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다 보니, 영화 <아바타>가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하고. 그래선가,

 

영화를 보며 짠하고 안타까운 맘으로들 흘렸다는 눈물이

감상적 소비 행위의 일환으로 갇히고 말지, 아니면 현실적 개입의 정서적 지렛대가 될지는 아마도,

아래의 논설에서 말하는 가히 아바타스런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과

나름의 개입 여부에 달린 게 아닐까도 싶고.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인도 토착어들이 섞여 있다 보니

문맥상 제대로 번역을 한 건지 미심쩍은 구석도 적잖겠다 싶고..;

 

1997/98년 금융위기와 포스코의 지분변화를 둘러싼

한국과 미국의 관계와 대응 양상에 대한 설명이 꽤나 고전적이잖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다시 말해, 고전적 의미의 제국-식민지 구도로 설명하려는 뉘앙스가 짙은데,

이런 접근보단 금융화 위기를 매개로 '주권국가'들 간에 위계적 관계를 형성, 지속하는

헤게모니적 협치의 관점에서 다가가는 게 더 낫잖겠나 싶어서다.

한국산 (민족)부르주아지들이 당시 상황상 무척 후달렸다고 해도,

마냥 끌려다니기만 한 건 아녔잖나. 이 글의 설명틀을 따르게 되면,

한국적 맥락, 즉 헤게모니적 협치에 나섰던 이들의 능동성이 드러나기 어렵다는 거다.)

 

뭐.. 이런 점을 감안해서 보면, 참,

당장 대추리나 용산(들), 오릿사의 '시공간적 거리'가 멀긴커녕 이렇듯 실시간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 곳서 펼쳐질 국지적 운동들은 이런 거리를 감안한 조직화의 동선과 스탠스를

어떻게 지구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면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니(노무현 정부), 선진화와 국격 향상이니 하며

특정 세력들이 애호하는 슬로건 내지 '이념노선'들이 결코 페인트가 아니라

결국 번역된 글에서 말하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노선을 걷겠다는 것이건만,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며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라는 건지 원,

들여다 보면 볼수록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국민/민족적이 됐든, 민족적이긴 싫어 세계시민적이기로 했든 간에

이런 류의 자긍심을 과연 '관용'해야 하느냔 거다.

 

이런 관용을, 아니 이런 걸 관용이라고 수용하는 민주주의 같은 건 거부하겠다는 정치적 노선/입장이,

과연 반대를 위한 반대의 산물인 걸까? 아니면 모든 긍정적 실천과 조직화,

즉 제대로된 자유의 미덕을 널리 신장하고 고르게 살찌우기 위한 기본 전제를 말하고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후자 쪽이지 싶은데,

좋든 싫든 앞으로 지루하다 싶을 만큼 토론하고 논쟁해야 할 일이겠지만,

적어도 이런 노선이 '외통수' 취급을 받는 건 확실히 생뚱맞은 거 아니냔 말이지.

 

음.

 

***

 

포스코의 인도농민 침탈과 환경파괴, 제국주의

 

애널리티컬 먼슬리리뷰




[<애널리티컬 먼슬리리뷰>는 인도 서벵갈 지역 카락푸르에서 발행되는 <먼슬리리뷰> 자매지다. 아래 논설은 지난 2월호에 실렸다. - 편집자 주]


 

(인도 북동부 해안과 마주한) 오릿사 주는 공식통계상 거주 인구 중 39.9퍼센트가 빈곤선 이하를 살아가는 극빈 지역이지만, 투자예정 규모 면에선 구자라트 주에 이어 두 번째인 곳이기도 하다. 인도상공회의소에서 낸 공식자료에 따르면, 오리사 지역이 대상인 투자 제안은 2009년 2008억 4600만 루피 규모에 달했다. 석탄, 철과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노동력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투자 제안 중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철강과 전력 산업이었다.

 

오릿사에서 추진중인 포스코 프로젝트의 투자액은 120억 달러로, 인도에서 유치한 역대 해외 투자 중 최대 규모다. 이 프로젝트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 컨주하르와 순다가르 구역 내 세 곳에 매장된 철광석을 채취하는 일. 대법원에서 승인 권고된 순다가르 구역의 땅 6204헥타르에 대한 채광권을 임대받는 것.

 

 * 연안지역인 자가트싱푸르에 제철소를 건립하는 일.

 

* 제철소 부지와 가까운 자타드하리 강 하구에 사설 항만을 조성하는 일(포스코와 오릿사 주정부 간에 체결한 양해 각서에는 “소규모 항만”이 지어질 수 있다고만 돼 있다).


 

필요한 프로젝트가 아주 광대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미비한 제도적 틀과 긴장이 생기고 있고, 이 과정에서 지배 세력들의 면모와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이들 세력이 취하는 방식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부리는 행패란 친숙한 것들로, 지역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하고 환경을 약탈하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아래서는 지금 오릿사 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전면 금지까진 아녀도 엄격한 규제로 보일 만한 (이를테면 삼림보호법 같은) 입법절차가 현란하게 이뤄져왔다. 그러나 관련법 조문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됐고,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행정부와 사법부에서는 지배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 필요하다면 뭐가 됐든 하겠다는 식이다. 이래서 오릿사 주 농민들은 칫담바람 주식회사에서 펼친 “부족사냥” 작전 덕분에 실제로 증발하기에 앞서, 법률적으로 먼저 증발된 존재가 되는 셈이다.

 

포스코는 4004에이커 정도가 필요했는데, 이 중 농민들이 가지고 있는 건 10퍼센트뿐이다. 나머지는 정부 소유로, 공문서상으로는 “삼림지역”으로 분류돼왔다. 정부 자료로는 이 땅 대부분에서 이 지역 주민들이 수 세대에 걸쳐 땅을 일궈왔다는 점을 알 수가없다. 하지만 이는 새로울 게 없다. B.K. 로이 버만은 “인도 중부의 부족들은 왜 정치적 급진주의자가 돼왔나”(Mainstream, Saturday 17 October 2009)라는 글에서 그 현실에 대해 이렇게 운을 뗀다.


(부족민들의) 퇴거가 비자발적인 데 반해, 부족 비중이 압도적인 다수 지역에서 부족민들을 상대로 이뤄지는 토지와 자원 강탈은 용의주도하다 못해 고도로 계획적이기 때문이다. 이건 심각한 잘못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 의회에 제출된 계획위원회의 문서에선 “오릿사 주정부가 취약한 산사면 주민들이 소외받지 않도록 하는 조사마저 회피하려 해왔기 때문에” 부족민들의 권리는 이들 지역 중 삼림보호법 조항 적용이 안 되는 10퍼센트 넘는 경사면에 대해서조차 기록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위원회의 진술이 불완전하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 진술이 나오기 이전에 토지조사국 부국장은 오릿사 주정부를 옹호하면서, 토지조사국 부국장은 10퍼센트 넘는 산사면에 해당하는 땅이 침탈돼 ‘카타족 세상’이더라는 내용의 문서를 제출했었다.…

 

우리는 오릿사 지역에 대한 현지 조사에 나섰고, 1950년대 말부터 시행돼 카라푸트 같은 상당수 지역들에선 1980년대까지 이어진 토지조사 및 정착사업 와중에 땅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부족 공동체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기록한 경우는 채 1퍼센트도 안 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 농민들은 “침입자”라고 기록되며, 광물이 풍부한 숲과 산사면 지대에 사는 이들에 대한 퇴거 조치는 “적법하게” 이뤄진다. 관련 부처에서는 숲에서 사는 선주민 보호를 취지로 입안됐다고 그렇게 떠벌렸던 법조문들을, (선주민 보호라는) 똑같은 이유를 들어 (“해석을 거쳐”) 무시한다. 포스코 프로젝트에 맞서 싸우고자 조직된 POSCO PRATIRODH SANGRAMSAMITI(PRSS)에서 최근 작성한 글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각에선 이 숲 일대의 토지를 2009년 12월 30일자로 용도 전환하겠다는 입장을 마지막으로 분명히 했다.

 

이렇게 입장 표명이 됐다고 하지만 이는 뻔뻔스런 위법 행위로, 내각 스스로 내렸던 지시들과 언론과 국회에다 확언했던 것들을 거스르는 것이다. 내각이 기업적인 이해와의 적극적인 공모 속에서 국회와 인민들을 상대로 법절차 준수와 관련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래의 내용에 주목해 보자.

 

* 기술적으로 “숲”이라고 분류된, 제철소 건설부지로 지정된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수십년 동안 땅을 일구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 주민들은 삼림보호법 아래서 그같은 권리를 누려온 사람들이다.

 

* 삼림보호법 4조 5항에는 해당지역 주민들의 권리가 완전히 인정될 때까진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삼림법 공고가 이뤄진 2008년 1월 1일자로 발효됐다. 법안 3조 1항(a)에서는 삼림 거주민들이 스스로 경작하는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더구나, 3조 1항(i)과 5조는 거주민 공동체가 자기 삶의 터전인 숲과 그간 형성해온 문화적·자연적 유산을 보호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더 나아가 7조는 이들 구역에 대한 그 어떤 침범도 범죄적 공격이라고 했다. 2008년 1월 1일 이래로, 이같은 법률적 요구를 따르지 않고서 그 누구에게라도 숲을 넘기는 건 따라서 불법이다.

 

* 2008년 3월 23일, (삼림법 6조 1항에서 권리인정 절차를 이끄는 당사자로 돼 있는) 딩키아 마을의 the gram (palli) sabha에서는 권리요구절차 개시하며 나아가 마을을 구성하는 “공동체와 연계된 삼림 자원”의 경계를 정하고, 해당구역 토지의 용도 전환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것을 포함해 이 경계를 지키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숲 일대의 토지는 이제 삼림법 5조를 위반하지 않고선 건드릴 수 없다.

 

* 2009년 7월 31일,  내각에서는 이상의 법률적 요구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 홍보전단 하나를 찍었다. 이 홍보물에서는 삼림 일대의 땅에 대한 용도 변환은 해당 지역에서 삼림법 시행이 완벽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주정부의 보증 없이는 승인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완벽한 시행을 요구해온 것이, 한낱 아무 자격도 없는 이들의 주장이 아니라, 의심할 바 없이 주정부라는 데 주목하기 바란다). 더군다나 용도 변환이 되려면 gram sabhas가 동의해야 한다고도 했다. 딩키아 gram sabha는 용도 변환에 대해 이미 동의를 거부했고, 추가 동의 요구를 더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포스코에서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진척을 위해 채광 사업을 제철소 건립과 분리시켰다. 오릿사 주정부는 다른 기업체들과 지역 성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광석이 매장된 2500헥타르 규모의 칸다하르 지역에 대한 채굴권 허가를 포스코에 내줬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 기존에 진행중이던 채광 작업으로, 광범한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수천 명은 이미 심각하게 악영향을 받고 있었다. 포스코에 허가가 난 바로 그 지역에서 물을 끌어올 원천으로는 폭포가 유일한데, 그곳은 진작부터 채광사업으로 오염돼 식용으로 쓸 수 있는상태가 아니었다. 이 일대를 대상으로 이뤄진 중앙지하수자원국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다와 바르빌 강 일대의 지하수 수위는 4미터가 줄었고, 8천개 가량인 이 지역 우물 중 40퍼센트가 전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며, 관개가 이뤄진 땅 중에서 거의 절반이 더는 칸다하르 폭포로 용수를 댈 수 없는 상태다.

 

포스코 프로젝트가 시행되면 인도 중부에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삼림 지대는 전반적으로 심대한 여파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특히 우려를 자아내는 건 가뜩이나 가뭄에 시달려 물 공급이 제한돼 있는 주에서, 포스코가 제철 용수로만 연간 700억 리터를“수월하게” 공급받도록 하는 데 매달리는 주정부의 태도다. 어떻게 이같은 환경파괴적 조처가 이뤄질 수 있는지는, 1991년 이후 부상한 “개혁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의 야만성과 결부된, 잘못된 발전 패러다임의 맥락 속에서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그 맥락에대한 전반적 개괄이 궁금한 이들은 환경보호 그룹 ‘오릿사’의 웹사이트(www.epgorissa.org) 방문을 권한다).

 

하지만 포스코가 내딛게 될 행보가 순탄하진 않을 것이다. 포스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뤄질 토지수용에 맞서 반反포스코 운동에서는 전열을 재차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포스코 투쟁은 이제 삼림 파괴로 술렁이는 대중과 마주해야 하는 여타 산업과 기업 집단들한테도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게 됐다. 반포스코 운동 입장에선 특별한 차원이 덧붙게 된 셈인데, 선동가들의 열망을 현상유지나 더 나은보상 같은 기본적 하한치에 가두는 건 큰 실수라는 점에서 그렇다. 포스코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운동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지구적 투쟁의 최전선에 있다.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인류의 주적,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맞서, 미래의 세대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지속케 할 투쟁이란 뜻에서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이 최근 인도 건국절 행사에 국빈으로 초대받았을 때, 포스코는 늘 그렇듯 “대한민국의” 기업으로 소개됐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포스코에 대한 소유권은 미국에 위치한 세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핵심 거점한테 있고 포스코는 이 거점의 통제를 받는 기업이다.

 

1997~98 년 (그 후로도 이미 세 번 더 발생했던) 아시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통화는 악명높았던 조지 소로스 같은 월 스트리트산 차익거래자들의 협공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IMF로 가 정부지출 삭감과 금융구조 “개방”, 재정적자 제한을 골자로 하는 “구조개혁”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그러나 클린턴 정권하의 미국 재무성으로선 이것으로 충분치가 않았고, IMF에 반기를들면서 IMF와 대한민국 정부 간에 이뤄진 협정을 거부했다.

 

데이빗 립톤과 래리 서머스, (현 미국 재무장관인) 티모시 가이트너 같은 재무성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비즈니스위크>의 당시 표현을 빌자면 (원래 FBI 소속 기동타격대를 일컫는) “SWAT 팀”이 구성돼 갑작스레한국에 들이닥쳤다. 제국(주의)적인 요구들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요구인즉슨 대한민국 국가가 키운 주요 산업들에 대한 통제권을 주요 미국산 이해관계자들한테 헐값에 넘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달러 화폐의 전폭 지원 없이는 총체적 금융 붕괴와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소유권 매각 대상 중 1순위는 포스코였다. 현재 포스코 주식을 소유한 미국산투자자들은 그 수에서 한국산 주주들을 압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포스코에 대해 최대 지분을 가진 세력은 이 기업 명의의 주식예탁증서를 가진 뉴욕 멜론 은행인데, 씨티그룹이 이 은행의 최대 주주다. 1998년 기준 미국 통화 기준으로 10달러였던 포스코 주식은 현재 1주당 11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반포스코 활동가들이 한국산 대표이사들이나 오릿사 주의 정치인들, 칫담바람의 준군사화된 경찰과 맞닥뜨릴 때 알아둬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네들 뒤켠에는 이네들이 따라 모시는 씨티그룹 소속상전들과 미합중국 재무성이 있다는 것이다.

 

토지 몰수 조치에 맞서 저항하는 (‘선주민’이란 뜻의 힌두어인) ‘아디바시’들을 상대로 칫담바람에서 벌어졌던 잔학한 공격은,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이제 오릿사로 확장될 참으로 있다. 이렇게 된다면, 그 규모와 전략적 중요성상 포스코 프로젝트는 진정한, 그러니까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와 연루된 이들에 관한 극적 사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문보기: http://mrzine.monthlyreview.org/2010/amr2502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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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0/03/03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후세 2010/03/04 02: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고해주신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3. 에밀리오 2010/03/05 0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먼슬리리뷰 사볼까 했었는데... 번역을 해주시고 +_+ (물론 영어는 못 읽지만요;;)

    • 들사람 2010/03/06 0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에밀리오님이 보실까 했었는데... 이렇게 읽어봐주시고ㅋ 영어를 하면야 나쁠 게 없지만 그렇다고 죄다 잘 할 필욘 없겠죠. 특권화된 권력이 아니라 유통되는 지식/정보로 부리는 농간을 허무는 힘이기만 하다면야..ㅎ;

  4. 나그네 2010/03/05 17: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저 먼 바다 건너에 있는 소위 말하는 열강에게 꼭두각시 노름이나 당하고 있다는 소리같이 들리네요. 특히나 이런 오릿사의 포스코 같은 사례가 더더욱 그 제국주의 현존의 넘버원 사례가 될 듯 싶구요. 영화 아바타는 영화 이기에 결국은 정의의 편에 손을 흔들지만 아마존의 눈물 같은 경우에는 결국 약한 자가 강한자에게 무릎을 꿇는 그러한 (어찌보면 문명이 강한놈이 될수 도 있겠네요) 상황이 전개가 되지요. 이런 포스코 상황과 영화 아바타, 혹은 아마존의 눈물에서 보이는 포인트들을 들사람님은 어떤식으로 보고 계시는지요. 당신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

    • 들사람 2010/03/06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웬지, 논술 시험지를 받은 기분이군여. 의도하신 건진 몰겠으나 , 다소 당혹..ㅋ; 아마존의 눈물은 보지 못해서 소감을 말하긴 뭐한데, 그렇다 쳐도 그게 약한 자가 강한 자한테 무릎꿇는 상황을 담고 있단 얘긴 과문해선지 금시초문이군요.

      아바타의 경우는 줄거리가 볼거리에 비해 왜소한 데다 구리고 해악적이기까지 하다고 욕을 먹고는 있지만(대체로 동의하구요), 그렇더라도 그 줄거리의 기본 구도만큼은 인도 오릿사 쪽에선 엄연한 현실이란 얘길 한 거죠. 그런 만큼, 들리기론 아바타를 보고선 겪는다는 "우울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할 게 아니라, 하다 못해 각자 선 자리에서 가능한 실천적 개입으로 '치유'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겠단 얘길 한 거죠. 물론 현실의 우리가, 아바타 주인공 같은 미국식 '슈퍼맨'이 돼서 상황을 바꾸는 건,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거북함이나 실현 가능성은 둘째 치고, 일단 바람직한 게 아니겠지만요.

      요는, 이 점을 제쳐놓고 보면, 다리가 불편해서든 자기가 속했던 세계에 만연한 폭력이 불편했어서든 기존의 자신과 결별, 단절하는 주인공의 '변신/변태'가 상황 반전의 중요한 계기였다는 점이 포스코 사례에서도 환기될 수 있느냘 텐데, 굳이 실용적으로 아바타 인지도를 포스코 이슈와 결부시키자면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잖나 싶군요. 하지만 뭐, 일단은 오릿사의 포스코 관련 보도/정보 자체가 여기서나 주류 언론에선 워낙에 제한/통제돼 있다 보니.. 한겨레 같은 데마저 포스코의 인도 진출을 대한민국의 '발전' 내지 경제적 선진화의 한 지표로 볼 정도니까요. 사실 국민국가적 관점/노선에서야 자국 산업의 (아)제국주의적 확장은 분명 잠재된 로망이자, 발전의 계기겠습니다만..; 얘넨 그 전에 있은 파이넥스 준공도 긍정 일변으로 보도했었으니 뭐.;;

      아무튼, 한국과 인도에서 동시다발까진 당분간은 무리여도 조직적으로 서로 되먹임하듯 이뤄지는 의제화, 이슈화의 판이 짜일 수 있으면 젤 좋겠지요. 오릿사 포스코 사태가 제국주의 총본산이라는 미 재무성-씨티그룹의 "총지휘" 아래 이뤄지는 거라기보단, 미국과 인도, 한국의 권력 중심들이 연결망을 이룬 헤게모니적 협치하에 진행되는 거면, 미국과 인도에서만큼이나 한국에서도 이 사태와 적극 연루된 (일테면 재경부-김앤장-전경련-경총 소속의) 이른바 '거물'(이라 불리는 글로벌 민족부르주아지)들을 겨냥해 싸움을 벌일 수 있을 테구요.

      근데, 제 생각은 사실 번역글에 앞서 써논 글에다 담을 만큼 담았다는 생각인데,,,,; 그걸론 부족하다고 보셔서 질문을 하신 건가요? 아니면 글이 난삽해 이해하기 어려우신 겐지..;;

  5. 나그네 2010/03/09 1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족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제가 너무 과문하고 아직 세상에 대한 사고가 너무 부족한지라 저보다 인텔리전트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인지하기 위해서 질문을 했다면 조금 더 솔직한 편이라고 할 수 있구요. 너무나도 영화와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상황이 서로 맞물려서 이와 비슷한 일이 나타나고 있는것에 대해 조금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의견을 경청해보고 싶었기에 이렇게 글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사죄드립니다.

    위 답글에서 한겨레 같은 신문사 마저도 인도부족민들의 사투를 크게 보도하고 있지 않는데 왜 이미 해외 언론에서는 오릿사에서 벌어지는 이 현상들을 계속해서 보도하며 강력하게 비판도 하고 혹은 이에 대해 토론을 갖는지... 우리 미디어 내에서는 그저 앞으로의 공사 전망, 그리고 포스코가 부족민들을 위해 무엇을 보상했는지, 말 그대로 좋은 한국의 이미지만 전달을 하고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면의 현실을 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지 이글을 읽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쉽게 추축해 볼 수 있는 일을 전혀 아니지만요. ㅎㅎ 지식을 좀 더 알려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불편하시면 안하셔도 됩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수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들사람 2010/03/09 2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그러셨군요.; 근데, 사실 제가 무슨 인텔리전트하다거나 한 수 가르쳐 드릴 정도까진 아닌 것 같고, 다만 님보다 앞서 좀 집요하게 궁금해했고 그렇다 보니 좀더 많이 알게 된 상태일 뿐이라고 할까요.. 글고 당혹했던 거지, 불편하기까지 했던 건 아니고요.ㅋ;;

      국민국가(내지 한국 같은 맥락에선 통일국가)적 발전노선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즉 '애국적' 언론이 한겨레뿐만은 아니죠. 기실 어느 국민국가에서건 "국익을 우선하는" 애국적 노선을 지지하는 언론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문제는 이런 노선이 해당 국가의 구성원들 모두의 이익으로 귀결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는 데 있슴다. 이에 대해선, 칼 맑스 씨가 <자본>에서 일찍이 날카롭게 일갈한 적이 있는데요, 국익(달리 말해 국익의 엔진인 자본축적)이란 인민들이 겪는 빈곤의 다른 이름이라구 했죠. 미국이 됐든 한국이 됐든, 국민국가 단위에 갇혀서 이미 국가간 경계를 가로질러 발생하는 사건, 사태를 이해하려다가는 '국익의 덫'에 열 번이면 열 번 족족 걸리기 십상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한국인이더라도, 그런 자기규정을 벗어나 지구상에서도 동아시아 언저리에 사는 주민일 뿐이란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비록 금융위기로 그야말로 끝물 됐다곤 하나, 세계화됐다는 지금이 됐든, 흔히들 민족사들의 총합으로 잘못 알려진 근대세계의 형성기가 됐든 간에요.

      이렇다 보니, 자신이 특정 국적 소속이더라도 거기에 자신을 옭아매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감각, 또는 이런 감각을 지닌 주체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 언론활동을 벌이는 매체들이 꾸준히 입지를 넓혀가고 있죠. 물론, 국민국가들이 하나의 위계화된 덩어리를 이뤄 굴러가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야 이런 언론활동은 애초부터 무척이나 불리하고, 심지어 생존의 위협까지 감내해야 하곤 했지만요.

      그렇다고 이런 언론활동이 그치지 않는 건, 국내/국제를 막론하고 '국익 내지 글로벌한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노선과 이 노선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의 이해가 대다수 인민들의 이해와 상충하고 근본적으로 제로섬 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흔히 양극화라 불리는 이같은 추센 국내/국제적으로 갈수록 더 노골화하고 있는데요, 이런 추세의 일환으로 벌어지고 있는 오릿사의 포스코 사태가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느냐? 그건, 최근 <삼성을 생각한다>가 인문서도 아니고 사회서론 아주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됐는데도, 특히 국익을 금과옥조 삼고 이 국익과 연동하는 삼성식 자본축적을 지지, 옹호하는 메이저 언론기업의 지면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알아서 외면해주고 있다는 데서 얼추 짐작이 되실 듯합니다. 이 흐름이 공론화되는 게 현상유지를 허무는 뇌관이 될지 모른다는, 그로 인해 삼성으로 상징되는 지배적 자본-권력의 황금률이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 내지 성가심 때문인 거죠. 조중동문이나 매경, 한경이 내세우는 이른바 '정론'은 이렇듯 지배계급의 비공식 기관지로서, 이들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 설정된 편집기조의 산물인 셈임다.

      오릿사의 농민들에 대한 "보상" 얘길 하셨는데요, 이건 이를테면 군위안부 할머니들한테, 또 백혈병으로 숨진 삼성반도체 노동자들한테 정말로 필요한 건 일본정부나 삼성의 사과 같은 담화적 보상이나 돈다발에 그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과 같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매매를 통한 착취가 됐든, 사실상 준살인에 가까웠던 노동과정으로 생명마저 빼앗겨야 했던 당사자들이 겪었을 모욕과 고통이 그저 일제의 전근대적 만행이나 삼성반도체의 "실수"가 아니라, 실은 거대기업친화적인 국민국가 제도가 '국익'과 '경제발전'을 좆게 냅두면 늘 발생하게 마련인 구조적이고 제도화된 (제국주의적) 폭력의 산물였기 때문이죠. 이게 일본일 땐 나쁘고, 글로벌 브랜드 삼성과 포스코가 자랑인 한국은 반일정신이 투철하니 좋은 거라거나 우리도 이젠 함 해봐야는 거 아니냐고 하는 건, 근대일본령 조선 시절 식민주의의 수혜를 입은 권세가들한테나 먹힐 논리지, 변주된 식민주의를 '주권적 국민국가 형태하에서' 여전히 겪고 있는 대다수 인민들로선 용납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죠 사실.

      그래도 우린 '한국인'이니 포스코의 해외진출엔 박수쳐 주되,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선처"해주면 되는 거 아니냔 식으로, 이른바 중도의 옷을 걸치고 접근해선 곤란하겠단 거예요. 대추리 농민들도, 삼성중공업서 흘린 기름으로 삶이 망가져버린 태안 주민들도 그런 식의 선처가 얼마나 알량했고, 이중의 폭력에 가까웠는지를 보면, 그런 얘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 싶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겠다는 검다. 백 번 양보해 설사 그래봤자, 그런 식의 한국산 자본의 해외이전이 부자들 빼고 한국 쪽 다수 주민들의 삶의 질 악화로 이어지리라는 건 앞서 구미권서 이뤄진 자본 해외 이전의 역사를 봐도 알 수가 있구요. 그래서 이런 음험하고 편협한 것도 모자라 게걸스럽기까지한 자본의 동선을 망가뜨릴, 국적상의 구획을 넘어선 관련 주민들의 글로벌 연대와 저항이 활성화돼야 하겠기에, <먼슬리리뷰> 같은 잡지는 관련 보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한겨레를 통해 한국서 유통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같은 매체도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한겨레에서 <르몽드 티플로>를 내는 거냔 의문이 드실 법한데.. 아마 편집국 내에서, 비판적여도 "리버럴"하게 일단 자국 이해는 챙겨야 한다고 보는 (통일-민주개혁)노선과, 어떻게 그런데도 비판적일 수 있겠냐며 이런 노선의 맹점이 지금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이라 보는 노선이 '긴장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