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310, August 1, 2011

 


구명보트 올라타기 경주: 유로화는 해낸 걸까?
("Racing for the Lifeboats: Did the Euro Make It?")

 




거의 모든 곳의 공식 소식통에서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만 하면 세계경제의 혈색은 조만간 다시 좋아질거라고들 한다. 정말로 이렇게 되리라고 믿는 이들은 사실 아무도 없다. 각국 정부와 거대은행이야 말할것도 없고, 심지어 (아둔한 낙관에 들린 채) 경주마용 눈가리개가 씌인 경제학자들마저 그렇다.

 

세계는 지금 공황 국면으로, 정말이지 중대한 충돌을 코앞에 두고서 동요중인 상태다. 그 어떤 곳의 그 어느 누구도 이 충돌이 불러올 부정적 효과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몇몇 운 좋은 이들이야 그 충돌로부터 가까스로 돈을 벌게 될지 몰라도 말이다. (이때) 곳곳에 자리한 정부의 제일 관심사는 얼마나 잘 해내느냐가 아니라, 여타 국가들보다 얼마나 덜 나빠지느냐 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언론에선 미국과 유로존(유럽연합), 그리고 그렇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적인 논쟁들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앞서 말한 국가들(미국, 유럽연합, 중국)과 여타 국가들이 (덩치가 크든 작든, 뚜렷이 성장중이든 명백히 침체중이든) 똑같이 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얘긴 아니다. 비록 이들 국가가 가장 덩치 큰 행위자들에 비해 일을 꾸며낼 역량이 곧잘 떨어지긴 하더라도 말이다.

 

엄청나게 극적인 상황이 펼쳐지던 지난 7월, 유로존은 잡다한 묶음으로 이뤄진 정치적 타협안을 법제화하는 듯했다. 이로써 유럽연합은 많은 여타 경쟁자들보다 “덜 나빠질” 만할 수 있게 된 걸까? 생각건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걸 보노라면, 우리는 복잡다단하게 이뤄진 여러 경제적 조치들 너머를 마주해야 한다. 그 누구도 실제로 합의한 바가 뭔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듯싶은데, 유로존 소속 국가들이 마주한 경제적 딜레마(진퇴양난)들과 관련해 그 합의가 조금이나마 득이 될 건지 여부를 놓고선 더더욱 그러하다.

 

지난 7월 성사된 타협은 경제적인 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고, 이에 따라 그 주된 결과는 정치적인 양상을 띄게 될 것이다. 유로존 국가들이 어렵사리 이뤄낸 건 유로를 단일통화로서 지켜내는 일이었다. 이 결정은 상당수 사람들에겐 놀라운 일로 여겨진 반면, 다른 이들한테는 재앙과도 같은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유로존 국가들이 유로를 단일통화로 지켜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 세계에서 진행중인 지정학적 투쟁들과 관련해, 유럽(연합)이 주요 행위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같은 조치 덕분일 것이다.

 

카르스텐 보케리는 <슈피겔>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연합이 취한 조치를 이렇게 요약했다. “[7월 21일]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빚더미에 깔린 그리스를 대상으로, 은행 등 민간기관의 참여를 놀라울 만큼 높은 수준으로 포함하는 제2차 긴급구제안을 밀어부쳤다. 더불어 이에 대한 보강조치 차원에서 조성된 기금에 새로이 힘이 실렸는데, 여기엔 이 기금을 유럽판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볼 만한 낌새가 있다.”

 

그리스 채무(와 여타 유로존 국가들의 채무)를 둘러싸고 앞서 불거졌던 경제적 논쟁에는 가히 표준이라 불릴 만한 성분들이 망라돼 있었다. 한 극단에는 결과야 뭐가 됐든 상관없이 “시장”에 대한 독실한 믿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가장 극단적인 이들은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퇴출시키고 싶어했다. 다른 한 극단에선 일종의 “소규모 마셜플랜” 같은 유효수요의 (재)창출에 중점을 두고서 경제적 연대에 관해 설교를 펼치는 네오-케인지안 계통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논쟁 밑에 깔려 있는 정치적 문제는 서로 다른 국가들 안에서 펼쳐지는 정치와 맞닿아 있다. 케인즈주의적 해법은 독일에선 대중적으로 거의 반향이 없었고 메르켈 여사(총리)는 합당하게도 그 해법을 따를 경우 선거에서 겪을지 모를 재앙을 두려워했다. 신자유주의적인 해법은 그리스와 스페인, 결국엔 많은 다른 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극심한 대중적 동요를 그 대가로 치러야 했다. 절충의 정수를 그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 이는 프랑스의 니콜라스 사르코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유럽재정안정기구(EFSF)에 새롭게 힘이 실릴 수 있도록 분투했고 제 스스로 말하길 유럽통화기금이 첫 발을 내디뎠다며 이를 공공연히 추켜세웠다. 이같은 비교에 대해선 메르켈 총리조차 말도 안 되는 건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메르켈 여사는 자신이 원했던 양보를 얻어냈는데, (은행 등) 사적/민간 투자자의 개입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유럽중앙은행 또한 이에 은총을 내리는 데 마침내 동의했다. 유럽재정안정기구는 자체 채권을 발행할 것이고 그리스정부산 채권의 보유자들은 보유한 채권을 새 채권으로 바꿀 수 있는데, 이 채권의 이자율은 모르긴 몰라도 (그리스 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다. 이같은 조치가 모두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데는 IMF의 신임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도 의견을 같이했다. 물론, 이같은 새로운 정렬 과정 덕분에 IMF가 덜 말려들게 된 건 사실이다. 게다가 IMF의 가용자원이 바닥을 드러낸 시점에서 말이다. 이와 같은 절충안(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선 심지어 유로존 회원국이 아닌 영국조차 박수를 보냈을 정도다.

 

이같은 조치는 유럽을 “구원해낼” 일종의 주문이 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도, 타협안을 따르지 않으려 애쓰는 행위자들이 여전히 있다. 머지않아 이는 선거 결과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드골의 후예인 사르코지는 왜, 유럽을 공통의 협치 구조로 한층 더 가깝게 재편시킬 절충안을 이끌어냈을까? 정말이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드골의 후예라는 측면에서 보인) 일련의 정치적 후퇴 조치들이 이뤄진 뒤로, 프랑스의 다음 선거와 관련해 상황은 사르코지에게 유리해 보인다. 외교정책상의 성취를 그가 이뤄냈다는 점에서다. 프랑스 내의 여론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실제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드골주의 노선에 아주 충실한 것이다. 드골은 유럽에서 연방주의 노선을 강화하는 데 반대했는데, 연방주의가 프랑스의 국익을 댓가로 미국의 국익에 봉사하는 노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에서 연방주의 노선의 강화는 미국의 국익을 댓가로 유럽(권역과 프랑스)의 이익에 봉사하는 상황이 됐다. 유로존이 붕괴했다면 서유럽이 국가간 체제에서 주된 행위자로 누려온 지위도 날아가고, 달러가 도움이란 도움은 죄다 필요한 시점에서 달러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좌파 중의 좌파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내는 목소리엔, 유로존이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제도로, 은행들은 보호하면서 힘없는 이들한테는 해를 끼치고 있다는 불평이 섞여 있다. 이는 대체로 사실이다. 여지껏 내가 이해한 적이 없는 건, 완전히 분리된 일련의 국가들 속에서 좌파가 어떻게 무언가 더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유럽연합이 사라지게 되면 신자유주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성해질 것 같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유럽연합과 유로존이 개봉박두 중인 심대한 붕괴 속에서 “덜 나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걸 대단한 성취라고 할 건 못 될 게다. 하지만 구명보트에 올라타려는 경주에서, 유럽이 적어도 구명보트 하나를 띄우리라는 보증은 된 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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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02:39 2011/08/02 02:39

 

 

어떻게, 잘 지내나? 연초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아봤는지. 편지 쓰고선 면회도 한 번 더 가야지 했는데, 결국 못 가고 이제야 이렇게 또 글로 소식을 전해. 미안햐. 너도 익히 알다시피, 내가 워낙에 게으르잖여. 게다가 이래저래 경황도 좀 없었네그랴. 경황 없음의 알리바이야 그럴 듯한 게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그 중 하나만 대볼게. 그럴 듯한 데다 아마도 꽤나 솔깃해할지 모를 걸로다 말야.
 

얼마 전 『법정에 선 과학』이란 책을 맡아서 진행했거든. 법정에 선 과학이라 하니까, 어떤가. 과학을 이성의 법정에 세워놓고는 과학이 ‘얼마나 과학다운지’ 따져묻는 책 같아 보일라나? 아니면 법조계를 겨냥해 니들이 한껏 폼만 잡았지 도대체 과학을 아느냐며 과학의 정석을 말하는 책 같다거나. 아, 그래, <CSI: 과학수사대> 같은 미드를 막바로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과학’수사만 어떻든 되면 사건이 아무리 오리무중이더라도 그 진실과 전후맥락은 사실상 따논 당상이라는 분위기를 연신 풍겨주시는 미국산 드라마 있잖어. 그러니까, 과학이 빠진 정의와 진실은 설사 차고 넘친들 김 빠진 사이다 같다고 말하는 책?
 

아니, 이 책은 그런 책들이 아냐. 이 책은 근대 법과 과학(기술)에 관한 상식 내지 통념들이 ‘실제로 굴러가는’ 관련 제도들, 뭣보다 이들 제도가 크고 작게 깃들어 있는 우리네 삶과 얼마나 겉돌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거든. 가령 과학계는 진리탐구에만, 법조계는 정의추구에만 제각기 열성이다 보면, 이 둘의 행복한 만남은 우연이 아닐 줄로들 알잖아.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다간, 정의와 진리 같은 말은 자칫 법률·과학전문가 공동체의 고객유치용 악세사리로나 쓰이기 십상이라는 거지. 과학(기술)계의 ‘주류 지식’은 법조계가 일단 따르고 볼 일이라거나, 사법 제도를 마치 과학(기술)계의 꽁무니만 쫓는 둔탱이로 취급하는 발상법도 이 책에선 기각 대상이야. 이런 가짜이분법에 매여 있어선, 법과 과학이 일종의 ‘내외하는 커플’ 사이처럼 어떻게 서로 스텝을 맞추거나 곧잘 몸까지 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과학(기술)과 법이라는 열쇳말을 책쓴이가 굳이 이렇게 다룬 이유? 이런 질문이 책 전반에 스며 있어서다 싶어. 우린 어떻게 해야 과학(기술)과 사법 제도를 사람 잡는 물신 내지는 괴물로 방치하지 않고, 기왕이면 저마다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하는 지렛대로 바꾸고 써먹을 수 있을까? 여러 민주적 공론화 장치들을 통해 법과 과학을 “일단 썼다가 쫙, 지우는”(=탈구축하는) 과정이 얼마나 필요하고 또 중요한지 책쓴이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건 아마 그래서겠지. 이런 의미에서 법이나 과학 영역을 근대화된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지적 사제들(특히나 이런 법/과학 특유의 전문성)한테 유달리 치이고 놀아나기 일쑤였던 한국산 대중에게,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은 더없이 반가운 소식일지 모르겠어. 
 

어때, 이 정도면 솔깃해졌을라나?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을 만큼 말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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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0 16:24 2011/06/10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