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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8/16
    의자놀이, 단상(4)
    ou_topia
  2. 2012/03/31
    레닌의 저서에는 유용한 것이 많다.
    ou_topia

의자놀이, 단상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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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저서에는 유용한 것이 많다.

공산주의자라고 자신을 밝히고 독일 정통보수일간 FAZ의 푀이통 부서에서 일하고 좌파적 입장에서 다양한 책을 쓰는 디트마르 다트(Dietmar Dath)와 독일 깡 보수 일간지 디벨트(Die Welt)와의 2008.8.28 인터뷰. 인터뷰 진행은 깡 신자유주의자 울프 포르샤르트(Ulf Porschardt), 주필 대리. 디트마르 다트를 까려고 인터뷰한 것 같은데 울프 포르샤트가 대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다.  깡 보수 일간지로 레닌이 선전된다? 이성의 간지?
 

 

원문은 여기


디벨트(이하 DW): 다트씨,  당신 저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 조차, 아니 어쩜 바로 그들이 당신을 타고난 머리로 어지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기분이 좋은가?


디트마르 다트(이하 DD):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기분이 잡친 것도 아니다. 어쩜 내 말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 먹혀들어갈 때까진, 늘 그러듯이, 아직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DW: 텍스트의 난해성(Unverständlichkeit)이 아직 좌파를 식별하는 특징인가?


DD: 숨김없는 글(Klartext)로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사람들이 주로 사전에 자신을 간추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까 놓고 말하는] 어려움이 전혀, 냉전시에 아직 그랬던 것처럼, 더이상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걱정없이] 편안하게 까놓고 말해도 된다. 다른 면은, 항상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주장이 익숙한 것에 거슬리는 항변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DW: 당신의 관심사는 – 느슨하게 표현하자면 – 광범위하게 늘어져 있고 밖에서 보기에 어쨌든 엉뚱하다. 헤비메탈, 좌익급진주의, 좀비와 포르노영화, 자연과학, SF 그리고 마약에 관심한다. 아직 사춘기에 묶여 헤어나오지 못하고 영원한 사춘기가 저항의 적합한 형식이라고 느끼는 것인가?


DD: 사춘기 땐 그와 같은 주제에 담긴 극을 치닫는 경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을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한다. 이와 달리 성인의 기쁨은 이해, 재결합, 그리고 극복의 기쁨이다. 나는 그런 기쁨에 기꺼이 내 자신을 내맡긴다.


DW: 다른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미래를 [공상하는/점치는] 공산주의 이념(die Idee eines futuristischen Kommunismus)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DD: „미래적인 공산주의/Futuristischer Kommunismus"란 아픈 사람에게 „미래적인 치유“를 약속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파괴된 것을 치우고 나면 시야가 터진다. 그런 상태에 도착하는 걸 원한다


DW: 그게 무슨 말인가?


DD: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은 항상 [오는] 훗날(Zukunft)에 있다. „미래적"이라는 형용사는 이런 사실을 꿈꾸는 것이라고 먹칠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점치는 것이 아니라] 관철되거나 아니면 관철되지 않는 것이다.


DW: 올 4월에 출판된 논박서에서 레닌을 재발견하라고 권유했다. 도발적인 발안인가?


DD: 맞다. 목이 바짝 마른 사람에게 „뭘 좀 마셔!“라고 제안하는 것과 같은 도발이다.


DW: 그게 의미하는 것은?


DD: „국가와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레닌의 다른 저서에는 소수의  고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유용한 것들이 많다.  그가 죽은지 오래됐지만, 그래서 그가 한 말들이 오래전에 다 맞는 말이 아니 되었지만, 그래도 뮌테페링[전 독일 사민당 당수], 버럭 오바마, 혹은 요쉬카 피셔[전 녹색당 거물/전 독일외무장관]  등이 한 말이나 하게 될 말을 다 털어서 비교해도 레닌의 말이 분명 더 유용하다.  


DW: 당신의 저서에서 그랬던 것처럼 렌닌의 시체산더미를 그냥 간과하고 지나가도 되는가?


DD: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장점을 설명하려면 프랑스 혁명시 얼마나 많은 농부들이 살해되었고, 현대 자유 의회주의의 바탕을 깐 사람들이 그들의 적들을 심지어 밀봉한 보트에 태워 강물에 침물시켰다는 이야기를 항상 반복해야 하는가?  혁명은 추잡스럽게 진행된다. 혁명이 일어나는 지역이 낙후하면 낙후할수록 야만적이면 야만적일수록 더 열악하다.  도덕적인 평가는 절대 역사적인 분석을 대체하지 못한다. 역사적인 분석은 [도덕과 같은] 비좁은 공간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


DW: 새로운 사람에 대한 당신의 동경은 좌파의 전형적인 토포스다. 그게 어느 정도 시사적인 것이라고 여기는가?


DD: 전혀 동경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인간을 만지작거리면서 만들기 전에 낡은 사람들의 형편이 좋아지기를 원한다.


DW: „사회주의“에 언젠가 종지부가 찍혀질 것인가?


DD: 동독의 유산임이 틀림없는 인용부호가 사라지면 그렇게 될 것이다 [디 벨트를 비롯한 악쎌 스프링어 계열 언론이 과거 동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동독을 항상 인용부호를 사용해서 „DDR“로 표기한 것을 비꼽는 대답/ou]. 그러면 사회주의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으로 넘어 갈 것이다.


DW: 그게 뭐가 될까?


DD: 계급이 없는 사회다. 현재 사회가 원숭이떼와 차별되듯이 우리사회와 차별되는 무계급사회다.  


DW: „고전에서 배운다란 말은 그걸 실행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오류에서도 배운다는 말이다"라고 „기계의 겨울“에서 말했다. 지나간, 수백년전부터 참조 되었던 이른바 혁명적인 이론이란 것들을, 현재에 대하여 그렇게도 몰랐던 이론들을 안고서 몸살하는 쾌락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DD: 왜 고전에서 배우지 않고 모든 오류를 다시 한번 해야 하는가는 아마 사도마조히즘[에 빠진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전혀 모른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것들에서 얻은 것이 뭔가라는 질문은 자신들보다 더 오래된 집에서 편히 사는 사람들이 다 물어야 할 질문이다. [아파트에서 살기 싫어하고 고풍이 도는 오래된 집에서 살기 좋아하는 독일 부르주아를 꼬집는 대답/ou]고전에 대한 편견은 초기 부르주아가 보여주지 않았던 유산에 대한 속수무책한 태도다. 후기 부르주아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르주아의 연명을 아주 불리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DW: 좌파당에 투표할 것인가? 그 정당의 [동독] 과거가, 장벽에서의 발포명령, 정치범, 그리고 여행자유 불가란 그 정당의 과거가 거슬리지 않나?


DD: 나는, 기초단체 혹은 유럽 선거 등 상황에 따라, 가능한 이것저것에 다 투표한다. 단 절대,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1차대전] 전쟁신용[법안]에 찬성하고, 독일 혁명을 목졸라 죽이고 [특히11월 혁명과 그후 혁명시도를 진압하고 차후 제국국방장관이 된 사민당 노스케의 역할],  나토 이중결정 [80년대 초 사민당 헬무트 슈미트]을 하고,  직업금지를 실시한 [사민]당에, 그리고 샤르핑, 벡[둘다 전 사민당 당수]과 같은 보기 싫은 수염을 기른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다.


(…)


DW: 당신의 공상과학을 즐기는 경향이 쟈코뱅이란 후기 18세기와 사회주의란  19세기의 정치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당신의 집착에 대한 해독제인가?


DD: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음악에 관심을 갖는 것을 두고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SF는 20세기가 - 앞서간 두 세기를 포함한 - 시대의 정치적, 과학적 문제들을 지각적(ästhetisch) 문제로서 대중적으로(populär) 다루는 것을 숙지한 장르다. 나는 이걸 좋아하고 시도한다, 단지 덜 대중적일 뿐이다. 그게 제대로 될 건지는 새세기가 결정할 것이다.  집착? 그런가, 프랑스 혁명이 목적했던 것이 다 이룩될 때까지 그리로 내려가는 것 모든 것이 내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DW: 좌파의 자진해체가 마지막 진보적 행위인가?  [좌파당이 자진해산해서 사민당하고 다시 합당하는 걸 은연 중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가 종종 대두된다. 특히 라퐁테인이 마지막 작품으로 그럴 수도 있다는 희망어린 주문도 있다./ou]


DD: 빌어먹는 일이, 다시 말해서 [빌어먹는] 몹쓸법(Unrecht)과 멍청이 누가 뭐래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어쩔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더이상 없으면 좌파는 스스로   해산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되면 좌파가 계속 뭣의 좌편에 선다고 똑바로 말할 수 있겠는가?  


DW: 예전에는 좌파가 자민당보다 더 자유에 눈을 맞췄다. 지금에 와서는 단지 분배만을 이야기 한다.  무엇을 상실한 상황인가?


DD: 상실했다? 상실한 건 서구의 [임금] 종속[노동]자들이 동부권에 매혹되어 넘어가지 말라고 받은 거의 모든 사회적 사탕이다. 러시아가 다른 문제로 안고 있는 지금  하르쯔 [개혁] 발안자와 같은 선지자들이 거침없이 유세하고 있다. 그렇다. 자유에 대하여 말해야 할 때다.  단 궁핍과 교육한계로부터의 자유, 까놓고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과 같이 부유한 지역이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모든 제한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 또한 자유[말하기]에 속한다.


DW: 좌파당이 동독을 다시 미화하는 시대다. 당신에게 동독은 뭐 였나?  


DD: 좌파 서구인인 나에겐 동독은 우선 우리 정부가 우리 좌파를 대하는데 있어서 너무 가혹하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개런티였다. 여성주의적 이웃 여성이 보는 앞에서 자기 부인을 때리는 남자는 없다.  동독에 어떤 단점이 있었는지는 사방에 깔려 쓰여있다. 그러나 장점은 단지 지난 수 십년간 독일 최대 저자인 페터 학스(Peter Hacks)와 로날드 M. 세르니카우(Ronald M. Schernikau)의 작품에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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