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사과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3/08/22
    사과 2
    ou_topia
  2. 2013/08/21
    사과 1
    ou_topia

사과 2

1. 기도

 

하나님 앞에서는 받침대(substantia)와 거기에 부과 된 것(attributum) 간의 관계가 뒤집어 진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네가 정의롭다’고 말하면서 주는 겉옷. 그러나 인간의 받침대는 여전히 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받침대는 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정의로운 겉옷만을 보신다. 이 루터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기를 희망한다.

 

대타는 타자(他者)를 대신하여 들어오는 대타(代打)가 아니라 타자(他者)의 자리에 타자(他者)를 넘어서는 ‘비타자’(非他者, “non-aliud”)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쿠자누스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지켜보는 하나님이 되기를 희망한다.

 

‘비타자’인 하나님 안에서 사과를 구하는 사람의 운동과 사과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사람의 운동이 만나기를 희망한다.

 

 

2. 오류

 

가리키는 일에서 오류를 범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일은 아마 사유의 바탕일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차원에서 오류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를 나는 ‘위안부 피해’,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로 읽지 않고 ‘위안부 피해’, ‘이용녀’, 그리고 ‘할머니’로 읽었다. 이름을 서술구로 읽은 것이다.

 

3. 오류의 원인

 

1) 

 

한문의 한글표기와 관련된 한글사용 특유의 상황은 지나간다.

 

2)

 

‘지성’에 요구되는 신중이 없었다. 지성이 신중을 다한다는 표징은 글의 사운드 체크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뭔가를 묻은 사운드가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자아를 넘어서 타자를 향하고 그를 진정 존중하는 글에는 오로지 타자의 대답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열린 물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본적인 [질문특유의] 소리다. 이 소리는 간혹 빤히 바라보는 눈이 될 수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글에 이런 물음이 없다.

 

3)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란 표현으로 가리켜지는, 한반도란 땅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던 이용녀라 불리던 분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이런 관심결여는 “이용녀”가 이름이었다고 알았을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다. 이름이 대상을 틀림없이 가리키는 서술의 다른 표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름을 이걸 넘어선다. 이름은 내가 말을 건네고 나에게 대답하면서 나를 묻는 사람을 가리키고 그를 존중하는 상황의 대명사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과 1

blog.jinbo.net/ou_topia531 에 대한 사과다. [트랙백이 왜 안 걸리지?]

 

1. 사과

 

먼저 이곳 진보넷 채널운영자 배라미님께 사과를 구한다. 배라미님이 나의 일차적인 비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다지 힘들지 않다. 배라미님도 힘들지 않게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용녀 할머님께 사과를 구한다.

 

이 사과는 힘들다. 딴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용녀 할머님을 이용했다. 이게 내 ‘잘못’의 핵심이다. 윤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즉 사악한 일이라고 규정한 근거다. 이용녀 할머님은 전혀 보지 않고, 이용녀 할머님을 추상적인 타자로 만들어 그녀의 주체성을 앗았다.

 

2. 사과란?

 

사과(赦過)에 전제되는 건 뭘까?

 

우선, 사과를 구하는 사람과 사과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 양자의 운동이 있다. 사과를 구하는 사람은 잘못에서 떨어져 나오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사과를 받아주는 사람은 이 운동을 동반하면서 그 진정성을 헤아리고 잘못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을 받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이용녀 할머님은 이 운동을 지켜볼 수가 없다. 대타가 필요하다.

 

3. 잘못에서 떨어져 나오기

 

1)

 

“우째 이런 일이”하면서 자신의 멍청함을 시인하고 잘못에서 떨어져 나올 수가 있겠다. 아니면 한바탕 크게 웃고 여유만만하게 자신의 잘못과 거리를 둘 수도 있겠다. 

 

2)

 

내 잘못은 쉽게 떨쳐버릴 수 있는 외재적인 잘못이 아니다. 고음에 깨지는 유리처럼 큰 웃음으로 깨지는 외피가 아니다. 지식/지성의 근저에 결합쌍둥이처럼 찰싹 붙어있다. 지식/지성의 지반에 꽂혀있는 닻이라면 거두면 되겠는데, 그게 아니다.

 

3) 여기서 떨어져 나오는 운동은 지성/지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만 가능한 게 아닐까? 이 운동의 결과는 反지성주의일까?

 

4. 머리가 아프다. 이 일은 내일로 미룬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