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328, May 1, 2012

 

노동절/메이데이: 노동자조합의 귀환?

("May Day: The Return of the Trade-Unions?")

 

 

 

 

노동자조합을 조직하는 일은 19세기 전반기 무렵만 해도 매우 급진적인 발상이었다. 노동자조합은 거의 모든 곳에서 불법이었다. 그래서 노조 결성을 금지하는 법률들이 상당수 유럽 국가들과 북미, 호주에서 19세기 후반기에 폐지됐을 때, 그같은 조치는 노동자들, 실제론 도시권 노동자들이 형성한 압력들에 대한 양보로서 의도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들의 요구가 이로써 보다 덜 급진적이게 됐으면 하는 바람과 기대 속에서 말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자조합들은 그와 동시에 탄생 중이었던 사회주의 및 노동자 정당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노동자조합들은 사회주의/노동자 정당들이 그랬던 것과 동일한 전략상의 쟁점들과 맞닥뜨렸다. 이들 쟁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조합이 선거 과정에 참여할지 여부와 어떤 식으로 참여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대부분의 노동자조합에선 선거에 참여하고 국가구조 내에서 권력을 추구해야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더욱이 노동자조합들에선, 사회주의/노동자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조합이 강력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일제 조직가들을 채용하는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는데, 이는 곧 그 조직을 운용하는 관료제가 창출돼야 함을 뜻했다. 모든 관료제가 그렇다시피, 그런 편제를 가진 노동자조합들은 조합원들인 노동자들의 물질적·정치적 이해관계와 반드시 동일하진 않은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

 

노동자조합들은 국가지향적이게 됐는데, 특히 자체적으로 꾸려진 이들 기구가 국민/민족적 조직으로 규정된 이후부터 그렇게 됐다. 보통 이들 조합은 명목상 국제주의를, 다시 말해 여타 국가들에서 결성된 노동자조합들과의 연대를 주창했다. 그러나 그 국제주의는 각국산 노동자와 노동자조합들의 이해관계를 [제각기] 보호하는 가운데 언제나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노동자조합들이 그 활동상의 매우 근본적인 색조를 누그러뜨렸다 해도, 고용주들이 자신의 사업 영역에서 노조가 결성되는 데 대해 반발하는 것은 여전했다. 노동자조합들은 조직화 활동을 허용하는 법제화가 이뤄지게 하고, 고용주들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조항을 이끌어내고자 끊임없이 투쟁해야 했다. 천천히, 천천히, 노동자조합들의 힘은 강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 25~30년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 각지의 노동자조합들로선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괜찮은 시기였다. 조합에 가입한 숫자와 가입률은 상승했고, 고용주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혜택들 또한 상당히 불어났다. 이 시기 세계경제가 믿기 힘들 만큼 팽창한 결과 자본주의적인 이윤은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뤄냈다. 많은 고용주들에게 이것이 뜻하는 바인즉슨, 어떤 종류로든 노동의 중지가 이뤄지는 쪽이 더 큰 혜택을 내건 노동자조합들의 요구에 응하는 쪽보다 치러야 할 비용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조합에게 유리하다는 바로 그 상황은 상당한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노동자조합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존의 근본적 수사와 활동들을 비난하면서, 이를 고용주 및 정부와의 다양한 협력 양식들로 대체했다. 여기에는 곧잘, 이들 조합이 서명한 협약서의 분량만큼 그 어떤 파업도 않겠노라는 맹세가 포함됐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군에 있는 노동자조합들은 정치적·심리적으로 1970년대 이후 고꾸라진 경제성장과 자본축적상의 정체 상황에 대해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고용주들(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세계 우파 진영)에선 좀더 향상된 혜택을 내건 노동자조합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응하기는 커녕, 그들은 일자리 재배치라는 위협을 주요 무기로 삼아 혜택들을 줄이는 데 골몰했다. 그들은 반노조 관련 법제화를 장려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40년 가까이에 걸쳐 이뤄져온 반노조 선동/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노동자조합들은 기존의 혜택들을 유지하기 위해 어렵고 종종 지는 싸움을 치렀다. 임금 수준은 하락했다. 그리고 노조 가입률은 급락했다. 노동자조합들의 대응은 곧잘 고용주들의 요구에 한층 더 순응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것이 아주 많이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산업생산이 몰렸던 (최근까지 “떠오르는” 국가라고 불려온) 나라들에서 노동자조합들은 (대한민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에서처럼) 초창기에 이뤄진 억압으로 인해 급진화됐고, 억압적인 정권들을 타도하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연합했다. 이들 노동조합들은 자신을 중도좌파 정당들과 연계시켰는데, 이들 정당은 마침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일단 이들 정당이 권력을 잡자, 노동자조합들에서 좀더 근본적인 입지에 선 목소리들은 사그라들었다.

 

2007년 이른바 금융 위기 이후, 이 모든 게 변했다. 이 세계에선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시위 구호인] ‘점거하라’, [스페인에서 긴축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일컬었던] ‘분노한 사람들’, [그리스 긴축조치 반대 시위 구호였던] ‘거부하라’, 그리고 그 외 다른 경우들처럼, 새로운 종류의 급진적/근본적 운동들이 출현했다. 그리고 돌연, 우리는 노동조합이 새로운 활력으로 반격에 나서고, 노동자 계층의 전면 봉기에 참여하는 상황을 목도했다. 특히나, 노조를 망가뜨리는 일이 우익 정치세력에서 지속적으로 공을 들이는 것 중 하나였던 이후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와 마주했다. 새로운 급진적/근본적 운동들의 문화와 노동자조합의 문화는 아주 달랐다. 새로운 운동들은 “수평주의적”이었는데, 다시 말해 국가지향적이지 않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미덕)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조직적인 위계가 생기는 걸 꺼려했다. 노동자조합들은 “수직주의적”이었고 중심적 구조로 조정된 계획과 통솔력, 균형잡힌 전술들을 강조했다.

 

아직까진 분명,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노동자조합과 새로운 급진적/근본적 운동의 [공통된] 이해관계 속에서였다. 아니면 그렇게 아주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함께 움직인다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어떤 식의 협력에서든 두 문화 중 다른 한 쪽이 [사상/노선 측면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걸까? 이는 양측 간에 중요한 쟁점이 돼왔다. 한편에 다른 한쪽에 대해 비타협적인 이들이 상당수 있고 다른 한편에선 양쪽을 절충하려는 양식을 찾는 이들이 있는 그런 쟁점으로서 말이다.

 

수평주의적인 세력의 힘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의미에서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명료함이 결여됐다는 의미에서든 이제껏 수동적인 채로 머물러 있던 사람들의 에너지와 노력들을 이들 세력이 아우를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수평주의적인 운동들이 지금까지 아주 성공적인 면모를 보여왔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노동자조합과 비교해 이들 운동에겐 장기적인 전략상 보다 더 명료한 전망이 있다.

 

노동자조합의 힘은 개별자들을 상대적으로 통솔력 있는 집단으로 조직화하고 현 세계의 공동체들을 가로질러 벌어지는 나날의 전투들에 투입돼야 할 비교적 상당량의 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수평주의적 운동에 비해 노동자조합에겐 단기적인 전술상 보다 더 명료한 전망이 있다.

 

노동절/메이데이는 역사적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1886년 5월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서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노조 집회가 열리는 사이 누군가가 폭탄을 던졌고, 상당수의 경찰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는 “아나키스트들”을 용의자로 기소했고, 이들 중 상당수를 교수형에 처했다. 헤이마켓은 전세계적으로 초창기 노동자조합 운동의 상징이 됐고, 노조 운동에서는 이 헤이마켓[사건]을 되새기고자 노동절/메이데이를 제정했다(정작 미국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말이다). 사실 그 “아나키스트들”은 부당하게 기소된 것이었고 그들에겐 혐의가 없음이 역사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하루 8시간 노동이라는, 그들이 내건 “근본적/급진적” 요구들 덕에, 노동자조합들은 여러 조직화 시도 속에서 그 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올해 노동절/메이데이가 현존 [자본주의]세계체계하의 여러 불평등들에 맞서 투쟁하는 수평주의와 수직주의 분파들wings을 다시 결속해낼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급진화된 노동자조합 운동과 전술적으로 단련된 수평주의적 운동들이 서로 어우러짐으로써만이, 각 분파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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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2 10:30 2012/05/02 10:30

 

 

[1956의 저주! 김일성에 홀린 진보, 박정희에 갇힌 보수!]

 

 

 

지난 주 프레시안 Books에 업뎃된,

중국산 좌파 지식인 錢理群/전리군/첸리췬 선생의 신간(+근간)에 관한 장석준의 서평.

 

강추다.

 

 

"장기 20세기"의 세계사도 그렇지만,

특히 이른바 동남북아시아 권역에서 펼쳐진 근현대 자본주의 발전사를 일국사적으로,

내지는 선형적(이거나 발전단계론적)인 '민족/국민서사'에 바탕해 조각내서 다룬다는 게

과연 가능하며 설사 가능한들 얼마나 바람직한 걸까.

들여다봄 볼수록, 확실히, 결코 그렇지가 않은 거 같다.

 

주지하다시피, 얼마 전 총선서

'대한민국 1%'라는 영광 아닌 영광을 본의 아니게 보고 만 진보신당이

무척 반가웠던 만큼이나 냉정히 말하자면 '선언적으로나마',

밀린 숙제 벼락치기하듯 추구하겠노라 다짐했던 것도

바로 '배제된 자들의 서사전략'였다마는,,

 

이런 서사(화)전략의 성패가 사실,

사회좌경화를 겨냥한 글로컬한 대중운동과 계급 형성,

잃어버린 연대의 저변을 어떻게 (되)살리거나 두터이 할지 궁리하는 일과 나란히,

지난 세기 자본주의적 발전-근대화 경험 와중에 배제/누락된 광범한 타자-소수자들의

신산했음서도 들끓었던 삶들을 '동아시아적 시야'에서 어케 다시 쓰고, 새롭게 기억할지

집단적으로 씨름하는 일과 무관할 리 없다는 거야 뭐..

몇 번이고 되풀이한들 지나칠 게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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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4 00:25 2012/04/24 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