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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마지막 수업

작은 녀석이 오늘 마지막 수업을 받는 날이다. 몇 주 동안 스스로 졸업시험준비를 하고 시험만 보면 지긋지긋한(?) 학교생활이 끝난다.

 

밤이면 짝지와 내 사이가 지 자리인양 우리 침대를 선점했던, 주먹만했던 녀석이 이젠 짝지가 한참 쳐다 올려다봐야 하는 청년이 되어 학교를 졸업한단다. 짝지는 벌써 야단이다. 다른 도시에 가면 어떻게 해, 이직해야겠다, 등치만 컸지 아무것도 모른다 등.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된다. 순진하기 짝이 없다. 팥으로 매주를 쓴다 해도 아직도 해맑은 눈으로 “정말 그래요?”한다.

 

학교 마지막 수업이 기억난다.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했던 라틴어 수업이었다. 베르길리우스의 목동들의 노래(bucolica)의 첫 번째 시였다. 전쟁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멜리뵈우스가 산에서 가축치고 농사짓고 사는 티튀루스를 보고 부러워하는 내용이다. 둘이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단지 마지막 단락에서 티튀루스가 멜리뵈우스에게 한 이야기는 왠지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쉬자. 아삭아삭 맛있는 사과도 있고, 부드러운 밤, 우유 치즈 다 충분히 있다. 멀리 보이는 농가에서 벌써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진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시골에서 하교하고 오후엔 산에 소를 몰고가 지키다가 초가집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땅거미가 짙어지면 다시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기억 때문에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이 기억에 남아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암튼, 그날 통학버스를 타고 바람에 너울거리는 밀밭을 보면서 이 시를 암송했던 기억이 난다.

 

평화. 라틴어 선생이 이 시를 의도적으로 골랐는지 모르겠다. 의도적이었다면 성공했다. 전쟁을 사유하면 반드시 이 시가 머리에 떠 오른다. 뭔가 절대적인 것으로. 평화 하면 내게 떠오르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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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21 김하영님의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단상

마르크스21 김하영님의 “리비아 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단상.

 

세세한 흐름까지 반영한 일목요연한 글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근데 마지막 문장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정한 진보 지지자라면 서방의 군사 개입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도 리비아를 포함한 아랍 전역에서 혁명이 확대·심화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한다.”

 

우선 서방의 군사 개입은 현실이다. 그 정당성을 논할 수야 있겠지만 반대의 문제는 아니다. 지상군 투입이라면 물론 아직 찬반이 가능하겠다.

 

두 가지 생각나는 점을 그냥 나열해 보겠다.

 

1. 서방의 개입으로 새로운 역관계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대한 분석이 없다. 이런 저런 담론을 떠나서, 즉 어떤 주권자나 주체나 집단이 하는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지에서 (벵가지, 미스라타) 등에서 어떤 역관계가 형성되었는지 궁금하다.

 

2. 서방 군사개입과 생과사의 문제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것 같다. 푸고는 <성과 진실>에서 군주의 권력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데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서방군사의 개입이 이상하게 이것과 겹친다. 단지 좀 다르게. 벵가지에 서방은 “죽게 내버려 두거나 살게 만들기 위해서” 개입했다는 것이다. 거절할 수 없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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