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58, June 1, 2009

 

오바마 vs. 체니, 중도 vs. 우파

("Obama versus Cheney, Center versus Right")

 

 

 

 

2009년 5월 21일, 미합중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현 행정부가 국가 안보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그 윤곽을 보여주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오바마의 연설이 끝나고서 바로 전 부통령인 리처드 체니가 중요한 연설을 했는데, 오바마 행정부가 보인 입장을 근본적으로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이들 연설은 대다수 언론에 보도됐는데, 한 짝을 이루는 두 연설은 언론에 따르면 근본적인 가치 충돌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바마는 연설에서 그간 논쟁적 이슈들에 대해 한결같이 보여줬던 바, “미묘한”(혹은 “균형잡힌”) 중도주의자로서의 입지를 취했다. 이를테면 관타나모 감옥의 폐쇄, 수감자들에 대한 물고문과 여타 “향상된 개입 조치들”의 사용, 수감자 처우와 관련하여 내린 현재와 과거 결정들의 투명성에 대해서 말이다. 체니는 기본적으로 오바마의 중도주의적인 입지가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며 날을 세웠다. 많은 논평가들이 그랬고 오바마 스스로도 며칠 후 밝혔다시피, 오바마의 입지는 사실 전임 대통령 부시가 퇴임 전 2년 동안 취했던 입지와 가까운 것인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오바마와 체니는 아주 똑똑한 사람들로, 아주 세련된 정치적 행위자들이다. 그들 둘 다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속설대로, 정치는 만만찮은 게임과 같다. 정치인들은 무얼 하든 보통 머릿 속에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한다. 다음 번 선거 때도 유권자들의 지지를 계속해 받는 일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특정한 여러 정책 목표들을 달성하는 일이다. 의심할 바 없이 오바마와 체니는 이같은 관심사를 마치 짝패처럼 염두에 두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각자 취한 전략이 잠재적으로 자신들한테 승리를 안겨다주리라고 느꼈을 게 확실하다. 따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기 위해선, 두 사람이 현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분석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오바마부터 다룰 텐데, 명백히 현 행정부를 그가 장악하고 있어서다. 오바마는 거의 모든 좌파 진영 유권자와 중도파 유권자 대다수의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바마의 당선은 그가 두 가지 기본 쟁점에 대해 보여준 입장 때문이었다. 2007년 당시 미합중국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대해 오바마는 확고한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이로써 그는 좌파 진영의 지지를 획득했다. 2008년,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심각하게 곤두박질 친 경제로 중심을 옮겼다. 오바마는 자신이 미국(과 세계)경제를 새로운 상승의 해역으로 이끌 든든한 조타수에 적격임을 천명했다. 중도파의 지지를 획득하기 좋은 이슈였던 셈이다.

 

당선 이후 오바마는 외교 정책/국가 안보 이슈와 경제 이슈를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해왔다. 그가 이제껏 앉힌 핵심 인물들은 중도주의 정책을 선호하는 중도파 출신이었다. 그가 내린 모든 주요 결정들엔 신중함과 불분명함이 함께 배어 있었다. 사회 영역(환경, 보건, 교육, 노동) 이슈들의 경우, 좌파 진영 지지자들에게 약속했던 바, 심장한 변화를 법제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치적 에너지를 (아마도 아직까지는) 쏟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이와 같은 전반적 스탠스가 2010년 의회 선거와 재선 기회가 될 2012년 대선에서 자신(과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다줄 것으로 생각하는 듯싶다. 짐작컨대 그는 공화당 성원들끼리의 자중지란과 더불어, (주로 “온건”한 공화당 지지파인) 중도파 유권자들의 공화당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이탈에 기댈 모양새다. 오바마가 생각하기에, 이같은 전망에 비추어 그칠 줄 모르는 체니의 극우파적 입지는 자신한테 커다란 득이다.

 

정책 목표의 달성이란 측면에서, 오바마는 미합중국의 정책적 추를 어느 영역이 됐든 극우 쪽에서 중도나 심지어 중도좌파 쪽으로 차근차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자국 유권자들과 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를 믿고서, 8년 후에 어떤지 보라. (그가 대선 캠페인에서 내건 주문呪文이었던) 변화가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게 될 거다. 내가 취한 전략은 이번에 미합중국에서 정치적으로 이룰 수 있는 변화의 최대치를 성취해낼 것이다.’ 이렇게 말하려는 듯도 싶다. ‘변화를 이처럼 차근차근 이루기 위해선 무얼 하든 결코 퉁명스레 나갈 수는 없는 것이, 그렇게 나갈 경우 중도파 유권자들,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민주당 내 중도파 의원들을 소외시켜 그들의 지지를 잃은 나머지 점진적 목표 달성에 실패할 거라서’라고 말이다.

 

체니의 셈법은 아주 다르다. 체니에 대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2001년부터 2009년 사이에 그가 공적 논쟁의 전면에 나선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부시 집권기에 공식적으로 나섰던 주요 인물들로는, 부시 자신과 콘돌리자 라이스가 있다. (체니의 동맹자라 할 도널드 럼스펠드도 주된 통로였지만, 부시는 2007년에 체니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해임했다.)

 

체니는 매우 공격적으로 자신의 정책적 목표를 밀어붙일 때면 조용히, 무대 뒤편에서 작업하기를 선호했다. 체니의 관점이 부시 행정부에서 널리 통했던 건, 2001~2006년 사이였다. 공화당이 2006년 의회 선거 참패로 괴로워하던 시기, 부시는 입지를 바꾸어 콘돌리자 라이스가 로버트 게이츠의 지원사격 속에서 페이스를 잡도록 했다. 체니로선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역겨운 상황이었겠지만 말이다.

 

2008년 대선 이후, 부시와 라이스는 작심이라도 한 듯 굉장히 조용해졌다. 상당한 정도로 그렇기는 대선 후보로 나섰다 낙선한 존 메케인도 마찬가지다. 반면 체니는 공식 상설확성기가 됐다. 그는 공화당이 목소리를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소심한 자들을 향해 공화당이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떠나라고 요구해왔다. 알렌 스펙터 상원 의원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꾼 데 대해 체니는 갈채를 보냈다. 그는 콜린 파월, 심지어 맥케인에 대해서조차 그렇게 하라고 공개적으로 부추겨왔는데, 조지 W. 부시도 아마 명단에 올라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체니가 취하는 이런 식의 행보가 공화당의 영속적인 쇠퇴를 부를 게 확실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많은 공화당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온건파”라 불리는 이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체니는 이를 깨닫지 못한 걸까? 그리 생각하다면 그건, 그가 취한 정치적 전략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체니는 현재 패를 놓고 보건대 향후 4~6년 간 공화당이 각종 선거에서 죽을 쑬 것이라 믿고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가장 긴급한 과제는 오바마의 점진주의가 먹혀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체니 생각에, 그럴 수 있는 방법은 공적인 논쟁의 구도를 중도 대 (한결같은) 우파 구도로 바꾸는 것이다. 체니가 추론하기로는 시끄럽게, 그리고 비이성적으로 목청을 높이면 정책적 결과는 이미 중도주의 노선을 취한 오바마의 정책과 자신의 그것이 억지로나마 타협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이런 식으로 2016년에 가서 결과를 보면, 심장한 변화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체니는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하고 나면, 조국이 그 스스로 오래도록 지지해왔고 부통령 재임 시절 밀어붙이기도 했던 극우 노선을 걷게 되리라는 개연성에 기대고 있다.

 

어느 쪽 얘기가 맞을까? 오바마의 점진주의 전략은 그의 지속적인 인기에 의존하고 있다. 바꿔 말해 그의 전략은 전쟁과 경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미합중국의 대중동 정책이 자국 사람들에게 패배를 부르는 수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면, 좌파는 오바마를 버릴 것이다. 미국과 세계가 공황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고 특히 실업자 수가 상당한 정도로 불어나면, 오바마는 중도파 유권자들에게 버림받기 시작할 것이다.

 

부정적인 이들 두 결과는 모두 가능한 일인데,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 중 하나라도 현실화하면, 더군다나 두 가지 모두 현실화할 경우, 변화를 앞세운 오바마의 정책들은 시궁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체니는 마치 식은 죽 먹듯 승리를 거머쥘 게다. 물론, 중동이나 경제 면에서 좀더 모호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긴 하다. 굉장한 성공도, 그렇다고 명백한 대혼란도 아닌 식으로 말이다. 그럴 경우 사회적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진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낙숫물 떨어지듯 하는 모양새를 띨 뿐이다. 이는 그 스스로 좌파나 적어도 중도-좌파도 아닌 중도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출발부터 (지지자들의) 여러 요구들 중 상당 부분을 제껴버렸기 때문이다.

 

정치란 건 만만찮은 사업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무언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오바마와 가까운 정치적 조언자 데이비드 악셀로드는 최근 앞서의 부정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음을 인정했다. <뉴욕타임스>에서 그는 오바마가 “미합중국 국민들과 함께 어찌 되든 기꺼이 한 번 해볼 요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내 생각에 오바마는 또한 국민들이 요구한 대로 갈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미합중국 국민들의 인내심이 오래 갈는지 모르겠다는 얘기에, 그는 인정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정치란 건 변덕쟁이 같죠.”

 

 

이매뉴얼 월러스틴

 

 

 

원문보기  http://fbc.binghamton.edu/258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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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6 00:36 2009/06/06 00:36

 

 

지난 22일 서비(준) 공부모임에선

부커진 에 실린 두 편의 글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하나는 고병권씨가 쓴 “불안시대의 삶과 정치”라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조원광씨가 쓴 “유연화체제의 프롤레타리아트, 비정규직”이었지요.

 

듣자니, 이류 선배는 이 날이 마침 다른 행사 참여와 겹친다는 걸 알고선,

‘앗싸아’로 추정되는 환호성을 나지막히 흘렸다고 하는군여. 대체 왜? (그것이 알고 싶다고나 할까ㅋ)

 

하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앞서 이미 소개한 세미나 후기로 작성하는 만큼,

‘앗싸아’의 진실이 과연 뭐였는지에 대해선 추후 따로 추적하기로 하고요.^^

 

 

고병권씨의 글 “불안시대의 삶과 정치”는 그날 세미나 때도 얘기했지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바우만 옹이 다룬 논의내용과 여러 모로 통한다 싶더라구요.

그렇다고 대동소이하다고만 하고 말면, 아무래도 새 텍스트를 읽는 자의 기본자세가 아니다 싶어ㅋ

여기서는 주로 ‘소이’에 주목, 그 차이를 들여다 보려 해요.

 

그건 한국적인 맥락에서 “세계화” 붐이 일며 일어났던 변화는 어떤 것이며,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떻게 달라진 사회적 조건에 (다른 한편으론 그 조건의 일부로) 놓여 있는지

살펴보는 일일 텐데요. 시기적으로는 1990년대 중후반~이 책이 나온 2008년 가을 무렵까지,

다시 말해 ‘문민정부’ 이후 국민-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민주정부’ 집권기에서

이명박 정권의 출범까지가 되겠습니다. 한마디로, (이제야 거품이 터졌다는) “신자유주의”가

한국은 물론이고 온 세계를 풍미했던 시기이기도 하겠죠.

 

고병권씨는 글 서두에서 “(국가)주권”에 대해 언급합니다. 왜냐.

요즘 우리가 국내 정세에서 직감적으로 느끼곤 하는 숭악함 내지 “불안”은 ‘주권의 부재/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편’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섭니다.

달리 말해 이는 주권이 “합법과 불법을 결정하는 ‘최고’ 권력”인 만큼,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법의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법 바깥에도 존재”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인데요.

 

아마도 “당당한 대한민국”이라든가 “이것도 나라입니까” 식 접근이 문제를 풀긴커녕

거꾸로 꼬이게 할 수 있음을 시사하려는 거겠죠.

그래서 고씨는 “주권의 실체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공간”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아는 현대 세계의 ‘주변’은 이렇듯 “주권의 정체가 가장 잘 드러나긴 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가 증명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공간”입니다. 이에 비하면 주권의 내부라는 곳은

“주변으로부터 안쪽 방향으로 자라난 ‘상상의 공간’일 뿐”이죠.

주권의 “예외성”, 달리 말해 법의 안팎을 ‘생각대로’ 넘나드는 권력의 ‘주변’에 위치한 사람들이

“‘불안시대’에 대한 가장 예리한 증언자”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계의 주변을 다루는 일은, 곧 세계를 다루는 일”이 되는 까닭도 그래서일 테고요.

 

그렇다면 ‘대한민국’ 라벨이 붙은 주권국가에선, 지난 10여년 간 어떤 통치술상의 변화가 나타났을까.

고병권씨는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습니다.

 

먼저, 주권국가의 살점을 이루는 문화적 화장발인

‘국민(혹은 민족)주의’의 내용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주목하고 있는데요.

이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특정 정부의 특정 사안에서의 극적인 배신”이 아니라,

달리 말해 “드라마가 아닌 일상에서 지난 정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하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득분배정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소득불평등이 꾸준히 확대되었음”을 환기하면서요. 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진

“‘정권교체’라는 시끄러운 사건에 정신이 팔려

 ‘교체되지 않은’ 노선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망각해선” 곤란하다는 겁니다.

 

요컨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금융시장 개방과 노동시장 구조조정을 완수한 건

정권을 교체한 김대중 정부였고,  노무현 정부가 완수하지 못한

(한미)FTA 최종 비준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도

역시 정권을 교체한 이명박 정부의 몫”이 되고 있는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는 거죠.

따라서 “문제는 지금 갓 태어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이 아니라,

십여 년 전부터 계속 성장하고 강화되고 있는 하나의 정권,

하나의 정부가 가진 성격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해요.

 

신자유주의라 명명되는 이같은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주의’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자체가 영미권을 위시한 각국 경제엘리트 권력의 (명예)회복 내지 강화를 내건,

다시 말해 양극화를 장려하는 정치적 기획인 만큼,

국민주의는 이제 예전 같은 “명목상 통합”에 방점을 찍지 않습니다.

설령 찍더라도, 신자유주의하에서 상상된 ‘국민’이란 자리는

오히려 세계화가 양산하는 명시적, 잠재적 추방자들에게는 선망을 부추기는 매혹에 가까워지죠.

그게 실은 잔혹한 것이더라도요.

 

예전처럼 개나 소나 국민인 것이 아니라, ‘경쟁력 부실/부재’를 자인하고 세계화 노선에 적극 동참해야

자랑스런 국민으로 인가받을 수(도ㅋ) 있다는 단서를 내거니까요. 이렇다 보니 신자유주의하의 국민은

“양극화의 진실을 아는 순간 깨져버릴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고씨는 말합니다

(그렇다고 전통적 국민/민족주의가 단순하단 것도 아니겠지만요). “세계의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들,

양극화의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체험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국민주의가 어떤 것인지,

어떤 면에서 그들이 국민주의를 강화하게 되는지 이해해야” 하는 건 이래섭니다.

 

그럼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국민주의는 어떤 것인가.

고씨는 “새로운 국민주의가 타자를 이중화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과거 국민주의가 다른 국민을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인 타자로 설정하고,

자기 국민을 동일성 속에서 표상했다면”, 새로운 국민주의는 “‘다른 나라 국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같은 나라의 비국민’에 대해서도 작동할 수 있”게 됐다는 거죠.

 

오늘날 이렇듯 새로워진 국민주의는 바우만이 말했던바,

‘자본주의적 포화’ 상태로 치닫는 “쓰레기”들,  즉 다양한 형태의 “‘비국민’들을 양산하면서도

여전히 ‘국민’이라는 강력한 표상을 통해 지배하는 국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거예요.

(주권국가 밖에서 밀려왔든 내부에서 양산됐든-사실 이 모두는 자본주의가 양산한 거겠습니다만)

‘비국민-난민’과 ‘국민’이 나뉘고 또 마주치면서 만들어내는 이같은 변증법의 한쪽에선

“‘내부-국민들’의 ‘주변-비국민들’에 대한 혐오와 반감, 거리두기,

비국민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주변-비국민들’의 자기부정과 혐오,

 ‘내부-국민’에 대한 선망과 동일시”가 싹트는 식으로요.

 

이러한 숭악스런 변화는 “기본적으로 인구를 살게 하는 데” 대한,

그러니까 ‘가변자본’ 또는 ‘노동력’으로 투하해야 할 전체 인구의 건강과 복리증진에 대한

근대 주권국가의 수용능력이 사실상 바닥났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응당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한단 식으로 볼 문제가 아니란 얘기기도 하죠).

요컨대 궁지에 몰린 개가 더 사납게 짖어댄다고, 지금 한국을 위시해 주권국가 일반이 보이는 행보는

어쩌면 딱 이 꼴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하여, 똥뀐 놈이 성낸다고 할까요. 이젠 “전체 인구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다시 말해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종[가령 국민]의 생명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가 엄연한 “행정”업무의 일환으로 추진됐듯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최소한 죽도록 방치”하는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이 노선 아래서 예컨대 농민들을

엄선된 인구만 육성할 참인 “국가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이자 “비용”으로 인식하는 건

불합리하긴커녕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 되죠. 적어도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는

“국가의 사도들”한테는 그렇단 겁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주변화된 ‘내부 난민’들은 역설적이게도 주권 내부의 ‘시민들’ 내지

우량국민들보다 더 애국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 일쑤인데,

고씨에 따르면 그 이유는 간단해요. 그들이 주권 체제에서 느끼는,

가공할 정도의 “커다란 존재 불안” 때문이라는 거죠.

내외부의 난민이나 비국민을 막론하고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은 대개의 경우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내치는 국가와 자본에 필사적으로”, 그야말로 “‘내치는데도’ 매달리며,

‘내치기 때문에도’ 매달”리게 된다고 할까요.

 

물론 국가와 자본에겐 이런 매달림을 정치적 지렛대 삼아

(내부)난민들이 ‘알아서 달라붙도록’ 하는 것만으론 불충분합니다.

‘나쁜 축적’도, 축적으로부터의 일탈도 아닌,

축적 위기의 '합리적 돌파구'였던 신자유주의 기획이 동반한 사회적 재난 상태,

다시 말해 영속화한 불안이 일상이 된 우리 시대의 대중들은 불안에 결박당해 있으면서도

또 그렇기 때문에 불안 자체로서 불안을 야기할 위험을 가진 존재이니까요.

 

고병권씨는 이명박 정권 들어서 ‘강력한 법질서’, ‘법치주의’란 말을 참으로 뻔질나게 들먹이는 정황을,

이처럼 짧게는 10여년에서 길게는 30여년 동안 변모해온 축적기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게 이명박답게도 '자본엔 자유를, 노동자계급에겐 재갈을 물리려 하기 때문'이란 진술이 그렇듯,

어느 때, 어디에서나 맞는 소리는 사실 어느 때도 어디서도 맞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면서요.  고씨가 주목하자는,

이른바 "민주화" 국면에서 일어난 변화의 두 번째 측면이기도 합니다.

 

여기 대한민국이 신자유주의의 후발주자라곤 하지만,

사실 그것이 부르는 살풍경은 그 어느 곳보다 앞서 있는 상황이죠.

다시 말해 “비정규 노동자, 농촌이주자, 실업자, 이주노동자, 노숙자 등”

“비국민의 지대, 내부 난민의 지대”가 광범해지는 중이라는 건데요.

고씨에 따르면 이들은 “자본이 그 생산과 소비 능력을 평가절하하고

정부가 적극적 육성을 포기한 인구들”로 “이제는 치안 관리 대상이 되는 사람들”인 셈입니다.

주변화된 대중은 과거처럼이나마 “재활용” 여지라도 있었던 훈육과 동원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 범죄자들’이자 선택적 격리가 필요한 ‘치안’의 대상이라는 거죠.

(들뢰즈가 내다봤던바) ‘훈육사회에서 통제사회로의 이행’이 현실화됐다는 겁니다.

 

신자유주의 노선에 반색하며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이들이

이같은 통제사회로의 이행 속에서 (박정희식) 배제의 정치만을 추구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통제사회의 일상화한 억압 때문에라도 이들은

합의의 정치란 "볼거리"에 더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되죠. 통제사회로의 이행은

‘합의로부터의 배제’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는 또한 그런 통제를 승인하는

‘합의를 통한 배제’가 작동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고씨는 이 과정이,

방법상 우악스럽기 짝이 없는 이명박 정부 이전인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이미 작동했던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죠.

 

2007년 가을 비정규보호법의 재논의차 소집된 노사정위원회에 포스콤, 이랜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난입’했던 일라든가, 새만금과 대추리에서 농어민들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고씨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도화된 민주적 합의의 장이 동시에 배제의 장으로 공고화해온 오늘날,

근대화된 ‘합의정치’의 틀로 과연 누구를, 또 무엇을 대의할 수 있는지,

나아가 이 물음이 좀더 ‘진보적이면서 왼쪽’에서의 세력화가

이뤄지는 것만으로 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 

오히려 그것은 또다른 “(자기)배반”을 예비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요.

이는 제도/비제도, 국가/비국가라는 상투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정치(적 실천)의 기예 내지

문법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할 텐데요. 아주 추상적이겠지만,

아마도 그건 ‘저항과 형성의 이중과제’를 멀찌감치 유예된 전망이 아니라

현실적인 운동으로 구현해낼 좌파정치의 실천적 스탠스는 어떤 것일지에 관한 물음이 아닐까 해요.

그랬을 때야, 체제의 추방자들이 체제의 시민들보다 더 체제에 매달리고 순응하는

역설 아닌 역설도 거짓말처럼 녹아내릴 수 있잖냔 겁니다.

 

고씨는 예로든 ‘난입’과 ‘탈퇴’ 운동이 그 자체 어떤 적극적 대안을 구성하는 건 아니며

“주변으로의 강력한 배제와 추방이 이뤄지는 시대에 불가피한 실천”임을 인정하면서도,

이같은 투쟁들이 앞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 진중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고 말하고 있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이들 투쟁에서

익숙한(그리하여 시효만료됐다고도 할) 문답들에 갇히지 않고,

(단순히 "전에 없던"이란 뜻만은 아닐) 새로운 물음들을 걸어올릴 수 있느냐,

이들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투박하나마 ‘길 없는 길’을 만들어낼 수 있겠느냐일 듯싶은데..

이런 측면에서 이를테면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는 물음은 사실

고병권씨한테 되물을 일은 아니란 생각을 해봅니다.^^

 

 

하아.. 조원광씨 글 "유연화체제의 프롤레타리아트, 비정규직"에 대해서 얘길 할라니,

분량 조절에 크게 실패한 고로, 일단 여기서 줄여야 할 거 같군여.ㅠ.ㅠ

 

 

일단 발제했던 입장에서 조원광씨 글에서 인상적이었달까, 눈여겨 봐야 할 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오늘날 상황이 외견상 무척이나 공세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다른 한편으로 자본과 국가의 (의지부재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무능력’ 내지 ‘궁지’의 표현이기도 하단 사실 아닐까 함다.

앞서 궁지에 몰린 개가 사납게 짖는다는 비유 마냥요.

노동의 유연화/비정규화 상황 자체가 사실 그런 궁지를 함의하고 있다면,

저들의 궁지를 우리의 입지로 바꿀(=지양해낼) 수 있는 반전의 실마리는 뭘지에 대한 토론은

정작 부족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달리 말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든가 “비정규직 철폐” 같은 구호는

전술적, 혹은 ‘원칙적’ 측면에서야 지당할지 몰라도,  궁지를 입지로 지양하는 실천의 실마리 내지

방법이라 하기엔 확실히 2% 부족하다 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이 부족함을 메우는 (전략적?) 방법으론 크게 두 가지일 듯한데,

하나는 실제론 할 의지는 물론 할 수도 없으면서 할 수 있다고 구라치는 ‘허세’의 영역 내지

사안들에 대해 그 궁지를 끝까지 밀어붙여 드러내는 일이 되겠죠.

다른 하나는, 마침 공황기로 진입한 이 시점에서, 자본과 국가가 이윤을 위한 생산의 여지만

(공황이란 태풍 잦아들면 그리 할 요량으로) 키울 뿐이지 필요에 의한 생산의 여지는

거의 질식시켜버리고자 ‘쟁여뒀거나 유휴 상태로 방치해두려는’ 부문/분야/지대에 대해

“역-엔클로저 운동”을 펼쳐봄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이런 부문/분야/지대를 앞서 얘기한바,

‘저항과 형성의 이중과제’를 구현할 지렛대로 끌어오자는 거죠.

이리 되면 좌파적 실천이 청사진으로서만이 아닌, 청사진과 피사체가 공존하는

현실적 과정으로서 대중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도 같고...

 

음,, 너무 추상적인 얘길진 몰겠으나,,^^;;

암튼 조원광씨 글의 경우 이런 류의 질문들을 자극하는 것 같다는 점만 밝혀 두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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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1 07:49 2009/05/31 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