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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9/20
    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4
    ou_topia
  2. 2012/08/16
    의자놀이, 단상(4)
    ou_topia

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4

II.

 

루카치가 레닌에 기대어 상술했듯이, 계급의식은 경험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는 사변적인 성찰은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짜임/구성Verfassung에 대한 부족한 성찰이었다. 이런 부족한 성찰은 레닌주의적 의미에 묻혀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메트로폴리스에 적합하지 않은 계급의식의 단순화/환원을 야기한다. 첫 단계에서 자발적으로/즉흥적으로 [나타나고] 정신분석학적인 틀[언어]와 개별자로 제한된 해방논쟁의 침체는 대중의 가능한 욕구구조로의 접근과 전략적으로 실천적인 인식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첫 단계에 있어서 반(反)권위주의적 운동을 두드러지게 하는 사변적인 총체성의식은 역사맹아적인 추상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면 실천적으로 일하는 많은 그룹들의 직접성이데올로기가 그 의식상 역사적인 [투쟁, 운동 등등] 현상형식들을 결합하지 않은 소실(消失)[점]에 안주하고 경험적인 실천들의 다양성을 정치적인 실천이란 계급의식적인 통일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차원에 대한 성찰은, 아직도 종종 그러듯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어렴풋한 당사자 개입에 머무는 나쁜 의미로 윤리화하는 당사자개입토론들보다Verbindlichkeitsdiskussion 훨씬 더 조직적인 정체성 기준들을 매개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은 부분적으로 루카치가 부르주아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말한 경험적인 역사주의의 요소/계기에 붙들려 있다. “그들의 오류는 그들이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개별자(그것이 한 인간이든지, 계급이든지, 또는 인민이든지 간에)와 그의 경험적으로 주어진/확인되는 (그러니까 심리학적인 또는 대중심리학적인) 의식 안에서 그 구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사념하는데 있다. 그들이 가장 구체적인 것을 찾았다고 믿는 곳 바로 거기가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다. ... 그들은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완전히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루카치, 역사와 계급, 61쪽).


그러나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인 가능성의 카테고리와 이와 함께 계급의식의 논리적인 형성Bildung이 굳혀진다는konstituieren 루카치의 인식 자체가 이미 이상화하는 추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조직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식 다루기 역시 개별 프롤레타리아들의 경험적인 심리적인 의식 안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총체성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단지 사후적으로 총체성을 참조/전유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정들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투쟁경험, 이론들의 형성, 선전선동활동 등을 통해서 총체성카테고리들이 현실적으로 개별 프롤레타리아의 머리 안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가는지 어둠에 묻혀있다. 올바른 계급의식은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올바른 정당이란 형태로, 즉 모든 역사적인 형태규정성들로부터 초월적으로 들어 올려진 레닌주의적인 정당유형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총체성이란 카테고리는 헤겔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도, 경험적일뿐만 아니라 비경험적인 요소/계기에 [활짝] 열려있다. 상품이 마르크스에 따르면 감각적-초감각적 사물인 것처럼 그렇다. 총체성카테고리에서 경험을 제거함으로써 계급의식의 역사적인 생성에 대한 성찰이 잘려나갔다. 루카치의 경험개념 자체가 이미 과학주의적으로 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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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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