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하여
(On the Nature of Capitalism)

 




자본주의가 소멸하리라는 소식은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자면) 다소간 과장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내부로부터 발휘되는 놀라운 부활 및 재생 능력이 있다. 비록 그 능력이란 게 기생물, 다시 말해 다른 종에 들러붙어 다른 생물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고 사는 생물과 나눠갖는 종류의 능력이긴 해도 말이다. 숙주가 된 생물이 완전히, 또는 거의 완전히 빨아먹히고 나면, 기생물은 이전 숙주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이라지만 연장된 시간 속에서 생명의 즙을 공급해줄 또다른 생물을 가까스로 찾아내는 경향이 있다.

1백 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듯 잿더미로부터 되풀이해 솟아나는 자본주의의 기괴한, 불사조 같은 능력의 비밀을 파헤쳐낸 바 있다. 그건 바로 황폐화의 궤적을 남기는 능력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명의 즙을 철저히 다 빨린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즐비한 무덤들로 자욱져 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같은 기생물이 아직 찾아들지 않은 [잠재적 숙주] 상태로 줄지어 있는 생물들의 집합을 “전
자본주의적 경제들”, 즉 계속해서 이뤄지는 제국주의적 팽창 아래 그 수가 제한돼 있고 꾸준히 줄어들게 될 경제들로 한정했다.

매번 이뤄지는 찾아듦의 연쇄 속에서, 잔존해 있는 “처녀지들”은 자본주의적 착취가 이뤄지는 또다른 목초지로 바뀌었고, 그리 머지않아 그같은 팽창으로 부풀었던 이윤 전망이 사그라든 결과 자본주의적으로 “확장된 재생산”에 불가결한 것들을 충족하기엔 부적합해졌다. 이런 경향을 염두에 두면서(1백여 년 전의 자본주의적 팽창이 대체로 영토적인 것으로 내포적이기보단 외연적이고, 종적이기보단 횡적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향인데),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지속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처녀지들”이 일단 정복돼서 자본주의적 순환의 쳇바퀴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나면 착취에 필요한 새로운 땅이 없어진 결과 시스템 붕괴의 조짐이 일고 마침내는 그렇게 내몰릴 거라고 말이다. 그 기생물은 먹잇감으로 삼을 숙주가 없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셈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미 지구적 차원으로 오지랖을 넓혔거나, 어쨌든 간에 그와 근접한―룩셈부르크에겐 그런 전망을 하기엔 여전히 다소 먼 경지였던―수준에 이르렀다. 그럼 이제 룩셈부르크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반 세기 남짓한 세월 동안 자본주의는 그 전까진 알지도, 상상도 못했던 기예로 전에 없던 새로운 “처녀지들”을, 기존 것들에 자신의 게걸스러움을 제약받지 않고서도 만들어낼 줄 알게 됐다. “부가가치”와 이윤, 축적의 주요 원천인 “생산자사회”에서 “소비자사회”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결합에서 상품과 고객의 결합으로의 전환이 이뤄짐으로써 가능해진 이 새로운 기예는 생리적 기능들[혹은 생명 과정 일반]의 점진적인 상품화, 시장을 매개로 한 잇따르는 필요의 충족, 이윤합리적 경제의 조절장치인 욕망이 필요를 대신하는 상황 속에 개재해 있다.

현재의 위기는 인위적으로 창출된 “처녀지”가 그 지력을 다 소진해버린 데서 비롯됐다. 이 처녀지는 “신용카드 문화”가 아닌 “저축장부 문화”에 밀착돼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 바꿔 말해 신용으로 살면서 대출을 받고 이자를 내고 사는 등 벌지 않은 돈을 쓰는 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못하는 사람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같은 특정한 “처녀지”를 상대로 한 착취는 대체로 끝이 났고 이젠 은행가들의 성찬 뒤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치우는 일이 정치가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이 일은 은행가들이 져야 할 책임의 영역에서 떨어져나와 “정치적 문제”의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뒤늦게서야 경제적 이슈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을 인용하면) “정치적 의지”의 문제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연구개발(RD) 부서들에선 새로운 “처녀지들”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강도 높은 노동이 지금도 진행중에 있으리라고 누구든 능히 짐작해볼 수가 있겠다. 기생물로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상, 기대수명은 어느 쪽이든 공정하게 제한돼 있다는 저주 또한 부담이 돼기야 하겠지만서도 말이다.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굴러간다. 그 파괴로 창조된 건 “새롭고 향상된” 형태의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창조로 파괴된 건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식으로 빠져들고/매혹되[지만 자본주의의 숙주로 먹히]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생물들”의 자기부양 능력과 살림살이, 그리고 존엄함이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의 중요한 밑천들 중 하나는 그 특유의 창의성과 그것이 내건 약속상의 변덕, 작동 방식상의 무자비함이 경제학자들의 상상(력)을 그에 대한 비판자들까지 포함해 큰 격차로 앞지른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다.


지그문트 바우만



원문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0/28 00:40 2011/10/28 00:40

 

거리로 나선 사람들 저마다의 '이유들', 그리고 '전망들'에 대하여

(The ‘Why’s’ and ‘What for’s’ of People taking to the Streets)

 

 

 

 

“아랍의 봄으로 아랍 세계 일대의 전제군주들에 맞서는 대중의 반란이 촉발됐다. 이스라엘의 여름으로 살 만한 집이 없고 자기네 나라가 정실자본주의 과두세력의 수중에 있다는 데 항의하는 주민들 25만 명은 거리로 나섰다. 아테네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유럽 도심의 광장은 실업과 기함할 만큼 벌어진 부정의한 소득 격차를 격렬히 비난하는 청년들로 뒤덮인 상태다….” [(금융)세계화의 미덕을 예찬한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토마스 프리드먼은 <뉴욕타임즈> 2001년 8월 12일자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거리로, 그리고 광장으로 나섰다. 1989년으로 되돌아가 보자면, 이런 일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Vaclavske Namesti에서 처음 일어난 다음, 소비에트 권역 국가들의 수도 여기저기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그 다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키예프의 도심 광장이었다. 다른 곳도 물론이거니와 이들 장소에선 새로운 기풍이 담금질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행진도, 시위도 더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기보다는 외려, 요구사항들이 충족될 때까지 여러 종류의 무기한 점거 아니면 포위/둘러싸기가 계속됐다.

시험 삼아 시도되던 게 최근 들어선 이제 하나의 표준이 됐다. 사람들은 공공 광장에서 상당 기간 머물겠다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서 그곳에 눌러앉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자신들이 바라는 걸 이루거나 받아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텐트와 함께 침낭을 가져오는데, 어떤 맘을 먹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상당수 다른 이들의 경우 들락날락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는 주기적으로 이뤄졌다. 매일 혹은 저녁마다, 아니면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광장에 있는 그들이 거기서 한 건 뭐였을까? 여러 연설을 경청하고, 갈채나 야유를 보내며, 각종 빌보드나 배너를 나르고, 소리치고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무언가가 바뀌길 바랬다. 그 ‘무언가’라는 건 저마다 제각각이다. 그게 거기 있는 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걸 뜻하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몰랐다. 많은 이들에게, 그건 수정처럼 투명한 게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뭐였든 간에, 그 사람들은 이미 진행중인 변화를 맛본 셈이었다. 동일한 정서적 파장에 맞춤한 게 확실한 군중에 둘러싸인 채로, 로스차일드나 타히르 광장에 밤낮으로 머무는 일은 이미 일어났고, 즐거움을 부르는 대단한 변화였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말로 시연되고 이젠 몸으로 겪는 일로서 말이다. 웹상에서 벌어질 때 매력을 발산했던 특색들을 잃는 것도 아니다. 미래를 담보로 가두는 일 없이 현재를, 의무 없는 권리들을 누리는 능력 덕분이다.

숨막힐 정도로 중독성이 있는 어우러짐의 경험.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연대(감)일 테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그 변화란, 더는 혼자가 아니란 뜻일 터. 그 연대를 이뤄내는 덴 “고독(한)solitary”이라는 고약한 단어에서 ‘t’가 있는 자리에 ‘d’를 대신 집어넣는 것 이상으로 품을 들일 게 거의 없었다. 연대는 요구하는 대로 이뤄지며, 그 요구가 감당하는 만큼 (아주 조금 더 오래가 아니라) 오래 가는 것이다. 채택된 대의를 공유하면서 이뤄지는 연대는 어떤 대의를 가지고 있을 때만큼 강고하질 못하다. 나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 그리고 우리 (여기서 ‘우리’인즉, 광장에 있는 사람들) 아닌 나머지 모두에게는 저마다 [삶의] 목적이 있고, 나름의 의미가 있는 삶이 있다.

며칠 전 월가 일대에 친 텐트에서 밤샘하던 젊은 친구들은 레흐 바웬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전설적인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에서 마찬가지로 전설이 된 지도자로, 조선소와 광산, 공장 안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작업장을 떠나지 않았을 정도로 독했던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제국을 뿌리째 흔들게끔 이끈 것으로 유명한 바로 그 바웬사에게 말이다. 그 편지에서, 맨하탄 거리와 광장에 모인 젊은 친구들은 자기네가 학생이자 아주 다양한 인생역정과 피부색, 정치적인 생각들을 가진 노동자조합의 조합원으로, 오로지 “미국 경제가 도덕적 깨끗함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단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인의 99%가 1%의 탐욕과 수탈을 더는 참을 수 없고, 참지도 않을 것이라는 공유된 믿음 말고는 그 어떤 지도자도 없다는 점을 아울러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 편지의 발신인들은 폴란드에서 이뤄졌던 “연대”가 이런저런 걸림돌과 장벽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고 불가능(하다던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하나의 사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따르고자 하는 사례라는 것이다.  

똑같거나 아주 비슷한 얘기들이 지난 5월 15일 ‘분노한 이들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마드리드의 도시 광장 일대에 굽이치던 젊은이들과 그닥 젊진 않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그리고 90개 넘는 나라의 951개 도시에 전염되면서 일어난 시위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들 운동엔 지도자가 없는데, 어디 어느 종족이라 할것없이, 어느 종교·정치 진영을 막론하고 열광적인 지지자들을 이끌어냈다. 오로지 세상물정이 지금처럼 계속 굴러가도록 하진 않겠다는 일념 아래 단결한 가운데 말이다. 이들[운동]은 그 심중에, 주저앉히거나 파괴시켜야 할 것으로 제쳐둔 단 하나의 걸림돌 내지 장벽이 저마다 있다. 그것은 나라별로 다양할지 모르지만, 이 다양함을 가로질러 더 나은 종류의 사회로 가는 길을 트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저마다 공유하고 있다. 인간다운 것에 보다 더 기꺼워하되, 인간답지 못한 것에 대해선 용납하기 어려워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제각기 지목된 걸림돌은 마치 저마다의 장소에서 잡아당겨야 [걸림돌들로 엮인] 사슬 전체가 움직이는 하나의 연계망처럼, 그 걸림돌이 깨져야 저항하는 사람들이 함께하게 만든 모든, 여하한 고통이 끝나는 상황과 단단히 연루돼 있다. 이 일이 일단 이뤄지고, 새롭고 보다 더 나아진 사회를 세울 장소가 깔끔하게 마련된 다음에 물어야 하는 건, 그 후에 펼쳐질 형세에 대해서다.

거리의 사람들이 가진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한데, 이처럼 파괴 이후 맞이할 세계가 어떤 이미지일지는 모호하게 둔 채 파괴라는 단일한 과제에 저마다 초점을 맞추는 데 있다. 분노한 이들의 운동이 파괴의 분담조를 이뤄 행동할 때 정말이지 막강해진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이 됐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무엇보다도 여전히 돋보이는 건 밑그림을 그리고 건설하는 팀으로서 이들이 저마다 지닌 역량이다. 몇 달 전 우리 모두는 아랍의 봄이라는 경외로운 장관을 부푼 존경의 맘으로 숨죽여 가며 지켜봤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10월 하순인데,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랍의 여름을, 아직까진 무위에 그쳤다 해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라인란트 출신의 두 젊은이였던 맑스와 엥겔스가 거의 2백년 전에 썼던 선언문[<공산주의자당 선언>]을 지금 쓰게 된다면, 그들은 당장 “유령이 이 행성을 배회하고 있다. 분노의 유령이…”라면서 운을 뗄 수 있었을 텐데, 그 유령이 어디서 나타나는가는 쓰잘 데 없고 말썽만 부르는 문제다. 그러나 온갖 곳에서 흘러든 그들을 묶는 공통 분모가 능욕당한 자존감과 존엄성,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가늠이 안 되는 데서 기인하는) 우리의 무지와 (어떤 일이 못 일어나게 막을 방법이 없다는 데서 기인하는) 무능에 공공연히 맞서는 일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가 있다. 마치 특허라도 낸 양 삶에 닥친 도전들을 막아준다던 오랜 방식들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 반면,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거나 공급이 지독하게 딸리는 상태다.

우리 아버지 세대에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서 싸움이 날 순 있었지만, 뭘 해야 할지가 일단 정해지면 기다리는 동안 저기 있는 대행기구가 그 일을 처리할 거라는 데 대해 공통된 합의가 있었다. (일이 되게 하는 능력인) 권력과 (그 일이 옳은 방향으로 이뤄지도록 살피는 능력인) 정치를 한 데 갖춘 이 기구가, 말하자면 국가(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는, 더 이상 이런 대행기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쌓여가고 있으며, 그나마 쓸모를 발휘했다던 데서마저 확실히 찾아볼 수 없게 됐다는 점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부실 지경에 있다. 권력과 정치는 서로 분리되는 방향으로 활로를 찾아 이동중이며 둘 사이의 이혼이 저 모퉁이 어딘가쯤에서 임박한 상황이다. 한편으로 권력은 무인지경의 전지구적 팽창 속에서 정치적 통제 없이 최적의 목표물을 고르는 자유를 누리며 안전하게 지구를 싸돌아다닐 테고, 반면 정치는 그 본연의 힘과 근육, 이빨을 전부 아니면 거의 뜯겨 짜부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 나면서부터 조각날 대로 조각난 존재로 여겨져온 우리 모두는,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 자신의 조각난 임시변통들로 인해 버림받는 신세가 되잖나 싶다. 우리가 이미 마주하고 있는 웅대한 과제들, 그러나 방책을 찾지 않으면 속절없이 뒤집어쓰게 될 보다 더 두려운 일들을 다루기엔 쓰라릴 만치 부적절한, 그런 임시변통들로 인해서 말이다. 우리 시대를 속박하는 모든 위기의 밑바닥에는, 효과적인 행동을 만들어낼 기구와 수단들의 위기가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결과로서, 공유된 위험들과 마주한 가운데 마치 독방 처분을 받은 것 같은 통절한 고독감이 있다.

“높은 곳”(즉, 의회와 정부 기구들)에서 내려오는 구제책에 대한 믿음을 잃고서 일이 올바르게 처리될 대안적인 방법들을 찾다, 사람들은 발견 그리고/혹은 실험의 항해차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도심 광장을 노천 실험실로 바꿨는데, 거기서는 도전의 규모와 맞아떨어지리라 기대되는 정치적 행동의 도구들이 우발적으로 고안 혹은 발견되고, 시험을 거치며, 심지어 불의 세례를 거쳐 실제로 운용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수많은 이유에서 도심 거리는 그런 실험실을 설치하기에 좋은 장소고, 몇 가지 다른 이유에서 거기에 설치된 실험실들에선 다른 데선 결국 괜한 짓으로 판명났던 것이 실용화되는 듯싶다.

1789년 7월 14일날, 근대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6세는 자신의 일기에다 딱 한 단어만 써놨다. ‘별무’라는 단어. 14일은 비천한 것[=레미제라블]들은 발들일 수 없고 적어도 떼지어 들어가지 못하며, 어슬렁대는 건 더더욱 안 되는 거리가 한 무리의 쌍뀔로뜨들로 흘러넘친 날이었다. 이 날 그들은 그렇게 거리를 채웠고, 근위대를 압도해 바스티유를 장악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뭘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영국의 휘그파 정치가] 헨리 피터 브로엄이 바스티유의 함락 후 수십 일이 지나 다른 거리로 나온 다른 민중들을 쫒아낼 때 “엄청나게 더러웠”다고 한) 군중의 발상은,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역사상의 진전이거나 후퇴로 보일 텐데, 아직 진지하게 여겨질 만한 게 아니었다. 더 많은 물이 세느와 라인, 템즈 강 아래로 흘러가야 했다. “군중”의 도래와 현전이 역사적인 단계에서 주목과 인정을 받고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다시는 쫒겨날 수 없게 되기 전까진 말이다. 구스타브 르봉, 조르주 소렐이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 같은 이들이 경고하고 일깨운 이후로, 도심 중앙 광장을 나돌아다니는 군중 소리를 듣고서 일기 작성자들이 “별무”라고 적지는 않게 됐다. 그런 만큼이나 대신 그들은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다. 그들은 모두, 힐러리 클린턴과 더불어, 대중적인 분노의 잿더미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가 뿌리내려야 한다는 비전을 심사숙하고, [이집트] 타히르 광장에 흘러넘치는 군중을 이후 이슬람 공화국의 기초를 닦게 될 자를 염두에 두고 신경이 곤두선 채 예의주시하며, 그 군중이 잘못을 저지른 자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정의한 짓을 한 자들에게 정의를 행하기를 꿈꾸는 이들이다.

스스로 뱃사람이 됐던 [<암흑의 핵심>의 작가] 조셉 콘래드는 “바다 위의 삶처럼 그렇게 사람을 홀리거나, 환멸을 부르지 않으면, 그렇게 속박하는 건 없다”고 주장한 걸로들 기억하는 이다. 반면, 몇 년이 지난 뒤 [<군중과 권력>을 쓴]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에 대한 아주 주효하면서도 어떤 일깨움을 자아내는 은유 중 하나로 바다를 (불, 숲, 모래 등과 나란히) 채택했는데, 그 은유는 특히 그가 이름붙였던 군중의 몇 가지 다양한 면면들 중 하나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건 바로 거스르는/반역하는 군중으로, 말하자면 사태를 일순 이제까지완 반대 반향으로 바꾸며 즉각적으로 ‘되감아치는 소용돌이’ 같은 것[즉, 혁명]이다. 죄수가 간수가 되고 간수가 죄수가 되며, 양떼가 목자가 되고 (고독한) 목자가 한 마리 양이 되는 셈인데, 군중이 하나의 개인, 즉 ['인터내셔널가'의 노랫말 중 하나이자, 프란츠 파농이 자신의 책 제목으로 쓰기도 한]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같이 분할 불가능한 주체로 배역상의 역전이 일어나는 사이, 잘게 부스러진 조각더미는 이질성이 사라진 통짜로 압착/응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흐름을 거스르는” 발상은 반역 행위 자체를 아우르는 데까지 나아갈 수가 있다. 카네티가 썼던 것처럼, “군중 속에서 … 개인은 제각각이던 한계들을 초월하고 있다고 느낀다.” 개인은 녹(아 없어지)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 셈이다. 이제 다수의 화신이 되는 건, 별볼일 없는 외곬수이던 바로 그 개인이다. 자기 자신을 저마다 비추는 수많은 거울의 연회장이 제한적이지도 조악하지도 않은 효과 속에서 거듭 남기려 하는 [감각상의] 흔적으로서 말이다.

군중은 또한 두려움/공포로부터의 즉각적인 해방을 뜻한다. “사람한테 낯선 이/것들이 건드리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없다”고 카네티는 말한다. “사람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싶어 하고, 그걸 파악하거나 적어도 분류할 수 있길 원한다. 사람은 늘 낯선 것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걸 피하려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그런 낯선 이/것들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원래 상태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효력을 잃는다. 무언가/누군가와 접촉하게 될지 모른다는 데 대한 두려움은, 개인과 개인을 가로질러 형성되는[=관개체적인] 공간을 헤치고 나아가는 일이 공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산산히 흩어진다. 그러니까, 분리와 고립에서 합침과 섞임으로 새로운 순환이 이뤄지게[re-cycling] 되는 공간에서, 여럿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여럿이 되면서 말이다.    

카네티가 군중 심리를 이렇게 읽어냈던 건, 1922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수상이었던] 독일계 유대인 발터 라테나우의 암살에 항의하는 대중 시위에 참여한 경험 덕이 컸다. 군중 속에서, 그는 “극적이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의식의 총체적인 변환”을 목격했다. 로저 킴볼이 (1986년 <뉴 크리테리언>에 실린 “엘리아스 카네티 되기”란 글에서) 밝혔던 것처럼, 카네티가 군중과의 첫 조우를 서술했던 방식은 상당 종류의 신비문학에서 이야기‘됐던’ 경험 유형과 거의 일치했다. 그것은 들뜸/도취였다. 즉, 뭘 느꼈든 간에, 그건 스스로 느꼈던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무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듯 전광석화 같은 무아의 경지가 최후의 심판이 닥쳤을 때 폭풍치듯 휘몰아치는 나팔소리처럼 필요했던 건, 자기밖에 모르는 행태에 대해선 충고와 설득이 따라붙고, 사방팔방에서 타박이 가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무엇이었을까 그건?

이제 우리는 군중이 왜, 마치 바다와도 같이 매혹적이면서도 사람을 속박한다는 건지 짐작할 수 있다. 군중 속에선, 칸막이들이 가로놓이고 철저히 구획된 채로 조성된 굳은 땅에서가 아니라 바다에서 그렇듯이, 모든 일 아니면 거의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아무 일이 아니면 거의 아무 일도 확실히 이뤄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뉘고 흩어지는 만큼이나 동맹은 신속하고 손쉽게 이루어진다. 찢기는 만큼이나 비전들은 재빨리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다. 차이와 대립들은 잠시 미뤄져도 격렬하게 새로이 생성될 뿐이다. 여기서는 정말이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뀐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되고 있는 걸로 보이든가 말이다.

거리 위의 사람들은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행의 신호를 보낸다고 해도 될까? 이행은 단순한 변화 이상을 뜻한다. “이행”, 그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리나 도심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벗어나고 싶은 “여기”는 이미 주어져 있지만, 그네들이 목적지로 삼아야 할 “거기”는 기껏해야 안개에 에워싸여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대안적인 사회를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런 만큼 그들이 지금까지 찾아낸 건 현존 사회를 없애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수단이란, 널리 퍼진 그들의 공분, 다시 말해 그들의 적의, 괴로움, 증오, 그리고 분노가 일순간에 초점을 맞췄던 현존 사회의 여러 특징들 중 하나를 없애는 데 필요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파괴 분담조로서 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오류는, 설사 있다 치더라도 거의 없다. 일단 바닥이 깨끗이 치워진 다음에 기초작업이 이뤄지고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진다 해도 오류들은 생긴다. 그리고 그 오류들은, 파괴 분담조들이 기이하리만치 높은 능률을 이끌어냈던 곳과 동일한 지점들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파괴의 시간대를 조성하기 위해 잠시 유예됐지만 그 일이 끝나는 순간 제 나름의 모습을 보이며 전면에 부각될 여러 이해관계들이 다양하고 상호대립하며, 심지어 양립불가능해지는 지점에서, 또한 쉽게 소진되고 사라지는 만큼이나 쉽게 고양되는 성질인 정서들 간의 시간대를 일치시켜 화해불가능한 것들이 화해하는 위업이 이뤄지는 지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동조화된) 정서들이 크게 흐트러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안 사회가 고안돼 만들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해 훨씬 더 빠르다.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는 이유라곤 오로지 어우러짐과 우정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일 그런 대안 사회로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안 사회라는 것은 리차드 세넷이 최근 긴급히 요청되는 것으로 묘사했던 바, 다종다양한 사람됨의 존재 형식들이 단일한 양식으로 자리잡은 사회다. 이 양식인즉, 형식에 개방된, 끝도 목적도 없는 상호부조에 바탕해 있다. 여기서 형식에 개방된 것이라 함은, 상호부조의 여러 원칙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상호부조 과정 속에서 창발/생성하는 것이란 뜻이다. 끝도 목적도 없다는 건, 상호부조에 임하는 이들 중 그 어느 쪽에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 않으며, 그 대신 서로 가르치는 만큼이나 배우는 역할을 주고받으며 화해에 이른다는 의미다. 그리고 상호부조란, 참여자들이 이긴 쪽과 진 쪽으로 나뉘기보다는 서로들 간에 혜택이 생길 수 있게끔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뜻한다.

이런 프로그램[의 실천]이, 왜 아니겠는가마는, 웬지 두렵고, 기이하며, 뜬구름잡는 것 같고, 유토피아 같으며, 불가능한 것처럼 들린다고? 뭐, 전기적 자극이나 승압을 통해 얻는 예상치와는 달리,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덴 시간이, 그것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뭔가 일이 이뤄지기까지 많은 사유와 논쟁, 인내와 끈기 또한 필요하다. 이런 자질들은 따라서 이제껏 [불가능한 것이었다기보단] 차라리 공급받기 열악한 상태였다고 하는 게 맞을 텐데, 그 자질들이 육성되는 데 지금보다 좀더 우호적인 사회적 기초들을 갖추지 못하는 한, 확실히 앞으로도 그런 상태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원문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0/27 20:31 2011/10/27 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