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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전선] 98년 2월

 

고통과 희망

  우리는 요즘 거의 날마다 외환·금융공황이 가져온 끔찍한 고통의 결과들을 보고 듣는다.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비행기 삯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아기 분유 값이 없어 가게에서 분유를 훔치다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어느 실업자, 새벽 4시면 하루도 빠짐없이 인력시장에 나가 보지만 공치는 날이 더 많아 '하루 벌어 열흘 살아야' 하는 건설 노동자들, '짤릴까봐 겁이 나서' 육아 휴직조차 하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 도저히 살 길이 없어 스스로 한꺼번에 목숨을 끊어버린 어느 가족 ……

  고통은 이렇듯 우리 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약한 곳에서, 가장 빨리, 가장 크게 닥쳐오고 있다. 일용 노동자, 하청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여성 노동자,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을 지켜줄 아무런 조직도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나라 1,300만 노동자 가운데 절반 가까운 600만 명이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민간부문이나 공공부문 가리지 않고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정리해고는 '법제화'되기 전에 이미 '현실화'되어 있다. 생산량을 줄인다고, 민영화다 인수합병이다 조직축소다 하면서, 강제 해고와 일방 전출이 늘고 있다. 임금 주는 걸 서너달씩 마냥 미루거나 아예 임금을 깎아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여금이나 성과급까지 떼어 먹는 회사가 수두룩하다. 연월차마저 억지로 반납하라고 하질 않나, 돈도 안주면서 휴가를 가라고 하질 않나, 학자금 못주겠다, 주택융자도 줄이겠다, 어디랄 것 없이 무법천지 똥배짱들이다.

  물가도 뛰고 세금도 뛰는데, 임금은 제자리도 아니고 뭉텅이로 깎여버리는 판이니, 아이들 '유치원 중퇴'에 적금도 깨고 씀씀이를 아무리 줄여봐도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덩치도 크고 힘이 있는 노동조합은 덜한 편(아주 조금!)이지만, 노동조합의 힘이 약하거나 아예 노동조합조차 없는 곳에서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살얼음이다.

  공황이 몰고 온 고통은 노동자들만 겪고 있는 게 아니다.

  기름값이며 사료값 따위가 뛰어오르고, 기름 살 때 세금을 깎아주던 특혜마저 없어지면서 하우스 농가와 축산 농가, 양식 어민들이 떠안게 된 고통은 매우 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설이다, 유조선 사고다 해서 애써 가꿔온 하우스와 양식장이 거덜나고, 산지 농축산물 값마저 한꺼번에 떨어지면서 농어민들은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이른바 '명예퇴직'으로 받은 퇴직금에다 이리저리 끌어모은 돈을 몽땅 주식에 투자했다가 하루 아침에 전 재산을 날리고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로 내몰린 일반 주식 투자자들, '돈 가뭄'에 부도를 막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중소기업 사장들 ……

  고통은 이렇듯 노동자와 전체 민중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다.

  희망은 있는가?

  우리의 희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통 분담에 합의하고 공무원 노조 인정이나 전교조 합법화를 정리해고·파견근로제와 맞바꾸는 데 있지 않다. 재벌 개혁이나 이른바 '건강한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실직해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을 때 나라 경제가 살아난들, 우리 은행이 최고의 은행이 된들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주1)

  우리의 희망은 실질임금을 그대로 둔 채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지키고 늘이는 데 있으며, 정리해고다 파견근로제다 변형근로제다 하는 따위의 노동악법들을 뜯어 고치는 데 있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단 하나의 길인 총파업 투쟁 속에만(!) 있다. 이것만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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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민주노동과 대안} 4호,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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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18 2005/02/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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