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김장김치와 고문의 기억
 
며칠 전부터 이 집 저 집 김장이 한창이다. 25년 전 아내와 처음 김장을 담궜던 기억이 난다. 아내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나를 따라 인천으로 왔다. 결혼 전이었지만 우린 함께 살았다. 1986년 가을 초입 인천 주안공단 굴삭기 부품업체에서 샤링 일을 하던 난 위장취업으로 해고됐다. 그 해 겨울 스피커 조립업체에 다니던 아내와 난 세 들어 살던 주인 할머니 코치를 받아가며 첫 김장에 도전했다. 
 
어느 볕 좋은 휴일, 반씩 가른 배추를 소금에 저리고, 무 채 썰고, 고추가루랑 새우젓으로 김칫속 만들어 저린 배춧잎 하나씩 펴 바르고, 그렇게 완성된 김치포기를 플라스틱 양동이 두 개에 나눠 담근 다음 집 앞 화단 한켠에 파 묻었다. 첫 김장치곤 맛도 좋았고, 이듬해 봄까진 반찬 걱정 없겠다 싶어 뿌듯했다.
 
그렇게 만든 김장김치를 두 포기나 먹었을까, 어느날 우리가 살던 셋방에 두툼한 파카를 입은 남자 네 명이 들이닥쳤다. 아내는 출근하고 없었고, 방에 혼자 있던 나는 그대로 끌려나갔다.
 
승용차에 나를 밀어넣은 그들은 내 눈에 검정색 가리개를 씌웠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두 명이 상관인 듯싶었다. 그들은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함께 탄 다른 두 명에게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게 했다.
 
서울로 끌려온 나는 어느 건물 앞에서 차에서 내려 지하로 끌려내려갔다. 조그만 방에 들어가서야 그들은 내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풀었다. 
 
그 때 일을 지금 처음 글로 쓰는 거라 기억이 꽤 엉크러져 있지만 방 안에는 두 명이 마주보게 가운데가 솟아 있는 책상이 있었고,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간이침대도 있었던 것 같다.
 
경상도 억양으로 그들이 말했다. "다 벗어!" 잠시 주춤거리다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엎드려 뻗쳐를 시키더니 그들이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허리도 맞았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허리부터 시큰거린다.
 
팬티만 다시 입히고는 가운데가 솟은 책상 앞에 나를 앉혔다. 수사관이 말했다. "네가 앉은 자리가 장영자가 앉았던 자리고, 옆방이 김재규가 있던 방이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조사받았던 곳이 보안사 서빙고분실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수배중인 동생을 찾던 수사관들이 동생 있는 데를 대라고 다그치며 물고문을 시작했다. 팬티를 다시 벗기고 그들이 나를 의자에 앉혔다. 팔을 수건으로 두른 뒤 새끼줄로 의자에 묶었다. 고개를 젖히고 얼굴 위로 수건을 덮은 다음 주전자에 담긴 물을 부었다. 바둥대며 '아, 죽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물고문으로 별 소득이 없자 그들은 나를 다른 방으로 끌고갔다. 사방이 시커먼 방 한가운데 '칠성판'이라고 불리는 전기고문대가 있었고, 어두운 벽에는 여러가지 고문도구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들은 겁만 주고 다시 원래 방으로 돌아왔다.
 
동생 찾기는 글렀다고 판단했던지 그들은 이제 내 활동을 캐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쉬는' 틈에 수사관들은 자기 아이들 대학입시 얘기를 나눴다. 베트남 민족이 자존심이 엄청 세다는 얘기도 했다.
 
수사관들이 잠시 나간 사이 사복군인 한 명이 내 전공이 신학인 걸 알고는 말을 걸었다. 그는 한국 대형 교회들의 문제점과 '구원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그 독실한 '크리스쳔'은 내가 물고문으로 처참하게 널부러지고 있을 때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건 옆방에 아내가 끌려 왔을 때였다. 제발 아내가 이 '지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내가 얼마나 놀라고 공포에 떨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아내는 하룬가 이틀만에 먼저 '지옥'에서 나갔다.
 
아내가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쯤 뒤에 난 고문에 못이겨 인천서 만났던 어느 해고자의 자취방을 댔다. 그들은 나를 차에 태워 그 곳으로 향했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다행히 그 방엔 아무도 없었고, 협박과 함께 그들은 나를 풀어줬다.
 
고문 앞에서 난 나 자신도, 아내도, 동지도 지킬 수 없었다. 만약 그 때 그 해고자의 방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가 나 때문에 보안사에 끌려갔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난 나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말 그대로 '파괴'됐을 것이다.
 
그렇게 풀려나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웃거나 얘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왔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아내와 난 보안사 수사관들이 다시 찾아올까봐 셋방 짐들을 그대로 놔둔 채 서둘러 인천을 떠났다. 그 때 주인 할머니가 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 사람들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이 말이 2차 트라우마라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그 때 화단에 묻혀 있던 김치들은 주인 할머니가 꺼내 드셨을까? 난 아직도 그 김치들이 지금껏 아내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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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16:25 2011/12/1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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