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86, August 1, 2010

자폭성 폰지 게임
("Ponzi Solitaire")
 




신문을 읽다 보면 깜짝 놀랄 수가 있다. 7월 26일자 미국산 신문매체에선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둘이 실렸다. 먼저 <USA 투데이>에 실린 기사에선, 분기별로 이뤄지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을 다뤘다. 기사 제목은 “경제학자들의 낙관주의가 사그라들다”. “정부재정 위기에 따른 유럽의 동요, 지리멸렬한 고용 증가, 취약한 주택시장과 제조업 생산의 침체” 상황이 맞물린 결과, 이미 사라진 850만 명의 일자리를 “좀 덜 완만하게라도” 회복할 공산은 매우 낮을 듯싶다는 게다. 여기에 덧붙여 “전지구적 금융불안정”을 우려하면서 말이다.

 

아주 합당하게도,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낙관적이질 못하다. 혹자는 세계시장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태생적으로 지닌 낙관주의가 드디어 현실이라는 암벽과 충돌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 중 상당수는 그런 결론에 훨씬 더 일찍 다다른 바 있다. 그럼, 바로 같은 날 <뉴욕타임스>에선 어떻게 미국 산업계에 “들이치는 이윤”을 다룬 1면 기사가 실릴 수 있을까?

 

답은 역시 기사 제목에 있다. “업계, 더 많은 비용 절감으로 들이치는 이윤의 샘을 발견하다”. 업계에서 생산물을 더 많이 팔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업계의 매출은 실제로 줄어드는 중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비용을 삭감해 왔는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을 해고해 왔다는 말이다.

 

업계에선, 충분한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하고서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 더 고되게 일하도록 만들면 덜 팔아도 더 큰 이윤을 챙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를 일러 보통 “생산성의 개가”라고들 한다. 아메리카 메릴린치 은행 수석 경제학자 에단 해리스는 이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밝힌다: “기업들에선 이윤을 빚어내기 위해 제반 노동 비용을 후려치는 중이다.”

 

그러나 <타임스>가 주목하듯이, 그 결과 발생하는 “수혜는 대체로 경제 전반이 아니라 주주들한테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산업계에선 이런 방법을 잠정적인 해결책으로 여기지 않는다. 설사 판매가 호전되더라도 노동자들을 추가로 고용할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어느 대기업 대표이사에 따르면 “언제쯤 고용을 늘릴지는 우리가 걱정할 사안이 아니다.” 그네들의 관심사는 외려, “(노동력)유연성을 좀더 높일 수 있도록 이제껏 작동해온 시스템 전반을 재구축하는” 데 있다.

 

그러면, 미국 산업계(와 세계의 여타 산업계)에선 죽 앞으로도 이윤을 팽창시킬 수 있을 마법의 탄환이라도 발견했다는 걸까? 그야말로 농담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20년대 헨리 포드는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들한테 통상보다 더 높은 임금을 지급했는데 그 스스로 말하길,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객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포드의 후예들은 지난 5년 동안 북미권 노동력 중 절반을 줄여버렸다. 이윤은 더 늘어났으나, 고객은 더 줄어버린 셈이다.

 

여기서 약간의 문제, 그러니까 케인즈와 칼레츠키가 한때 언급한 바 있는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유효수요(의 위축이라는 문제)다. 그 어떤 중기적 계산에 따르더라도 충분한 소비자-고객이 없으면 판매가 충분치 않아질 테고, 그러면 이윤은 곧바로 말라붙을 것이다. 노동력을 줄이고 잔존한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로 이윤을 불리려는 산업들에선 단기적으론 이윤이 들이차게 될 것이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이라는 옹벽으로 내달릴 때까지 말이다. 그 다음엔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업계에선 알 수 없는 걸까? 물론, 상당수는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업계라는 곳은 내일이면 죽을지도 모르니 당장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쾌락주의적 원리로 굴러가는 중이다. 이를 “자폭성 폰지게임”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통상적인 폰지 사기에선 (개미투자자들을 위주로 저지른 다단계 금융사기로 2009년 초 종신형을 선고받은 월가의 금융트레이더이자 전 미국증권거래소NASDAQ 이사장) 버나드 매도프가 그랬다시피, 판을 짠 자는 도박판이 붕괴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등쳐먹는다. 자폭성 폰지의 경우에는, 판을 돌리는 자가 판이 깨질 때까지 제 자신을 등쳐먹는다. 통상적인 폰지 사기에서 (잠재적 피해자인) 투자자들이 설사 판이 깨져도 그건 자기가 재미를 본 직후이길 바라듯이, 자폭성 폰지의 참여자들, 즉 업계의 대표이사들도 업계 전반이 붕괴하기에 앞서 저마다 재미를 보고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부디 행운이 깃들기를!


이매뉴얼 월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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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02:14 2010/08/04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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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편지 2010/08/04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월옹논평이군요+_+ 오 그런데 월옹논평방이 아니라 다른 방에 올려져 있네요?? 아무튼 자폭성 폰지게임이라니 결국 다단계를 말하는 거네요.

    아참 요새는 구글 서핑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월러스틴을 검색하다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254&o[at]=s&o[sc]=a&o[st]=a&o[ss]=%BF%F9%B7%AF%BD%BA%C6%BE

    진포평론이라는 곳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네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말이라는 것은 오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책을 읽었는데도 이렇게 관점이 다르다니.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의 차이겠지요?

    • 들사람 2010/08/05 01: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일하다 딴짓하던 중에 마침 짧길래요.(그러면 안 되는데 사실- -;) 김성구 선생님은 정통파시죠.ㅋ '영원한 PD'(이론가)라는 별명도 가지고 계시고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입각해 자기 입장을 개진해 오신 분인데, 세계체제 분석이 생산관계(혹은 계급적 적대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정치적 노선이 모호하다는 등등의 수많은 이유로 평가절하하시는 모양이시더라구요. 세계체제 분석을 주창했고 지지하는 쪽에서야 물론 이런 평가는 실로 부당하다고 하지만요.ㅎ

      개인적으론 그냥 세상을 바라보는 틀의 차이라고만 하고 말 게 아니라, 아닌 게 아니라 쟁점다운 쟁점들이 좀 추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당연한 얘기지만 차이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면, 진짜 의미 있는 차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라도요. 특정한 이론화에 따라붙는 서로 다른 전제에 입각해 보면 (물론 이론화가 되긴 한 건지마저 논란거리긴 해도) 서로가 서로의 입론을 기각하는 건 되려 손쉬운 일이겠지만, 지금 필요한 건 서로 상정해둔 그 전제들의 타당성이 어떤 점에서 어떤 식으로 확보될 수 있고, 이게 실천적, 정치적으로 어떤 함의를 갖겠냔 걸 텐데, 정작 논쟁이 이런 식으로 벌어지거나 이를 위한 쟁점들이 형성되진 않는 것 같더라구요. 누가 뭐래도 1980년대 들어 좌파-맑스주의적 시각이 현실 분석의 주요 축이 된 건 뒤늦었지만 참 반갑고 소중한 일인데, 그게 잠재력만큼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 게 그저 엄혹한 "이론외적인 여건" 탓이기만 했냐는 질문은 사실 1980년대 시절의 전위론이나 실천-조직관을 되새김하면서 자연스레 던져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근데 아마도 김성구 샘처럼 이와 관련한 에지간한 "맑스주의적인 이론화" 작업은 1980년대 동안 거의 일단락됐(고 스스로 그런 과정에 일정하게 관여했)다고 판단하는 쪽에선, 예컨대 (세계체제"론"이 아닌) 세계체제 분석틀의 재부상, 혹은 유행은 꽤나 뜬금없고 심지어 어처구니 없는 '이론적 퇴행'으로 보일 수 있을 겁니다. 하여 저로선, 어느 쪽이 맞냐고 하기에 앞서 서로의 주장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를 둘러싼 제대로된 논쟁이 차분히 진행됐음 좋겠더만, 김성구 샘 글이 쓰여진 지가 사실 꽤 됐는데도 이후 조용하더라구요. 아마도 누군가가 작심하고 그런 판을 차리기 전엔 쉽지 않을 거 같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