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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6, 57, 58 첫 문장

§56) 이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자신의 개념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하는 것의 속성이[1]바로 논리적 필연성이 성립되는 근거다.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이 이성적인 것이며, 유기적인 총체를 그 마디마디의 리듬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논리적 필연성은 내용[자체가] 개념과 본질이 된다는 것과 더불어 그런 내용이 지가 된다는 것이다. — 한마디로, 오로지 이 논리적 필연성만이[전체를 꿰뚫어 보는] 사변적인[2]것이다. — 구체적인 형태는 자신을 스스로 움직이는 가운데 자신을 단순한 규정성[3]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논리적 형식으로 승화하여 본질성만 갖춘 것으로 존재한다. 구체적인 형태의 구체적인 현존재는 오로지 이런 운동이며 바로[4]논리적인 현존재가[5]된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에 밖으로부터 형식주의의 형식을 덮어 씌울 필요가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거기에 애당초부터 스며있는[6]형식주의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이 형식주의는 외피적인 형식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형식이란 구체적인 내용이 자기 터전에서 거기에 어울리게 생성되어 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57) 이 같이 한편으로는 내용과 분리될 수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자신을 분절하여] 리듬을[7]규정해야 하는 학문적 방법의 속성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은, 위에서 상기한  바와 같이, 사변적 철학에서 이루어진다. — 지금 이야기된 것은 학문적 방법의[껍데기]개념은[8]표현하고 있지만, 지금상황에서는 뒤에 가서 완성되는 것을 앞당겨 단언하는 것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런 단언의 진부를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이야기식으로 역어진 개요를 가지고 따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그것은 그렇지 않고 그와 반대로 이렇다>라고 단언하는 식으로, 상투적인 관념들을 확드러나고 모두에게 알려진 진리인양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나열하는 식으로, 아니면 신적인 내적 직관만 꿰뚫어 볼 수 있는[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있는] 성스러운 갑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양 보란 듯이 내놓고 단언하는 식으로 [여기서는 단언일 수 밖에 없는 학문적 방법에 대한] 단언에 대한 반론을 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뭔가 모르는 것을 대하는 지의 첫 반응을 보면, 살펴본 바와 같이 의례 우선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여 자신의 자유와 통찰력, 다시 말하면 외부의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위를 사수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지가 여기서 대하는 것은 처음엔 외부 권위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반항의 또 다른 목적은[직관이라고 내놓은 것이 구구절절 습득한 것임을, 영특한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멍청해서] 애써 습득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는데 있다. 이와 같은 작태는 정치극장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박수갈채로 받아들이는[자기의 무식이 뽀록날까봐/아니면 숙청될까봐 무서워 같이 박수치는] 행위와 똑 같은 유의 반응인데, 여기서 직관은 극단적인 혁명적 언사, 그리고 행동과 같은 것이다.[9]

 

§58) 그래서 학문에는[위와 같은 작태를 멀리하고] 개념의 힘겨움/노동[10]을 마다하지 않고 몸소 떠맡는 일 없이는 열중할[11]수 없다.



[1]원문<In dieser Natur dessen, was ist, in seinem Sein sein Begriff zu sein>. 뭔 말인가? 이 문장 구조가 왠지 하이데거가<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제기와 관련해서 현존재[여기서는 인간을 의미한다.]를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고, 그 근거로 제시한 „Diesem Seienden {dem Dasein} [geht es] in seinem Sein um dieses Sein selbst/현존재에게는 존재하는 가운데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에[무관심하지 않고] 그것을 움켜쥐려는 것이다“)라는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데거는 여기서<in seinem Sein>을<실존/Existenz>이라고 하고 현존재는 실존하는 가운데 이미 이런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현존재, 즉 인간은 존재론에서 이야기되는 것을 실존의 차원에서 행한다는 말이다. 참다운 자기 모습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이어 실존이란 현존재가 선택하든 그렇지 않든 현존재가 이미 그속에 빠져있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가능성 중 그 하나이며, 현존재가 존재하는 모습은 이렇게 실존으로서의 자기존재와 관계하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니면 그런 존재와 관계하지 않는 가운데 존재하든지 아무튼 양자택일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es selbst oder nicht es selbst zu sein“). (하이데거, Sein und Zeit, 12쪽 참조).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에 기대어 윗 문장을 살펴보면 „존재하는 것은(was ist) 존재하는 가운데(in seinem Sein)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고 번역될 수가 있겠다. 여기서 부정형 „zu sein“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자가 존재하는 가운데 자기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무슨 말인가?

[2]„사변적인 철학이란 모든 것이 이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의식에 담고 있는 것이다. 이념이란 사상 속에 있는 참다운 것으로서, 단지 직관이나 관념이 아니다. 사상속에 있는 참다운 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체적인 것이고, 그 자체가 대립을 빗고 둘로 갈라져 있지만, 이렇게 둘로 갈라진 것이 각기 갖는 양면이 사유규정이며, 이런 사유규정을 통일한 것을 이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사변적인 사유란 현실을[둘로] 해체하여 이런 차이들이 사유규정에 따라서 대립관계들을 빗게하고, 둘로 갈라진 것의 통일로서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Spekulative Philosophie ist das Bewusstsein der Idee, so dass alles als Idee aufgefasst wird; die Idee aber ist das Wahre in Gedanken, nicht als bloße Anschauung oder Vorstellung. Das Wahre in Gedanken ist näher dieses, dass es konkret sei, in sich entzweit gesetzt, und zwar so, dass die zwei Seiten des Entzweiten entgegengesetzte Denkbestimmungen sind, als deren Einheit die Idee gefasst werden muss. Spekulativ denken heißt ein Wirkliches auflösen und dieses in sich so entgegensetzen, dass die Unterschiede nach Denkbestimmungen entgegengesetzt sind und der Gegenstand als Einheit beider aufgefasst wird.“) (헤겔, 종교철학강의I, stw Bd. 16/20, 30쪽)

[3]원문<Bestimmtheit>

[4]원문<unmittelbar>

[5]온갖 사물도 실존하는 인간과 같이 존재론적이란 말인가?

[6]원문<an ihm selbst>

[7]서설 §26에서 언급된 헤라클리트가 말한<리듬과 절/metra>이란 의미로 번역했다.

[8]원문<Begriff>. <bloßer Begriff>이란 의미로 번역햇다.

[9][개념]논리학이 헷갈리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헤겔 자신이 수긍하는 것 같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는데, 그것은 두고봐야 할 일이고 여기선 단지 <대인논증/argumentum ad hominem>으로 너무 쉽게 넘어간다.

[10]원문<Anstrengung des Begriffs>. 소유격을 주격 소유격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성질을 표현하는 소유격으로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개념을 따라가는 것이 힘겨울 뿐만 아니라 개념이 스스로 힘겹게 운동한다는 것이고 노동과 개념[운동]은 성질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11]원문<studium>. <노력하다>라는 어원의 의미를 살려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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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 55

§55) [오성의 의미는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1]], 실체가 자기의식이라는 면에서는 그 의미가 이미 이야기되었다.[2] 여기서 이야기된 바로는 그 의미가 실체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면에서 밝혀진 것이다. — 현존재는[본]질, 즉[다른 것이 다 추상된] 자기동일적인 규정, 달리 표현하면[하나로] 규정된 단순성이며, 이렇게[사유의 산물인] 규정된 사상이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 안에 작용하는 오성의[힘]이다.[3] 그래서 아낙사고라스가 처음으로[우주와 현존재의] 본질을 규정할 때 그랬던 것처럼[본]질은 누스가[4]되는 것이다. 아낙사고라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에이도스 혹은 이데아라는[5]개념 등으로 현존재의 본질을[6]보다 더 명확하게 파악했는데, 이런개념들은 규정된 보편성으로서<종>개념이다[7]. 혹자는<종>이라는 표현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아름다운 것, 성스러운 것, 영원한 것 등등의 이념을 담기에는 너무나 비속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할 수야 있겠지만, 이런 이념은 실로 종개념 그 이상의, 그 이하도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 개념을 명확하게 하는 표현은 멸시하고 다른 표현을 선호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때 사용되는 표현은, 외래어이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아무튼 개념을 자욱한 안개 안에 두루뭉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럴수록 아직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표현들이다. — 현존재가 바로 종[개념]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현존재는 단순한 사상인 것이다. 이런 단순성으로서의 사상, 즉 누스가[현존재의] 실체다. 실체는 이런 단순성과 자기동일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자기동일성은[자기긍정못지않게] [자기]부정성이다.[8] 그리고 이 부정성으로 인하여 확고부동한 현존재는 자신이 해체되는 상태를 맞이한다. 현존재가 현존재가 되는 것은[제한된] 규정성으로서 그런데, 이런 규정성이 첫눈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또 이런 규정성의 운동은 알 수 없는 폭력이[외부에서] 가해진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사유와 현존재의] 규정성은[다른 현존재의 규정성과 관계하기 보다는] 애당초부터[인식되지 못한 상태로]  자기안에[9][자기의] 타자존재를 두기때문에[타자존재와 관계하는 운동이 자기와 관계하는] 자기운동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사유의 단순성에 바로 이런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유의 단순성이란 스스로 운동하고 자기 안에 차이가 나게 하는 사상임과 동시에 자기 고유의 내면성으로서 순수한 개념이다. 오성은 이렇게 분별하는 힘으로[10]생성되고 이런 생성으로서 정도를[11]아는[12]이성과 부합하는 것이 된다.



[1]이성과 함께 오성이란 개념의 형성과정을 보면 두 갈래의 의미로 생성되었다. 하나는 감각적 지각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인식능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와 함께 그 안에 존재하는 것에 작용하는 원리 자체가 누스, 즉 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철학개념사 사전  Artikel „Verstand/Vernunft“ 참조).

[2]서설 §17 이하에서 다뤘다. 의식의 운동, 즉 정신현상학의 주제다. 그럼 오성과 함께 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개념]논리학인가? 의식의 운동은 이해가 가는데, 오성/이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에서 다룬 것은 헷갈린다. 뭔가 신비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이유의 근간에는 우주에 작용하는 원리가 이성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심정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누가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고, 칸트가 이야기한<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e> 이상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그렇다치고 우주의 원리가 이성적이라면 어떤 식이든지 목적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스피노자의 목적론 비판 이후 어떤 목적론이 가능할까? 아무튼 앞에서<인식론>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존재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 언어분석철학 입장에서 보면 둘 다 같은 것이고 부족한 것이지만 – 여기서 이야기되는 ‚존재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고 뭔가 이상야릇한 이야기를 듣는 것같이 힘들게 만든다. 요즘에 들어선 사람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조차 수긍이 안가는 판인데, 연필이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여 뭔가를 스스로 쓰고 지운다고 하면 광적인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원문<Verstand des Daseins>.이 소유격은 주격 소유격임과 동시에 목적격적 소유격이다. 그러나 오성을 실체가 존재하는 면서에서 규정하는 여기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겠다.

[4]원문<Nus>. <noein/인식하다>의 명사<noos> 혹은<nous>를 이야기하고 있다.<noema>도 역시<noein>에서 파생된 낱말로서<사상>을 의미한다.

[5]원문<Eidos oder Idea>.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Idea>를 플라톤이 이야기한<이데아론>과 연결시키고, <Eidos>는 플라톤의<이데아론>을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의<형상론>에서 이야기된<Eidos>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Eidos>와<idea>를 동일선상에 놓는<oder>가 이해안된다. 그리고 왜 순서를 지켜<Idea oder Eidos>라고 하지 않았을까? 플라톤의<이데아론>이 플라톤 자신이 만들어 논 것이 아니라 후세대가 만든 것이고, 플라톤은<이데아>와 관련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사용된<Eidos>는 플라톤이<이데아>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낱말에 속하는 것 같다.

[6]원문<Natur>

[7]원문<[Eidos oder  Idea, d.h.] bestimmte Allgemeinheit, Art>. <규정된 보편성, 즉 종>이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제시한<형상론>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플라톤은 최소한 두 가지 차원에서<이데아>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현상의 본질을 묻는<정의/Definition>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doxa/사견>과 <Episteme/“학문“)간의 관계를 다루는 차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고늘어지는 차원은 두번째 사견과 학문을 다루는 차원의 맥락에서 이야기된 개별자와 이데아간의 관계다. 플라톤에 따르면<Episteme>는 혼이 태어나기 전에 보았지만 몸으로 태어나면서 다 잊어버린 본질을 상기<Anamnesis>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기론>의 신비성은 제쳐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여기서 이야기된<이데아>는 칸트가 이야기한<선험적인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런 선험적인 것으로서<이데아>는 개별자의<참다운 존재근거/to aition to onti>가 되고 개별자는 이런 참다운 존재근거에<분유(分有)/Methexis>함으로써 존재한다고 한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비판한다. 플라톤이 정말 개별자와 이데아가 따로 논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가<개별자와 따로 노는 것/para ta kath’ hekasta choris>이라고 비판한다. 관련 아리스토텔레스는<질료/hyle/Materie>에 대립되는 개념으로<형상/Eidos/Form>을 도입하여 사물의 모든 성질은, 그것의 인식가능성, 규정성, 제한성을 포함하여<Eidos>의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하고, 바로 이<Eidos>가<개별자가 그런 개별자가 되게 하는 개별자에 속한/내재하는 본질/to ti en einai hekastou>이고<첫(!) 본질/he prote ousia>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따로 노는<이데아>가 본래적인 본질이 되는 첫째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hyle>와<eidos>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양대원칙이고 서로<떼어놀 수 없는 것/ou choriston>이라고 한다. <hyle>와<eidos>의 관계는<dynamis/가능태>와<energeia/실재태>와 비교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는<가능태>로서의<hyle>는  <유/gene>와 같은 것이고, <eidos>는 모든<차이/diaphorai>를 거쳐서 규정된 것이 된다. 즉 종차(differentia specifica)를 통한 종(Art)과 같은 것이다. 이런 종으로서<eidos>는 보편본질이 된다. (철학개념사사전4권55쪽 이하 참조). 근데 문제가 되는 것은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고 있는지 아니면 플라톤을 따르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플라톤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양자를 동선에 놓고 거론한다. 아니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따로 논다는 생각이 애당초 잘못된 생각인지, 다시 말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진정 말하는 것이 같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8]원문<Aber diese Sichselbstgleichheit ist ebenso Negativität>. 이것 정말 이해안된다. 이 부정의 힘이 어디서 온다는 것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보편적 본질로서의<eidos>, 즉<종>으로서의 본질보다는 개별자의 본질(to ti en einai)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는가 한다. 그리고 여기서 부정성이란 것을 뭔가 더 참다운 것이 있어서 덜 참다운 것을 부정하여 거기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건 플라톤이 이야기한<원본/paradeigma>을 따라가는<Methexis/분유>가 아닌가? 이것이 또 참다운<분유>의 의미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인 것과 이데아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이<Methexis>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부정은 뭔가 부족한 것의 부정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헷갈린다.

[9]원문<an ihr>

[10]원문<die Verständigkeit>

[11]<Maß>란 개념을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12]원문<die Vernünfti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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