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한 성명

 

구수코 부도리가 없는 이하토브는 필요 없다 *

 

 

* 이와테의 시인이자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가 동화에서 그려낸 이상향이 ‘이하토브’이며, ‘구수코 부도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이하토브를 구한 인물.

 

 

 

 

 

‘예상 밖의 사태’. 이 한 마디로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죽음이 합리화되어 있다. 수십만의 사람들을 방사능피해에 노출시키며 아직도 수백만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는 인재(人災), 그렇다, 거듭 말하지만 최악의 인재가 오로지 이 한 마디로 합리화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전혀 예상 밖이 아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태를 거듭 예측하며 경고했다. 지진이나 쓰나미 피해에 따른 원자력발전소의 극심한 사고, 수소폭발도 노심융해도 방사성 물질의 대규모 확산도 원전반대 운동가나 원자력 전문가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내용이다.

 

피해는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의 에너지소비를 지탱하기 위해 지방에서 생활하는 수백만 사람들은 방사성 물질 앞에 노출되어 있다. 지방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함으로써 오키나와전력을 제외한 모든 전력회사는 안정적인 이익을 챙겨왔다. 이 비즈니스를 성립시키기 위해 지역독점을 허용하고 원전 건설에 유리한 법제도를 만들어내면서 각 전력회사를 지원해온 일본정부에도 당연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각 전력회사와 일본정부는 지금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은 지금 무엇보다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진행되면서도 은폐되어 있는 노동의 모든 것을 자세하게 공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냉각수 주입을 위해 누가 어디를 어떻게 뛰며, 파이프를 연결하며, 벌브를 열었는지. 방사능에 오염된 물방울을 누가 닦아내며, 닦아내라고 누가 명령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것은 영웅담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일하는 이들을 구수코 부도리로 만들어 칭송하는 추악함을 우리가 극복하기 위한 요구다. ‘수천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본인 스스로는 결코 하지 않는 일을 원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끔찍한 냉혹함에서 우리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죽음을 강요당하는 노동에 대한 거부를 우리는 지원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원자력 이재민’이 되어가고 있다. 각지 원전에서 목숨을 잃을 위험에 노출되면서 일해 온 사람들, 원전사고에 따른 피폭으로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건강문제에 시달려야 할 사람들의 피해가 먼저 있다. 하지만 원자력 피해는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앞으로 오랫동안 동북지방 농업에 타격을 줄 것이며 안전한 식량의 가격을 폭등시킬 것이다. 도시 빈곤층은 틀림없이 식품 안전에서 배제된다. 원전 정지로 인해 전력공급이 부족해 계획정전이 실시되고 있지만, 그에 따른 사업장 폐쇄와 휴업이 잇따르고 있다. 도시 빈곤층은 이에 따른 실직과 임금 삭감으로 인해 구매력이 저하될 것이다. 우리는 이재민이다.

 

-일본정부와 모든 전력회사는 모든 원전을 당장 정지시켜라

-사람의 목숨을 이용해먹는 비즈니스에서 철수하라

-도쿄전력은 모든 원자력 이재민에게 보상하라

-피폭한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 완전히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의료비와 생활비를 보상하라

-원전 사고 때문에 폐쇄나 휴업을 할 수밖에 없는 모든 사업자의 손실을 보전하라

-실업이나 휴업, 임금 삭감으로 내몰린 이들의 손해를 보상하라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호소한다. 압도적인 쓰나미나 화재의 스펙터클, 압력용기 안의 수위를 전하는 자막들, 어용학자가 하는 ‘곧바로 건강 피해가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발언들, 이와 같은 무한히 반복되는 영상에 노출된 나날에서 벗어나자. 이 ‘정보 피폭’은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을 만들어내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이들과 제도에 대해 얼버무리는 정부와 전력회사의 변명에 대한 동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시바삐 이 ‘정보 피폭’의 피해에서 회복해 책임자를 지목하며 추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2011년 3월 17일

프리터일반노동조합

 

***

 

아래는 일본어 전문.

 

福島原発事故に関する声明

---グスコーブドリのいないイーハトーヴはいらない

 

 

「想定外の事態」。このひとことで、数万におよび人々の死が合理化されている。数十万の人々を放射能被害にさらし、なお数百万の人の暮らしを破壊し続けている人災、そう、繰り返し言うが最悪の人災が僅かこのひとことで合理化されている。

 

いま生じている事態は、なんら想定外のことではなかったはずだ。幾人もが、この事態を繰り返し予測し警告してきた。地震や津波被害にともなう原子力発電所の 激甚事故、水素爆発も炉心溶融も放射性物質の大規模な飛散も、反原発運動や原子力の専門家のみならず、多くの人々が指摘してきたことである。

 

被害は折り込まれていたのである。

 

東京をはじめとする大都市のエネルギー消費を支えるために、地方に住む数百万の人々は放射性物質の前に曝し出されている。地方の人々の暮らしを壊すことで、 沖縄電力をのぞくすべての電力会社は安定した利益を確保し続けてきた。このビジネスを成立させるために、地域独占を許し原発建設に有利な法制度をつくりあ げ、各電力会社を支援してきた日本政府も当然の責を問われる。電力各社と日本政府はいまそのつけを支払わなければならない。

 

日本政府と東京電力は、まず何よりもいま、福島原発で取り組まれつつ隠されている労働のすべてを子細に公開すべきだ。たとえば冷却水注入作業のために、誰が どこをどのように走り、管をつなぎ、バルブを開けたのか。放射能に汚染された飛沫を誰がふき取り、ふき取ることを誰が命じているのか。これは英雄譚を作り 出すためではなく、そこで働く人々をグスコーブドリにして褒め称える醜悪さを私たちが克服するための要求だ。「数千万の命を救う」ために自らは決してしな い仕事を、原発労働者に求めるおぞましいまでの冷酷さから私たちは遠ざ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死を強制される労働の拒否こそ私たちは支えるべきである。

い ま私たちは「原子力被災者」になろうとしている。各地の原発で生命を危険にさらして働いてきた人々、爆発事故に伴う被曝で今後長期間にわたる健康リスクに 向き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人々の被災がまずある。だが原子力被災はこれにとどまらない。福島原発の爆発は、今後長期にわたって東北地方の農業に打撃を与 え、安全な食料の価格を高騰させるだろう。都市貧困層は確実に食の安全から排除される。原発の停止によって電力供給が不足し、輪番停電が実施されている が、それに伴う事業所の閉鎖や休業が相次いでいる。都市貧困層はこれによる失職と賃金カットに見舞われ購買力を低下させるだろう。私たちは被災者なのであ る。

 

-日本政府と全電力会社はすべての原子力発電所を直ちに停止せよ。

-人の生命を貪るビジネスから撤退しろ。

-東京電力はすべての原子力被災者に補償せよ。

-被曝したすべての人々に今後の全健康被害を回復するまでの医療費と生活費を補償せよ。

-原発事故のために閉鎖や休業を余儀なくされたすべての事業者の売り上げを補填せよ。

-失業や休業、賃金カットに追い込まれた人々の損害を補償せよ。

 

 

直接の被害を受けず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私たちは呼びかける。圧倒的な津波や火災のスペクタクル、圧力容器内の水位を伝える字幕の数々、御用学者の言う「直 ちに健康被害はないレベルです」というコメント、これらの無限ループ映像に曝される日々から抜け出そう。この「情報被曝」は私たちに「祈るしかない」とい う無力感を作り出し、今回の事態に責任を負うべき者や制度をあいまいにする政府・電力会社の言いわけへの同意を作り出している。いっときも早く、この「情報被曝」による被災から回復し、責任者を名指し追求することが必要であると私たちは考える。

 

 

2011年3月17日

フリーター全般労働組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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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9 23:44 2011/04/09 23:44

 

[링크] <한겨레> 세상읽기: 다가오는 자유주의의 시대 - 안병진

 

 

 

안병진 교수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이른바 '부상'은 (물론, 좀더 엄밀히 말하면 이유야 뭐라 하든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안정화 내지 영속화를 선망하는 정치적 입지의 산물이라고 해야겠지만서도, 아무튼) 딱히 놀라워 해가며 주목할 것도 없이, 역사적으로 보면 서구산 근대화를 제 발로든 떼밀려서든 좇았던 데 치고 안 그런 데가 없었던 거 아닌가? 호황-공황이란 자본제 경제 특유의 주기적 싸이클이나 지정학적 입지완 무관하게, 자본주의 기업가나 민족 부르주아지들이 끝없는 이윤 창출에 대한 차가운 열정을 과시해왔던 것만큼이나 말이다. 앞으로 아마 더 중요한 물음은, 이런 열정과 맞물려 있었던 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선호나 선망이 '실제로는' 어떤 내재적 모순 속에서 그 선망과 극심하게, 또는 여보란듯이 어긋나 왔고 어긋날 거냐일 테고, 이런 어긋남이 그저 부재 내지 부실한 '합의절차'와 테크닉에 관한 문제일 뿐이겠느냔 걸 테다.

 

글쎄, 나로선 글쓴이가 "혁명"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실은 그간 단속적으로 계속해서 있어온) 자유주의의 부상 전망 속에서 어떤 낙관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설사 안다 한들 설득력 있게 와닿을지도 의심스럽다. 소위 한국산 보수와 진보가 알고 보면 공통된 걸 공유하고 있다며 스스로 놀라워하는 것도, 뭐가 그리 놀라운 건지, 그게 되려 놀랍다. 소위 진보와 보수가 알고 보면 많이 겹치더란 주장은 사실, 한참 전에 백낙청씨와 박세일씨가 경향신문에서 벌인 대담인가에서 보여줬듯, 박세일씨 같은 이도 하는 얘기다. 백낙청씨도 동의할 얘긴지와는 별개로, 박세일은 자기가 보기엔 진보와 보수가 겉보기완 달리 심지어 7~80%가 겹친다고까지 했다.

 

그래서, 이런 겹치는 대목에 유념해 국민통합주의적 정치, 더 적극적으론 "자유주의 혁명"이 도래하면 우리는 희망을 입으로만 아니라 몸과 삶으로도 실감하게 될까? 박세일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가 이런 얘기 하니까 나쁘고, 안병진 같거나 그와 엇비슷한 진보적, 민주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이 하면 괜찮은 게 아니다 이건. 정작 문제는 입구만 다를 뿐 우리가 지금 마주한 현실에 대한 동일한 사고와 가치판단 회로가 공히 장착돼 있다는 건데, 거기에 누구 이름표가 붙어 있냐는 게 그리 중요한 걸까?

 

안병진씨의 주장에서 난, '점진적인 것'의 미덕을 주장하며 소위 중도적 국민통합주의를 지지하는 강단 지식인 특유의 메가리 없는 정치적 유토피아 혹은 신기루를 본다. 페북에서 이 글을 링크한 윤석규님의 포스팅에 달린 덧글을 보니, 무슨 남인에 소론까지 들먹여가며 당찮은 비교적 접근을 하잔 소리까지 나오는데, 이거야 뭐 조공체제와 근대자본제 체제를 맞비교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소급의 오류라 치자. 이걸 부여잡고 있기보단, 가령 이런 질문이 더 시급해 보여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네 몸뚱아리, 나아가 우리네 삶이 깃들어 있는 이 지구생태계의 활력과 항상성은 실은 부단한 분열증식 과정으로부터 생긴다는데, 이른바 분열을 정치적 죄악으로 단도리치는 건 과연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의 산물일까, 아니면 정치적으로 우상화된 세속종교의 산물일까? 게다가 다른 사회 체제도 아니고, 자본 축적이 빚어내는 각종 경제적, 지리적, 문화적, 따라서 정치적 적대와 갈등이 여러 방식으로 구조화되기 일쑤인 이 자본제 시민사회 아래서. 그렇다고 이런 유무형의 적대를 어떻게 실질적으로 철폐할 건지 제대로 궁리하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소위 분열은 과다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소해서 문제였던 거 아닌가? 우리 일상을 그간 피곤하게 가로질러 가며 압뷁해온 이런저런 적대를 제대로 해소, 극복하는 데 중요하고 또 필요한 창조적인 분열 내지 분화 말이다. 이런 긍정적 분열의 정치에 탄력을 받는 게 실은 소위 '국민경제'니 '국민통합'의 견지에서 언짢고 두려우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까놓고 말을 하던가. 이걸 끽해야 경제 살리기를 훼방놓는 "사분오열"로밖엔 판단을 못하거나, 일본산 식민주의자들이 윤색해놓은 '사색당파' 담론에나 기대 힐난하는 정치적 상상력의 결여, 혹은 빈곤이 더 심각하다, 내가 보기엔. 내가 알기론 담론적으로 거의 치명타에 가까운 부상을 입은 자유주의 가지고 의미 있는 변화를 꾀하겠다는 것도 굳이 말하자면 참 뜨악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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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9 16:29 2011/04/09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