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그리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 老子, 道德經 중에서
노자의 철학이 갖는 특징은 도(道:길, 방법을 의미)를 인생사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 연관시켜 논의했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관심은 제도와 문화 및 도덕적 주체성의 확립 즉 현세적인 인간의 삶에 있었지만 노자는 유가적 인본주의와는 달리 자연 중심주의 입장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한다. 그는 자연을 비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도'를 사유했는데 이러한 형이상학은 '생의 비참성'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열망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도는 창조적 생명 원리이다. 그것은 다양한 사물들을 "생산하고 양육한다."그러나 그것은 권력자의 지배욕처럼 생산물을 소유화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창조적 힘으로서의 도는 자연의 자발적 힘이다. 그러므로 도는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으며 활동하되 자랑하지 않고 성장하게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 또한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흔히 이해하듯이 자연과 합리된 상태의 긴장 없는 안일한 평온이나 유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자연에 합치하는 능력을 적극적인 내적 힘으로 전환하여 기존의 삶의 양식을 비판적으로 잠식해 간다는 실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노자가 주장하는 삶의 양식은 원한의 부정 정신으로 물든 은둔이거나 투쟁이 아니라 자신의 내밀한 덕을 표출함으로써 스며들 이 세계를 침식해 가는 평화적인 삶의 양식이다.
노자의 철학은 장자와 결합하여 아시아 인들의 삶의 고뇌를 용해시키거나 억압통치에 저항할 때 그 정신적 근거로서 작동해 왔다. 정치 기구 내부에 들어가 귀족의 정치적 삶을 도덕화하고자 한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정치 기구 밖에서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한다. 그는 경제적수탈, 정치적 지배수단에 의한 압제, 전쟁을 현실 정치의 위기로 지적하고 물리적 투쟁보다는 자연과 도에 대한 사유를 통해 병리학적 허영과 자기 상실을 극복하기 바란다. 그의 이상사회론은 문명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는 비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사사유를 이해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 시원적 사회가 갖는 비폭력성과 무계급성, 무소유와 검소 및 정신적 안정성은 비록 그 기회가 사라졌지만 문명의 광포한 맹목성을 반성하게 한다. 최초의 것이 최후의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철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반성적으로 사유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승되어 새로운 문맥에서 작용할 수 있는 창조적 가능성을 여전히 품고 있다. 그의 사유는 타인을 위하기에 앞서 타인을 위하는 태도 자체를 반성적으로 음미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문제로서 제기하게 하는, 음미하는 삶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 이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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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논어보다 노자의 도덕경을 먼저 읽었다. 그러나 십몇년전쯤 선배들 학습모임에 우연히 몇번 끼였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장난처럼만 느껴져 포기하고 만 기억에서 지금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때보다야 몇구절쯤 조금 더 의미가 와닿긴 하지만 말이다.
小國寡民. 使有什伯人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 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國相望, 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하나하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순리란 무엇일까? 인위적 규제가 아닌 자연의 근본적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 존재 가능성 여부를 떠나 어떤 모습일지 내게는 상상조차 잘 되지 않는다. 내가 바랬던 세상 또한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니 비슷할 법 한데, 어쩌면 난 이미 상당히 자포자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혁명을 상상하기 쉬웠다. 힘들 때마다 우리 손으로 변화된 세상을 꿈꾸며 현실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데 사실 그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건 자본주의의 거대한 구조 한 켠에서 극소수로 존재하는 일단의 운동세력이다. 예전보다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지만 결코 자본주의의 심장을 꿰뚫지 못하는 - 그저 자기만족적인, 개인이나 소수집단일뿐인. 운동을 쉬는 몇년 사이 자신은 겨우 추스렸지만, 함께 했던 이들 속에서 받은 상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삐딱하게 불신으로까지 자리매김했나보다. 순수한 열정보다 숨겨진 권력욕에, 변화와 혁신을 내세우며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함에 먼저 눈길이 간다. 그러면 그렇지. 말로는 함께 살자고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이기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에 불과한 걸. 특별한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말이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靜天下正
가장 완전한 것은 마치 이지러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용하더라도 해지지 않는다.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다. 그래서 퍼내더라도 다함이 없다.
가장 곧은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가장 뛰어난 기교는 마치 서툰 듯 하며, 가장 잘하는 말은 마치 더듬는 듯하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삶은 날마다 전쟁인데 고요해질 수 있는 걸까. 성인만이 가능하겠지. 아침마다 비비적거리다 겨우 일어나 출근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였니? 하지만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금씩 자포자기하며 남들처럼 그렇게 사는 거지. 대단한 현장활동도 아니고 구멍가게만한 직장에서 눈치보고 욕 얻어먹어가며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고 월급날만 기다린다. 그동안 별나지 않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외모에 손톱만큼도 투자 않는 나를 주변에서 더 못 견뎌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구닥다리 핸드폰이며 변변한 보험 하나 가입하지 않는 내 똥배짱에 동료들은 놀라고 안타까워한다. 이렇게 생겨먹은 나를 인정하라는 것, 분명히 그들의 상식에선 어려운 일이고 이런 소규모 사업장에선 딱 왕따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된것이다. 이런 거였구나. 다행히 왕따는 면했지만 때때로 소외감을 느낀다. 잠깐 돌아서면 대단치도 않은 일로 씹어대는 습관성 뒷담화도 싫고 틀에 박힌 쇼핑, 남자 얘기도 재미 없다. 이런 식으로 튀고 싶지 않은데 결국은 그렇다. 그래서 좀 외로워진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다. 잠들기 전엔 출근할 자신이 없어지지만 아직은 좀 더 버텨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뭘 하며 살고 싶은 건지 대안도 없으니까 말이지.
맑고 고요함,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나중에 읽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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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넓고 구름이 높이 떠 있는 오늘 입니다.
새소리는 메미소리와 더욱 청명하게 이정표로 들려 옵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성찰과 생성의 오늘 입니다.
그럼으로 소멸의 고통과 생성의 시간은 다가오는 가을의 청명한 새소리 일 겁니다.
삼복의 뜨거움 처럼
지난 열정은 그 순수했던 열정만큼 역사에 대한 편협함이 또한 삼복의 더위에서 하안거를 수행하는 출가인 처럼 토해내는 깨달음의 시간은 아닙니까?
글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성찰과 깨달음의 도구는 고전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서구의 과학적 인식의 도구에 많은 것을 잃었을 겁니다.
무엇을 버리고 채우는 시간은 아름답습니다.
그 과정은 고독하며 외롭고 힘들다고 봅니다.
노자는 이런면에서 지혜의 도구이며 그렇다고 공자역시 꼭 지배계급의 지혜의 문화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마도 공자의 유학은 우리 현실의 권력화된 문화양태가 작용하고 있지만 사람의 인과 예에서는 상당히 존엄한 평등의 사상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佛法은 더욱 생활의 지혜의 도구가 되겠지요
저는 과거의 반성과 성찰에서 우리의 고전 동양고전을 다시 삶의 지혜로 중요하게 눈을 뜨고 있습니다.
위 글에서 공감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픔의 편린에 대하여 몸부림 칠때 그것은 활동과정으로 부터 편협함 보다는 지혜의 이성적 도구의 천박한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더욱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이런점에서 "변증법 유물론 비판"이라는 책을 보고 있죠 그동안의 폐해는 "절대"에 대한 개념규정에 대하여 그것이 물질이든 존재이든 관념이든 철학사적인 인식의 문제가 홛동의 구체적 행위에서 나와 남에게 반성과 성찰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더욱 벼리되어서 아니면 비움으로서 이후 활동에 더욱 풍부한 활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으로 고전은 우리의 문화적 철학적 역사적인 것들이 한때의 열정에서 돌아보면 더욱 심화하고 역사속으로 질주해야 할 열정이 되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과거의 활동의 편린을 단편적인 시각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현실 일 겁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진정성 있게 다시 역사의 행위의 한가운데 주체가 되려면 더욱 깨달음의 시간은 소중할 겁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저는 요즘 17장이 절실히 체감되더라구요.."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고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