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강선생, 힘들겠지만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구! 법정이 안되면 거리도 있고 언론도 있어! 그렇다고 저 아이들을 다시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잖아. 장경사가 그러더라. 판사 검사 변호사에게 과연 이사장가족의 인권과 귀머거리 애들의 인권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그래? 좋아. 판사 검사에게 변호사에게는 아니라도 우리에게는 이사장의 인권과 귀머거리 아이의 인권은 같아. 단 일 밀리, 단 일 그램의 차별도 안돼. 난 그걸 위해 싸울 거야."
- 공지영, '도가니'중에서
성폭력은 정말 '무섭다'. 어쩌다 우연찮게 영화나 책자속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접하게 될때면 공포로 온몸이 뻣뻣해지고 토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아마 나도 그동안 여자로 살아오면서 겪게된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 몸과 마음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게 아닐까싶다. 하여튼 꼭 필요한 자료가 아니라면 알면서 굳이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내가 살고 있는 '광주'에서 몇년간 힘겹게 싸워온 '인애학교 성폭력사건'을 소재로 한 이 소설 역시 피해가고 싶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광주'는 진부한지 이미 오래이며 '장애인 성폭력 사건'은 결말이 보이지않는 싸움처럼 느껴졌다.
안개로 뒤덮인 이 도시에서 그 아이들과 함께 살아 가면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상황을 묻곤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진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백마디 변명을 뒤로 하고 이 책은 나를 부끄러움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나직하게 묻는다. '함께 하기 그렇게 힘들었니?'
"우리의 귀도 네 소식을 그리워하고 있어.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네가 보여준 헌신과 사랑을 기억하고 있어. 네가 우리를 잊었다 해도 우리는 네가 늘 그리울 거야. 건강하게 잘 지내길,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하길 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선생 부인의 설정은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아내란 그런 존재일까? '돈벌라'며 생활전선으로 끊임없이 남편을 내모는 악덕포주같은 아내 - 허나 그 아내에게 어찌 돌 던질 수 있으랴. 그녀 역시 가부장제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충실한 구성원일뿐인것을. 그런데 서유정은 농성장 침탈 순간에 서울로 내뺀 강인호에게 어쩌면 그렇게 관대할 수 있을까? 아마 나라면 쉽게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 보여준 그의 활동 따위 싹 잊고 아예 '배신자'로 낙인찍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온 상처들속에서 끊임없이 도망가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스스로 극복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속 인물 배치도 재미있다. 두 여자의 입장이 확고하게 대립하고 그만큼 노력도 열정적인데 반해 강인호의 입장은 줄타기하듯 애매하다. 아내와 있을때는 마지못한듯하면서도 성실한 가장의 역할을, 서유정과 있을땐 참으로 인간적인 교사의 얼굴을 갖게 된다. 마치 이핑계저핑계 대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당히 또는 이기적으로 타협하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