로써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고 거기를 떠나 다른 무언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정된 것에[32] 눈길을 고정하고 들여다볼 때, 다시 말해서 그 곁에 하염없이 머물러[33] 있을 때 정신은 비로소 위와 같은 강제력이 된다. 이와 같은 하염없는 머무름이[34] 사지로 부정된 것을 다시 존재의 터전으로 돌아오게 하는 마력이다.[35] 이 마력이 앞서 [그림자 같은] 주체라고 일컬었던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자기의 터전에서 [부정된 것들이] 규정성을 갖는 내용으로[36] 존재하게 하는 가운데 자기의 추상적인 직접성, 다시 말해서 자기란 것을 찍어 올려 보여 줄 수 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덜 떨어진 직접성을[37] 지양하고 참다운 실체가 된다. 바로 이런 실체가 존재의 터전이 되는데, 이때 존재는 매개운동을 외부에 두는 직접성이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된 매개운동을 스스로 하는 직접성이다.



[1] 이 문단은 진보넷 블로거 행인님의 <다시, 당을 희망하며>라는 글과 토론(blog.jinbo.net/hi/?pid=1293)에서 받은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한 것이다.

[2] 원문 . 이 개념을 한번 쭉 훑어 보았으면 한다.

[3] 원문 . <예전에>. 물론 데카르트의 <첫째 철학(=형이상학)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고 있다.

[4] 원문

[5] 원문 . 걷어치워 보관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6] 데카르트가 한 이 일은 단지 <성찰>뿐이었다. 진보는 이런 <걷어치워 없애버리는 작업>을 실천적으로 한다.

[7] 원문 ünglich>

[8] 원문

[9] 원문 . 역자가 이해한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의 내용에 기대어 흔히 <계기>로 번역되는 를 여기선 <지탱하는 축>으로 번역해 보았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지탱은 축은 였다.

[10] 원문

[11] 을 사용할 때 보통 <표상된 내용> <표상 자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12] 원문

[13]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된 것을 생각하면서 생각한다.> 아니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생각 주체가 하는 행위와 생각을 구분하는 것이다.

[14] 원문 . <움직이지 않는>

[15] <첫째 철학에 대한 성찰>이 분석한 3대 요소, cogito(사유 주체의 행위), res cogitans(사유 주체의 실체), 그리고 res extensa(사유 대상)를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사유 주체인 cogito [변증법적] 운동이 없는 자족하는 행위가 되었다. 

[16] 원문

[17] 원문

[18] 원문

[19] 원문 . 한번 쭉 훑어봐야 할 개념인데 우선 을 라틴어로 번역한 을 다시 독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질과 형식이 혼합된>이란 의미로 쓰여진다고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20] 원문 . 보편자가 되려면 자신의 터전[고향]을 떠나는 것과 함께 자기자신과 작별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마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아닌가 한다.

[21] 원문

[22] 원문 . 베버

[23] 원문 . 여기서는 원의 역학을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24] 원문

[25] 원문 . <우연적인 것>인데 라틴 원어 를 참작하여 번역하였다. <어디에 불현듯 자빠져 떨어지다>라는 기본의미에 <우연히 일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26] 원문

[27] 원문 Wirkliche>

[28] 원문

[29] 원문

[30] 사유행위 주체인 . 달리 표현하면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conscientia). 사유행위를 동반하는 그 무엇으로 <양심>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31] 원문

[32] 원문 . 아도르노의 가 울리는 개념이다. <동일>, 즉 논리의 올가미에 묶이지 않는 것으로서 서양철학이 배제한 것. §19 역자주 1, 2 참조.

[33] 원문

[34] 원문

[35] 벤야민이 말한 <햇빛을 향하는> 만물의 성질도 생각나는 대목이다.

[36] 원문

[37] 원문 überhaupt seiende Unmittelbar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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