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 목록
-
- 임경선 님
- 씨앗(산길)
- 2010
-
- [우석훈 칼럼] 이마트 피자 ...(1)
- 씨앗(산길)
- 2010
-
- 박휘순의 노래 개그(1)
- 씨앗(산길)
- 2010
-
-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 씨앗(산길)
- 2010
-
- 현실, 받아들임, 지나감
- 씨앗(산길)
- 2010
3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유물․유적과 사람-오래된 물건을 통해 본 백운의 옛 생활사
상백암에서 마을 내 혼례식 때 사용하였던 혼례복 및 물품
상백암 마을에서는 마을 내에서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혼례복을 궤짝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마을에서 혼례를 치를 때 이 옷을 입고 결혼을 하였으며 약 30여년 전까지 사용되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천이 구겨지고 해지고, 구멍이 나 지금은 입을 수 없다. 혼례복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궤짝은 적어도 100여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주로 큰 마을들을 중심으로 마을에서 혼례복을 장만하여 사용하였으며 이웃마을인 중백암과 백운동에서도 상백암의 혼례복을 빌려 이용하였다고 한다. 궤짝 안에는 신부 혼례복인 신부가 입던 원삼과 족두리, 신랑이 입는 혼례복이었던 사모관대와 신발, 나무로 만든 기러기가 보관되어 있다. 관리는 이장이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지만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매쟁이(중신애비)를 통해 양쪽 집안의 부모가 선을 보고,궁합을 본 후 혼사를 결정하고, 신랑과 신부는 혼례를 올리는 날 처음 얼굴을 보았다. 중매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마을에 있거나, 주변의 아는 이, 친척이 중매를 서서 결혼이 성사되었었다. ‘중신 셋만 하면 죽어서 천당을 가지만 잘못하면 뺨이 석대’라고 한다. 중신애비에게는 사례로 ‘중채’를 주었는데 주로 음식이나 옷 한 벌을 주었다고 한다.
혼담이 결정되면 중신애비 편에 신랑 측에서 신부 될 사람의 집에 ‘사성보따리’를 전해 보낸다. 사성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로, 그 안에 사성(생년월일시)을 적은 사주단자와 옷 한 벌이 담겨 있었다.
신부는 사성보따리를 받아서 고이 모셨다고 한다. 치마폭으로 받아안아서 방에 쌀을 떠놓고 고이 모시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주단자를 일종의 결혼서약과 같은 것으로 사주단자가 오고가면 결혼을 물릴 수가 없었다
신부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받은 후 답장을 보냈는데 신랑 집과 신부 집이 거리가 멀거나 하는 이유 등으로 신부집에서 사주단자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처가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처가가 가난한 경우에는 경제적 부담을 우려하여 신랑 집에서 결혼식을 치루기도 하였다.
한 동네 혼사는 옛 사람들의 말로는 “3대 적선을 해야 한동네에서 결혼헌다”는 말이 있을만큼 덕을 쌓아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삼주씨
신삼주씨
상백암 태생인 신삼주씨는 18세가 되던 1939년 한 동네에 살던 故 박동곤씨와 결혼하였다. 당시 신랑은 19세였고 마을에서 길을 오고가며 얼굴은 보았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본적은 없었다. 결혼식은 처가인 신삼주씨의 집에서 올렸다. 중매는 당시 마을에 살던 양씨 성을 가진 이가 섰으며, 혼담이 오고 간 후 신랑 집에서 ‘사성보따리’가 신부 집으로 왔다. 그 안에는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와 초록저고리와 빨간 치마 한 벌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사성 보따리는 ‘비단으로 만든 빨간 보자기에 남색으로 수실이 달렸었다’고 신삼주씨는 기억했다. 그리고 신랑 집에서 택일을 하여 결혼식 날짜를 9월 어느 날로 정했다. 결혼식 하루 전날 함잽이가 함을 메고 왔다. 함잽이는 자식들이 잘 장성하는 등 팔자가 좋고 복이 있는 사람이 메도록 했었다고 한다. 함잽이가 메고 온 함에는 비녀와 반지 등 신랑이 보낸 혼수가 들어 있었고 함이 들어오는 날은 함잽이를 위해 신삼주씨의 집에서는 음식을 준비해 대접했다.
주천 태생으로 신삼주씨의 동생인 상백암 태생 신영진씨와 결혼하여 함께 살고 있는 박오목씨는 자신의 결혼식 하루 전 함이 들어오던 날의 풍경을 설명해주었다.
“결혼식 전날 (함잽이가) 함을 짊어지고 들어와. (함 안에는) 옷감 들었지. 명주베도 나서 보내고 비단도 보내고. 세 벌 보낸 사람도 있고 일곱벌 보낸 사람도 있고. 나는 세 필 받았어. 명주비단 물들여갖고 곱게 뚜드려서. 물들여갖고 뚜드리믄 비단이나 같으지. 글고 치마 저고리 떠서 두벌허고 가락지허고 비녀허고 (받았어)‘함 사시오, 함 사시오.’얼굴에다 뭐 발라. (그리고) 마른 오징어 썼지. 싸무락(싸립문) 앞에서부터 막 들어오라그믄 못 들어오고 돈을 줘야 들어와. 속에다 돈을 넣어서 그 놈 밟고 들어와. 쬐깨 넣고 안 넣으믄 안 들어와. 새기고 저 밑에가 있어. 있으면 자꾸 시달리믄, 돈을 놔 주믄 들어와. 들어와갖고 함 벗어놓고 먹고 가. 함 받는 날 밥이랑 반찬이랑 잘 히 놔. 그 사람들 먹고 가라고. ”(박오목)
결혼식 날, 신랑은 가마를 타고, 나무로 만든 기러기 한 쌍을 든 사람과 가족 등을 동행하여 혼례를 치르기 위해 처갓집으로 온다. 이 때 신랑과 함께 오는 행렬을 ‘상객’, 신부에 딸린 행렬은 ‘요객’이라 불렀다 한다. 결혼식을 다른 말로 ‘행례’를 치른다고도 하며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신부 집 마당이었다. 그곳을 ‘초례청’이라 불렀고 초례청에는 ‘행례상’을 차렸다. 결혼식 시간은 신랑과 신부의 궁합에 따라서 정했다고 한다. 볕을 가리기 위해 ‘채알’(일종의 천막)을 치고 상 뒤에는 꽃그림이 그려진 열두폭 병풍을 쳤었다. 상 양쪽으로 청사초롱을 불밝혀두었는데 불이 꺼지지 않아야 신랑신부에게 좋은 징조였다고 한다.
행례상에는 양쪽에 화병을 두고 화병 안에 꺾은 대나무 가지를 꽂아 둔다. 그리고 입에 대추를 물린 명태와 잉어모양으로 장식한 무의 입에 대추를 물린다. 대추를 물리는 것은 대추가 ‘씨’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쌀 한 대접을 퍼서 초 두 자루를 꽂아 불을 밝히고 청실홍실로 술병을 둘렀다고 한다. 술은 청주를 마셨으며 술병과 술잔, 퇴주잔을 두었다. 대추,곶감,밤 등의 과일도 상에 올렸다. 그리고 신랑 측에서 전달받은 기러기 한 쌍을 서로 마주보게 상에 올린다. 상 아래에는 장탈과 암탉을 한 마리씩 두었는데 장탉이 울면 신랑신부에게 좋고, 모든 살을 물리친다는 ‘뱅이’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신부는 방 안에서 대기하고 신랑은 문 밖에서 대기한다. 신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이들을 ‘우수각시’라고 하는데 우수각시가 양쪽에서 신부를 부축한다. 각시는 신랑을 못 보도록 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랑도 얼굴을 가리는 도구를 들어 서로 얼굴을 못 보게 한다.
결혼식 순서를 적은 종이를 홀기라고 하는데 홀기는 학식 있는 사람이 쓰고, 결혼 사회를 맡았다. 사회자가 “신랑 출!” 하면 신랑이 문 안으로 걸어 들어와 서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절을 한다. 이후 “신부 출!” 하면 신부가 방에서 나와 선다. 먼저 기러기를 전달받아 상에 올리고 신랑과 신부는 대야에 떠놓은 물에 손을 씼었다. 그 다음 신랑이 먼저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하고 다시 신랑이 1배를 하면 신부가 2배를 한다. 이후 잔에 술을 따라 서로 나누어 마신다. 신부가 술을 따라 입에 대고 조금 마시다가 상 위로 신랑에게 잔을 주면 신랑이 받아서 마시다가 상 밑으로 신부한테 잔을 준다. 이렇게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신다.
손님 중에 아이를 밴 여자가 있을 때는 아이를 잘 낳기를 바라며 좋을 호(好)자를 의미하는 뜻으로 호박을 어깨 너머로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을 위해 신부집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준비하였고 결혼식에 온 손님들은 축하선물로 ‘국수 한 뭉텡이’, ‘달걀 한 줄’을 가지고 오거나 천원, 이천원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치르는데 도와준 마을사람들에 대한 답례로 신부 집에서는 결혼식이 끝난 며칠 후 마을사람들에게 별도로 음식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혼례 전에 신랑 될 사람 집에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내면 결혼식 날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이에 대한 답례로 이바지 음식을 해서 보낸다. 이바지 음식은 셋 혹은 다섯 동고리, 이처럼 홀수로 맞추어서 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삼주씨는 인절미, 백설기, 돼지다리, 유과, 흰 떡을 해서 교환했다고 한다. 이렇게 음식을 주거니받거니 해서 먹는 것을 ‘퇴상’이라 한다고 한다. 신부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는 날 입떡치기, 입막이떡 이라 부르는 것을 행하는데 시집살이를 호되게 시키지 말아달라는 의미이다.
“장가드는 날 큰애기 편에서 입막이떡을 인절미를 해서, 시어머니입에다 틀어막어. 각시 숭도 보지 말고 총각 숭도 보지 말아라는 뜻이여.”(신영진)
행례가 끝나면 각시방, 즉 신방으로 신랑과 신부가 들어와 주안상을 차려놓고 마주앉는다. 이 때 친척들이 신랑신부에게 장난을 걸기도 한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첫날밤 치를 준비를 하는데 이때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엿보았다. 신부가 신랑의 사모관대를 먼저 벗겨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는데 신삼주씨는 부끄러움을 타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결혼 첫날 밤 동네사람들이 문구멍을 뚫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큰애기가 몰래 샛서방(결혼전에 몰래 만나던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찾아와서 까닥허믄 사고를 낼까봐 못들어오게끔 보고 내우(내외) 간에 비밀로 얘기한 것도 좀 듣고자’하는 이유였다고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1년이 지나 설을 쇠고, 그 해 가을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즉 설을 쇠어야 근친(친정부모를 뵈러 찾아뵙는 일)을 가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지만 신삼주씨는 친정이 한 동네였기 때문에 근친을 가기 전에도 가끔 친정식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3일만에 재양을 가지 못하면 3년이 지나야 근친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하룻밤을 처가에서 지내고 다음날 신랑과 신부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서 폐백을 드리고 3일 후에 신부 집으로 ‘재양’을 간다. ‘재양’을 갈 때는 신부 집에서 신랑․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신랑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 때에도 음식을 해서 가지고 간다. 도착하면 친척,동네 사람들이 신랑을 다루는 ‘동상리’를 하였다고 한다.
“처갓집에서 신랑을 달아 먹어. 돈 내라고, 친척들이. 서로 똑같이 너도 어른이 되었다 해서 한 가지 동이라 해서 동상린가...? 우리 동네로 장가왔응게 술 한잔 내라 하고 사랑방으로 데리고 가서 요구를 혀. 돼아지 한 마리하고 뭣을 내라. 신랑이 좋게 낸다고 허믄 좋지만 신랑이 ‘없다, 내가 그렇게 못허고 술이나 한 말 내 마’ 그러믄 안 된다 더 내그라, 그러고 발을 쨈매.(묶어). 그래서 거꾸로 매달리쟎아. 말하자믄 장난이지. 글고 (발바닥을) 때려, 얼마 낼래, 얼마 낼래 함서. (신랑이)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낸다) 하면 이제 풀어놔. 만족허니 대답을 들으면 같이 먹고 놀고.”(신영진)
행례를 치른 후 신랑 집과 신부 집에 인사를 드리고 동네사람들과 안면을 익히고 친목을 도모함으로서 결혼식과 관련된 행사가 끝나면 시댁으로 다시 돌아와 부부는 백년해로를 하게 된다.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여자 혼례복인 원삼족두리를 착용한 모습.
남자 혼례복인 사모관대를 착용한 모습.
예전에 사용하던 나무 기러기
쉽게 말하면 농촌생활사, 여성생활사.. 이다.
예전에 있었다가 폐간된 디새집이라는 잡지를 아시는가?그 잡지에 실리는 글 정도의 수준으로 쓰고 싶었지만 ^^ 물론 텍도 없었지 ^^그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물론 지금도....
내가 쓴 것들을 한 번 모아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떡도 하고 술도 담그고 양잿물도 내리고
- 옹기시루 쓰던 이야기
한 때 왕성하게 쓰였을 옹기시루는 시대가 변하면서 양은시루를 쓰게 되다보니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 집 한 구석에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집을 개축하고 이사하면서, 혹은 골동품 수집업자에게 판매하면서 옹기시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사라졌으나 몇몇 집에는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중백암 김분순 씨(1934년생), 정송 최종애씨(1931년생), 동신 전영자 씨(1941년생)의 옹기시루에 담긴 옛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분순씨는 17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는 4대째 물려내려오고 있는 시루가 있었다. 시루는 남원에서 사 온 것이었다고 한다. 전영자씨 집의 시루 또한 시집을 오기 전부터 시댁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최종애씨가 시집와서 살고 있는 정송마을은 옛부터 옹기점이 융성하던 동네여서 시어머니는 동네 옹기점에서 시루 등 그릇을 장만했다.
시루는 큰 시루와 한 되 정도의 용량인 작은 시루를 사용했었는데 현재 김분순씨와 최종애씨 집에는 큰 시루만 남아있다. 보통 큰 시루는 고두밥을 찌거나, 찰밥을 찔 때 썼고, 작은 시루는 제사 때나 생일 때, 고사 때 올릴 떡을 찔 때 썼다고 한다. 김분순씨 댁 큰 시루는 일명 ‘동네시루’로 쓰여서 동네 행사, 이웃행사에 두루 사용하다보니 군데 군데 조금씩 깨어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찰밥 해 먹고 제사 때나 명절 때 고두밥 쪄서 술 담아먹고, 아들 여울 때, 환갑 치룰 때’ 등 중요한 행사를 치룰 때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다. 쌀도 부족하던 때라 떡을 쉽게 해 먹기 어려웠기에 생일, 회갑, 제사 등 집안에 큰 일이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제사에 이르기까지 큰 일이 있을 때에는 떡이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레가 지나면 떡을 장만하게 된다. 그리고 삼칠일이 지나면 떡을 해 집안 식구들끼리 나누어먹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이를 낳고 첫 이레 때 떡을 하고, 삼칠일 때 시루떡해서 먹고, 마지막 이레 때 떡을 하는 등 일곱 이레를 챙겨 떡을 해 먹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생일에는 백설기, 시루떡 등을 장만했다. 돌때는 붉은 팥을 얹은 시루떡, 백일에는 백설기를 만들었다. 백일이나 돌에 떡을 해서 동네에 돌리면 떡 접시는 빈 그릇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돈 10원도 주고 실 한 타래 째깐한 것도 째깐씩 주고, 쌀도 적어 못 묵고 살아. 우리 딸네들 돌 때 그랬어. 돈도 없으믄 그 때는 닭을 키우쟎아 계란도 서너개씩 갖고 온 사람도 있고. 비누도 맨들어서 하나썩 갖고오고.” (김분순)
결혼을 하고 회갑잔치를 치르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상에 떡은 빠지지 않았다.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찹쌀을 도정해서 곱게 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방앗간이 생기기 전에는 집에서 절구로 일일이 빻아서 체에 쳐서 쌀가루를 내서 썼다. 떡을 하려면 시루 밑바닥에 있는 구멍을 먼저 막아야 했다. 구멍 위에 삼베나 무명천을 깔거나 무를 잘라서 막기도 했고, 짚을 엮어서 만든 ‘시루밑’으로 막았다. 그리고 시루를 물이 끓는 솥 위에 올려서 김이 올라와 떡이 쪄지는 것이다. 솥과 시루 사이가 틈이 있으면 김이 새기 때문에 ‘시루뻔’이라는 것을 붙여 틈새를 막아줬는데 시루뻔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들거나 몽근겨(註: 곡식의 겉겨가 벗겨진 다음에 나온 고운 겨로 속겨라고도 부름)를 이겨서 만들어서 붙였다. 그 다음 쌀가루를 시루에 얹고 팥고물을 얹고 또 쌀가루를 얹고 이렇게 켜켜이 얹고 고르게 한 다음 찐다.
가정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수확에 감사할 때에도 떡을 올렸다. 최종애씨 말에 따르면 장광을 주관하는 가신을 ‘철륭’이라고 하는데 정월이면 떡과 제물을 차려 장광에 놓고 ‘시루떡 고사’를 지냈고 농사수확철에도 떡과 제물을 차리고 고사를 지내고 동네사람들과 떡을 함께 나누어 먹는 ‘도신’이라는 것을 지내 철륭신을 모셨다고 한다. 김분순씨는 딸이 홍역에 걸렸을 때 찬물로 목욕재계를 하고 날마다 떡을 해서 빨리 낫기를 빌었다. 지금은 홍역이어도 주사 한 번 맞으면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진안에 있는 병원을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야만 했다. 버스편도 자주 있지 않아서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고 한다. 조순덕씨 말씀에 따르면 홍역과 비슷하게 몸에 이상한 것이 나는 ‘손님’이라는 병이 오면 손님떡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찰밥을 하거나, 술을 담기 위해서 고두밥을 찔 때도 시루를 썼다. 제사에 올릴 술을 담기도 하고, 잔치 때 쓸 술, 술멕이를 할 때 동네에 낼 술을 담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많은 집에서는 사흘들이로 술을 담그었었다 한다. 먹을 쌀도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을 단속했다. 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고 단속에 걸리면 벌금을 내야 했다. 몰래 숨겨도 샅샅이 뒤지면 들켰지만 그렇다해서 술을 담지 않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시루의 쓰임새는 또 있었다. 비누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기 전까지는 양잿물로 빨래를 했는데 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떡시루와는 별도의 시루에 콩대나 깻대를 태워 그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부어 내려 받아서 썼다. 간혹 비누를 만들어서 쓰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드는 방법은 양잿물을 끓여서 등겨를 섞어 굳혀서 칼로 썰어서 비누를 만들었다
시루를 쓰지 않게 된지는 대략 20~3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대가 흘러오면서 옹기시루 대신 양은시루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60~70년대 들어서면서 평가에 평장떡방앗간, 원촌에 행운떡방앗간이 생기면서 집에서보다 방앗간에서 떡을 주로 하게 되었다. 현재 백운면에는 원촌떡방앗간과 행운떡방앗간 2곳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빨래비누가 널리 보급되면서 양잿물로 빨래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술을 집에서 담그어먹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들 여울라믄 술 하고, 환갑 돌아오믄 술하고, 시방은 안혀. 그전에는 했어, 뭣만 돌아오믄. 지금은 안혀.” (전영자)
어머니들과 고생을 함께 해 온 옹기시루는 이렇게 쓰임새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고 고물장수가 와서 팔 것을 권유하지만 팔지 않고 몇 몇 집에서는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 ⓒ최운 |
▲시와의 1집 [소요]. ⓒ시와 |
▲ ⓒ프로필 사진(주성용) |
▲ ⓒ최운 |
▲ ⓒ프로필 사진(주성용) |
'아리랑'은? '분홍신'은?…'홍대 앞 잔혹사'
기사입력 2010-03-26 오전 10:22:24
▲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퍼온 글^^
단편선이라고 아주 매력적인 음악을 하는 친구를 봤다. 두리반에서
연주하면서 긴장된다고 막걸리를 들이키길래 나도 두 모금 얻어마셨다.
하여간 재밌는 친구다. 병신같지만 멋있어^^;; 요런 느낌 ㅋㅋ
Q: 고황 : 필명이 특이하다. ‘회기동 단편선’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A: 회기동 단편선(이하 단편선) 전엔 친구들이랑 다른 이름으로 밴드를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하나 둘 씩 군대에 가고 혼자 남은 거다. 새로 이름을 짓는데 일단 회기동은 들어가야 할 것 같더라. ‘청량리 브루스’, ‘서교동 하이에나’이런 것처럼. 그리고 05년도부터 소설을 많이 봤는데, 특히 단편소설을 많이 봤다. 단편선이라는 어감도 좋고. 그래서 회기동 단편선이 된 거다. 삶의 단편들을 음악으로……뭐 이런 의미는 차후에 부여했다. [녀석다움을 보여주는 추임새죠. 종윤이는 가식도, 허울도 없는 매우 진솔한 녀석입니다. 덕분에 녀석의 겸손한 얼굴과 스타일이 한껏 빛을 발하는 것인가봐요]
Q: 고황 음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A: 단편선 중 3때 일렉트로니카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고1때 밴드 <미선이>의 음악을 듣고 모던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컴퓨터 게임하고, 오락실 다니던 친구들 모아서 시작했다. 기타는 고3때, 공부하기 싫어서……
Q: 고황 뮤지션으로 꽤 유명한 것 같더라. 공연도 많이 하고, 싸이월드에 음원도 있고.
A: 단편선 아, <초콜렛>. 그 곡은 군대 가기 전에 술값 벌려고 과감히 판 곡이다. 내 스타일과도 많이 다른 곡이다. 원래 내 스타일은 아방가르드한 포크다. [아방가르드한 포크라니! ^^ 이종간의 배합을 통한 언어유희! 이러한 놀라운 재주는 종윤이의 트레이드마크죠. ]
Q: 고황 웹진 <보다>에는 음악 평론도 올리던데, 바쁘겠다.
A: 단편선 바쁘다. 녹음도 해야 하고, 공연도 해야 하고, 글도 써야하고, 빨갱이 짓도 해야 하고. 잠 잘 시간도 없다. 그래도 재밌으니까 한다. 행복하다.
Q: 고황 바쁜 와중에 대자보도 썼다.
A: 단편선 너무 화가 나서. 열폭했다고 보면 된다. 사실 나는 지금 총학생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또 고재석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인사도 하고. 그런데 그건 사적인 관계인 거고, 이건 공적인 이야기다. (고재석이 붙인)대자보를 봤는데 이건 너무 뻘글인거다. 내가 언론정보학 전공이라 사진을 이용하는 것에 민감한데, 공개한 사진이 증거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진이더라. 일반학우 운운하는 것도 황당하고. 아침에 고재석이 붙인 대자보를 보고 수업도 빠지고 글을 썼다. 점심 값 들고 가서 출력해다 붙인 거다. 고황 그게 참 특이하다. 화가 나서 자비를 들여서 자보를 썼다는 게. 더 특이한 건 그 글에 학우들이 반응을 보였다는 거고.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린 자보는 조회 수가 1500건 가까이 되더라. 직접 쓴 그 글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보자. 글에 ‘정치 좀 하자’라고 썼다. 단편선 말 그대로다. 사실, 정치 좀 하자는 건 다른 게 아니고, 호구가 되지 말자는 거다. 후배들한테 정치얘기 하면 부담스럽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호구되는 거다. 외면하면 당장은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그게 정말 마음이 편한 길인가. 우리가 고등학생은 아니잖나. 집돈 받아쓰는 나이도 아닌데, 자기한테 뭐가 유리한지는 따질 줄 알아야 한다. 잇속 챙기고, 사리사욕 챙기자는 거다.
Q: 고황 우리학교 학생들이 좀 착한 편이긴 하다.
A: 편선 맞다. 화도안내고, 순하고……. 예를 들어, 남학생 휴게실만 해도 그렇다. 물론 여학생휴게실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학생 휴게실을 먼저 만들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신축건물에도 남학생 휴게실이 없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어제도 나는 청운관 빈 강의실에서 자다 나왔다. 사실, 그래서 남학생 휴게실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획했다. 완전히 필요에 의한 투쟁. 한 스무 명이 중앙 도서관 벤치에 자리 잡고 누워있는 거다. 음악도 듣고 잠도 자고. 앞에는 남학생 휴게실 만들어 달라고 팻말 세우고. 시간이 없어서 실행하지 못했지만, 이정도 요구는 정당하지 않나.
Q: 고황 같이 행동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글에도 연대하자고 썼다.
A: 단편선 당연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보다 세 사람이라도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원래 진리는 평범한 언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대개의 평범안 언어는 당연해서 평범해 보입니다. 그래서였는지 종윤이가 늘 말하는 '연대'나 참여'라는 문제를 직면할 경우 사실 저는 방관자의 자세로 대처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바로 제가 더 종윤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전태일 추도 공연 중 사진
Q: 고황 실제로 모이는 사람들이 있나?
A: 단편선 전에는 한예종 다니는 친구들이랑 작업을 많이 했다. 대학생 예술행동이나 희망콘서트 같은 것. 요즘은 ‘좌익’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인디 레이블을 하나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사실 나도 혁명을 얘기하는 극좌파는 아닌데, 극좌파를 콘셉트로 잡을 생각이다.
Q: 고황 표현 방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통 대자보는 정색하고 쓴 글이 많은데, 이번에 올린 대자보는 무엇보다 글이 재밌었다.
A: 단편선 이번 자보는, 사실 내가 좋아하는 문체에 대한 오마주 같은 것이다. 원래는 따뜻한 글을 쓰는 남자다. 다만, 최대한 어떻게 재밌게 쓸까 고민했다. 전에 술 먹다가 갑자기 만든 모임이 하나 있다. 실제로 모인적은 없는데, 플래카드를 재밌게 써보자고 의기투합한 모임이었다. 그때 얘기한 게 이런 거였다. 예컨대, 보통 ‘등록금 동결하라’고 플래카드를 쓴다면, 우리는 ‘교수님, 등록금 인상되건 말건 우리는 A+주실 거죠? - 개념녀들’ 이런 식으로 써보자는 거다. 역설적으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시킬 수 있는 플래카드를 써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윤이는 음악보다는 정치가 어울린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이죠.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창의적인 해결 솔루션을 내어놓는 당돌함!]
Q: 고황 목표했던 대로 블로그에 여학우들이 많이 들렀나?
A: 단편선 전혀. 오히려 남학우들 유입수가 늘었다.
Q: 고황 그래도 성과가 있다면?
A: 단편선 경자네(경희 자유창작자 네트워크)라는 사조직을 하나 만들려고 준비 중인데, 이번 일로 뜻이 맞는 친구를 만났다.
Q: 고황 사조직이라면 어떤 건가?
A: 단편선 대단한 건 아니고, 열흘에 한번 정도 정문에서 공연하고, 수공예품을 팔아볼 생각이다. 학교의 구성원이 생산하고 판매하는 거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고 재미가 없으니까 뭐라도 만들어 보려고 계획한 거다.
Q: 고황 맞다. 학교에 이슈가 없다. 왜일까.
A: 단편선 일단, 전에는 학교 안에서 학생운동권이 이슈를 만들어왔다. 이젠 그게 안 된다. 나는 학생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Q: 고황 어떤 측면을 말하는 건가. 왜 학생운동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나?
A: 단편선 일종의 시스템문제다. 학생운동은 아직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인데, 요즘 학생들은 어떤 구심점이 있는 세대가 아니다.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다. 여기에 맞춰서 권력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운동의 방식이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운동은 미래가 없다.
Q: 고황 자기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라고 했는데, 20대론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20대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 글 봤나.
A: 단편선 봤다. 그냥 뭐, 그 분에게 희망이 안 보인다. 희망을 어디서 찾나. 그야말로 ‘너나 잘하세요’다. 일단, 세대론을 말할 때, 단순히 ‘20대’로 뭉뚱그리지 말고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로 보는 게 맞다. 90년대 말 학번까지 포함해서 포스트 IMF 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IMF 전후로 사회 전반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세대에서 더 세분화 하면 X세대와 구심점이 없는 N세대(우리 세대)로 나눌 수는 있다. 우리 세대에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문화적 중심축이 없었다. 마지막 국민가요가 에스지워너비 정도니까. (소녀시대, 원더걸스는 아이돌 씬이 새로 만들어졌다고 봐야한다. 하다못해 이 아이돌 씬도 한 가지 특징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소녀시대와 투애니원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하나의 보편성으로 설명이 안 되는 세대다. 누굴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이 세대의 연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Q: 고황 그래도 그 글에 일견 맞는 말도 있다. 목소리를 안 내는 세대라는 말은 맞다.
A: 단편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인정하면 지는 거니까.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20대도 많다.
Q:고황 맞다. 표현욕구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A: 단편선 그래서 매체를 하나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학교의 정책을 세부적이고 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매체. 그리고 이 지역, 회기동에 사는 분들의 생활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매체.
Q: 고황 잘 진행되면 근사할 것 같다.
A: 단편선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뜻 맞는 사람들 열 명, 열다섯 명 정도 모여서 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밌게. 운동이, 정치가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다. 이번 대자보사건에서 ‘운동권’과 ‘정치적 활동’이라는 단어가 도발적으로 사용 됐다. 이 공격이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한 글쓴이도 애석하지만, ‘학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가 오고가지 않은 것도 애석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운동이 뭐 별건가. 정치가 뭐 별건가.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정의된 기본권 아니었나? 마음 맞는 친구들이 모이면 그게 정치의 시작이고, 노는 것이 운동의 시작 아닐까. 정말이지, 정치 좀 하자. 기왕이면 제대로.
P.S) 그가 04년 08년에 각각 작곡한 '안녕'과 '초코렛'을 첨부합니다.
편의상 곡 전체가 아닌 일부만 게재함을 밝힙니다.
[상단 우측 클릭]
P.S) 그의 블로그입니다: http://danpyunsun.egloos.com/ (여자친구 없어요)
"조깅하는 사람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기사입력 2010-01-14 오후 4:56:08
▲ ⓒ프레시안 |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작사/작곡/노래/연주 소히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그 위에선 누굴 위한건지 폐허들이 보였어 폐허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법 앞에서만 고갤 떨구는 사람들도 보였어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 송전탑 옆을 지나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였어 그들은 여기 사람 사는지도 몰라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상처 시간 지나가도 잊혀질 수 없어 긴 시간 정말 힘들었으니까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매주 화, 목요일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될 이번 릴레이음악 발표를 통해서 독자들은 당대 뮤지션의 날카로운 비판을 최고의 음악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다시 음악으로 희망을 쏘아 올리다") <편집자> |
2010.03.13 14:03 | ![]() ![]() ![]() |
|||||||||
|
||||||||||
![]() |
||||||||||
|
음.. 보사노바를 하는 가수라 한다.
복많게도 이번 두리반 공연에서 소히를 직접 보았다. 아~보사노바 스러운 기타연주도 매력이었다.
가수 소히, 그 봄바람을 베낀 노래에 대하여... | |||||||||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 소히와의 감성 인터뷰 | |||||||||
가수 소히는 봄바람같은 목소리를 지녔다. 시린 귀를 부드럽게 스치고 여린 솜털들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일부러 지어낸 기교가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잔잔히 흔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2집 앨범을 들고 왔다. 2집 앨범은 탁월한 송메이커 이한철이 프로듀서를 맡아 제작한 앨범으로 타이틀 곡 '그럼 그렇지'는 발랄한 분위기에 현 세태를 풍자한 가사가 돋보이고, '산책'은 소히의 시적인 감수성이 잘 묻어난다. 그녀는 국내 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다. 보사노바 아티스트가 귀한 국내에서 기존의 보사노바 앨범들이 대부분 카피곡 위주였다면 그녀는 한국과 브라질의 감성을 잘 녹여내 '한국적 보사노바'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문화저널21은 합정동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가수 소히를 만나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한국적 보사노바'란 어떤 색깔인가.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색깔이 있다. 일본에는 일본만의 감성이 있고, 영국에는 영국 특유의 감성이 있다. 나는 브라질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한국만의 감수성과 멜로디 라인을 통해 브라질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브라질 음악을 어떻게 하면 한국적으로 만들까 생각하며 굿거리 장단, 자진모리 장단 등을 연구하기도 한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는 시와 소설 등 문학을 주로 읽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여성학, 사회학 서적도 즐겨 읽는다. 최근에는 자기계발서도 읽고 있다. 1집과 이번에 발매한 2집 'MIGLE'을 비교한다면? 1집에선 음반사의 의도가 살짝 들어가서 재즈풍의 느낌이 있었다면 2집에서는 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보사노바 음악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한강 송전탑 위엔 사람이 살았어'라는 노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옆에 있는 송전탑 위에 올라가 투쟁을 할 때 그 아래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위험한 송전탑 위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한강을 거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 한강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그 노래를 듣고 소히씨를 민중가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나의 전체적인 음악을 들어보면 분명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수라고 생각한다해도 나로서는 불만이 없다. 민중가요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음악적 형식이 비슷한 민중가요를 듣다가 '이런 민중가요도 있네'라고 느낀다면 민중가요가 다양해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평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가. 음악활동을 하면서 사회문제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됐다. 음악을 통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1집을 만들 당시 20대였는데 2집을 들고 나온 지금은 30대다. 30대에 들어서 음악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 20대 때는 음악이 좋아서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30대에 들어서는 음악을 하는 자세가 더 치열해졌다. 좀 더 완벽주의가 되려고 하는 거지. 또 예전엔 음악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음악에서 8~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옛 감성을 좋아한다. 90년대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함과 그리움의 감성이 있었다. 팝적인 음악과 사회비판적인 노래 등 다양한 음악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노래들을 공중파에서 들을 수가 없다. 점점 획일화되고 있는 것 같다. 특유의 자연스럽고 깨끗한 창법이 인상적이다. 마치 조미료가 안 들어간 정갈한 음식 같은 느낌이랄까. 기교 섞인 노래보다는 목소리 자체를 깨끗하게 전달하고 싶다. 또 목소리의 모서리를 최대한 없애 좋은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나같은 가수들은 노래를 못 부른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기교와 고음처리를 해야만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참 힘들다. 평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야 하니까. 나는 내 목소리를 맑고 깨끗하게 전달하면서 오래오래 노래하는 보컬이고 싶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둔지는 몇 달됐다. 음악활동으로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좀 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할 생각은 없는지. 대중의 요구를 배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최대한 접점을 찾고 싶다. 이번에 나온 음반은 대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낸 음반이다. 만약에 성과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접점을 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을 할 생각도 있다. 예전에는 얼굴이 많이 보여지는 것이 창피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드니까 용감해지는 것 같다. 앞으로도 보사노바 음악을 할 생각인가. 처음엔 락밴드로 음악을 시작했고 그 다음엔 흑인음악을 했다. 관심이 가는 음악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예측불허다. 보사노바 음악도 워낙 다양해서 지방마다 특색이 다르기 때문에 보사노바 음악만으로 다양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직접 만나본 소히는 모딜리아니 그림에 나오는 여인처럼 목이 길고 신비로운 이미지였다.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 잔잔한 미소. 그녀는 마음이 여려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 긴장이 많이 된다고 한다. 모서리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마음에도 모서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란성 쌍둥이다. 쌍둥이 남동생과 자주 만나지는 않는다. 그녀는 합정동에 산다. 홍대와도 가깝고 한강과도 지척이다. 동네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다. 문화저널21 배문희 기자 baemoony@mhj21.com |
댓글 목록
관리 메뉴
본문
반갑네요. 제 고향이 백운인데...조사단에서 일했단 얘기 듣고 눈이 번쩍~~ 시골집 갈때 한번씩 소식지 봤는데...제가 잘 모르던 이야기들도 있고 해서 참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그런데 사진이 안 보이네요.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아, 네 퍼오면서 사진을 따로 저장해줘야 하는데그렇게 못했네요 ^^ 시간이 없어서 아직 작업을 못했답니다.부가 정보