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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21] [학생회론]99년 '둘의 우리 더하기 학생회론'을 생각하며-똘레랑스

1999년 '둘의 우리 더하기 학생회론'을 생각하며
- 지금에 있어서의 학생사회와 학생회론에 대한 간략한 단상-

우연한 기회에 홍세화씨의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평소에 책을 읽는 편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이상하게(?)도 술술 잘 읽혀내려가졌다. 아마 그 저변에 깔린 나의 생각은 외국이라는 곳에서 잠시나마 살아본, 다른 사회의 문화들을 접해본 나의 경험들 때문이리라 생각이 든다.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은 말은 바로 "똘레랑스'이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서로에 대한 차이, 사람이든 group이든, 사회이든 같은 것은 없다라는 전제하에 그 차이를 인정하고 여러가지 방법, 토론, 논의, 등을 거쳐서 더 큰 합을 이룰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수도 있음 또한 인정해야하는 사회의 가치'이다. 또는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다.

문득 99년 가을의 '둘의 우리 더하기 학생회'론이 떠올랐다. 당시의 나의 문제의식은 매우 얕은 수준이었으며, 동아리 선배가 이야기한 것에 수긍하고 타단위 사람과의 활동보다 내 동아리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생각으로 정리가 되었다.
당시 얕았지만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혹시 지금의 학생사회의 위기 좁게는 학생회에 대한 이야기를, 고민을 풀수 있는 데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한다.


① 우리는 그 동안 '하나'가 되어야 했다.
1) 모두 잘 알다시피 우리의 역사 속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란 대단하다. 과거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어지러울 때 마다 위정자들이 들고 나왔던 개념이 바로 '하나'이다. 외세는 나와 다른 '하나'이기에 그 '하나'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들 스스로가 하나가 되어야 했다. 또한 근·현대사에서도 위정자들은 단일민족이라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경제가 어려운 때에 허리를 졸라매어 하나가 되어 국난을 극복하자며 경제성장과 기타 여러 사상 민주화를 막아왔던 것이다.
2) 여기에는 진보(?)진영 또한 마찬가지로 작용을 하고 있다. 소위 nl의 '조국통일', '우리는 하나', '한민족', '통큰 단결' 등 이러한 개념에도 여지없이 그것은 작용되었다. 그것의 함의가 진보적 사회를 이루기 위한, 힘이 약한 민중의 단일함을 보이는것일거라는 생각은 하나, 자칫 파시즘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② 우리는 '하나'이기를 거부했다.
누가 만들었든지 간에 당시 (사실 현재와 별반 다름없음의 학생사회. 오히려 더 분화되고, 파편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 분열되어 있는 학생사회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방식은 학생운동권이 선도적으로 제기하고 나섰다. (지금 또한 그러할 것이다.)(가끔 비운동권을 표방하고 나오는 이들도 있으나 여기서는 논외로 치고,)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관념하에 '하나'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하위 단위로 치부해버렸다고 생각한다.

③지금의 학생사회를 보고 새로운 학생회론을 제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간 '이유있는 도발, 이제 마주침의 두근거림으로 오늘을 연다', '평등한 자유, 우리 청년의 공감', 'promise of Democracy'의 가치를 제시해 왔다. 이것들이 갖는 함의는 우리 활동가들의 가치를 확연히 표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옳은 가치관이다 하여도 대중에게 어필할 수 없다면... 그것이 충분히 공감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라고 외쳐도 그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수 밖에 없다.
이제 오히려 그렇게 분열화된 학생사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그 학생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구조를 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점층적 논의로 우리들의 다른 마인드가 요구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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