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5일 아침 호두마을 도경스님 해제 법문
6박7일 수행 기간이 다 지나고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6박7일 동안 여러분들에게 이 수행이 많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6박7일 금방 지나갔습니다. 언제 지나간 줄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렇게 시간이 가다보면 언제 지나간 줄도 모르고 언젠가 죽을 때가 있을 겁니다. 죽음의 순간이 불현듯이 내 앞에 있는 그 순간들일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볼 문젭니다. 우리는 아주 엄연한 진실인데도 자의적으로 아주 눈감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 수행 기간을 맨처음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가장 주의깊게 생각하셔야 될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수행하는가의 문제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왜 수행하는가? 붓다는 당신께서 다루는 문제는 두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고통과 고통의 해방입니다. 불교에서 고통은 어디에서 생겨난다고 설명하는가? 고통은 인식의 전도에서 생겨납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느낌의 고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고통을 말합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떤 문제들, 불완전성, 불확실성, 이런 것들을 총칭해서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이 존재의 문제는 붓다께서 갈애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애가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갈애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눈, 코, 귀, 입, 몸,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는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번 살펴봅시다. 눈에서는 보이고 보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귀에서는 들리고 듣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감각기관에서는 어떤 앎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앎에는 언제나 알아지는 것과 아는 것의 작용이 함께 있습니다. 알아지는 것을 대상의 작용, 아는 것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앎이 일어납니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것을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느낌을 통해서 그것이 뭔지, 책상인지, 나문지, 꽃인지, 바람인지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관념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을 인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각각의 감각기관에서는 대상과 마음의 작용, 알아지는 것과 아는 것의 작용, 그리고 그것이 부딪힘으로써 생겨나는 느낌, 느낌을 통해서 무엇인지 아는 인식작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엇이다고 해석한 인식의 결과물에 대해서 마음이 반응합니다. 꽃과 오물에 대해서 여러분은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꽃에 대해서는 좋다고 판단하고, 좋아하는 마음, 갖고 싶어하는 마음, 욕심으로 반응하고, 오물에 대해서는 더럽다고 생각하고 피하고 싶은 마음, 없애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응이 있습니다. 화와 욕심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일어나는 것, 앞에 말한 세 가지 일어남은 똑같습니다. 대상과 마음의 작용, 보이고 보는 작용,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느낌,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인식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 다릅니다. 물론 인식도 다릅니다만 인식 자체는 그 자체가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고통의 문제, 우리의 삶의 문제는 이러한 인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는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가? 실제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지혜를 통해서 해결합니다. 실제 있는 것은 대상과 마음의 작용, 그로부터 일어나는 느낌,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인식작용입니다. 그런데 왜 지혜가 필요한가? 왜 지혜로써 이해해야 되는가? 그냥 그게 있다고 알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렇게 실재하는 일어남, 우리는 '파라마타'라고 말합니다. 실재하는 일어남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식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해석이 있게 한 실재하는 작용들, 실제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지혜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해나가면서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생길 때, 이런 지혜가 날 때 여러분 마음에서는 ‘아, 내가 이것을 안다’라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이해하고 있구나’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 실재하는 것에 대한 지혜가 생겨났을 때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우리가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그것에 대한 관념적 해석에 대해서 마음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TV를 보면 프로 레스링 경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프로 레스링 경기를 보면 그렇게 흥분하지 않습니다. 왜 흥분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실제 짜고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선수들이 상호 합의 하에서 훈련해서 그런 동작들, 그런 싸움의 장면들이 연출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제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보고 있지만 우리는 ‘어, 그렇구나’라고 담담하게 그것을 봅니다. 그런데 짜고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어린애들은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압니다. 그러면 걔네들은 그 어떤 격투기의 장면을 보면서 아주 흥분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가 이기면 아주 기뻐하고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가 지면 아주 화를 냅니다. 왜? 진실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실제 그 안에서 내면적으로 있는 것은 합의입니다. 그리고 연습이고, 서로 어떤 동작을 익히기 위해서 서로 돕습니다. 이것이 실제 그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작용들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난 것, 동작들, 행위들 이런 것만 보고 그것이 진실인 줄 아는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것, 우리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 알아지는 것과 아는 것, 대상과 마음의 작용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인식들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내면적으로 실제 작용하고 있는 이런 에너지들, 이런 작용과 성질들을 이해해갔을 때 밖으로 드러난 것, 저게 뭐구나 하는 인식, 예쁘다는 판단, 더럽다고 하는 판단, 이런 밖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서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그럼 수행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두 번째 문젭니다. 수행의 방법은 수행의 목적에 부합해서 나온 것입니다. 수행의 방법이라는 것이 홀로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지혜가 나기 위해서 수행해야 됩니다. 그것이 절대 명제입니다.
우리는 지혜가 날 수 있는 수행을 해나가야 됩니다. 지혜가 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알아차림이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어떠한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가? 여러분, 대상을 자세하게 보려고 하는 알아차림은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이 못됩니다. 대상을 가볍게 가볍게 알아가십시오. 그럼 점점 마음은 대상에서 멀어집니다. 처음에는 내가 대상을 알았지만 나중에는 대상이 내게 알아집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의 대상만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대상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물러나서 수동적으로 할 수 있는 알아차림, 이것이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렇게 단지, 일어나는 것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알아차림, 이것이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림하는 것이 계속 이어질 수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이어질 수 있는 알아차림, 이것 또한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동적으로 수행해가면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마음 부분이 있습니다.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알아차림이 돼야 합니다. 물론 대상 쪽을 보면서도 지혜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는 이 수행은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마음의 이해를 통해서 마음의 대상을 이해해가는 패턴입니다. 이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나기 위해서는 마음 부분이 이해돼야 됩니다.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알아차림은 수동적인 알아차림입니다. 물러나서 지켜볼 수 있는 상태에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알아차림에 항상 바른 견해가 있어야 됩니다. 바른 견해가 있는 알아차림, 이것이 또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알아차림입니다. 바른 견해는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라는 견해, 알아지는 모든 것은 대상이라는 견해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내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눈 뜨면 보고, 소리 있으면 듣고, 닿으면 느끼고, 생각할 거리가 있으면 생각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생각 안하려고 해도 그 힘이 강하면 생각 안할 수가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로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지혜가 날 수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알아차림을 해나가셔야 되고 여기 있는 동안 여러분이 배운 알아차림 방법이 바로 이렇게 알아차림을 해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조건은 지식, 바른 정보와 사유입니다. 여러분은 수행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 됩니다. 바른 수행에 대해서, 바른 법에 대해서 여러분은 많이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많이 안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셔야 됩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이 맞는가, 실제 수행에서 그렇게 일어나는가? 생각을 통해서 그것을 소화시키셔야 됩니다. 수행 기간 동안 여러분은 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약 이런 사유와 정보에 대한 조건들을 갖춰가는 분들이라면 수행하면서 이 생각들이 많이 났을 겁니다. '내가 이런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마음이 깨어나서 말로써 막 나에게 '수행을 어떻게 하는 거야? 법은 어떤 거야?'라고 막 가르쳐주는 그런 말도 많이 들었을 겁니다. 이게 다 이런 사유하는 작용, 정보를 소화시키는 작용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가 나기 위해서 바른 정보를 많이 알고 있어야 되고, 그것을 끊임없이 소화시켜야 되고 또 그것을 끊임없이 수행에 적용시켜가야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지혜가 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또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좋은 도반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 나름 마음이 그렇게 바르지 않습니다. 번뇌가 아주 강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싶어하는 그런 경향도 강합니다. 수행을 혼자 하게 되면 바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 마음이 경향 되는대로 그렇게 수행이 이끌어가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래서 함께 수행할, 함께 수행을 이야기할 도반이 아주 중요합니다. 경전에 보면 붓다의 시자였던 아난존자가 어느날 붓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님. 출가해서 살아보니까 출가해서 사는 수행자의 삶의 절반이 좋은 도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출가해서 사는 수행자의 삶의 전부가 좋은 도반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출가생활의 전부가 좋은 도반에게 달렸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바르게 해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도반이 필요합니다.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혜가 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이렇게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알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밖에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정보가 내 안에 왔을 때 압니다. 내 안에 왔을 때 알 때도 직접적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해석해서 압니다. 관념적으로 해석해서 무엇이다라고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뭔가를 안다면 그것은 벌써 관념입니다. 우리는 이 관념이 우리 상호간에 같지 않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닭소리, 우리는 '꼬끼오'지만 미국 사람들은 '카커두들드'입니다. 너무나 다른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그렇게 듣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해가 안되죠. 어떻게 저 소리를 '카커두들드'라고 들을 수 있냐고. 그 사람들의 정보대로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 뜨고 이 방을 전체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는 전체를 못봅니다. 한 부분, 한 부분을 봐나갑니다. 우리 눈의 능력이 그것밖에 안됩니다. 한 부분, 한 부분을 차례차례 봐나가지만 우리는 전체를 보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 마음이 그 한 부분들을 조합해서 전체를 만들어냅니다. 하나의 그림판을 만들어냅니다. 이것 또한 관념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에너지가 생각으로 이렇게 일어날 겁니다. 그럼 우리는 '먹고 싶다'라고 그 생각을 압니다. 미국 사람들은 'I want to eat' 이렇게 알 겁니다. 에너지는 똑같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 같이 올라갈 겁니다. 뇌의 반응도 똑같을 겁니다. 그렇지만 인식의 결과물, 어떻게 알아지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한글로 알고 미국 사람들은 영어로 압니다. 무슨 말인가? 관념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이건 가치중립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음이 좋을 때 세상은 어떻게 알아지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이 좋을 때 세상은 좋게 알아집니다. 여러분 마음이 나쁠 때 세상은 어떻게 알아지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이 나쁠 때 세상은 나쁘게 알아집니다. 여러분, 좋은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 세상을 바꾸지 마십시오. 세상은 안바뀝니다. 여러분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상대적인 것을 시비하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여러분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은 마음을 가지면 세상은 좋아집니다. 천국이 뭐 따로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좋고 내가 세상을 좋게 안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삶의 질, 우리는 모두 높은 삶의 질을 살고 싶어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삶의 질을 높입니까? 좋은 것을 소비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씀으로써, 좋은 차를 탐으로써 이렇게 삶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다는 아니겠지만 여러분 대부분이 젊었을 때보다 지금 좀더 잘 사실 겁니다. 젊었을 때보다 지금 좀더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것, 우리가 지금까지 배웠습니다. 모든 것은 관념적으로 해석됩니다. 내 마음자세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됩니다. 거기에 대한 판단도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좋은 것을 쓰고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스스로 경험적으로 압니다. 아무리 많이 써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는 변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다릅니다. 접근법이 다르죠. 우리는 마음의 질을 높임으로써 삶의 질을 높입니다. 수행자는 마음의 질을 높이면서 삶의 질을 높입니다. 무엇이 절대적이겠습니까? 무엇이 본질적으로 삶의 질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의 질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하는 활동,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은 좋은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길러감으로써 여러분 삶의 질은 높아져가는 것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이 항상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해가고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좀 비인간적이지 않은가? 자기만 신경쓰고 자기만 좋아지려고 그러고 그렇게 해가는 그 사람은 비인간적이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어느 수행자가 제 스승이신 우 떼자냐 사야도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봐야 됩니까?” 사야도 왈 “대상으로 봐라.” 그러자 그 수행자가 “그러면 너무나 비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사야도 왈 “그것이 진짜 인간적인 것이다.” 사야도의 지혜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 정말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적이다, 좀 따져봅시다. 무엇을 가지고 인간적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사람과 함께 사회를 살아갑니다. 서로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위해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해주고 행동해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흔히 사회적 관념 속에서 다른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화가 나면 나도 화가 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내 애가 있습니다. 애가 밖에서 맞고 들어왔습니다. 그걸 보면 화가 납니다. 당연히 화가 날 거예요. 화를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는 사람, 화난 마음에서 그 애한테 그 애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줍니다. "이래이래서 이래", 그리고 그 애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해줍니다. "이러이렇게 해." 이렇게 말합니다.
화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스스로 화났을 때 화가 어떤 작용을 합니까? 화가 어떻게 말하라 하고 화가 어떻게 하라고 시킵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던가요? 화가 바르게 그 상황을 해석했던가요? 화가 난 상황에서 어떤 해석을 해서 해석의 결과물이 있습니다. 나중에 화가 없어졌을 때 그 상황을 다시 한번 봐보십시오. 화가 한 해석은 아주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는 나쁘게밖에 못합니다. 파괴하는 것밖에 못합니다. 그러면 내 애에게 말해준 그것, 그때의 화, 우리 화를 여러분 나름 관찰해보셨습니다. 화의 마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동일한 마음의 성질입니다. 내 자신에게 화났든, 내 아이의 상태에 화냈든, 사회정의에 화났든 화란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화의 성질은 동일합니다. 화는 나 자신을 위할 수가 없습니다. 화는 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내가 애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준 그 설명이 바를 리가 없고 그 애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한 그 어떤 조언이 바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화로써 한 그런 것들이 그 애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습니다.
욕심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의 애가 있습니다. 성적표를 들고 왔습니다. 점수가 아주 낮습니다. 화가 나고 잘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일어납니다. "이래이래 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한번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그 애가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그 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그 애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겁니다. 욕심이 우리를 위할 수 없듯이 욕심이 다른 이를 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애가 맞고 들어왔어요. 화가 났어요. 화를 보는 게 익숙합니다. 수행에 능숙한 사람을 예를 들어봅시다. 화를 보는 데 능숙합니다. 화는 워낙 강한 자극이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습니다. '화났구나'라고 압니다. 자연의 이치라고 알아보려고 합니다. 자기의 지혜의 크기만큼 좀 객관적이 됩니다. 화의 지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스러워집니다. 어느 정도라고 하는 이 자유스러움은 바로 평온의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의 지혜의 크기만큼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그러면 그 애에 대한 집착이 줄어듭니다. 그 애의 상황에 대해서도 그렇게 집착하는 마음이 평온의 마음의 힘만큼 줄어듭니다. 그러면 내가 그 상황에 빠져서 그 상황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물론 지혜의 크기만큼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느낌을 볼 때 객관적으로 봐나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이 느낌을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 이렇게 볼 때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봅니다. 이렇게 보는 마음의 상태랑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똑같습니다. 이렇게 그 상황을 나의 지혜의 크기만큼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집착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애에게 "이러이러하게 해라"라고 말해줍니다. 그것은 내가 그 상황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적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대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생각하면서 해주는 말입니다. 그 말들은 그 사람을 위해서 해주는 말입니다. 근데 이렇게 해주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지혜의 크기만큼 적습니다. 그 대상이 내가 이렇게 말해주는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내 마음의 충격은 그 지혜의 크기만큼 크지 않습니다.
욕심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욕심의 마음 또한 아까 그 상황에서 애가 성적표 들고 왔는데 내가 이렇게 해석해주고 잘하라고 충고해줄 때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 이렇게 마음이 분리됩니다. 마음이 떨어집니다.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 상황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충고를 해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을 말해줍니다. 또 마찬가지로 내가 말해준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따르지 않더라도 내 마음의 충격은 별로 없습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내 지혜의 크기만큼 그렇단 얘깁니다.
그럼 두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화가 있는 사람, 욕심이 있는 사람, 번뇌로 가득한 사람은 자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번뇌라는 마음 자체가 나와 아주 강하게 동일되는 마음입니다. 욕심으로 말하고 화로 말하는 사람은 내 중심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화난 그 내용을 해석하고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그것을 원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인간적입니까? 내 주장만 하는 사람,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주지 않는 사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정말 비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정말 번뇌가 강한 사람이 비인간적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 원하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인간적인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정말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수행하는 사람과 수행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길을 아는 사람과 길을 모르는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적인 어떤 삶의 장면들을 만납니다. 이런 삶의 장면 장면마다 그 장면들, 그 상황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수행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수행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단지 살아왔던 어떤 관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지하철이 있습니다. 지하철에 탔습니다. 막 붐빕니다. 수행을 안해본 사람,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은 붐벼서 이렇게 다른 사람과 막 부딪힐 때 그는 그 느낌을 괴로운 느낌이라고 압니다. 화가 납니다. 마음에서 화가 일어납니다. 그 화는 다시 그 상황을 더 화날 수 있는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화는 원래 그런 작용을 합니다. 그럼 그에게 화는 점점 커집니다. 그는 거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를 모릅니다. 어떻게 그 상황을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갖고 있는 해결책은 단 하납니다. 거기서 빨리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 다른 곳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 또한 욕심입니다. 그는 화를 피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욕심밖에 없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 상황에서 전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수행에 능숙한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배운 것입니다.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붐비는 지하철 속에서 부딪힙니다. 느낌들이 있습니다. 화가 일어납니다. 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습니다. 우리의 중생 수준에서. 화가 일어나면 화를 압니다. 여러분은 화를 봐봤습니다. '화났구나'라고 압니다. 그때 ‘아, 화가 났구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지. 내게 알아지는 대상이지’라고 화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화를 지켜볼 때 화와 마음은 어느 정도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어나는 느낌들을 단지 느낌으로 봐나가려고 합니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고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길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고통을 빨리 버리고 즐거움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를 그 문제 안에서 그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옳으려는 사람이고 선하려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다릅니까? 단지 고통받는 사람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공자께서 사람들을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서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대인과 소인입니다. 대인이라고 하면 옳은 것을 구하는 사람을 대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의를 구하는 사람, 대인. 소인이라고 하면 이를 구하는 사람, 이익됨을 구하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대인, 의를 구하는 사람, 수행하는 사람만큼 의를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수행을 해나가는 매 순간순간마다 옳은 것을 구해갑니다. 바른 것을 구해갑니다. 공자께서 좀더 완성된 인간형을 대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대인입니다. 수행할 때 여러분 자신을 한번 봐보십시오. ‘아, 이건 자연의 이치야’ 아무리 아파도 ‘자연의 이치야’, 아무리 화나도 ‘아 이건 자연의 이치야. 대상이야. 저 사람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내 마음의 견해 때문에 화난 거야’ 얼마나 바릅니까? 얼마나 착합니까? 이 이상의 대인이 어디 있습니까? 공자님은 사실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 방법을 잘 안가르쳐줬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리 갖고 싶어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바른가 그른가? 옳은가 그른가? 적당한가 적당하지 않은가?' 알아차림을 통해서 이것을 생각해보고 여러분은 행동하십니다. 진짜 좋은 사람들이죠 우리는. 우리는 대인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습니다. 점점 더 큰 대인이 돼갑니다. 점점 더 옳은 사람이 돼갑니다. 점점 더 바른 사람, 선한 사람이 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방법, 그게 바로 우리가 이렇게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행하십시오.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꿔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바꿔가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수행을 정말 잘해서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되겠다, 어떤 나의 모습을 상정하면서 수행하지 마십시오. 미래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있는 것은 지금 현재만 있습니다. 수행은 지금 이 현재 현재 현재의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행의 완성 또한 이 현재에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이 시간에 알아차림이 있고, 바른 견해가 있고, 마음의 고요함이 있다면 현재 이 시간에 여러분의 수행은 여러분의 마음의 힘만큼 완성된 겁니다. 다른 것은 하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이 순간, 이 현재의 시간에 수행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이 현재의 시간에 여러분 수행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자세에서도 여러분 마음에 알아차림, 바른 견해, 마음의 고요함 이것이 있다면 여러분의 수행은 그 순간 그 활동 속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현재에 수행하시고 현재에 수행한 그 결과물에 만족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사야도가 발견하신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사야도의 공식, 우리 사야도께서 수행하시면서 당신이 지혜를 통해서 발견하신 뻰쭐라 규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야도께서 젊었을 때 큰 사야도, 스승의 스승과 함께 수행홀에서 수행을 하고 계셨는데 수행 상태가 아주 좋았습니다. 마음이 아주 고요했고 마음의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큰 사야도께서 좌선이 끝나는 시간쯤 들어오셔서 항상 바른 견해에 대해서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 법문을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하루는 큰 사야도가 들어와서 법문을 하시는데 사야도께서 그 법문을 유심히 듣고 계셨습니다. 그때 수행홀 바깥에서 누가 발을 씻는다고 수돗물을 아주 크게 틀었습니다. 그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큰 사야도 법문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마음에서 아주 강한 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물소리 나는 곳으로 마음이 달려가면서 마음에서 막 욕하는 말이 막 나왔습니다.
당신이 순간 생각하시기를 '좀전까지 그렇게 편했는데, 마음이 편했고 마음이 지혜가 충만했었는데 왜 지금 이렇게 마음이 힘든가'라고 생각해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일어났던 마음의 작용들, 일어난 생각들 이런 것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주 분명한 이해가 생기셨습니다. 당신이 큰 사야도의 법문을 소리로서, 법으로서 알지 못하고 집착하는 좋아함으로, 좋아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만큼 좋아하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10만큼 화가 나는 것이고 100만큼 좋아하면 그것이 자기 뜻대로 안됐을 때 100만큼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뻰쭐라 규칙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고난 뒤부터는 당신이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 당신에게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면 괴로움이 뒤따라오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사람이 부처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행복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슬퍼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비통해한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좋아함은 다 집착의 좋아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좋아하면 더 괴롭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가장 좋아하십니까? 누구를 가장 사랑하십니까? 대체로 나의 가족, 나의 아들 딸, 나의 배우자를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한다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겁니다. 여러분, 누구 때문에 진짜 괴롭습니까? 누구 때문에 정말 뼈저리게 고통스럽습니까? 나의 아들 딸, 나의 배우자, 나의 가족 때문에 정말 뼈저리게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아픈 고통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배우자, 우리 가족, 우리 아들 딸보다 더 좋아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나 자신입니다. 경전에도 부처님께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좋아합니다. 나의 아들 딸이지만 ‘나의’라는 말이 들어가기 때문에 좋아하는 겁니다. ‘나의 뭐’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집착의 사랑은 다 그렇습니다. 실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럼 뺀쭐라 규칙에 대입해서 우리는 누구 때문에 가장 고통스럽습니까?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이 나 자신 때문에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나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정말 나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알아가야 됩니다. 정말 문제는 내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왜 여러분 때문에 괴로운가? 여러분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단순히 난 어떤 존재다라고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이해해가면서 실제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 여러분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관찰하시고 이해해가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이해해가고 알아갈 때 여러분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내 자신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 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관찰해가시면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이해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 6박7일 동안 여러분 수행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모쪼록 이 수행 기간이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우리 자신을 알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이해해가면서 삶을 좀더 보람차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