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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7/08
    캄보디아(2) 앙코르 유적군(1)
    겨울철쭉
  2. 2007/07/07
    캄보디아(1)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6)
    겨울철쭉

캄보디아(2) 앙코르 유적군

아마 모네가 보았다면 "수련이 있는 연못에 비친 앙코르와트"라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은 곳.

앙코르유적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앙코르와트의 정원 연못에 비친 모습입니다. 요즘에 우기인지라 약간 흐린 날씨라서 그런데 햇볓이 좋았으면 물결이 더 반짝거렸을 것같네요.

 

앙코르 유적군에 대한 설명은 역사책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많으니까 생략.

(다만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 중 대표적인 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전체적으로는 많은 사원과 궁전 유적들을 통칭해서 앙코르 유적군을 둘러보는 일정이라는 점은 언급해야겠네요. 그밖에 많은 사원과 유적들 각각에 대한 느낌도, 일단은 생략.)

 

1000년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제는 허물어진, 하지만 한때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황금과 상아,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을 곳들.

 

한때 장엄과 영광이 깃들였던 위대한 유적이 지금은 밀림 속에 버려져 황폐하게 된 광경을 쳐다보는 것처럼, 여행객에게 동경과 피곤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 샤를 에밀 부유보 <인도차이나 여행> 1858

 

13세기 이후 크메르왕국이 쇠퇴하면서 이웃한 시암족(지금의 태국이죠)에게 약탈당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폐허만 남은 곳입니다. 태국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의 사원들은 지금도 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데 이 곳도 아마 그런 모습과 비슷했겠죠.

 

일행 중에 어떤 분은 로마보다 훨씬 더 위대한 유적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더군요. 저는 로마는 못가봤으니 패스. 그러나 거대한 유적들과, 그 안에 있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은 쓸쓸함을 더 느끼게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양조위는 자신이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을 앙코르와트의 어느 기둥, 작은 구멍에 속삭이고 진흙으로 메웁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죠. 저에겐 다른 방식의 운명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 장면의 쓸쓸함이 어울리는 곳들을 여기저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 유적들을 돌아봤지만, 역시 패키지 여행은 여유가 없습니다.(그나마 가이드가 좀 여유로운 분이었는데다가 자유시간으로 주어진 반나절을 또 어느 유적에 찾아간 덕분에 조금은 더 좋았습니다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추천으로는 하루 종일 햇빛의 변화에 따라서 변해가는 유적의 모습을 보아야한다고 하는데, 그런 여유를 부리기에는 쉽지 않았던 셈이죠. 그런 부분이 무척 아쉽기는 합니다.

 

아름다운 유적이 많습니다만, '반테이 스레이'라는 곳의 사연이 잘알려져 있습니다.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붉은 색(아, 이런 표현의 어려움이 있을까요, 그것은 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암선셋과 비슷한, 하지만 좀더 촉촉한 색깔입니다.)의 사업으로 만들어진 사원입니다.

 

앙드레 말로는 이 곳에서 Devata(여신)상을 밀반출하려다 당국에 체포됩니다. 그는 여신상에 반해서, 그걸 '동양의 모나리자'라고 부릅니다. 당일날 그 여신상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가이드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더군요. 제가 찍은 사진에는 제가 반한 여신상이 담겨 있습니다.^^;

 

(옆의 사진은 앙드레 밀반출하려 했던 여신상, 밑에 소개한 책에서 스캔했습니다. 모나리자라는 비유도 아까운 모습입니다. 앙드레 말로의 행위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가져가고 싶다는 느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문화제를 반출하다가 구속되기도 하고 스페인내전 국제여단에 참여했던 좌파이기도 했다가 드골 정부의 문화장관을 하기도 한 앙드레 말로의 변화무쌍한 경력이 한편으로 떠오르는군요.ㅎ)

 

하지만 굳이 그 여신상이 아니라도 수많은 여신상이 사원에 조각되어 있고, 모두 표정과 얼굴이 다릅니다. 당신이 어떤 느낌의 어떤 모습의 여신을 만나려고 해도 그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반테이 스레이의 여신상들이 가장 아름답지만, 앙코르와트에도 수많은 여신상, 무려 15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유적들은 대부분 비교적 무른 사암으로 지어져있어 손상이 빠른 편입니다. 한편으로는 무른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모든 벽면에 아름다운 조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앞에, 곳곳에서 서서히 마모되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군요. 특히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유적의 훼손도 빠르다고 하는데, 관광객이 밟고 올라서는 유적의 계단들을 보면 그런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여신상 같은 것들은.. 너무나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그 얼굴을 도저히 만져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아름답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천천히, 여유있게 하나하나를 느끼면서 돌아보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드는 유적군. 하지만 정말 곳곳에 한국사람들과, 중국사람들(떠드는데 정신이 빠질 지경입니다.)이 너무 많아서 조용히 둘러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앙코르와트는 한편으로는 서구(이 지역을 식민화한 프랑스)의 시각에 의해서 19세기 이후에 '발견'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전혀 다른 맥락에서 관광상품이 되어있습니다. 1000년전 크메르 왕국의 후손들에게 이 유적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또 한편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생각할 몫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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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몇가지 책 중에 아래의 책도 있다.

 

앙코르 : 장엄한 성벽도시 - 시공디스커버리총서 46

 

일반적으로 시공디스커버리총서는 선호하고 좋게 평가하는 편인데, 이 책은 좀 그렇다.

내용인 즉슨,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앙코르유적군을 '발견'해서 탐사하고 연구하고 복원해서 지금에 이르게되었는가하는.. 유적군 자체에 대한 설명도 아니고 19세기 이후 유적이 프랑스에 의해서 '발견'된 역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역사가 어떻게 서구에 의해서 지금도 '재구성'되는지를 생생하게 살펴보고 싶은 분에게는 추천하지만, 앙코르 유적군 자체, 크메르왕국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비추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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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1)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

지난 주에 급하게 다녀온 캄보디아. 예정했던 그리스-터키 여행이 여행사 사정으로 취소되면서 급하게 대체한 일정. 최저가 패키지 여행에 혼자 덜렁 따라가긴 했는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는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여행에는 어떤 식으로든 느낌이라는 게 남는 것같군요. 가까운 사람들은 캄보디아 항공 사고가 난 와중에 무슨 여행이냐는 말도 있었지만, 현지 광지들은 한국관광객들로 넘치더군요.ㅋ

 

캄보디아라고 하면 물론 앙코르와트가 대표적인 역사유적군이자 관광지죠. 저도 물론 거길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다녀온 것에 대해더 어떤 말을 하려면 무엇보다 앙코르와트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겠지만, 그 이야기 전에 몇가지 다른 이야기를 해야할 것같군요. 정작 제가 가장 깊이 느끼고 온 것들은, 앙코르 유적들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첫날 일정 중에서, '관광지로 개발된' 킬링필드 희생자 사당이 있더군요. 사당이라기 보다는.. 전시장입니다. 옆에 보는 것처럼,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75~79년)에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끔찍하죠.

 

끔찍한 것은, 크메르루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죽은자들의 유골을 정치적으로 전시하는 행위도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간 관광도시 시엠립의 것은 작은 편이고, 프놈펜 같은 곳에는 더 크다고 하는군요. 도시마다 이런 게 있답니다..)

 

물론 여기에는 크메르루주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의 호치민루트, 캄보디아 동부지역 폭격을 언급해야할 것입니다. 크메르루주 시기에 학살된 사람이 약 8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할 때 적어도 그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인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지만 주목되지 않았죠. "국민"학교 때 의무적으로 보아야했던 영화 <킬링필드>도 그런 관점에서 크메르루주의 학살만 부각합니다.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미국과 베트남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유골을, 그들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묻거나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하는 이런 행위는 베트남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베트남이 자신들의 78년 캄보디아 침공과 점령, 괴뢰정권의 수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88년 12월 베트남군이 철수하고 파리강화조약 이후에 연립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베트남이 세운 정권을 주도했던 훈센이 주도하고 있으니 이런 행위도 계속될 수밖에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은, 자신들은 크메르루주의 학살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패권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학살같은 것이 없었던 라오스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도 설명이 안되죠.) 공산주의 정권들 사이에서, 그것도 불과 얼마전에 있있던 미국과의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은 사실은 인도차이나 전체의 전쟁이었죠. 보통 프랑스에 대한 독립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을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피를 나누며 싸웠던 이웃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공산당은 원래 인도차이나 공산당 하나였죠. 그러나 이후 코민테른의 민족당 방침 속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베트남민족 우선주의"(북조선 생각나는군요;;)에 따라서 각 민족당으로 분할됩니다. 그 결과는 해방 후 각 민족당 사이의 내전이었던 겁니다. 현대에 가장 위대한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이자 공산주의 혁명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의 주역들조차 이랬다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명확할 것입니다. 20세기 역사에서, 주변, 반주변 인민들의 저항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그것이 20세기 말에 남겨준 유물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자처한 정권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 수십년이지만, 글쎄요 사회가 민주화되거나 했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것같습니다. 캄보디아인 가이드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직업이 뭐냐고 묻더군요, 노조활동가라고 소개했는데,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조차도 아예 없는 겁니다. 거참. 그 양반도 국가가 운영하는 어떤 기구에서 일하는 '공식'가이드이고 배울만큼 배운 사람인데 말입니다.(가이드들은 보통 영어와 태국어/중국어를 하는 정도입니다.)

 

내전의 유산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서, 이 나라 전체를 상징하는 말, 빈곤 자체가 전쟁의 결과입니다. 아직도 많은 무기(지뢰가 대표적이지만 대인화기까지)가 남아있어서 범죄에 이용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아래는 무기를 회수하자는 켐페인 입간판.

이런 것보다 더 가슴아픈 것은 거리에 구걸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디에서나 "one dollar"를 외치면서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이 나라의 빈곤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여행중 저녁 시간에 공짜 공연이라는 이유로 찾아간, 어떤 첼로 공연이었습니다.

 

Beat Richner 이라는 첼리스트 겸 의사선생의 공연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의사선생.

자신이 세운 어린이 병원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연이었습니다. 바흐를 주로 연주했는데, 정작 연주시간의 세배 정도는 이야기를 한 것같습니다. 짧은 영어라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75년 처음 와서 크메르루즈 폴포트 정권 이후에 병원 운영이 중단되었다가 90년대 다시 들어와서 10여년 동안 어린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더군요.(그렇다고 크메르루주만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닉슨이 살인자라는 이야기도.)

 

많은 어린이들이 기초적인 의학적 처방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고, 특히 어머니가 HIV 감염자인 경우에 어린이들이 더 취약하다는 이야기..이고, 특히 시엠립에 있는 병원은 HIV 감염 어린이를 전문적으로 보살핀다고 합니다. 선진국의 아주 작은 지원, 기부만으로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홈페이지도 있습니다. : http://beatocello.com

 

75년에 들어와서 활동하다가, 20년 가까이 되어서 병원 운영이 가능해지자 다시 들어온 사람, 10여년 동안 병원을 운영하고 진료하고, 지원을 받으러 각국을 순례하고 지금도 낮에는 병원을 운영하고 밤에는 매일 "무료" 콘서트를 여는 사람을 보면서,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요. 이 분 말고도 화가이자 생물학자인 Denis Laurent라는 분도 그림을 기증하고 병원 운영팀에 결합해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3세계 최빈국에 와서 그야말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과, 빈곤한 이 나라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제3세계 빈곤(특히 빈곤아동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한데도 그렇고 남한 노동자운동도 그렇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사고도 없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하지요.

 

이 나라들의 빈곤의 문제가 단지 '못 산다'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세계체계의 모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운동적 과제로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요..

 

여전히 저나 노동자운동..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운동들에게 이 문제는 '딴 나라 이야기'일텐데, 그 '딴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한 대목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딴 나라'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지 않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국제주의가 운동의 새로운 대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저조차도, 모든 운동의 과제는 단지 남한에서 전지구적 문제가 투영되는 문제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스페인 공화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달려왔던 국제여단은 영화속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지요. 좌파들이 나름대로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 그것은 겨우 '비-민족주의적'이라는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입니다. 그러나 비-(혹은 反?)민족주의가 국제주의는 아닌 바에야, 사상과 이념의 혁신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국제주의와의 결합은 페미니즘과 결합만큼이나 혹은 반성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노동자운동 혁신에 결합하기가 어쩌면 더 어려운 과제일 것같군요.

 

그렇다고 운동의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자원봉사를 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어떤 시기에는 필요하겠죠) 다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세계체계에 대항하는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필요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제3세계 인민들, 어린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대안세계의 전망이 혼란에 빠진 이런 시기에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는 것,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중적인 대항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그 '정의'에 대한 닥터 Beatocello(그 선생의 '애칭'입니다)의 호소에 공감하지 않았다면 2~300명의 관객들이 2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그의 '강의'를 듣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겠죠.

 

마지막날, 옵션 관광의 하나로 가야했던 곳이 있습니다. "평양친선관", 평양냉면집입니다.

(이런 저가 여행에는 여러 옵션이 붙는데, 현지 가이드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것은 아무래도 예의상 해주어야하기 때문에.)

냉면을 포함한 식사를 제공하고, 평양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곳입니다. 써빙하던 여성들이 공연을 바로 하더군요. 시엠립에만 서너군데가 있는 것을 봤는데, 북한의 외화벌이 기업들이 서로 몇개가 따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연간 수만명의 관광객들이 북한 주민들을 접촉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을 수호하는 국정원 등 국가기구들은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차마 그 장면들을 볼 수 없게 한없이 복잡한 심경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사진도 간판만 찍었습니다만) 특히 '아침이슬'을 가라오케 반주로 부르는데.. 그 복잡한 느낌은 뭐랄까..*&^&$&)*!##%$ 도저히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 알려진 북한 노래들(반갑습니다, 휘파람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노래와 춤, 가야금..

 

다큐 어떤나라(A State of Mind)에 대해서 이 블로그에도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 소녀들이 결국 이 앞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 여행을 다녀오면서, 과연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머리를 채웠습니다. 인도차이나에서,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했던 공산주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 혹은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도 아니고, 사이비 공산주의적인 민족주의였던 것일까.. 하지만 목숨을 바쳐 제국주의와 투쟁했던, 20세기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아메리카와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던 그들의 진정성은 무엇이었을까..

 

20세기 인도차이나의 역사의 장면들과, 어린이들, Beatocello씨, 평양친선관의 여성들을 보면서, 20세기를 압축적으로 마주친 느낌이었습니다. 1000년이 넘은 유적들은 차치하고라도 그 많은 관광객들과 함께 너무나 비동시대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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