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
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
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
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
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이제 그때만큼 아프지 않아
난 다 자랐으니까 폴리백처럼 가벼워졌으니까
(껴안고 사랑할 순 없어도
버릴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이제 난 눈물 없는 노래도 부를 줄 알아
生이 너무 즐거운 비명 같은 날이면 바람 부는
구름 속을 홀로 산책하겠어
새로 산 티베트풍 모자를 덮어쓰고 경쾌한
도트 무늬 스커트를 허리에 걸치고
한번쯤은 기꺼이, 가벼운 외투 같은 상처를
장롱에서 꺼내 입어볼게 옛날 옛적
당신에게 받은 상처를
선물인 듯 간직할게
세세만년 전 당신이여
그러면 정말 안녕
<출처> 김은경, 『실천문학』, 2009년 봄호(통권 93호)
..................................................................................................
아직 당신을 보지 못했어
옆사람옆사람 근처쯤
더듬더듬 당신의 모습, 목소리도 들렸지만
난 더 크게 말하고 웃어댔지
설레이고 싶지 않았어
잠 못들고 싶지 않았어
쿨하게 인사할 용기같은 건
애당초 없었던 거야
마음은 참 이상하지
안녕이라고 인사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