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다루면서 유럽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만든 식민체제가 없던 것을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서유럽이 동유럽과 맺었던 관계나 이탈리아가 지중해 지역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장사를 하는 시스템을 확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이런 생각에서 유럽사 내부가 아니라 유럽과 다른 지역과의 관계로 외연을 넓혀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 <경향신문> "한국의 파워라이터" 인터뷰 기사 중에서
.

 




아닌 게 아니라, 이른바 보편성-특수성 테제로는, 여러 권역에서 이뤄진 근대자본주의 세계의 발전 궤적을 오롯이 다룰 수 없는 거야 둘째 치고, 이 테제로 곧잘 옹호하려고들 드는 자유(민주)주의 담론/현실의 얼개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바꿔 말하면 가령 근대일본령 조선이나 오키나와, 홋카이도, 지금의 중국 동북부와 남동연안 지역 같은 데서 19세기 후반~20세기에 벌어진 동아시아의 (준)식민지적 근대화 과정 또한 '세계사적 발전'의 겉저리(=외부)나 일탈, 왜곡, 파행, 심지어 '낙오'니 지체 따위로 볼 수 없으며, 그렇게 봐선 아니아니 아니 될 일이란 얘기겄다. 되려, 그간 '발전'과 '진보'를 거듭해왔다고들 하는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의 필수적 구성분으로 다시 봐야 하는 거면 모를까.

사정이 이렇다면, 지난 세기 탈식민지 주권국가 체제로의 재편 이후와 그 이전의 '연속과 단절'에 대한 이론화, 역사화 작업이야말로 얼마나 조각나고 지체돼 있었던 건지.

대한민국산(혹은 자유대한산) 주류 사회과학계야 근대성 이데올로기의 주요 버팀목 중 하나인 (특히나 미국산) 보편-특수 테제와 자신의 입지를 철저히 동일시해왔으니 워낙에 그렇다 치고, 이른바 비판적이고 좌파적이라는 역사/사회과학계로만 국한해 봐도 그렇다. 뭐랄까, 여기저기 때깔 좋게 차려논 잔칫상이니 눈여겨볼 만한 밥상들이 그간 적잖았는데도, 어째 '배고픔'은 여전하고 맛도, 포만감도 좀체 느끼기 어렵다고 할까.ㅋ

끽해야,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과제' 운운하지만 사실상 '극복 없는 적응주의'로 가닥 잡힌 창비 쪽 얘기 안에서 맞네 틀리네 하고 있거나, 가령 이영훈과 허수열 같은 경제사 연구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드잡이질'이 본의 아니게 보여줬듯이 식민지적 근대화나 근대 권력-축적양식의 식민성 같은 말이 (필시 보편-특수 테제를 우습게 만드는 '지적 불경'을 저질렀단 암묵적 전제하에) 어불성설이네 아니네 왈가왈부하는 정도니 뭐.. 하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4/23 23:26 2012/04/23 23:26

 

[김진숙- 백기완 선생님, 벌써 여든이시라니]

 

 

'유기적 지식인'(그람시)은 대체 누구며, 어디에 있냐고 한다면 이렇게 단언해도 좋겠다. 전 한진중공업 노동자 출신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해온 말과 행적을 보라고.

펠릭스 가타리 같은 (네오)맑시스트 계통의 연구자들과 친구로 지내며 시야를 넑혀갔다는 야금노동자 출신으로, 브라질 대통령을 지낸 룰라 다 실바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더라마는. 과문한 깜냥이라 이 정도밖엔 모르지만서도 분명 더 들 수 있을 텐데..

이들을 눈여겨보자는 것은 물론, 김진숙/룰라 같은 유기적 지식인(혹은 이른바 "책 읽는 노동자")으로서의 인민-대중이 더는 '독특'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달리 말하잠 이들을 예외적 존재로 만들어버리거나 아예 그런 싹수들을 쳐내곤 했던) 역사적, 사회적, 제도적 조건은 뭔지 스스로나 서로 간에 묻고 답해보잔 일일 게다. 나 같은 "시민 아닌 시민들"을 대표한답시며 결국엔 사실상 주변화시키기 일쑤인 과두엘리트적 정당정치 형식에 백프로 싱크로부터 하고 보거나, 심지어 자신의 전부를 걸 게 아니라 말이다.

소위 제도화 과정과 그 구체적 형태들이 "변화의 지렛대"로서 지닐 수 있는 일정한 미덕과 유효성도, 내가 볼 땐 이런 문답이 광범한 저변을 확보하며 변화, 내식으로 말하잠 "사회의 좌경화" 압박을 조성해가지 않는 한, 그저 때깔만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뭐 그마저 솔직히 성별나이 불문, 이 "망할 눔의 사회"를 유지보수할 바로 그 '눔'들로 화했거나 화하려는 이들(혹은 그런 계급)의 안목으로나 보기 좋은 때깔이겠지만서도.

요컨대 "정치의 조건"인 제도(화)의 안과 밖을 분리하거나 고정된 것으로 물신화하지 않으면서 그 과정 자체에 내재한 긍정적인 긴장 내지 딜레마를 실질적, 근본적 변화의 계기로 끌어당겨 '퉁겨낼' 힘(실은 권력보다 더 넓고 깊은 비인칭적 생성변화의 마그마?ㅎ)은, 가령 김진숙이나 룰라"들"이 어떡함 더 꾸준히 폭넓게 나타날 수 있겠는지 묻고 답하는 한 가운데서, 이 문답이 틔워낼 집단적 주체 형성 과정으로부터 생긴다고, 아니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해야잖냐는 거다. 소위 학출+명망가들의 가방끈 기럭지나 때깔, 명민함,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날개를 달아줄 거라고들 (착각)하는 "당선가능성"(만)으로는 커버할래야 할 수가 없다는 거지(가만 보면 또 이래 가능한 것만이 현실적인 것인 양 얘기하는 분들 치고, 가령 "임파서블 이즈 낫씽"[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같은 나이키 광고카피에 곧잘 뻑가지 않는 이가 무척 드물다는 거-실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그런 게 결정적 변수였음, 특히나 '엄친아/엄친녀' 지수로만 보면 더 이상 선진화할 것도 없어 뵈는 한국 같은 데서, 뭔가가 바뀌어도 진작에 바꼈겠잖겠나. 이런 생각이 그렇게나 안 드는지 원. 물론, 암것두 안 바꼈단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럴 리는 없겠다. 요점은 어떻게 바꼈냔 거니까.

근데도, 이런 지수들을 높이고 또 넓히는 식이면 뭐가 바껴도 하여간 바뀔 수 있으리라는, '일단 닥치고 찍어봐'식 설레발 혹은 '중도주의적 미망'은 고명하신 분덜일수록 참 여전들 하신 것 같다. 뭐 이거야 사실 워낙에 지적으로나, 실천감각상 그런 훈육 과정을 국민학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타의 모범이 돼 가며 착실히 받아온 이들이니 그렇다 치자.

이보다 더 난감한 건, 앞서 말한 문답이 지금 당장 무슨 쓸모가 있으며, 설사 있다 한들 그런 "한가한" 방식으로 뭐가 바뀌겠냐며, 그 과정이 지닌 오지랖과 가늠하기 힘든 잠재력을 아예 뭉개거나 일단 깔아보는 경우들인데.. 글쎄, 나로선 되려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그런 식으로야말로 당장 뭐라도 바뀔 수 있겠냐고, 도깨비 방망이나 드래곤 볼이라도 입수해 어따 숨겨논 거냐고. 바껴야 한다지만 정말로 뭐가, 어떻게 바뀌길 원하는 거냐고 말이다. 흐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3/17 03:48 2012/03/17 0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