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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지막인 강좌가 시작하기 전에 교보문고에 가서 구입한 책 두 권. 요즘엔 참 다들 표지 디자인이 쌔끈하다. 표지 디자인에 끌리는 이 맘 어찌할꼬.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최세진
예전부터 사고 싶던 책인데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실은 전혀 살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그 코너를 지날때마다 눈에 밟히는 그 책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너무도 명쾌한 진실이 뇌리 깊게 박혀온다. 그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재밌는 책일 것 같다. 음? 근데 사고나서 보니 첨바왐바에 대한 챕터는 전에 노동자의 힘 기관지 읽다가 본 것 같은데? 에세이 모은건가?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중앙대 백승욱 교수가 낸 신간!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책 소개하는 지면(?)에 소개된 책이다. 보자마자 사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노동의 힘>, 그외 몇몇 브로델의 저서들을 통해 세계체계 이론에 대해 겉핥기 식으로 배웠는데, 이 책은 마치 학생운동 하는 아해들의 커리큘럼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세미나 커리로 적합해보인다. 어찌 이리 철저한 시장 분석을 하고 책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책을 냈는지.. 부제가 "세계체계 분석의 대가들을 통해 본 근대자본주의의 과거와 미래"인데 이 책에는 자본주의 체제, 헤게모니 이행의 역사에 대한 강의와 더불어, 앞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성격을 띈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전망이 있는 것 같다. 민중의 대안으로 채워질 세계인가, 아니면 또다시 미 헤게모니에서 동아시아 헤게모니로 이행된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의 연속인가?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금방 읽을듯.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는 이제 학회커리계에서 사라져랏 ㅋㅋ

<지중해의 기억>, 페르낭 브로델
사고 싶다!!! 아마 14~16세기 지중해 중상주의에서의 자본주의적 성격들에 대해 서술한 책이 아닐까 싶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의 내러티브는 철저히 현실적인 내용,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교훈적 패배의 역사' 그 자체이다. 지금껏 몇몇(왜냐하면, 스스로 좌파라 자칭하는 이들은 많지만, 엄밀히 따져서 '영화적으로' 좌파인 감독은 별로 없다.) 좌파 감독들이 영화로 투쟁하려했지만 켄 로치처럼 '투쟁'다운 투쟁을 하고 있는 감독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의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들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촬영중인 켄 로치와 촬영 staff들.)
| 투쟁하는 작가주의의 최전선 켄 로치에 바친다 ④ | ||
| [필름 2.0 2006-11-09 18:50] | ||
현재의 감독 중 가장 실천적인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는 역사적 거울을 통해 지금 노동계급의 우울과 좌절을 토로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에 서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가의 태도! 1995년,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을 완성했을 때 세계는 논쟁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둘러싼 미학적, 문화적 담론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1939년 실패로 각인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배반과 분노에 대한 기록이었고, 영화가 개봉되자 스페인 극장가에서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토론이 형성되는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스페인의 역사는 망각의 늪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한 평자가 켄 로치에게 왜 당신의 관심이 영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스페인으로 이전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답은 명료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그것을 민중들에게로, 본연의 그들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대답처럼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가 이미 <랜드 앤 프리덤>에서 보여줬던 역사가의 시선과 태도로 다시 한 번 무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역사적 무대는 1920년 아일랜드다. 학살과 고문, 죽음과 고통으로 넘쳐나는 그곳에서 켄 로치는 스페인 내전의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총을 들고 게릴라 투쟁의 한 전장으로 돌진한다. 그런 점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의 거울처럼 보인다. 전문 배우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한 순간들은 마치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해 숨이 막히고, 조바심 쳐진다. 켄 로치의 태도와 방법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릴라 전투의 소름끼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역시나 예의 기나긴 토론들이 벌어진다.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즉 영국의 대처리즘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주도된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은 전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실업과 구조조정이라는 작업장의 첨예한 생존권 싸움을 넘어 우리의 일상으로 표면화되고, 문화와 가치들로 회귀한다. 이에 저항하는 문화적 표상들의 싸움은 몹시 고립되고 외로워 보인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폭력과 쾌락과 상품가치의 스펙터클에 포획돼 있을 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작가주의이자 좌파적 노선에 선 이들은 극히 적었다. 프랑스 노동계급의 삶을 드러내는 로랑 캉테나 알랭 기로디, 그리고 유럽의 변방 벨기에에서 역시 희망 없는 노동계급의 심리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포착하는 다르덴 형제들처럼 그들은 매우 제한적인 이름들이다. 그나마 ‘세계 영화제’라는 특수한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내부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켄 로치의 이름은 독보적이다. 물론 마이크 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노동계급의 보다 깊은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건조함과 해방구 없는 절망 그 자체를 소묘한다.
단순함의 미학! 켄 로치를 폄하하는 평자들의 주요 논지는 그가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비판은 어느 누구보다도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자의식과 철학을 가진 그의 응답 아래 무가치해진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1969년 <케스>를 연출하며 만난 촬영감독 크리스 멩게스와 제작자 토니 가렛 등과 더불어 ‘꾸밈없고 소박하고 진지해지기 위한 가장 단순한 프레이밍’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설정한다.
사회주의자임과 동시에 원칙주의자인 켄 로치의 이러한 실천은 일회적인 작품들로만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통해서도 하나의 실천적 궤적을 형성한다. 60년대 프리시네마 세대와 더불어 등장한 그는 지금껏 여전히 노동계급의 일상을 소묘하면서도 그 안에 배태된 사회구조의 모순과 폭력을 성찰한다. 그러한 여정이 변별점을 경유하게 되는 지점은 1995년에 연출한 <랜드 앤 프리덤>으로부터 <칼라 송> <빵과 장미> 등을 통하면서다. 영국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루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식민지 니카라구아의 상흔으로, 그리고 첨단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심장부 미국으로 넘어가 외국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이른바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의 이러한 실천은 그러나 2000년대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블레어 정권의 영국에서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다. “블레어 정권은 친미적이고 친자본적인 새로운 보수주의자”라는 그의 단언처럼,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행하는 살육을 영국이 여전히 아일랜드에 행하는 폭력으로 비유한다. 1990년에 연출한 <히든 아젠다>에 이어 두 번째로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화한 이번 작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그는 다시금 역사가 현재를 돌파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상기한다. 그러나 돌파구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그는 안다. 그는 아마 이 영화를 연출하며 이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혁명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욱 힘겨운 문제는 혁명의 성공 그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그가 베스트 영화로 손꼽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에 나오는 한 혁명가의 말이다. 적은 거대한 괴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우리들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관타나모로 가는 길>(The road to Guantanamo),
아시프는 말한다.
"the world is not a nice place."
그 '처절한 진실'은 이 영화는 어떤 피비린내나고 분노어린 실화의 재현으로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 이 영화는 오직 '보여주고', '증명하며', '증언하는' 영화이다. 다큐멘터리이지만 극영화이며, 100퍼센트 진실에 의존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파키스탄계 영국 청년 네 명이 친구의 결혼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향한다. 결혼할 청년의 신부가 될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하던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미군의 폭격을 만나게 된다. 젊고 혈기왕성하기만 한 청년들의 여행은 이때부터 비극으로 치닫는다. 미군의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시에서 외국인들을 내보내는 과정을 겪으며 혼자 떨어져 실종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수백 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탈레반의 본거지에서 연합군에게 잡힌다. 이들은 미군에 넘겨져 관타나모로 끌려가 2년이 넘는 시간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것은 실화다. 지금도 쿠바 관타나모에 있는 미군 수용소에는 500여명의 포로가 온갖 비인간적 대우 속에서 고통받으며 갇혀있다고 한다. 나치의 그것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의 그 수용소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의 부당함, 비도덕성, 잔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수년을 고문과 온갖 거짓 취조에 시달리며 갇혀있는 세 청년(한 명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종된다.)은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지만, 미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때까지 그 어떤 포로도 풀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2004년 750여명이나 포로가 그 안에 있었지만, 단지 10명만이 기소되었을뿐이며, 그 중 단 한명도 유죄선고를 받지 않았다. 조작된 언어가 세계를 지배한다지만 관타나모는 그 조작된 세계의 거짓과 폭력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인 것이다.
수용소에 갇혀있는 세 청년의 고통과 분노가 담긴 영상과 파키스탄, 영국에서의 지난 날을 보여주는 영상은 끊임없이 교차편집(inter-cut)되어 보여진다. 왜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어야하는 저 아랍인들이 저 곳에 갇혀있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과 분노를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당연히 느껴야하는 분노. 이 영화를 보고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오직 '앞으로' 내딛으며 살아가겠다는 세 청년의 마지막 말은, 좌절할 수만은 없다는 감독의 남다른 의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 세계는 친절한 곳이 아니며, 우린 분노해야 한다.

새벽길님의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에 관련된 글.
논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저것은 건강한 논쟁의 일부가 결코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조야해 보인다. 민노당 안에서의 NL과 PD 나이드신 분들이 피튀기게, '이전투구'(열받지마시길. 내가 보기엔 너무 이 표현이 '적합'하다.)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싸움이 운동의 발전을 위한 '치열한 논쟁'이 아니라, 이전투구로 비치는 것은 내용과 방식이 너무 조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본질도 아니며, 정수도 아니며, 문제해결에 하등 도움안되며, 스스로 뒷걸음질만 치는 결과만 나을 것이다, 라는 뜻!
NL이 어쨌건 저것을 일반화시켜서 빈정거림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저런 쓰잘데기 없는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낭비하는 건 분명 소위 'PD' '선배님들'도 그 조야함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아이고, 이런 하극상이... 하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전선 위에 같이 서있으면 동지는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왜 논리적인 비판글 대신 빈정거림과 욕설들이 난무하는가... 배설들은 끊임없는 배설들만을 낳을 것이다.
학교에 있을때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하던 얘기가 있다. 다짜고짜 타 정파 욕부터 하고, NL동지들을 멍청하다고만 말하는 분들 얘기는 절대로 듣지말라고. 열이면 열, 배울게 별로 없는 '술자리'좌파들이었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다. 소위 마니아들이었던 것이다. 대중을 만나지 않고, 집회엔 혼자 다니며, 학교 안에서 NL동지들이 얼마나 열심히 대중들을 만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민족주의 멍청하다고 혼자 외치는, 좀 나이 많은, 내가 하면 정치, 남이 하면 '운동대운동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단지 술수', (일본말로는) 오타쿠!
아, 너무 건강하지 않다. 가뜩이나 시대가 하수상하여 부르주아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하고, 이데올로기 공세는 강해지는데 왜 이런 건강치 못한 쌈박질에 몰두하는가. 개소리는 무시하면 되는거 아니었나? 왜 똑같이 열받는가. 민족주의자건, 소위 '좌파'건, 그 사람의 운동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게 운동하느냐 일텐데, 당내 싸움은 누구를 막론하건 응원하고 싶지 않아보인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난 당원도 아니고...)
진보블로그에서 저런 방식의 조롱들을 많이 본다. 눈쌀 찌푸려진다. 여긴 80년대, 90년대학번말고, 나같은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어린이들도 많은데 너무 안좋은거 많이 배우는것 같다.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난 소위 전통적 PD 학생운동의 풀 안에서 운동했(하)고, 운동하면서 NL동지들에게 배신감 느끼고 열받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않게 운동한다고 따라서 똑같이 하라고 배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모 학교 선배님들은 전부 '전진'으로 갔다던데, 가끔 보면 아무래도 저건 내가 배운 운동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왜 목매다는건가. 계속 저렇게 하면 NL이랑 '같이' 망할게 분명하다. 대중운동은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저기서 지금 뭐하고 계시나... NL들이 당권 장악할 동안 뭐하고들 계셨나, 이런 생각만 든다. 당권 장악은 욕찌거리로 되는게 절대 아닐텐데. 민노당이 그렇게 우스운 당인가? 당권 장악은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만 가능하다. 일단 선배님들은 아는건 많지만, 어쨌건 그 '민족주의자'들한테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는 한참 지고 있는 것이다.
좀 논지를 벗어나는 말이지만,
심지어 당은 너무 의회주의로 변질되어, 더이상 대중투쟁을 선도할 수 없는 '정책정당'이 되어서, "당을 통한 지역 민중 조직화"라는 꿈은 물건너가도 한참 물건너간 것으로 보이기 까지하다. 게다가 "어쨌건 당권 장악"하면 또 뭐 어쩔껀데, 이런 생각도 들고.
내 생각에, '무조건 우리가 하면 잘 된다'는 건 환상이다. 우리가 안해도 잘하는 대중운동에 능한 자들이 있곤했으며, 우리가 해도 대중운동 할 줄 몰라 당년도 학교 운동 망친 예들이 셀 수 없다.
그것은, 알리바이였던 것이다! 얼마나 편한가!!
"다 쟤네 때문"인데.
p.s.
정치적 입장의 옳음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여기선 논외. (PD도 PD나름이지만, 일단 PD는 옳다고 치는 것을 가정하고. 이것은 그러나 심상정보다는 강기갑이 훨씬 훌륭한 동지로 보인다는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정말 "강기갑은 nl이니까 옳지 않"은가? 입장의 옳음은 오직 실천과 운동의 진정성만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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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을 걸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에 기냥 댓글만 답니다. 일부 정신나간 중생들이 있긴 하나 그걸로 NL 대 좌파의 대립 전체를 판단하시지는 않겠죠. 님께서 후배들에게 타 정파 욕하는 선배들 말은 듣지 말라고 이야기하시는 정도면 그럴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알리바이, 그거 좋죠. 그러나 누구나 알리바이를 만들고 삽니다. 주사파들은 미국을 욕하면서 북한에 알리바이를 제공합니다. 좌파가 자본가를 욕하면서 노동자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듯이. 좌파가 주사파를 욕하는 것은 자신들의 대중성 없음에 대한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함이고 주사파가 좌파를 욕하는 것은 자신들의 뻘소리를 그것으로 덮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거죠. 어느 정파와도 관련 없는 행인같은 경우는 아주 기분 좋게 양쪽을 다 까면서 나름대로의 알리바이를 만들구요. 그런데 뭐 하다보니 주로 NL 주사들을 때리게 되더만요. 좌파의 무능력에 대해서야 님 말씀처럼 "개소리는 무시"하는 정도만 하면 되구요.
건강하게 운동하는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개소리"를 하더라도 깃발들고 "대중투쟁을 선도"하는 거? 당이 의회주의로 변질되었다는 말씀들 참 잘하는데, 당이 대중투쟁을 "선도"해야 하는 건가요? 그럴걸 뭐하러 정당해요? 그냥 전위비합지하조직만들어 뛰지. "당을 통한 지역민중 조직화?" 그건 정당을 하고있는 사람들 입장이지 정당 외곽의 사람들은 그런 입장을 견지하면 안 되죠. 정당 외곽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 조직의 강화와 투쟁을 통해 당을 선도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입장의 옳음은 오직 실천과 운동의 진정성만으로 증명된다"는 님의 말씀,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그 실천의 방식이 틀리고 그 진정성을 내보이는 방식이 틀립니다. 뭘로 증명할까요? 그게 옳다는 것을. 그저 깃발들고 뛰어다니다가 오늘 사람 많이 왔다면서 투쟁이 성공했다고 하는 것. 이걸 가지고 입장이 옳다고 이야기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강기갑이 심상정보다 훌륭한 동지로 여겨진다는 님의 말씀에 점점 더 진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제 입장에서는 솔직히 강기갑이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난 해 단식투쟁? 그걸 꼭 의회 들어가서 해야했나요? 그냥 전농에서 하면 되지. 그리고 뭐 그게 무슨 투쟁을 선도했나요? ㅎㅎ
심상정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에요. 뭘 보고 강기갑이 훨씬 훌륭하다고 할까... 그냥 그런 겁니다. 아, 트랙백으로 걸걸 간단하게 답글만 달려고 하다가 자꾸 길어지넹... 죄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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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정성은 활동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점검하면서 만들어가는 것도 있고, '대중운동'(물론, 대단히 추상적인 목표지만요.)이라는 드러나는 성과로 증명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진정성이란 말은 같은 정치를 지닌 동지들끼리만 서로 증명하고, 비판받으며, 채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이 운동의 내용과 더불러 다른 한쪽면을 채워야한다는 생각을 말씀드린것입니다. 엔엘들의 소위 '품성론'을 마냥 깔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가끔은 들곤 했었던 개인적 경험으로 흥분해서 말한것 같군요.
2.
저도 민노당이 대중투쟁을 선도하려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민노당은 '그러려고'하는 것 같아 보이더군요. 고의적 의도가 없더라도 의회에 진입한 정당으로서, 그 역사성으로 인해서 어쩔수없는 효과라고 해야하나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전체 운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체 전략전술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적어도 대중투쟁이라도 선도해야하는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3.
심상정과 강기갑은 한 예로 들고자 한 것인데, 평가가 다 같진 않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회내에서 비타협적 자세로 보다 민중들의 보편적 권리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정치를 펼친건 강기갑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예컨대, 한-칠레FTA 저지투쟁이나 WTO저지투쟁, 한미FTA저지투쟁을 경과하면서 그가 위치한 농민출신이라는 점도 강하게 작용했겠지만 보다 대중투쟁과 단호한 자세로 일관한 점은 심상정과는 좀 비교되더군요. 물론 전 모든 정보를 알고있진 못합니다. 한계가 있는 정보로부터 판단한 평가니 그 평가 역시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심상정에 대해서는 금속연맹 시절 얘기부터 안좋은 얘기 너무 많이 들리고 권력지향적인 행태들이 많은 활동가들이 못미덥게 생각하도록 만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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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몇 가지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NL 중에 품성론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있죠. 저는 그분들 존경한답니다. 사상과 이념을 떠나 인간적으로 말이죠. '품성론' 자체를 까는 것이 아니죠.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개별적인 판단의 기준을 이야기하는 것이 될 것이므로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되겠죠.민주노동당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민주노동당이 지금 "전체 운동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체 전략전술을 좌지우지"하고 있나요? 당 안에서도 그렇지만 당 밖에서 이런 말씀을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처음' 봅니다. 또한 당이 대중투쟁을 선도해야 한다는 발상, 이거 과거 소비에트 당시 존재했던 일종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인데, 아직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군요. 당이 대중투쟁을 선도한다... 로자의 글을 한 번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심상정을 좋아하건 강기갑을 좋아하건 그건 개인의 취향의 문제이므로 살필 일이 아니지만, 그 호불호의 계기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 그것도 "단호한 자세", "대중투쟁"이었다면 매우 우려가 되네요. 강기갑의 단호한 자세와 대중투쟁, 그거 강기갑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의 당론이기도 하거니와 민주노동당의 많은 사람들이 진작에 전술을 내놓은 것이었고, 그러한 전략전술을 위해 앞에 세운 것이 강기갑일 뿐이죠. 심상정도 역시 마찬가지구요.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을 조직적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판단하는 님의 시선입니다. "대중투쟁"을 강조하시는 분이 개인의 역능을 가지고 마치 그것이 대중을 선도한 것처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때문이죠. 대중-저는 이 말을 될 수 있는 한 쓰지 않으려 하는데, 어쨌든 님의 표현을 빌려 이야기하더라도 그 대중이 가지고 있는 역능은 단지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단체가 선도투를 하는 것으로 추동되거나 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대중을 믿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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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혼자가는게 문제가 되나요?-_-조직없는 활동가들을 배려하지 않는 발언이군요
상당히 불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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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조직이 있다고 하더라도(제경우) 지역 조직이 활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가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일수있는데 왜 그런식으로 표현하시는지 모르겠군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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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마지막 문단의 말씀에 대해 동의하는데요, 다만 농민운동의 얼굴로 활동하는 강기갑의 그런 전투성은 농민운동의 여러 전투적 경향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 개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아니고, 그 개인의 활동 역시 대중운동의 성과겠죠. 다만 심상정은 조직적 관점에서 그렇게 활동하는것이라면 그 '조직적 관점'이 별로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이 안듭니다. 선도투를 잘하고 말을 빡세게 하니까 좋다는게 아닙니다. 대중의 분노를 '직접행동'으로 조직해내는가, 아니면 의회주의에 기댄 단순한 선거운동 또는 캠페인 경향으로 만드는가 라는 쟁점이 있는듯. 심상정과 민주노동당 내 의회주의 흐름은 후자에 가깝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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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근데 조직없는 활동가라도 대중운동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운동이 어려운 것도 알죠. 지금 현재 개인이고 그렇더라도 언제나 대중이데올로기에 착목해서, 대중운동을 지향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sd님 생각처럼 운동의 조건의 현실적 어려움은 단지 조건이지, 개인 역량 탓이 아닙니다. 다만 어떻게(how) 운동하고 있느냐가 문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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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 물론 밖에서 보시는 분이 보이는 대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시시콜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네요. 어느 누군가에 대한 호불호 역시 님의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다는 점을 십분 이해합니다. 다만, 대중의 분노를 조직, 그것도 직접행동으로 조직해내는 것이 무엇인지, 의회주의에 대한 비판이 어떤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인지가 님의 관점과 저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의원 몇이서 대중의 분노를 조직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러한 선도투가 있더라도 그 방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죠. 민주노동당 내 의회주의의 흐름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전술의 다양성을 의회주의로 단정하는 모습은 동의하기 어렵군요. 님의 관점대로 그렇게 따지자면 남한 사회 내에서 소위 변혁운동을 하는 단위 중 과거 사노맹 정도를 빼곤 모두 의회주의에 일정정도 기대고 있다는 결론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대중을 수동적 계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힘들구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