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9/05

고 박종태 열사 투쟁 승리 결의대회 (09/05/09,대전)

고 박종태 열사 미망인 하수진씨가 고인에게 붙이는 편지

 
  
▲ 고 박종태 열사 미망인 하수진 씨가 고인에게 붙이는 편지 9일 오후 대전 대한통운 대전물류센터 앞에서 열린 '박종태 열사 투쟁승리를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에서 고 박종태 열사 미망인 하수진 씨가 고인에게 붙이는 편지를 낭독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박종태

 

 

여보! 오랜만에 불러보네. 나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 당신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병원에 걸린 사진 속에서 당신이 튀어 나올 것만 같고, 다른 화물연대 조합원들처럼 바쁜 듯이 걸어 들어올 것만 같고, 큰 아이 말처럼 당신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아.

 

아이들에겐 사람은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된다, 다만 언제 죽게 될지 모를 뿐인데, 아빠가 조금 빨리 가신 것 같다고 말했으면서도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받아들여지지가 않네.

 

체포영장이 떨어진 날, 입을 옷가지들을 챙겨서 보냈는데, 속옷이 마음에 걸려서 싸구려가 아닌 좀 좋은 것으로 줄려고 사다 놓은 속옷이 아직 서랍장에 그대로 있을 텐데...

 

여보 생각나? 작년 12월 마지막 날 눈이 너무도 이쁘게 와서 정말 모처럼 만에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걸으면서 '나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지?'하고 했던 말, 나 그때 그냥 웃기만 했는데 말해 줄걸 그랬어. '그래 당신 괜찮은 사람이다'.

 

당신이 사랑했던 동지들도,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지금 보게 되면서 늦었지만 알게 돼. 당신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보. 아직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지만, 걱정하지마. 나 아직 잘 견디고 있고, 당신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당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지만 보태려고 노력하고 있어.

 

당신이 정말 마음 놓고 웃으며 편안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당신을 좋은 사람으로 간직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당신이 가는 마지막 길이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당신의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살아갈게.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을 궁지로 몰아서 죽인 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밥줄을 끊겠다'는 둥, '질서를 지키라'는 둥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인간입니까? 사람을 죽여 놓고 협상은커녕 사죄도 그 어떤 것도 하고 있지 않는 대한통운과 금호는 누구를 위해서 아름다운 기업입니까? 고인은 아직 깜깜한 어둠속에서 차디찬 얼음장 속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편이 사랑했던 대한통운 택배 조합원 여러분, 그리고 화물연대 조합원 여러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죄인은 여러분들이 아니라 저 뒤에 숨어있는 자들입니다. 더 이상 슬러하는 대신에 일어나서 싸워주십시오. 고인의 유언대로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대접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싸움을 이어가야 합니다. 남아있는 저희 가족이 살 수 있는 것도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나무에 리본을 단 이유
고 박종태 열사 투쟁 승리 결의대회... "고인 유언처럼 악착같이 싸우자"
오마이뉴스 09.05.09 20:54 ㅣ최종 업데이트 09.05.09 21:32  장재완 (jjang153)  
 

대전 대덕구 읍내동 대한통운 앞 삼거리가 검은 옷에 검은 리본을 단 5000여명의 노동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들은 대한통운으로부터 계약해지 된 78명의 택배노동자들의 복직투쟁을 이끌다가 지난 3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 고 박종태씨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

'노동기본권 보장, 비정규직 철폐, 노동탄압 중단, 운송료 삭감 중단, 해고자 원직복직, 고 박종태 열사 대책위원회'는 9일 오후 대전 대한통운 대전물류센터 앞에서 '박종태 열사 투쟁승리를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지난 6일 1000여명이 모여 제1차 투쟁결의대회를 개최한 화물연대를 비롯한 노동계는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 등 제 진보진영 전체가 참여하는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이날 첫 투쟁결의대회를 마련한 것.

 

대한통운 정문을 가로막고 대형 무대가 설치됐고, 5000여명의 노동자들은 읍내삼거리 도로 전체를 점거한 채 대오를 갖춰 자리했다. 이들은 '근조'라고 쓰인 검은색 리본을 가슴에 달았고 '박종태를 살려내라', '대한통운 박살내자'라고 쓰인 손 피켓을 들었다.

이날 결의대회에는 임성규 민주노총위원장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심상정 전 진보신당 공동대표, 이수호 민주노총 최고위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등 진보진영 주요인사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별 민주노총 간부와 조합원들도 참석했다.

고인에 대한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시작된 이날 대회는 경과보고와 대회사, 문예공연, 추모사, 유족인사, 투쟁사, 상징의식, 거리행진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대회사에 나선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박종태 열사는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뒷걸음질 치면서 거기에 깔려 죽은 것"이라며 "지금도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 수레바퀴에 손이 잘리고 발이 잘리고 목숨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 이 땅은 모든 진보세력들이 지난 5월 1일 노동자대회를 기점으로 하나가 되어 총력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면서 "노동자를 탄압하는 이명박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리고 대한통운과 금호그룹을 심판하기 위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말했다.

 

임 위원장의 뒤를 이어 추모사에 나선 이는 정영신씨. 그녀는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고 이상림씨의 며느리다. 검은 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 그녀는 "박종태 열사의 소식을 듣고 정말로 가슴이 아팠다"면서 "왜 힘없는 철거민과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하는지, 원망스럽고 한스럽다"고 말했다.

"살려고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을 죽인 이명박 정권, 일하고 싶어서 싸워야 했던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은 그들은 사죄해야 한다. 용산참사가 110일이나 지났지만 저희 유가족들 지치지 않았다. 여러분들도 지치지 않고 싸워서 반드시 고임의 염원을 이루어 달라."

 

정씨를 이어 박종태 열사의 미망인인 하수진씨가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인에게 쓴 편지를 낭독했다.  

하씨는 "여보, 오랜만에 불러 보네"로 시작된 편지에서 "아직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지만, 걱정하지마, 잘 견디고 있다"면서 "당신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당신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작은 힘이지만 보태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씨는 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지 말라"면서 "고인의 유언대로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하씨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참가자들은 일제히 눈시울을 붉히며 고인을 추모했다.

 

 

투쟁사에는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와 심상정 전 진보신당 공동대표가 나섰다. 먼저 강 대표는 "비정규직과 특수고용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자본가들,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경찰이 또 다시 한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면서 "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이명박 정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심상정 전 대표는 "박종태 열사의 죽음은 노동자 대우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과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설움을 대변한 죽음이었다"면서 "7살과 10살 자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눈을 감아야 했던 젊은 노동자의 죽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결의의 시간을 통해 ▲ 노동기본권 보장 ▲ 비정규직 철폐 ▲ 노동탄압 중단 ▲ 운송료 삭감 중단 ▲ 집단 해고된 화물연대 대한통운택배 조합원 전원 복직 등을 촉구했다.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는 '상징의식'으로 고인이 목숨은 끊은 인근 야산의 현장과 주변 나무에 노란색 리본을 묶고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노란리본에 "종태야 잘가라", "네 몫까지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마" 등의 문구를 적어 놓았다.

상징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참가자들과 경찰이 몸싸움을 벌이면서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또한 대한통운 건물의 현관과 유리창이 파손되기도 했으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 '박종태 열사 투쟁승리를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마친 5000여 노동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박종태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200여개의 검은 만장을 앞세워 고인이 안치된 대전중앙병원까지 1.7km의 도로를 따라 행진한 뒤 모든 일정을 마감했다.

한편,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날 오전 민주노총 대전본부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오는 16일 같은 장소에서 전국 노동자 1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16일까지 대한통운측의 사죄와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원직복직 처리가 되지 않을 경우, 서울에서 대규모 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전국적인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출처 : 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나무에 리본을 단 이유 - 오마이뉴스
 

 

  
▲ '박종태 열사 투쟁승리를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마치고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는 참가자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박종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B-H.Levy가 본 사르트르와 좌파

베르나르-앙리 레비(BHL)의 책, <사르트르의 세기>(Le Siècle de Sartre (2000))의 한국어 번역본에 대한 고명섭의 서평 마지막 부분만 옮겨온다. "공산주의로 경도된 '후기 사르트르'는 실패다" 라고 책이 말하는 모양인데, 레비든 사르트르든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점은 좀 생각해 볼 거리(가치)가 되겠기에 약간만 살펴본다.

레비가 내린 이런 판단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출세작이자 처녀작이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La Barbarie à visage humain (1977)) 이라는 책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Ce grand cadavre à la renverse (2007)) 라는 책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겠다. 뭐 별 거는 아니고, 1977년에는 좌파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야만으로 본 모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는 사르코지가 아닌 사회당을 지지하니 스스로 좌파를 자처하는 듯하다. 아주 유명하고 활동적인 사람이라지만 좌파적 실천에서든 이론에서든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고로 나도 별로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워낙에 인구에 회자되니 상식삼아 알아는 본다. 위키 소개상 눈에 띄는 것으로는, 레비가 68년에 입학한 빠리고등사범에서 알튀세르에게서도 배웠고 그 출발은 스피노자와 헤겔이었으며 입학 후 3년만에 획득한 교사자격시험에 8등으로 합격했다니, 천재성은 인정할만 하겠는데 그 후의 통속화(?) 과정이 좀 안타깝다는 느낌이다. 하여튼 관련 글 찌라시들을 밑에 둔다 (둘 다 선호대상이 아니므로 모든 그림은 생략).

(...) 1952년 이후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운동의 동반자가 되고 스탈린주의 소련을 옹호하며 마오쩌둥주의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된다. 완전한 자유를 주창하고 그것을 실천하던 전기의 ‘실존주의자’ 사르트르가 여기서 자신을 이념과 운동에 구속시키는 존재가 된다. 그런 변신의 바탕을 철학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이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저작은 후기 사르트르의 사유가 집적된 대표작으로 평가받지만, 지은이는 이 책이야말로 사르트르의 철학적 실패를 보여주는 저작이라고 단언한다. 사르트르가 헤겔이라는 거대한 정신에 맞서 일대 결전을 벌였지만 그 헤겔에게 패배한 뒤 헤겔주의의 동일성·주체성 철학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그런 패배의 정치적 발현이 교조적 좌익 운동 투신이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전기의 실존주의 자유 투사 사르트르를 사랑하고 후기의 공산주의 동반자 사르트르와 거리를 두려 한다. (고명섭 기자, 사르트르의 ‘허리’에서 시작해 ‘사유’에서 맺다 / <사르트르 평전>베르나르앙리 레비 지음·변광배 옮김/을유문화사·3만5000원, 2009-05-08 오후 09:03:14 ⓒ 한겨레)

 

"1977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교조적인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신철학’의 기수로 나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꼭 30년이 지난 2007년,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를 내놓았다.(프로네시스 동시 복간 및 출간) 그 냉소와 독설은 여전하나, 비관주의로 일관하던 화법에는 다소 힘이 들어갔다.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CE GRAND CADAVRE A LA RENVERSE”(원제인 이 말은 1960년 사르트르가 폴 니장의 소설 『아덴 아라비』의 서문에서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것)로 은유한 좌파를 자처하며, “일어나 다시 걸을 것”을 주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 사르코지와의 통화에서 출발한 레비의 이 긴급한 호소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지지를 호소한 사르코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를 했는지에 대한 레비의 변이자, 사르코지 내각으로 투항한 구좌파, 선거에서 패배한 중도좌파, 무기력하거나 무책임한 극좌파에게 던지는 청원서이다. 좌파의 몰락을 직시하고 좌파의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말한다].  (...) “자유와 인권”을 최상위 가치로 여기며 “혁명은 과연 바람직한가”를 되묻고(제2부)[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변광배 (옮긴이), 웅진, 2008], “나는 책임 있는 사회주의자가 좋은 자유주의와 나쁜 자유주의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창조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양산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하는 레비는, 말하자면 자유주의적 좌파에 가깝다."

출처: 알라딘 책소개에서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82926

 

 

Bernard-Henri Lévy (né Bernard Levy le 5 novembre 1948, à Béni Saf en Algérie), surnommé BHL, est un intellectuel engagé, écrivain, journaliste, essayiste, metteur en scène de théâtre, cinéaste, homme d'affaires et éditorialiste présent tant sur la scène publique nationale qu'internationale. Après avoir passé plusieurs années au Maroc, sa famille s'installe à Neuilly-sur-Seine en France en 1954. Son père, André, a fondé La Becob, une société d’importation de bois africains qui a été rachetée par le groupe Pinault-Printemps-Redoute en 1997. Après des études au lycée Pasteur de Neuilly-sur-Seine puis deux années préparatoires au lycée Louis-le-Grand,

 

1968) il entr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de la rue d’Ulm où il a comme professeurs Jacques Derrida et Louis Althusser [Les philosophes qui ont formé sa réflexion sont : Hegel, Spinoza, Louis Althusser et Emmanuel Levinas. Il rapporte à propos de Hegel l’« éblouissement » qu’il a éprouvé en découvrant la langue et la pensée hégéliennes en particulier la vision hégélienne de l'histoire. Son professeur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Althusser, l’a amené à apprécier les subtilités de la métaphysique de Spinoza et les liens étroits reliant le théologique au politique.] Il publie un premier article dans la revue Les Temps modernes intitulé "Mexique, nationalisation de l'impérialisme" suite à un séjour au Mexique en 1969. En 1971, il est reçu huitième au concours d’agrégation de philosophie. En septembre de la même année, il écrit dans Combat un long reportage consacré à l'Irlande du Nord ainsi qu'une série d'articles et d'enquêtes sur le monde paysan français dont la thèse rejoint la problématique maoïste et montre comment la lutte des classes s’invite dans les provinces françaises. En 1976, il est l'une des têtes de file du mouvement des « nouveaux philosophes » constitué de philosophes et intellectuels engagés. Depuis, cette dénomination est restée attachée à son œuvre. Il tient un Bloc-notes hebdomadaire dans le magazine français Le Point.

1977) Mais c'est la publication chez Grasset, en mai 1977, de La Barbarie à visage humain qui marque l'émergence du phénomène "BHL". Dans cet essai, Bernard-Henri Lévy analyse aussi bien les effets du fascisme que de la version totalitaire du socialisme d’État pour tenter d’en faire un bilan pour la période contemporaine. La Barbarie à visage humain dénonce la tentation totalitaire inhérente à toute "idéologie progressiste". BHL, à la fois dans la dénonciation du fascisme et du communisme historique, se présente comme le représentant d’une génération venue après la double catastrophe du fascisme et du stalinisme et désireuse de repenser la politique en sortant des schémas totalitaires. Présentant ce livre, BHL déclare alors : « Chacun sait aujourd'hui que le rationalisme a été un des moyens, un des trous d'aiguille par quoi s'est faufilée la tentative totalitaire. Le fascisme n'est pas issu de l'obscurantisme, mais de la lumière. Les hommes de l'ombre, ce sont les résistants... C'est la Gestapo qui brandit la torche. La raison, c'est le totalitarisme. Le totalitarisme, lui, s'est toujours drapé des prestiges de la torche du policier. Voilà la "barbarie à visage humain" qui menace le monde aujourd'hui[2]. » Cet essai déclenche de nombreuses réactions et controverses.

1979) Depuis Le Testament de Dieu, publié en 1979, Bernard-Henri Lévy a puisé les sources de sa philosophie dans les textes de Franz Rosenzweig et Levinas. Sa philosophie s'inscrit dans le combat contre le Mal, la lutte contre le fanatisme et l’antitotalitarisme.

2000) il publie Le Siècle de Sartre aux éditions Grasset
2007) dans son livre sur le Parti Socialiste Ce grand cadavre à la renverse (Grasset), il analyse la tentation anti démocratique de la gauche française.

 

출처: wikipedia.f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故 박종태]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참고 견디겠다" -한수진-


故 박종태 씨 아내 한수진 씨 "고인의 뜻 이뤄질 때까지 참고 견디겠다"

다음은 이날 기자 회견에서 밝힌 한수진 씨의 발언 전문이다.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몇 시간 후면 내가 만나 얘기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여기 저기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기도 어렵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왜 다른 아빠와 달리 우리 아빠는 우리랑 안 놀아주냐'며 떼쓰던 아이들에게…. 마침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지만 내일은 우리 아들 생일이다. 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많은 일들을 하면서 아이들 아빠가 많은 추억을 남기고 가준 것 같아서 고맙다. 작년 아들 생일에는 나에게는 한 번도 안 끓여준 미역국도 끓여줘서, 그나마 추억을 갖고 있게 해줘서 고맙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참고 견디겠다.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멀쩡했던 두 아이 아빠를, 단란했던 가정을, 이렇게 만든 금호자본과 그것을 방조한 정부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라면 하루 빨리 나타나서 사죄해야 한다. 또 다른 열사가 생기기 전에 더 큰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두 다리 뻗고 자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와서 사죄하기를 경고한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는 왜 죽어야 했나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5-06 오후 4:54:34

 

아들 생일에 손수 미역국을 끓여주던 다정했던 아빠였다. 두 아이와 자신만 남겨두고 떠난 남편에게 아내가 "그래도 추억을 남겨주고 가서 고맙다"고 꾹꾹 울음을 참아가며 얘기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지난 3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화물연대 광주지부 1지회장 박종태 씨는 구두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78명 택배 기사와의 계약마저 해지한 대한통운과 싸우고 있던 중이었다. 본인은 대한통운 택배 기사도 아닌, 25톤 화물차를 운전하는 노동자였다. "일체의 대화를 회피"하는 대한통운 탓에 "파업 아닌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대한통운 소속 조합원의 갖게 된 절망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난 달 30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한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열 살 딸 아이와 일곱 살 아들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아들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지난 2007년 10월, 법으로 보장된 "단체 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기공 정해진 씨의 죽음 이후 불과 2년도 못 돼 또 다시 노동자가 노동 3권을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6일 한 목소리로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며 '고 박종태 열사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함께 싸울 것을 다짐했다. "대한통운으로부터 계약해지된 78명의 원직 복직 등이 이뤄지기 전까지 장례도 치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한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는 택배 기사와 달리 본인은 여러 회사의 물량을 운송하는 25톤 트럭 운전 기사였지만, 박 씨는 지회장으로 대한통운 기사들의 투쟁을 이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난 23일 체포영장이 발부되기도 했던 박 씨는 지난달 30일 한 정당 게시판에 죽음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박 씨는 이 글에서 "현재 적들은 죽음을 요구하고 있다"며 "투쟁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면 바쳐야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주검으로 발견된 것.

 

이후 발견된 유서에서 그는 "나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최소한 화물연대가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서 전문] "시대가 노동자에게 죽음을 요구"

다음은 박종태 씨가 남긴 유서의 전문이다.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제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 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리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 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 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 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운수노조 등에 따르면 대한통운은 지난 1월 노조와 구두로 수수료를 건당 30원씩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양 측은 2월 시행을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외려 3월 15일 대한통운은 "본사의 방침"이라며 "합의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노조에 통보했다. 이튿날 노조는 회사에 대한 항의의 일환으로 분류 작업을 거부했다. 김종인 운수노조 위원장은 "택배를 분류하는 것은 계약서 상 택배 기사의 업무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간 관행으로 택배 기사가 별도의 수당 없이 진행해 왔던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회사는 이들의 '항의'에 "근무지 이탈"이라며 "12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전원 해고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다시 오후 3시 경 "저녁 6시 전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자동 계약 해지됨을 최종 통보한다"는 문자가 조합원들에게 날아 왔다. 또 하루 뒤인 17일, 회사는 내용증명 우편으로 해고 통보서를 보냈다. 화물연대 심동진 사무국장은 "대한통운은 집단 계약해지 이후 노조와 비공식 대화마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초 단 한 차례 노조와 마주 앉아 임금 등 근로조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대한통운 소속 PD직으로 고용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심동진 국장은 "대한통운은 PD직이 되면 택배 기사가 산 화물차의 소유 관계나 물량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전혀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화물연대를 탈퇴해야 대화할 수 있다고만 되풀이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한통운은 화물기사들의 수입과 직결된 운송료 삭감의 선두주자"라는 것이 운수노조 관계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택배 뿐 아니라 컨테이너 운송료도 대한통운이 한진, CJ 등 다른 물류운송 업체보다 가장 먼저 깎아 왔다는 것. 박 씨를 죽음으로 내몬 이번 사태도 대한통운의 이런 경영 전략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노동계의 분석이다.

 

노동계는 또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물기사 등 특수고용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정부 정책이 이들을 더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얘기다. 올해 초 노동부는 실제 덤프트럭과 레미콘 차주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볼 수 없다며 관련 노조에 시정을 요구했다. 신고필증을 반려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는 이들 화물 기사들이 자기 차를 가지고 영업을 하는 사람이므로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 주장은 다르다. 회사와 맺는 '화물운송 계약'은 형식적으로만 파트너 관계로 포장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종속적인 업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택배 기사의 경우 한 회사와 계약을 맺고 그 회사의 물건만을 나르고 있는 데다, 출근 시간이나 휴가도 자율적이지 않다는 것이 노조 주장이다. 때문에 민주노총은 이런 정부 정책을 놓고 "수 년 동안 합법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음에도 이제와 신고필증 반려 운운하는 것은 건설노조와 운수노조에 대한 탄압 이외에 해석할 길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1일 노동절 대회에서 "이들 노조의 신고필증을 반려할 경우 민주노총은 설립신고필증 반납을 통한 특단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었다.

 

여기에 대한통운 택배 기사들의 싸움 과정에 개입한 경찰 등 공권력의 태도도 박 씨가 절망한 이유의 한 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운수노조 위원장은 "경찰은 신고 인원보다 많이 왔다고 집회 참가자를 무조건 연행하고 1인 시위자까지 병력을 동원해 둘러싸는 등 과도한 진압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이 박 씨의 죽음에 대해 "고인은 거꾸로 가는 역사의 칼날에, 이명박 정부가 휘두르는 민중 탄압의 철퇴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임 위원장은 "또 고인은 그런 이명박 정부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우리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이라며 '총력 투쟁'의 뜻을 밝혔다.

 

박 씨의 아내인 한수진 씨도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비통해하거나 슬퍼하지만은 않겠다"며 "고인이 남기고 간 뜻이 이뤄질 때까지, 아이들이 아빠의 뜻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까지 참고 견디겠다"고 말했다. 이날 화물연대는 1000여 명의 간부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통운 대전지사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었다. 오는 9일에는 역시 같은 곳에서 민주노총 등 '대책위' 주최로 집회가 열린다. 매년 5월 18일 즈음에 개최하던 '5.18 정신 계층 전국 노동자대회'도 이번에는 광주가 아닌 대전에서 여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화물연대는 총파업까지 검토하고 있다. 김달식 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장은 "아무리 힘없는 화물 노동자라지만 사람을 개처럼 부려먹고 버려서는 안 된다"며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몽둥이가 필요하다면 우리가 몽둥이를 들겠다"고 밝혔다. (여정민 기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정체성 (부평을의 경우)

[도표 출처] 오마이 김당 기자의 여론분석 기사

 

"(...) <부평신문>이 여론조사 기관 '더 피플'에 의뢰해 지난 4월 17일에서 19일 동안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진보신당 지지자 중 43.8퍼센트는 민주당 홍영표 후보를 지지했고, 12.5퍼센트만이 민주노동당 김응호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

출처 : '반MB 승리' 자축만 하기엔 허전한 무엇 - 오마이뉴스 링크


이번 보궐선거 결과 분석물들 중에서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여기서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정체성이 어느정도 느껴지는데, 내게는 과히 긍정적이지는 않다. 여론조사에서 부평을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10명 중 1명만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고, 4명은 홍영표라는 노무현 정부 시절 'FTA 국내대책본부장'을, 나머지 5명은 아마도 기권을 선택했다. 물론 최종 투표에서야 '폭력과 야만의 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대의에 따라서 비판적 지지로 '구 FTA 국내대책본부장'이든 뭐든 당선 가능한 민주당 후보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우리적 상황논리에 충분히 공감을 하지만, 지지하는 후보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1명만이 '진보 후보'를 지지한다는 것, 아니 10명 중 9명은 -좀 과장하여 말하면- 진보든 뭐든 민노당은 무조건 싫다고 표명한 것인데, 여기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밖에는 안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민주노동당 측에서 울산과 비교하며 서운한 감정을 갖기에는 그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겠기에(많다니)  참기로 하고(*), 단지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정체성이 과연 얼마나 진보적인가 하는 점이다. 같이 진보니까 무조건 대동단결하고, 비슷하게 같은 적을 뒀으니 무조건 우린 친구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종북이든 패권이든 맘대로 정의하고 맘대로 비판하는 것은 다 좋은데, 그런 감정에 너무 충실하느라 나중에는 미운 놈이 사용하는 것이면 그것이 좌파적 가치든 뭐든 상관없이 무조건 배척하는 사태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세부적인 정강지침에서야, -어제 손호철의 말마따나- 한 쪽에서는 30-40년대의 쾌쾌묵은 골수 사회주의(공산주의)를 하고, 다른 쪽에서는 21세기적 첨단의 생동(생태-환경) 사회주의(사민주의)를 하면서 서로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런 구체적 실천 방향의 차이로 말미암아 좌파의 기본적(근본적) 가치까지도 도매금으로 매도해서는(팔아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주적 앞에서 함께 어깨 걸고 싸우는 동지가 되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이런저런 내부 역학도 있으니 이런 과잉의 희망은 버리더라도, 적보다도 내부의 경쟁자를 더 미워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좌파적 가치에 대한 충실성이나 진지성이 결격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진보신당은 전체당원의 60%가 민주노동당과는 무관한 신규 당원이라고 자랑을 하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60%의 상당 수는 수도권-중산층(최소한 화이트칼라)-먹물(최소한 책 읽는 자)의 축선상에 있을 듯하고, 그들이 갖는 좌파적 신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지에 나는 약간 의문이 든다. 아마도, 이런 부실한 신념이 위의 여론조사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면, 신념과는 무관하게 전혀 길들지 않은 천연의 감정에만 충실한 일종의 가족주의자들이 레디앙의 마구잡이 댓글러들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가족주의도 '수도권-중산층-먹물'과 약간은 친족일 것이다).

 

(*) 참고로 나는 두 정당과 조금의 상관도 없는 방관자다. 굳이 선택을 하라면, 대중영합주의와 시대추종주의로 경도되어 이념적 탈색을 선호하는 진보신당 보다는 좌파적 전통과 원칙에 충실한 민주노동당을 나는 지지한다. 피디와 엔엘의 개념 상으로는 이러한 나의 두 정당에 대한 정의가 뒤바뀌는 게 옳겠는데, 여기에는 우리적 민족주의라는 특수인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개념이 약간 혼란스런 꼴이 됐다. 

 

 


 

[내 통제권의 밖에 놓인 내 답변-댓글을 본문으로 옮겨다 둔다. 맥락을 위해 이의-댓글도 함께]

 

글쎄요  2009/05/02    #

'진보성'의 기준이 민노당 지지인 듯 한게 영 그렇네요.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자기 지지정당 후보가 없는 곳에서 후보를 선택하는 기준이 뭘까요? 1)유사성 2)현실적 가능성입니다. 진보신당 지지자들이 민노당을 자기 지지정당인 진보신당에 좀 더 유사한 성향의 정당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그들은 자기 지지정당이 아닌 정당의 후보에 대해 '현실적 가능성'측면도 따진 겁니다. 유권자로서 말이지요.
두번째, 복수의 진보정당이 있는 상황에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건 '친연관계'가 작용하거나, 혹은 그 차이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원근법'에 의해 내부자가 보는 그 차이는 외부의 관측보다 크게 보입니다. 울산에서 단일화가 논의될 때 민노당 당원게시판이 '진보신당이 진보냐, 진보신당은 조선일보나 다름없다'는 식의 극언까지 날아다니고 결국 그 후폭풍으로 박승흡 대변인이 사퇴해 버린 것은 대충 다 아는 이야깁니다. 두 당의 당원 혹은 의식적인 지지자들이 두 정당의 '유사성'과 '차이'중 무엇에 전자에 더 집중할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울산처럼 당 대 당의 차원에서 의식적 노력이라도 없는 한, 기존 지지자들의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나 경계심리를 쉽게 누그러뜨리기 힘듭니다.

 

술래  2009/05/02   #

1) 님이 지적하신 "현실적 가능성"에 기초한 지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적 '비판적 지지'의 망령까지도 기꺼이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최종투표도 아닌 '지지 후보를 묻는 여론조사'에 적용된 이 기준은 너무 지나치거나, -제가 볼 때에는- "좌파적 가치에 대한 충실성과 진지성이 결격된 결과"로 밖에는 안 보이고, 그래서 진보신당 지지자들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2) 유사성으로 따진다면야, 두 진보정당의 사이가 민주당이나 딴나라당보다는 훨씬 유사하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줄로 믿고, 중요한 것은 님께서 "친연관계"라고 표현하신, 이런 저런 이유에서 발생한 '미워하는 감정'의 반 이성적 작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님께서 "지지자들이 두 정당의 '유사성'과 '차이'중 무엇에 더 집중할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유사성으로서의 "좌파적 가치"보다는 '차이의 존중'이라는 미명으로 위장하고는 반 좌파 후보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위의 여론조사의 결과를 다시 설명한 것일텐데, 저는 이런 행태를 "일종의 가족주의"에 함몰된, 객관적 기준을 상실한 전혀 좌파적이지 못한 행동이라는 취지에서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가족주의라는 틀 속에서는 그 어떤 고상하고 준엄한 외적 가치도 침투하기 힘든 게 우리적 정서일테고, 그 속에서 이뤄지는 판단들이라는 것은 "원근법"에 의한 정확성보다는 맹목적 감성과 끈적한 피의 얽힘으로 인해 객관적 시각을 놓치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닐까요? (게시판에 걸렸다는 "극언"들에 대해서는, -저는 게시판에는 안 가봤고 주로 레디앙에서 감을 잡곤 하는데- 누가 더 하고 덜한지를 여기서 따지고 싶지는 않고 제 3자들이 더 잘 알 줄로 봅니다.)

3) "진보성"으로 따지자면야, "1930~40년대 식민지반봉건사회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적 좌파세력’이 중심이 된" 민주노동당 보다는 인터넷-디지털 시대에 선도적으로 부응하며 "‘21세기형 진보정당’을 추구하는" 진보신당이 훨씬 '진보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그 진보성이 좌파적 가치에 대한 충실성과 진지성까지 바로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여기서 다시 '진보와 좌파'라는 지겨운 구분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겠는데, 별 신빙성 없을 제 발언을 다시 반복하느니 보다는, "좌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며칠 전에 나온 한겨레 기사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 "언뜻 보기에 좌파와 우파는 단지 방향을 지시하는 것 같고, 진보 보수가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다. 좌우는 고정적인 개념인 데 반해 진보 보수는 상대적이다. 좌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들의 사상이나 현재 프랑스 좌파의 이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라는 덫 / 김제완, 한겨레 2009-04-2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52483.html)
(*) 인용: 손호철, 레디앙, 2009-04-30,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364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