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는 말할 수 있는가?
: 6.2 지방선거에 관한 잡상들


들사람
마포구 거주 세입자 겸 불안정노동자,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준) 회원
 

 



울엄니한테 물어봤다. 한명숙이 ‘분패’한 게 노회찬의 완주 탓이라고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참고로 울엄니, ‘노짱’ 얘기만나오면 일단 짠해지고 보는 양반이시다. 그거야, 권세와 호사 쫌 누린다는 한국산 시민 계급한테서 노짱이 사실상 분수도 모르고 깝친 ‘쌍놈’ 취급받던 게 도무지 남일 같지 않아서였을 터. 나야 물론, 헌데 그 노짱이 대통령 하던 시절 우리 같은 쌍놈들의 살림살이 전반은 더 나빠졌으니 이건 그럼 어찌된 노릇이겠냐며, 말라죽은 나무 하나만 붙잡고 있다 숲 전체가 망가지는 줄 몰라서야 되겠냐고 번번이 토를 달았지만 말이다.

울엄니의 대답은 이랬다. 노회찬은 어차피 갈 길이 다를 텐데, 한명숙이 오세훈한테 아무리 한끗 차로 뒤졌기로서니 그걸 왜 노회찬 탓으로 돌리는지 모르겠다고. 오우, 이런. 딱히 토 달 게 없다 보니, 잠시나마 삐끗한 듯 입 둘 바를 몰랐더랬다. 뜻밖였어도 반가웠던 건, 노무현 생각에 설사 짠한 맘 든다고 죄다, 그것도 하필이면 ‘민주주의 수호’라는 깃발 아래 뭉쳐야 한다고 보진 않는구나 싶어서였다. 적어도 울엄니한테, 노짱에 대한 이런저런 정서적 동일시가 ‘민주주의 너머’를 말하는 정치적 구상을 아예 접거나 미뤄야 할 근거일 순 없었던 셈이다. 더군다나 그토록 수호해야 한다는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건지조차 아주 모호한 마당에 말이다. 하물며 그게, 복고적 조국근대화 노선과 몇몇 옵션상 분명 다르긴 하되, 결국 자유시장과 거대기업 권력의 아바타들한테 안성맞춤인 민주주의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마는.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울엄니처럼 정치적으로 불확정적인 사람들, 차고 넘친다고까진 못해도 의외로 적잖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외려 이를 부정하기가 더 어려울 텐데, 이런 사정이야말로 실은 정치가 필요한 까닭이자 일반적 조건일 게다. 정치란 게 기본적으로, ‘좋은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필요한 능력을 고양할 능동적 주체 형성의 기예라면 말이다. 그럼, 선거라는 아주 특정한 정치의 장에서 ‘유권자’가 된 우리는, 과연 이런 기예에 관해 무언가 말할 수 있을까?

무언가는 고사하고, 이런 말하기 자체가 MB심판이라는 국민적 염원을 우롱하는, 따라서 제거돼야 마땅한 ‘잡티’나 정치적 디폴트취급 받기 일쑤다. 이런 취급 받는 쪽에서야 물론 우롱차 들이키다 새알 들릴 소리겠지만, 특히나 선거판에서 이런 논리는 꽤 잘먹히는 편이다. 심지어 니들이 잘난 체 해봤자 오세훈의 간첩 노릇한 거 아니냐는 힐난까지 등장할 정도니까. 한때 군사독재 비판을 곧바로 친북으로 즐겨 싸잡던 옛 군사정권들의 넝마급 논리가, 민주개혁 노선의 열성 지지파한테는 아직도 쓸 만하구나 싶을 지경이다. 이쯤 되면 민주개혁 진영에서 잇겠다는 민주주의는 누구 좋으라고 수호하나 싶을 만큼 맛이 확 간 상태인 거 아닌가? 땜빵용 내지 마약성 승리주의에 눈 멀고 몸까지 망가질 게 아니라, 새로운 주체 형성의 정치에 눈을 떠도 션찮을 판국에 말이다. 이미 신학화된 교리문답 읊듯 ‘국민통합’의 당위만 되뇌이는 게 낙인 이들한테야 이런 지적마저 한낱 소음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런 낙하고는 볼일 없다는 이들한테 사탄 딱지 붙이는 MB급 삽짓만큼은 제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씁쓸하기 이를 데 없을 거면 큰 웃음이라도주시든가. 이건뭐,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고 해야 하나.

 

가령 이런 투표는 이제 그만 하자고, 투표로 말할 수 있느냐 말이다.

 

 

현행 선거제도는 이렇듯, 유권자들이 무언가를 말하기에 적합한 정치의 장이 아니다. 말하기는 둘째 치고, 맛도 없는 메뉴 앞에서 골라먹는 재미마저 신통치 않다 보니 유권자의 목소리는 엉덩이에 먹힌 바지 마냥 후보에 묻혀 들어가기 십상이다. 당장 오세훈 지지표와 초박빙이었다던 한명숙 지지표를 놓고도 그래서 실속 없는 아전인수나 침소봉대식 갑론을박을 피하기 힘들다. “n개의노무현” 운운까지 해가며 민망한 바람잡기에 나섰던 <한겨레> 등 개혁 언론이나 민주개혁 노선의 골수 지지자들로서야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겠지만, 한명숙이라는 기표가 정작 어떤 욕망들을 표상하는지는 일단 아주 복합적이며 불확정적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여기엔 이를테면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한국산 계엄군에 맞서 주민들이 손에 든 태극기가 과연 태극기였을까 하는 류의 질문이 버무려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수호하거나 말거나 기어이 노회찬을 지지해버린 유권자 십수만 명의 선택에 대한 ‘징후적 독해’도 불가결하겠고.

이번 지방선거의 이른바 민심을 읽는다는 건, 아무래도 이같은 질문과 징후적 독해 속에서 선거 결과의 상황 맥락을 ‘두텁게’ 읽어내는 일일 게다. ‘반MB’ 라벨 붙은 반창고형 부정의 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통해 우리 한국산 주민들이 자기해방 능력을 고양하는 집단적 주체로 거듭나게 할 긍정의 정치를 위해서 말이다.

이제껏 선거정치의 내부 맥락을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 위주로 얘기했는데, 사실 이것만으로 긍정의 정치를 전망하기란 굉장히 불충분하다. 왜냐. 의제상으론 정권심판론이 판치고 기술적으론 소녀시대의 샤방한 몸짓까지 동원됐는데도 전국 투표율 평균은 절반 남짓인 54.5%였다. 역대 지방선거 투표율 중 그나마 젤 낫다지만, 이는 바꿔 말해 45.5%(지역별로는 35~54%)에 이르는 유권자들에게 선거는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얘기니까. “투표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구라성 슬로건으로 투표율 높이기에 앞서, 이렇게 저조한 투표율 자체가 지닌 (좌파)정치적 함의부터 먼저 캐물어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애쓴 소시인들, 선거가 알맹이 없는 뮤비쯤이길 스스로 원했겠냐마는.



‘유권자 아닌 유권자들’, 즉 명목상 투표권이 있긴 해도 사실상 배제돼 있거나 현행 선거제도하에서 자신의 투표 행위가 껍데기나 마찬가지인 줄 아는 이들한테 선거는 과연 합리적인 걸까. 그럴 리 없다(이주노동자들이나 소위 새터민처럼, 주권 영역의 바깥에서주권의 안쪽을 떠받치는 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단기적으론 벌이가 끊기지 않도록 선거날에도 일을 나가는 쪽이 차라리 합리적일 터. 물론 길게 보자면야 그같은 일상의 지속이 그들의 삶의 조건 전반을 차차 악화시킬 게 뻔해도 말이다.

진보신당과 노회찬에 ‘비판적 지지’ 표를 던졌던 이로서 드는 생각은 이렇다. 앞으로 진보좌파 정당이 우선시해야 할 건, 앞서 말한유권자 아닌 유권자들이 제 안에 잠자고 있는 ‘야만적 합리성’에 눈 뜨도록 하는 데 집중하는 일이겠다는 것. 진보대연합이니 민주대연합이니 하며 선거용 문제설정에 목매달 게 아니라 말이다. ‘사회의 좌경화’와 따로 노는 당선·집권 같은 건, 설사 이뤄진들 실속도 없을 뿐더러 오래 가지도 못 한다. ‘좌파적인 동시에 대중적인’ 질문들로 나와 세상을 차차 발그레 하니 물들여 갈 수 있는, 뭔가 확실히 다른 꿈과 실천 경로들이 그래서 중요한 거다. 헌데 정당이랍시고 단기 패턴에서부터 선거 일정표에 끄달려 다녀서야, 자유시장주의 정당들과 시나브로 궤를 같이 하다 장기적으론 지리멸렬해지는 말로를 피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현행 선거제도가 거수기 민주주의, 비즈니스화한 민주주의의 주요 부품으로 굴러가는 조건에서 단기적인 선거 ‘승리’에 목매다는 건, 긴 안목에서 정치적으로 진정 필요한 주체 형성의 토대를 외려 불모화하는 일이다. 특정 국면에서 선거제도를 유권자 아닌 유권자들에게 최대한 적합한 형태로 써먹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좌경화’ 전략에 바탕한 주체형성의 정치가 거듭 강조돼야 하는 이유다.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민주노동당은 자유시장주의 정당들과 더불어 범민족-민주개혁 노선으로 사실상 포섭됐고, 다른 한편 진보신당의 경우 뚜렷한 좌파정치적 전략 부재로 인한 난맥상이 여실히 드러난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반체제 운동(들) 진영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정치적 카오스’ 상태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듯하다. 1980년대 무렵부터 이른바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라는 구도 아래 형성·지속됐던 조직적·인식론적 토대가 부득불 대대적인 재편을 맞이하게 됐다고 할까. 이를테면 고용 없는 성장/축적 체제의 부상이나 이에 따른 ‘투쟁현장’의 공간적·지리적 재편 속에서, 20여 년 전에나 유효했던 문제틀이나 조직화 방식은 이제 실천적·조직적 임계점에 다다른 셈이다.

결국 선거라는 장이 ‘자본주의 너머’를 모색하는 데 유효한 정치의 한 경로로 부상할지 여부는, 선거전술 자체보다는 외려 이런 정치적 카오스 과정을 거치며 그간 안 보였거나 주변화돼 있던 정치의 장소들을 어떤 식으로 재발견할 것이냐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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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주간지 <위클리 수유+너머>에다 보낸 청탁원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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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8 14:53 2010/06/0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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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디 2010/06/08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은 네이트온 안하냐

  2. 디디 2010/06/08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해-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