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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05
    [영화] 기담(1)
    겨울철쭉
  2. 2007/06/15
    [애니]파프리카Paprika(6)
    겨울철쭉
  3. 2007/02/12
    [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겨울철쭉
  4. 2006/11/18
    [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겨울철쭉

[영화] 기담

오랜만에 공포영화를 봤다, 기담.
(스포일러 조금 있음)
이런저런 평처럼 "잘 만든" 공포영화다.
서로 연결되는 세개의 에피소드가 액자구조 속에 있다. 액자의 밖은 1979년 유신 말기, 액자의 안은 1942년 일제 말기 경성. 억압적인 시대--따라서 그 자체가 공포들인--들이 절정에 있고 끝나가는 시기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싶었나보다.

영상도 좋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식 건물과 복식들이 아름답고도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외국에서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는데, 남한 사람들에게는 일본전통양식은 뭔가 알수 없지만 존재했던 공간,아직 봉건적--따라서 前-이성적--이고도 근대적--따라서 이성적--인 것들의 불안정한 공존을 상징하는 것같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이자 부재, 과학의 부재이자 존재를 드러낸다.(이 영화는 병원이라는 근대적인 '과학'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괴담.) 역시 잘만든 공포영화로 기억되는 '장화홍련'의 배경도 일본식 건물이었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공포효과'를 만들어내지만, 정작 플롯 자체는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세개의 에피소드들에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역설적이게도 논리적--따라서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과학적'인 것이라면 정신분석이거나, 심리학적인. 다만 심리학을 과학이라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공포스러운 것은 무의식의 어떤 불안을 건드리면서도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는 그에 비하면 너무 친절하다. (그래서 정신분석을 잘 아는 누가 꼼꼼하게 분석을 해주면 재미있을 것같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여러가지 정신적인 현상들을 소재로 가져온다. 시체성애 necrophilia, 엘렉트라 컴플렉스, 다중인격장애 같은 것들. 이것들은 모두 죽은자를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영화의 다른 포스터에는 "사랑에 홀린자, 여기 모이다"라는 카피를 쓰는데, 내용들은 모두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응시한다. 사랑하는 대상들은(그것이 이미 죽어있든 사랑하다가 죽었든) 살아있는 주체에게는 여전히 죽지않고 살아서 함께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타자에 대한 사랑은 타자 자신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타자(의 욕망)이라고 상상되는 내 안의 가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다. 사랑하는 자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유령이다. 뭐, 사실 모든 사랑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을 통해서 망각하고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해야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것들에 실패하고 죽은 자들은 따라서 죽지 않는다. 특히 이런 점에서 세번째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애도작업이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 된다. 따라서 주체 안에서 죽지않고 공존하게 된다. (영화의 무대는 안생(安生)병원이라는 가상의 병원이다. 이름이 흥미롭다. 내가 보기엔 안(安)은 오히려 '아니-'라는 의미의 부정어로 보인다. 따라서 un-live라고 할 만한데,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un-dead.. 따라서 죽어도 죽지 않은,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좀비같은 존재다.) 이 영화의 공포효과는 이 부분, 죽었지만 죽지않은, 그리고 그 죽지않은 부분은(사실은 살아있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당신들 안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앞서서 이야기했지만, 잘 만든 영화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공포스럽지는 않다.(이것은 욕이 아니다.) 모두 설명가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들 또한 모두 상징들로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섭다기 보다는 지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흠.. 깜짝 놀라고 무섭기도 장면들도 많다. 감독이 만든 영상-음향 효과는 뛰어나다.)

공포영화들이 최근에는 가족(장화홍련, 4인용식탁)이나 학교(여고괴담)를 다루어온 것은 그것이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주체들을 무의식에서 억압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제도적인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이라... 사랑도 그것이 공포의 대상이 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과잉되어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주이상스로 나타날 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인영'(이자 동시에 그녀의 남편인 '동원'이기도 한)이 마지막으로 남성 인턴을 살해하려는 장면은 마치 여성상위체위에서 성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장면에서 인영은 사실은 그녀의 사랑의 대상인 '동원'이 부재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나비(퓌지스psyche-영혼)모양의 비녀로 가슴을 찌르고 자살한다.

그리고 인영의 마지막 대사, "쓸쓸하구나.."
실재계에 갑자기 마주할 때, 그런 느낌이다.

공포스럽다기보다는 쓸쓸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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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파프리카Paprika


파프리카 (Paprika, 2006) , 콘 사토시 감독

줄거리나 설정은 검색엔진에 찾아보면 나올 테니 생략.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해들어갈 수 있는 DC mini라는 기계가 만들어지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놀라운 설정과 상상력의 산물. 프로이트를 애니메이션에 초대해서 '노는' 셈인데, 흥미롭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1.

다른 사람의 꿈에 개입한다는 것은, 무의식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우리 세계에서는 정신분석가, 혹은 정신과의사들의 일일텐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이 우리 무의식에 접속하거나 들어오는 과정은 항상 불충분하다. 그러니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기계를 상상할 만도 하다.

그렇지만, 영화에서처럼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좋을까? 그것은 확신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나 정신과치료의 과정에서, 피분석자 혹은 환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자신을 인식하고 치유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 직접 무의식을 투명하게 보고, 개입한다고 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의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저항'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게다가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전이-역전이를 너무나 위험하게 만들 것같다.
 
2.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John Lennon의 부인인 Yoko Ono가 한 잘 알려진 말.

그런데 영화는, 함께 꾸는 꿈이 현실..이 되긴 하는데, 그런데,
그 꿈이 악몽이면 어쩌지? 라고 묻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인 꿈을 꾼다. 그것은 온갖 상징들, 욕망들이 뒤엉켜 혼란스럽고 기괴한 모습이다. (위에 포스터에서, "This is your brain on anime."라는 말, 파프리카 안에 있는 이미지들이 그것들이다.)

집단이 혹은 대중이 함께 꾸는 꿈은, 그래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지만, 그것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하나의 집단적인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공유하는 이데올로기가 반역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우리가 집단적인 꿈을 모두 기각할 필요는 없다. 감독은 오히려 집단적인 꿈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느낌이지만 말이다.(그 위험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경고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의식적인-지적인 요소와 결합하고 반성하지 않는, 날 것 자체의 무의식과 욕망은 현실이 될 때 끔찍할 수 있다.
 
3.

(꿈 공간의) 파프리카는 (현실 세계의) 아츠코 치바의 또 하나의 주체. 파프리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꿈의 세계에서 치바 대신 나타난다.

지나가는 대사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이 장면. (그림은 파프리카)
대사를 그대로 옮겨보자.


(치바) : 멋대로 앞서가지 마, 파프리카
(파프리카) : 항상 너만 옳은 건 아니잖아
..
(치바) :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파프리카) 아츠코(치바)가 내 분신이라는 발상은 못 하나봐?
(치바) : 내 말을 들어
(파프리카) : 모든 사람이 자기 멋대로 되리라는 생각은 어느 대머리 아저씨랑 똑같은 것 같은데?

(참고로, 여기서 '어느 대머리 아저씨'는 모든 사람의 꿈을 지배하려는 노인네를 지칭한다.)
의식-무의식의 경계에 있는 주체인 파프리카가 오히려 의식-주체인 치바에게 네 멋대로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주체로서 우리는 항상 무의식에 이런 저런 것을 강제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무의식이 항변한다.. 그럴 때 신경증이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것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
파프리카는, 치바의 말처럼 '멋대로 앞서'간다. 주체가 어쩔 수 없이..


정신분석책에나 나올 개념들을, 스토리로 구성해서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후반부에는 이야기를 수습하는 데 약간 무리하는 것같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상력과 사고력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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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람풍경, 천개의 공감


사람풍경
김형경 지음 / 예담

천 개의 공감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정신분석학의 여러 개념들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개념'들일 뿐이었다. 물론 자기분석을 해보는 과정에서나, 몇번의 정신과 상담에서 드문드문 그 개념들의 현실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 개념들은 현실의 지시대상이 불분명한 채, 이론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는 토픽(topique)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두 책은 그 개념들이 현실의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게 있어 추상적인 개념들이 현실의 지시대상을 획득했다고나 할까. 놀라운 독서 경험. 사람들에게 추천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사람풍경>은 외국을 여행하면서 있었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통해서 정신분석의 개념들, 혹은 사람들의 정념의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설명한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그 '낯선 것'들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 의미있는 것이란 걸 이제야 알다니!) 

 

<천개의 공감>은 신문에 연재된 상담을 묶은 책으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분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저자가 각각의 책에서 솔직하게 자기분석의 결과를 책 속에서 드러내는 덕분에 이해가 쉽다. 그것은 또한 똑같이 나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면 아마 다른 독자들도 그랬을 텐데,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이 유사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형경은 소설가다. 오랜 동안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비전문가인 작가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사례들과, 개념들을 다루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서 서로 논쟁하는 상이한 학파들의 개념을 편리하게 끌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드문드문 서로 논리적으로 정합하지 않는 설명을 내놓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독자들이 가려읽을 일이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이 나의 이야기로, 어떤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려왔다. 무엇보다 각각의 주체 안에 그런 여러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복합적이며, 그나마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게다. 많은 사람들이 또 그런 각자의 문제를 나와 유사하게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위안이 된다. 많은 이들과 동병상련.

 

이 책들을 통해서 우리 경험의 어떤 구체적인 요소들이, 그를 통해 형성된 무의식의 어떤 측면들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들을 나타나게 하는 지 알 수 있다. 그것도 평범한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의 가족구조에서 겪었을 문제들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매우 값진 일인데, 추상적인 개념 이전에 우리가 가족 속에서 어릴 적부터 겪었을  문제들을 한국의 가족형태, 이 가족형태의 모순 속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된다.(어쩌면 소설가로서 저자의 묘사능력이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내내 나 자신을 돌아보느라 독서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상황은 정신의 어떤 요소를 형성시켰을까, 그래서 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충족 혹은 좌절에 어떻게 반응해왔을까, 때로 그것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상처도 되었겠구나..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의 고유한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한결 더 객관적으로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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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1

 

정신분석 치료는 너무 비싸고 시간도 많이 들어서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치료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할 때, 건강보험은 물론 이려니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얻어내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뜻맞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해볼 만한 운동의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그렇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노래 두가지만 언급해보자.

 

우선, 델리스파이스의 '동병상련'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푸른사막"님의 블로그

어쩌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왜냐하면 모든 문제들의 근원에 있는 '사랑'이라는 정념이 시작되는 데서, 김형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자신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사랑을 선택하는 병리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Simon &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나야"님의 블로그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여기서 "I"란 말 그대로 그 누구보다 "나"일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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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2

 

다만 정신분석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경향인 것같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정신분석이 특정한 치료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그 치료의 결과는 사회의 '정상적' 관계망 속으로 환자를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결과, 기존의 사회적 관념에서 부적절하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교정'의 대상이되고 이데올로기적 통념이 '정상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이런 것은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근대 정신의학의 성격으로 지적한 것이다. 정신의학과 결합한 형태로 진행되는 정신분석의 특수성(한국에서만 그런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형경이 제시하는 정신분석의 실천도 본질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반항적인 여성에 대해서 외디푸스 컴플렉스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거나(-따라서 그 단계를 반복해야한다고 말할 때), 군복무가 나르시즘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거나하는 언급 등이 있다. 정상가족이 정신건강을 위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도 있다. 매번의 정신적 문제가 해결되는 목표는 '가족의 유지'가 되기도 한다.(그럼 다른 가족 형태를 시험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로운 일로, 지양되어야하나?)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통념, '정상'이라고 규정된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체의 무의식을 치료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신분석과 이를 통한 치유의 결과가 기존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기초한 '정상적인 상태'에 이르러야만 주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고해도, 그렇다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다른 종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단적인 주체는 치료의 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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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폴 호크 지음, 김희수.박경애 옮김 / 사람과사람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글쓴이는 '인지-정서-행동-치료요법(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REBT;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명한 이론인 듯)'이라는 정신의학의 한 이론을 토대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제시하고자한다. 갖가지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길게 설명하기는 그렇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우울증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1) 자기비난 (2) 자기연민 (3)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세가지에 대해서 각각의 대책이 수립되어야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전반적으로 '뻔뻔스러워지라'고 주문하는 것같다. 내용을 보자면 이렇다. 실수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걸로 죄의식을 가지거나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능력이 안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실수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습관의 희생물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라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나의 권리라는 것이다.
 
또 자기연민은 우울증의 요인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사실 많은 슬픔의 원인들이 생각해보면 별 것아닐 수도 있는데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는만큼 신경끄라는 말씀.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자기연민을 통해서 타인들의 연민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만큼 주의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타인동정.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서 타인동정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타인동정은 비합리적인 신념이며, 자신의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정도'만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타인동정은 타인의 '정서적 협박'에 이용당하는 경로가 될 수 있는 만큼 주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동정은 자기동정까지 불러올 수 있어서 특히 좋지 않다.
 
이 정도가 대략의 내용이다. (잘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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